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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과 명상 / 능동적 관상과 수동적 관상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몸과 우리의 몸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성전이듯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현존해 사실 수 있으시도록 우리의 죄를 멀리합시다. 우리가 죄가 없다 싶을 때 하느님을 바로 뵙는 것이고 하느님의 현존을 가장 잘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낀다고 또는 관상을 한다고 명상을 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44페이지 참조)
그리고 인터넷 다음 어학사전「신덕」을 검색해 보면【「신덕(信德)」: 향주 삼덕의 하나로 천주와 교회의 가르침을 굳게 믿는 마음】이라고 하였듯이 이것을 그냥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신덕의 근본인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계시(啓示)하시니까 보고 듣고 교회가 그 계시(啓示)를 전수받아(영성시집 ‘187.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편 211-213페이지 참조) 그 가르침에 오류가 없는 조건으로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믿는 그런 믿음인 것이지 그냥 무조건 믿는 그런 믿음이 아닌 것이듯이....【‘상해천주교요리(詳解天主敎要理)’ 상권 –믿을 교리 편- 제1장 천주/제2장 삼위 일체/제3장 천지 창조, 천사, 마귀/제4장 사람/제5장 원죄/제6장 구세주/제7장 천주 성신/제8장 교회/제9장 사말(죽음, 심판, 천당, 지옥) 참조】그런데 불교의 교리는 부분적인 견성(見性)인 만큼 교리가 사실상 불완전하기도 하지만 즉 깨달음과 지혜와 관상과 명상도 교리를 넘어서 있는 것은 아니고 10계명을 지키고 7덕을 지켜서 완덕(의 경지)에로 이끄는 깨달음과 지혜와 관상과 명상이 아니라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듯이....(영성시집 ‘140. ‘우리의 생활이 바로 관상생활이구나!ⓐ’ 편 115페이지, ‘186. 이것이 관상입니다ⓑ’ 편 203페이지 참조)
140. ‘우리의 생활이 바로 관상생활이구나!ⓐ’
나는 관상생활이라면
갈멜수도원 같은 데서나
하는 것으로 막연히 알았습니다
분도수도원 같은 반 관상생활은
관상을 반만 하는 것으로
그것도 막연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관상은
갈멜수도원 같은 데서나
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겨우 깨닫습니다
영혼이 맑아지면서 문득 깨닫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바로 관상생활이구나!’
※ 인터넷 다음 어학사전「관상6 (觀想)」: (1) [철학] 순수한 이성 활동에 의하여 진리, 실재(實在)를 인식하는 일.
(2) [종교] 신(神)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일.
(3) (기본의미) [불교] 수행의 한 가지. 사물을 마음에 떠올려 관찰함으로써 번뇌를 없애는 일이다.
(4) [천주] 마음이 사색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단순하며, 사랑에 충만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응시하는 기도의 경지.
※ 명상(冥想) : 눈을 감고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함.
※ 묵상(默想) : (1) (기본의미) 말없이 마음속으로 생각함.
※ 신앙수기 ‘43. 명상과 무아상태’ 편 28-29페이지, ‘60.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능동적 밤과 수동적 밤을 이해하는데 주관성을 발견함)①’ 편 40-41페이지 참조.【영성시집 ‘140. ‘우리의 생활이 바로 관상생활이구나!ⓐ’‘ 편 115페이지 참조】
186. 이것이 관상입니다ⓑ
성삼수도회의 영성생활 관상생활을 공부하다가
「‘천주교에는 관상(觀想)이라는 것이 있는데,
하느님 대전에 자신의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정신 통일을 시키는 게 아니고,
꿀을 마시면 단맛에 취하듯이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 은총의 단맛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은혜를 바라보면서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고 하느님께로 몰입되는 것,
이것이 관상입니다.
그래서 옛날 수도자들은 관상을 중하게 여겼습니다.’」
죄가 없는 생활이 바로 관상생활이라는 생각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어찌 관상생활을 한다고 하겠습니까?
즉 죄를 지으면서 어찌 하느님을 본다고 하겠습니까?
우리 수도회는 관상과 활동을 완전히 겸하는 수도회
이것이 우리 수도회의 회헌이고 영성이고 규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관상과 활동을 완전히 겸하지 않으셨습니까?
※ 정행만 신부의「회헌해설」17페이지 1-6째줄【「성삼수도가족의 영성생활」제8권 251페이지 14-18째줄 “자기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찾는 것, 이것이 바로 관상 생활입니다. 자기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찾는 생활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끊고 고통을 참는 것, 이것이 바로 활동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수도 생활은 관상과 활동을 겸해야 합니다.”】참조.【영성시집 ‘186. 이것이 관상입니다ⓑ’ 편 203페이지 참조】
……………………………(165p / 168p)…………………………
……………………………(168p / 175p)…………………………
【(성서생활 피정강의 묵상집(2) 165-168페이지 참조)】
60.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능동적 밤과 수동적 밤을 이해하는데 주관성을 발견함)①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갈멜의 산길’과 ‘어둔 밤’ 책을 몇번 읽었으나 능동적 밤이 무엇인지 수동적 밤이 무엇인지 또는 어둔 밤이 무엇인지 막연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어둔 밤 책을 다시 보고 싶어서 보는 중 책 첫머리인 ‘독자들에게’ 하는 말이 깨쳐지면서 어둔 밤이 주관성 있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선인 빛이며 나는 악인 어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 밤인 나를 정화해가는 단계가 어둔 밤의 과정이라는 것과 능동적이란 스스로 하는 것 수동적이란 따라가는 것을 사전을 찾아보고 연구해보니 우리 인간 편에서는 능동적인 것이 발전이 있는 말이지만 하느님과 함께라면 수동적인 것이 능동적인 것과 전연 반대로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왜 책 첫머리인 독자들에게 하는 말을 중요시 하지 않고 어둔 밤 책을 읽었을까?’ 하는 후회가 되었습니다.
【(신앙수기 ‘60.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능동적 밤과 수동적 밤을 이해하는데 주관성을 발견함)①’ 편 40-41페이지 참조)】
94.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비밀 사다리의 뜻이 속 시 원하고 통쾌하게 풀림)②
나는 60번 묵상「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능동적 밤과 수동적 밤을 이해하는데 주관성을 발견함)①」편을 정리하면서 며칠 전부터 소화 데레사 성녀는 갈멜의 산길이나 어둔 밤 책에서처럼 똑같이 미완성으로 끝나버린,〈사실 어둔 밤 싯귀 여덟째 노래까지의 완전한 설명은 아니더라도 어둔 밤 책 ‘머리말’에서도 ‘첫번 두 노래에서는 영성의 두 가지 정화의 결과가 밝혀질 것인데, 이는 곧 인간의 감각적 부분에 대한 정화 및 영적 부분에 대한 정화이다.’ 하고 밝혔듯이 어둔 밤 제2편 제24장과 제25장에서처럼 영혼의 아래 낮은 부분인 감성면과 윗부분인 영성면의 정화를 뜻하는 것으로써 즉 어둔 밤 싯귀 둘째 노래「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까지인 자유를 얻기까지를 설명하였다면 십자가의 요한성인으로서는 할말은 다하고 끝냈다고 생각되지만〉갈멜의 산길이나 어둔 밤 책을 완성시킨 갈멜의 영성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잠이 일찍 깨어 손님 수사님들과 다른 수사님의 세면시간을 고려해서 일찍 세면을 하고 미사가기 전 거의 1시간 정도의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십자가의 요한성인의「어둔 밤」을 소화 데레사 성녀의 자서전에서는 언급한 대목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좀이 쑤셔 책이라도 찾아 두려고 도서실에 가서 소화 데레사 자서전을 찾아 한 두번 펼치고 이쪽 저쪽을 살펴보았더니 (십자가의 요한성인의「영혼의 캄캄한 밤」)이란 대목 중에서「영혼의 캄캄한 밤」이란 글귀가 얼른 눈에 띄여 그 부분
《동산지기가 어떤 실과를 철 전에 익히려고 정성을 들이는 것은 그 실과를 나무에 매달린 채 두기 위해서가 아니고, 훌륭하게 차린 식탁에 내놓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비슷한 뜻으로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적에 어떤 날 기쁨을 걷잡지 못하시고〈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오 11. 25) 하고 부르짖으신 예수께서 제 안에 당신 인자를 빛내고자 하셨습니다. 저는 작고 약하니까, 그는 제게로 몸을 굽히시고 당신 사랑의 비밀을 가만히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아! 만일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친 학자들이 제게 와서 물어 보았다면, 열 네살 먹은 애가 그들의 학문으로 알아내지 못했던 비밀, 완전함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 비밀을 알려면 영혼이 가난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십자가의 요한성인이 그의「영적 찬가」가운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내 마음속에 반짝이는 빛 밖에 나는 인도자도 빛도 없노라. 한낮의 햇빛보다도 이 빛은 더 확실히 나를 인도하여, 내 속까지 잘 아는 그이가 기다리는 곳으로 나를 데려 갔도다〉(십자가의 요한성인의「영혼의 캄캄한 밤」3. 4 노래) 그 기다리는 곳이란 즉「갈멜」이었습니다. 그러나〈내가 원하는 그이의 그늘에서 쉬기〉(아가 2. 3) 까지는 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매우 급히 부르셔서 비록 불꽃을 건너가야 한다 할지라도 예수께 충실하기 위해서 저는 그렇게 할 지경이었습니다.(소화 데레사 자서전 124-125페이지)》
을 읽어보니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 제2편 18-21장 완전함에 이르는 비밀 사다리의 뜻이 즉 ‘아! 만일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친 학자들이 제게 와서 물어 보았다면, 열 네살 먹은 애가 그들의 학문으로 알아내지 못했던 비밀, 완전함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놀랐을 것입니다. 그 비밀을 알려면 영혼이 가난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였듯이 영혼이 가난해야만 되는 것이 완전함에 이르는 비밀 사다리라는 뜻이 속 시원하게 풀려버렸습니다.
【(신앙수기 ‘94.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비밀 사다리의 뜻이 속 시 원하고 통쾌하게 풀림)②’ 편 94-96페이지 참조)】
97.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싯귀가 풀림)③
성서 어디엔가 있는 “나는 한번 더 내 음성으로 하늘과 땅을 뒤흔들겠다”(히브리서 12장 26절) 라는 성서 구절이 어디에 있는 말씀인지 그 성서 구절을 찾는 중에 언제부터인지 풀린(12번 “진정한 믿음으로 기도를 한번 해보세요.” 편을 체험했기 때문에 쉽게 풀린)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 책 싯귀 네째 노래 ‘한낮 빛보다 더 탄탄히 그 빛이 날 인도했어라’ 부분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어둔 밤 책 ‘머리말’을 어둔 밤 싯귀와 같이 살펴보았더니
「머리말
이 책 첫들머리에는 앞으로 풀어 나갈 노래가 모두 다 있다. 다음엔 그 풀이 앞에다 실은 노래를 하나씩 따로 설명하고, 그리고나서 구절을 낱낱이 풀어갈 터인데, 이 역시 풀이 앞에다 두기로 한다. 첫번 두 노래에서는 영성의 두 가지 정화의 결과가 밝혀질 것인데, 이는 곧 인간의 감각적 부분에 대한 정화 및 영적 부분에 대한 정화이다. 나머지 여섯 노래에서는 영적 비춤과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이 자아내는 다양스럽고도 현묘한 결과들을 밝혀 나가겠다.
1
어느 어두운 밤에
사랑에 타 할딱이며
좋을씨고 행운이여
알 이 없이 나왔노라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2
변장한 몸, 캄캄한 속을
비밀 층대로 든든하이
좋을씨고 행운이여
캄캄한 속을 꼭꼭 숨어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3
상서로운 야밤중에
날 볼 이 없는 은밀한 속에
빛도 없이 길잡이 없이
나는 아무것 못 보았노라
마음에 속타는 불빛 밖엔
4
한낮 빛보다 더 탄탄히
그 빛이 날 인도했어라
내 가장 아는 그분께서
날 기다리시는 그 곳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 쪽으로
5
아, 밤이여 길잡이여
새벽도곤 한결 좋은 아, 밤이여
굄하는 이와 굄받는 이를
님과 한몸되어 버린 괴이는 이를
한데 아우른 아하, 밤이여
6
꽃스런 내 가슴 안
오로지 님 위해 지켜 온 그 안에
거기 당신이 잠드셨을 때
나는 당신을 고여드리고
잣나무도 부채런 듯 바람을 일고
7
바람은 성 머리에서 불어 오고
나는 님의 머리채 흩어 드릴 제
고요한 당신의 손으로
자리게 내 목을 안아 주시니
일체 나의 감각은 끊어졌어라.
8
하릴없이 나를 잊고
님께 얼굴 기대이니
온갖 것 없고 나도 몰라라
백합화 떨기진 속에
내 시름 던져 두고
하느님과 사랑으로 합일하는 길에 있어 영혼이 지니는 방법과 양식을 다루는 노래의 풀이가 시작됨.
이 노래의 풀이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완덕의 상태에 있는 영혼이 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완덕이란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 영혼은 벌써 우리 구세주께서 복음에 말씀하시는 영생에로 통하는 좁은 길의 영적 수련을 거쳐, 답답하고 숨막히는 곤경을 치룬 것이다. 영혼이 하느님과의 높고도 복된 이 합일에 도달하려면 거의 항상 통과해야 하는 이 길은 어찌나 좁은지, 그리고 (주께서도 말씀 하시듯이―마복 7장 14절―)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지, 이런 길을 거쳐서 저 사랑의 완전성에 도달했음을 아슬아슬한 행복으로 알아, 이를 첫째 노래에서 읊조리고, 앞으로도 그 구절을 풀어 나가겠지만 이 좁다란 길을 가장 그럴사하게 “어둔 밤” 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으뜸가는 행복이 뒤따르는 이 좁은 길을 용하게도 거친 것이 대견스러워서 영혼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어둔 밤 싯귀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즉 어둔 밤 머리말 4-8째줄 에서 ‘첫번 두 노래에서는 영성의 두 가지 정화의 결과가 밝혀질 것인데, 이는 곧 인간의 감각적 부분에 대한 정화 및 영적 부분에 대한 정화이다. 나머지 여섯 노래에서는 영적 비춤과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이 자아내는 다양스럽고도 현묘한 결과들을 밝혀 나가겠다.’ 하였듯이 그리고 어둔 밤 싯귀 다섯째 노래에서「아, 밤이여 길잡이여 / 새벽도곤 한결 좋은 아, 밤이여 / 굄하는 이와 굄받는 이를 / 님과 한몸되어 버린 괴이는 이를 / 한데 아우른 아하, 밤이여」처럼 소화 데레사 성녀의 첫 영성체 때처럼
「아! 제 영혼에 주신 예수의 첫 번 친구(親口)는 참말 즐거웠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친구였으며 저는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깨달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는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그리고 나를 영원히 당신께 바치나이다.』아무런 청구(請求)도 싸움도 희생도 없었습니다. 벌써 오래전부터 예수와 어린 데레사는 서로 바라보고 서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바라다만 보는 것이 아니고 융합(融合)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둘이 아니었으니 데레사는 물방울이 큰 바닷물속에 사라지는 것같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 혼자만이 남아 계셨으니 그분은 스승이요 임금이었습니다.(소화 데레사 자서전 91페이지)」
합일되어 버림을 엿볼 수가 있었으며 그리고 어둔 밤 머리말 싯귀 노래 다음에 ‘하느님과 사랑으로 합일하는 길에 있어 영혼이 지니는 방법과 양식을 다루는 노래의 풀이가 시작됨.’ 하면서 ‘이 노래의 풀이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완덕의 상태에 있는 영혼이 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하면서 ‘완덕이란 하느님과의 사랑의 합일, 영혼은 벌써 우리 구세주께서 복음에 말씀하시는 영생에로 통하는 좁은 길의 영적 수련을 거쳐, 답답하고 숨막히는 곤경을 치룬 것이다. 영혼이 하느님과의 높고도 복된 이 합일에 도달하려면 거의 항상 통과해야 하는 이 길은 어찌나 좁은지…’ ‘이 좁다란 길을 가장 그럴싸하게 “어둔 밤” 이라고 부른다.’ 하는 어둔 밤의 좁은 문을 또한 알아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둔 밤 책 ‘독자에게’
「독자에게
무릇 자기에게 돌아가(루복 15장 17절) 스스로를 관조하는 사람이면, 자기 초월의 필요성을 절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영은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있게 되었으나 육은 흙으로 지음을 받은(창세 2장 7절) 비참 탓인지, 어차피 인간은 인간을 무한히 초월한다는 빠스칼의 말이 가장 옳은 것만 같습니다.
스스로 제 목적일 수 없는 인간이 자기 완성―행복을 자기안에서 발견할 수 없다면, 자기 아닌 누구를 만남이 없이 자기 안에 폐쇄된 채로 남아 있을수록, 그는 더욱 외로워지고 스스로의 공간이 더욱 더 좁아짐을 볼 것입니다.
아쉬운 것이 너무나 많고 어쩌면 모자람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인생이, 자기 아닌 누구를 만남에서 성장하고 원숙하려면 그 누구란 “나” 아닌 딴 누구라야 할 뿐더러 내게 없는 것을 줄 수 있고 모자라는 “나” 자신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는 그러한 누구라야 합니다.
“나”의 인생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누구를 만난 다 함은 쉬운 일이 아니라도, 다만 확실한 것은 나의 생명과 구원을 위하여 없어서는 아니될 하나의 만남,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하라고 창조된 존재이기에, 사랑은 자기 실존의 가장 뿌리 깊은 핵심일 수 밖에 없고, 따라서 “나”라는 이 나는 항상 그 “너”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오롯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제 돌아갈 자리로 태어난 나그네 이기에, 인간은 이를 의식하건 거부하건 결국 사랑을 향하여 걸어가는 길손인 것, 그러기에 당신 아닌 누구나 무엇으로 채워질 수 없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간인지라, 사랑을 겨냥하여 삐뚜루 쏘아진 화살이 하고 많은 사람들의 그릇된 삶이요 올바르게 거침없이 나가는 것이 과녁을 맞히는 이들의 참 생활일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랑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합일하고자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니”(마복 6장 24절)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주님을 온전히 섬기려는 사람은 세속의 정을 온전히 끊어야 합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섬기지 않으면 완전히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니 창조된 그 어느 선이 하느님의 완전성에 비길 수 있으며 어디라 감히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비오 12세 수도회 총장들에게 11-2-1958)
이른바 모순 원리(矛盾原理)를 영성학의 대가들이 잘 알고 있지만, “전(全)과 무(無)” “순수한 사랑” “절대”의 스승이신 십자가의 성 요한이야말로 그의 “갈멜의 산길” 제1권 제4장 1 에서 이를 고전적 공식으로 표명하십니다. 즉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려면 모든 것에 대한 욕 끊기와 맛 없애기의 밤을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피조물에 대한 모든 애집이 하느님 앞에서는 어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니, 이 어둠을 둘러 쓴 영혼이 먼저 어둠을 떨어버리지 않으면 티 없이 맑으신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일 수도 빛날 수도 없다.
성 요한께서 ‘어둠이 빛을 받아 들이지 아니했다.’(요복 1 장 5절) 라고 하신 말씀 대로, 빛과 어둠이 서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잇달아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대셨습니다.
“상반되는 둘이 하나의 주체에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은 철학의 가르침… 그러므로 피조물에의 애집인 어둠과 하느님이신 빛은 상극이요, 서로 비슷하지 않을 뿐더러 전혀 엉뚱하여서 성 바오로께서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겠느냐’(고린후 6장 14절) 즉 풀어 이르면 빛과 어둠이 어떻게 어울리겠느냐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영혼이 먼저 애집을 쫓아 버리지 않고는, 하느님과의 합일의 빛이 그 안에 자리할 수 없는 것이다.”
“정화를 우리는 어둔 밤이라 부른다.” 고 하신 성인은 하느님과의 합일에 있어 인간이 치뤄야하는 정화, 즉 밤이 감성 및 영성의 두 가지라 했고 그의 양상 역시 능동 및 수동의 두 가지라 했습니다. 능동의 밤은 곧 “다름 아닌 끊음과 씻음으로서, 세상의 바깥 일들, 육에 즐거운 것들, 의지에 맛스러운 일체를 끊고 씻어 버림”(갈멜의 산길, 제1권, 1장, 4)인데, 갈멜의 산길은 이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둔 밤”은 감성 및 영성의 수동적 밤을 소재로 하는 것입니다. 성인의 표현을 빈다면 “능동적이란, 영혼이 밤에 들기 위한 일을 제편에서 할 수 있고, 실제하는 것”이지만 “수동적이란, 영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다만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시고 영혼은 수동적인 상태에 있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빛을 받아 들일 때, 그가 지닌 감성 및 영성을 스스로(능동적) 어둡게 하여 캄캄한 밤이 될수록 빛이 잘 들어오게 마련이지만, 의인도 일곱번 넘어진다(잠언 24 장 16절) 할만큼 제아무리 성인이라도 스스로 제 허물을 다 알지 못하는지라, 하느님과의 합일이 요청하는 순수한 청정 무구를 제 힘만으로 얻을 수 있다고 버틴다면 이는 분명 뻴라지아니즘(상해천주교요리 중권 ‘지킬 계명편’ 164 해설 237페이지 12째줄 펠라지우스 참조)의 망발을 되풀이함일 것입니다.
인간의 능동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절대 정화가 자비하신 하느님 / 아버지의 손길로 다스려짐이 감성 및 영성의 수동적 밤이요,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천재가 유례 없이 밝혀내는 밤입니다.
5
아, 밤이여 길잡이여
새벽도곤 한결 좋은 아, 밤이여
굄하는 이와 굄받는 이를
님과 한몸되어 버린 괴이는 이를
한데 아우른 아하, 밤이여
8
하릴없이 나를 잊고
님께 얼굴 기대이니
온갖 것 없고 나도 몰라라
백합화 떨기진 속에
내 시름 던져 두고… 」
를 읽어보니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어둔 밤이 감성 및 영성의 두가지라 했고 그의 양상 역시 능동 및 수동의 두가지인데 갈멜의 산길에서 능동의 밤을 다루었다는 점과 인간의 능동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절대 정화가 자비하신 하느님 / 아버지의 손길로 다스려짐이 감성 및 영성의 수동적 밤이라는 즉 (감성 및 영성의 능동적 밤을 다룬 것이 갈멜의 산길 책이라는 것)과 (인간의 능동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절대 정화가 자비하신 하느님 / 아버지의 손길로 다스려지는 감성 및 영성의 수동적 밤을 다룬 것이 어둔 밤 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수기 ‘97.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싯귀가 풀림)③’ 편 99-107페이지 참조)】
110.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싯귀가 풀림)④
나는 부산 성요셉병원 분원에서 무슨 일로 인하여 나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는 마음이 되어 침대에 누워 있는데 눈엔 눈물이 가득 고여 왔습니다. 그런데 순간 그때 볼 수는 없었지만 하느님께서 옆에 오셔서 스며들 듯 팔베개 하시고 나를 끌어 안아주시는 것을 갑자기 영신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실망하는 마음도 어느 듯 사라져 버리고 왠지 그때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 책 싯귀의 온갖 풀이가 이제는 만사 땡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둔 밤 싯귀 내용들을 살펴보니 싯귀 일곱째 노래 ‘고요한 당신의 손으로, / 자리게 내 목을 안아 주시니, / 일체 나의 감각은 끊어졌어라.’에서 즉 아가서 2장 6-7절 ‘왼팔을 베게 하시고, / 오른팔로 이 몸을 안아 주시네. / 들판을 뛰노는 노루 사슴 같은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 이 사랑이 잦아들기까지 / 제발 방해하지 말아다오. / 흔들어 깨우지 말아다오.’ 하였듯이 또 아가서 8장 3-4절에서도 ‘왼팔을 베게 하시고, / 오른팔로 이 몸 안아 주시네. /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 이 사랑이 잦아들기까지 / 제발 방해하지 말아다오. / 흔들어 깨우지 말아다오.’ 하고 같은 말을 되풀이 하였듯이 이 사랑이 잦아들기까지는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 싯귀가 풀린 것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 책에서처럼 하느님과의 합일을 그렇게까지는 체험한 적은 없다지만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자면 우리가 인간적인 사랑의 관계에서도 아!, 내 낭군이 팔베게 하시고 나를 끌어 안아 주시면 만사 땡이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리고 싯귀 여덟째 노래에서는 ‘하릴없이 나를 잊고’ 즉 달라고 보채고 그다지 청할게 없는 그저 하느님께서 내 목을 끌어 안아 주시니 ‘님께 얼굴 기대이고’ 즉 우리가 이성간의 사랑에서도 그 안에 무슨 잡다한 것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하느님의 사랑에서야 그저 그대로 ‘하릴없이 나를 잊고 / 님께 얼굴 기대이니 / 온갖 것 없고 나도 몰라라 / 백합화 떨기진 속에 / 내 시름 던져두고.’인 시름은 가신 그대로가 아니겠습니까?
【(신앙수기 ‘110. 십자가의 요한성인의 어둔 밤(싯귀가 풀림)④’ 편 162-163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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