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라서 좋다 거리에 서서 초점을 잃어가는 사물들과 각자의 외투 속으로 응집한 채 흔들려가는 사람들 목 없는 얼굴을 바라보는 게 좋다 오늘의 決心과 亡身은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이다 포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재능이 좋다 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헐벗었고 새떼가 죽을 힘껏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반대로 봄이 아니라 겨울이라 좋다 신년이 아니고 연말, 흥청망청 처음이 아니라서 좋다 이제는 곧 육신을 볼 수 없겠지 움푹 파인 눈의 애인아 창백한 내 사랑아 일어나라 내 방으로 가자 그냥 여기서 고인 물을 마시겠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널 건드려도 괜찮지? 숨넘어가겠니? 영혼아, 넌 내게 뭘 줄 수 있겠니?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2011) ............................................................................... 태생이 자유로운 영혼은 몸과 마음을 비끄러매 둘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닌다. 겉보기엔 분방해 보이지만 속내는 어딘가에 묶이고 싶은 것이다. 결핍은 그쪽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생래로 정돈된 영혼은 일탈에 대한 갈망이 크다. 겉으로는 틀에 박혔지만 속내로는 무한한 자유를 갈망한다. 출구가 그쪽이기 때문이다. 두 부류는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기차다. 교차하는 중간 지점에는 시가 없다. 발과 꿈의 거리가 멀수록 시의 파격과 낯섦의 정도가 도출하는 울림이 크다. 최선을 다해 꿈을 멀리 보낼수록, 달려가 거세게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울컥울컥 선혈처럼 시가 피어난다. 대체로 사람들은 태생에 따라 생래에 따라 디딘 발, 뿌리 뻗은 곳에서 산다. 그러나 시인이란 존재는 발과 꿈의 이격 정도가 멀고, 호기심 또한 만만찮은 사람들이다. 시는 그런 무모한 여정의 종점을 향해가는 불쌍한 기록이다. 언젠가는 다시 발로 돌아갈, 그러나 (시를 버리지 않는 한) 기약할 수도 없는.ㅡ 안상학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날마다 설날 ㅡ김이듬(1969∼)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 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定義)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뜻한 바는 뺨에서 흘러내리고 뜻 없이 목 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무모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셔보자고 다시 쓴다
.......... 언제부터 ‘계획’이라는 말이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약속을 뜻했을까. 흔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이곳에서 가능하지 않을 것만 같은 최대치와 이곳을 변화시키고 싶은 최소치 사이에서 그저 두리번거려 보는 것이다. 때문에 늘 현실에서 도약하고 싶지만 거대한 다짐들을 모두 감당하기에 그 끝은 허무로 기울어져 있다. 또 현실을 절충하면서 처음을 배신하기에 이른다. 이 시에서 다짐은 어쩌면 건강해지려는 다짐일지도 모르겠다.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겠다는 말은 역으로, 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고백이고, 권태를 이겨내고 싶다는 외침으로 들린다.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 또한 그렇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다 걸어봤다는, 그래서 또 그만큼 지금이 누추하다는 말이 아닐까. 그러니 그런 실패밖에 할 수 없는 다짐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다짐하고, 또 실패하고 그렇게 실패의 일대기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끔찍한 공약을 매일매일 적어 나가야 한다니! 그에게 하루는 ‘날마다 설날’이어서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 이미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슬픔 속에 있다. 내일이 다시 우리를 매혹시키기를.ㅡ박성준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 너는 우연히 연두 ㅡ김이듬
암흑 한가운데서 눈이 사라진 두개골로 물살을 가르는 심해어에게 물의 흐름과 진동을 감지하는 감각 수용기가 있을 거라 믿는다면 어두운 시간이 준 노래를 들었다면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는 연두, 엎드린 아이
그 옆의 물고기는 얼마예요? 나 또한 먹이를 고르는 중이었다
시선으로 들어온 방문객들은 한 순간 나를 조화롭게 만든다 식기장 속 그릇처럼 어색하면서도 다정한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책들처럼
어이, 여기 술 더 줘! 술꾼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 순간 나는 종업원이 되어 어두운 카페 안 냉장고를 찾아본다
다른 건 없어요? 물건을 고르던 여자가 나한테 묻는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해본다
손님들은 손님인 나를 착각한다 나는 주인이 아닌데 주인이 되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사람의 진동을 느끼는 감각기관이 다를 거야 나는 의심스럽게 모호한 인상을 하고 있나 보다 직업을 드러내는 옷차림도 고유한 성격을 보여주는 표정도 없을 것이다
식기장 속 유리병처럼 휘어진 책장처럼 내게 오는 사물을 맞이한다 나는 나든 아니면 또 다른 한 사람 일생으로 그 짧은 한 순간 다르게 불릴 때 암흑 한가운데서 내가 두리번거릴 때 너에게로 이행할 감각이 생겨난다
기뻐하며 누가 맡아도 상관없을 배역을 맡자 너는 우연히 연두, 엎드린 아이, 아름다운 검은 나비 뭐든 되거나 아무것도 되지 않을 이 소리 없는 유령들과 함께
—시집『히스테리아』 ............................................................................... 당신은 오해와 착각이 만들어낸 암흑 속에서, 눈이 사라진 두개골로 물살을 가르는 심해어처럼, 불확실한 시간의 흐름과 진동을 느끼며 물속에 잠겨있는 연두, 엎드린 아이를 본다. 당신이 다른 누군가의 일생으로 불릴 때, 당신은 암흑 속에서 끝없이 두리번거리며, 누가 맡아도 상관없을 배역으로 서서히 옮아간다.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 소리 없는 유령들과 함께. 황병승(시인) ㅡㅡㅡㅡㅡㅡㅡ
물 위의 잠 ㅡ 김이듬
신발은 부두에서 벗고 짐이 되는 물건들 바다에 던졌다
배에 올랐다 뛰어들었어야 맞나 맞거나 옳다는 게 싫은 거추장스런 짐
파도 위에 내리는 비 몇 방울의 환승
선미 쪽 유리창에는 온통 물방울
파란은 몽상 바람과 조수의 흐름에 출렁이는 잠
잔잔한 바다에 배를 세웠나 보다
금붕어 어항을 보며 생선을 먹는다 베트남 사나이의 뱃머리
네 어깨 뒤로는 나의 머리칼 왜 목련꽃은 나의 마당에 떨어졌나 그루터긴 담장 너머 있었는데
새끼 적부터 선반 있는 쇠창살에 갇혀 자라던 개가 땅을 디디며 느꼈을 멀미 식용으로 팔려가던 날 비틀거리다 트럭으로 환승
배에서 내리면 육지 멀미를 한다는 사람 파랑은 너를 위해 거세지고 나는 난간을 잡지 않는다 없었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시와 사상》2014년 겨울호
나는 춤춘다
나는 춤춥니다 춤추기 시작했어요 파도가 파고드는 검은 모래 위에서 아름다운 눈발은 전조였죠 폭우 속에서
우선 가슴을 옮깁니다 마음이 아니라 말캉하고 뾰족한 바로 그 젖가슴 말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너무 일찍 감정을 가지죠* 다음으로 들린 발을 뒤로 보내는 겁니다
뒷걸음질이 중요합니다 나는 아직 스탭을 다 알지 못하고 몸을 잘 가눌 줄도 몰라요 내 몸은 내가 지탱해야 합니다 허벅지와 허벅지가 스치도록 발꿈치와 발꿈치가 스치도록 이동할 겁니다 모래에 뒤꿈치를 묻은 채 서있지는 않을 거예요 멈춤과 정적을 좋아하지만 추종하지는 않아요 무한을 봐요 파도가 회오리치는
수평선 너머에 시선을 두는 겁니다 눈을 내리깔지 마세요 당신이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 나는 왼쪽으로 갑니다 당신이 당신 편에서 동쪽으로 갈 때 나는 나의 서편으로 심장을 밀고 가요
가슴 맞대고 춤추는 겁니다 마주보지만 얼굴을 살피지는 말자는 겁니다 바다 바깥으로 해변 밖으로 나가라는 방송이 거듭될수록 서로의 어깨 깊숙이 손바닥을 붙이는 겁니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 피하고 흥분하고 싸우기도 하듯이 나는 춤추겠다는 겁니다 눈감고 리듬을 느껴봅니다
당신이라는 유령, 다가오는 죽음을 인정하고 포옹하면서 매순간의 나를 석방합니다 나는 춤을 춥니다 뒤로 걷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
이 인간을 물어뜯고 싶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널 물어뜯어 죽일 수 있다면 야 어딜 만져 야야 손 저리 치워 곧 나는 찢어진다 찢어질 것 같다 발작하며 울부짖으려다 손으로 아랫배를 꽉 누른다 심호흡한다 만지지 마 제발 기대지 말라고 신경질 나게 왜 이래 팽팽해진 가죽을 찢고 여우든 늑대든 튀어나오려고 한다 피가 흐르는데 핏자국이 달무리처럼 푸른 시트로 번져가는데 본능이라니 보름달 때문이라니 조용히 해라 진리를 말하는 자여 진리를 알거든 너만 알고 있어라 더러운 인간들의 복음 주기적인 출혈과 복통 나는 멈추지 않는데 복잡해죽겠는데 안으로 안으로 들어오려는 인간들 나는 말이야 인사이더잖아 아웃사이더가 아냐 넌 자면서도 중얼거리네 갑작스런 출혈인데 피 흐르는데 반복적으로 열렸다 닫혔다 하는 큰 문이 달린 세계 이동하다 반복적으로 멈추는 바퀴 바뀌지 않는 노선 벗어나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대형 생리대가 필요해요 곯아떨어진 이 인간을 어떻게 하나 내 외투 안으로 손을 넣고 갈겨쓴 편지를 읽듯 잠꼬대까지 하는 이 죽일 놈을 한방 갈기고 싶은데 이놈의 애인을 어떻게 하나 덥석 목덜미를 물고 뛰어내릴 수 있다면 갈기를 휘날리며 한밤의 철도 위를 내달릴 수 있다면 달이 뜬 붉은 해안으로 그 흐르는 모래사장 시원한 우물 옆으로 가서 너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ㅡㅡㅡㅡㅡ 드레스 리허설
그녀가 출전할 때 눈을 감아요 나는 내가 안 봐야 그녀가 이기거든요 드레스 리허설까지만 지켜보고 나는 퇴장합니다
오늘 새벽 프리 피겨스케이팅 경기를 볼까 말까 머뭇거리고 있어요
피겨 퀸은 빙판 위에 댄싱 퀸은 콜라텍에 (밀양강 놔두고 무심천가에 와서 노래하는 일을 다시 시작한 밀양 이모, 환갑 다 된 과붓집이 위장하듯 화장을 하고 레깅스로 강조한 엉덩이 흔들며 노래하는 꼴이란, 이천 원 입장료로 온종일 죽치고 노는 노인들의 콜라텍에서 쌍쌍이 눈이 맞아 모텔도 가고 공원도 가는 옛날 공단 지역 창고 같은 곳에서, 춤도 아니고 들썩임도 아닌 이상한 스텝을 밟는, 뭐야, 도살장으로 실려와 죽음을 눈치채자 교미에 열을 올리는 돼지들 같잖아요, 안 와도 되는데 뭐하러 왔나? 네 에미가 가보라든? 옷은 이게 뭐냐, 애늙은이같이, 중략, 자칭 댄싱 퀸) 그 허구 속에 자기가 있다고 말하라 했다던 보르헤스처럼 보든지 말든지 당신이 믿는 실체라고 하는 게 사라져야 실체가 나타난다는 말 분장 뒤에는 아무것도 없거든
그녀가 경기를 할 때 나는 오후 세 시의 스톡홀름 낮처럼 어두워져서 눈보라 치는 감라스탄 구시가 골목에서 전화를 걸었어요 눈앞의 투명 프롬프터를 읽듯 대사를 전달했죠 죽을 때까지 적을 수는 없거든요
쇼는 계속되고 촛불은 많아요
그녀가 내게 입김을 불어 꺼줍니다 매월당은 김시습을 연기하고 연극하세요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을 스웨덴 숲에서 내가 쇼를 할 때 (홍대 앞 파티 용품 가게에서 사서 가져간 삼천 원짜리 은색 가면을 이탈리아 가면으로 오인하여 환호하는 관객들 앞에 내 얼굴을 숨기자마자 스스로를 망각할 수 있었으므로, 일종의 정신병, 후략)
김연아는 김연아가 되고 싶죠 맨주먹은 주먹의 반대말 맨얼굴은 진짜 얼굴이 아니에요
크리스마스 시즌 스웨덴 거리 촛불 사이 드문드문 아니스캔디가 든 유리 항아리 옆에 잠시 쇼윈도를 바라보면서 나는 홑겹입니다 내 안에는 내가 없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 눈을 감기세요
구청 창작교실이다. 위층은 에어로빅 교실, 뛰고 구르며 춤추는 사람들, 지붕 없는 방에서 눈보라를 맞는다 해도 거꾸로 든 가방을 바로 놓아도 역전은 없겠다. 나는 선생이 앉는 의자에 앉는다. 과제 검사를 하겠어요. 한 명씩 자신이 쓴 시 세 편을 들고 와 내 책상 맞은편에 앉는다. 수강생과 나는 머리를 맞댄다. 어깨를 감싸는 안개가 있고 나는 연달아 사슴을 쫓아가며 총을 쏘는 기분이다. 전쟁을 겪은 후 나는 총을 쏘지 못하게 되었다. 이건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하잖아요. 이렇게 쓰시면 안 됩니다. 노인이 내민 시에 칼질을 한다. 깎고 깎여서 뼈대만 남은 조각상처럼 노인은 앉아 있다. 패잔병의 앙상한 뺨을 타고 곧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다. 분노로 불신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아니다. 선생님, 방금 그 작품은 내가 쓴 게 아닙니다. 아무리 애써도 시를 쓸 수가 없어 유명한 시인의 수상 작품을 필사해봤어요. 내 머리는 떨어진다. 책상 위에는 첨삭하느라 엉망이 된 유명 시인의 작품이 있다. 그것은 마치 왜 그렇게 비싼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품 브랜드 가방 같다. 노인이 나를 보며 웃지 않으려 애쓴다. 위에서 춤추는 사람들, 이름을 가리면 걸작을 못 알아보는 내 식견으로 누구를 가르치겠다고 덤빈 걸까?
—시집『히스테리아』(2014)에서 -------------- 호명 ㅡ김이듬
당신이 부르시면 사랑스런 당신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리면 한숨을 쉬며 나는 달아납니다
자꾸 말을 시켰죠 내 혀는 말랐는데
마당에서 키우던 개를 이웃집 개와 맞바꿉니다 그 개를 끌고 산으로 가 엄나무에 매달았어요 마당에는 커다란 솥이 준비 되었어요 버둥거리던 개가 도망칩니다
이리 와 이리 와 느릿한 톤 불확실한 리듬
어딘가 숨었을 개가 주인을 향해 달려갑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을 향해 사랑이라 믿는 걸까요 날 이해하는 사람은 나를 묶어버립니다 호명의 피 냄새가 납니다
개 주인은 그 개를 다시 흥분한 사람들에게 넘깁니다 이번엔 맞아죽을 때까지 지켜봅니다
평상에서 서로 밀치고 당기는 사람들 비어가는 접시와 술잔 빈 개집 앞에 마른 밥 몇 숟가락
아버지는 나를 부르고 나는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옥수수 밭 너머 신작로가 보입니다 흐르는 구름 너머 골짜기 개구리 소리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동경하지 않아요
당신이 부르시면 날개 달린 당신이 부르셔도
—《애지》2014년 가을호 ------------- 피의 10일간 김이듬
그 섬에 가서 돼지를 잡자 우물가에서 돼지 잡아 넘쳐흐르는 내장까지 나눠먹자 했죠 천일염도 한 포대씩 받아오자 했죠
그 친구 죽고 나면 그 돼지 누가 잡아 따듯한 콩팥을 나눠줄까요 하늘 높이 올라가는 방광을 주세요
당신은 번역하고 칼럼 쓰느라 약속을 잊으셨지요
얘기해주세요 그날이 어땠는지 누가 어떻게 종지부를 찍었는지 춘원도 육당도 몰라요 당신이 말해줘요 직접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늙어 죽어갑니다
나는 요즘 애 영어가 급하죠 참는 건 아니에요 재떨이가 담뱃불을 도마가 칼을 참는다고 비약하지 마세요
이 날짜에 비상해지죠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필요 없는 물건도 훔치고 싶어요 팬티 내리고 생리대를 똑바로 놓지만 뛰어다니는 날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요 피의 일주일이 지나면 피임 날짜나 세는 요즘 애라서 당신은 고향에 내렸던 비상계엄령에 관해 우물과 시장에 관해 말하지 않나요 나는 보챕니다
불타는 파출소 옆에서 자궁을 꺼내 하늘 높이 차올리고 싶은 날이니까요
—《시와 사람》2014년 봄호
김이듬의 「모르는 기쁨」감상 / 황인숙
모르는 기쁨
김이듬(1969∼ )
해운대 바다야, 아니 바다 아니고 바닷가야. 작은 여자가 자기 머리칼을 한 묶음 손으로 쥔 채 몸을 숙이고 모래밭에서 한참 동안 뭔가를 찾고 있어. 그녀에게 뭘 그리 열심히 찾고 있냐고 물어보았지. 몰라도 된다고 하네. 나는 그녀가 그 백사장에서 썩어서 하얗게 바랜 애인의 유해를 찾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어리둥절해지는 순간에, 뭐하러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적고 있나, 몰라도 된다고 나는 내게 말하지. 내 생각의 절반 이상은 몰라도 되는 생각, 억지스런 상상. 난 눈을 질끈 감아보지. 보이지, 캄캄한 심해의 눈 없는 물고기처럼 비로소 나는 활발해지지. 죽은 나의 사람들이 지하 언덕에서 지느러미로 춤추며 나를 건드려. 나는 출렁거리지. 돌멩이도 노래하고 저녁도 낄낄거리네. 멈추지 않는 슬픔, 검은 파도, 도저히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해. 금이 간 찻잔 같은 얼굴로 나는 웃고 있겠어.
철이 좀 이르거나 갓 지난 해수욕장이다. 아니면 제철인데 날이 저물기도 했고, 하늘에 먹구름이라도 끼어서 해수욕객들이 거의 돌아갔을까. 한적한 바닷가 모래밭에서 아마 ‘멍 때리고’ 있었을 화자 눈에 한 ‘작은 여자’가 들어온다. 샤워를 하다가 화급히 돌아온 듯 ‘자기 머리칼을 한 묶음 손으로 쥔 채’ 그녀는 ‘한참 동안 뭔가를 찾고 있’다. 굉장히 소중한 것인가 보네. 같이 찾아줄 생각으로 뭘 찾고 있냐고 묻는 화자에게 ‘몰라도 된다고’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온다. 화자가 한 말이 시에 쓰인 그대로 ‘뭘 그리 열심히 찾고 있냐’였다면 ‘작은 여자’가 뾰족하게 반응할 만하다. 화자 성정의 착함이나 말투를 알 리 없으니 발화된 말 그대로 받아들일 테니까. 애타 죽겠는데 호기심에 찬 구경꾼의 참견이라니! 무르춤해진 상황에서 화자는 ‘작은 여자’를 발견하기 전에 하던, 멍하니 생각에 잠겨 무심코 ‘손가락으로 모래밭에’ 글자를 새기던 짓으로 돌아간다. ‘내 생각의 절반은 몰라도 되는 생각’, 다른 이에게는 하찮을지 몰라도 내게는 너무 소중한, 아무도 모르게 나만의 것인,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말하고 싶지 않은, 그 생각이 화자를 바닷가로 이끌었을 것이다. ‘눈을 질끈’ 감고 화자는 생각에 깊이 잠긴다. 바닷가 모래밭의 모래들은 숱한 생명체들의 ‘하얗게’ 바스러진 유해. 때때로 그들은 돌아온다. 그들 모습 생생해서 웃음이 피어오른 채 일그러지는 화자 얼굴. 다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멈추지 않는 슬픔’으로 얼굴에 죽죽 금이 가는 화자, 눈을 감고 ‘검은 파도’에 출렁출렁 실려 간다.
황인숙(시인)
물 위의 잠 (외 1편)ㅡ 김이듬
신발은 부두에서 벗고 짐이 되는 물건들 바다에 던졌다
배에 올랐다 뛰어들었어야 맞나 맞거나 옳다는 게 싫은 거추장스런 짐
파도 위에 내리는 비 몇 방울의 환승
선미 쪽 유리창에는 온통 물방울
파란은 몽상 바람과 조수의 흐름에 출렁이는 잠
잔잔한 바다에 배를 세웠나 보다
금붕어 어항을 보며 생선을 먹는다 베트남 사나이의 뱃머리
네 어깨 뒤로는 나의 머리칼 왜 목련꽃은 나의 마당에 떨어졌나 그루터긴 담장 너머 있었는데
새끼 적부터 선반 있는 쇠창살에 갇혀 자라던 개가 땅을 디디며 느꼈을 멀미 식용으로 팔려가던 날 비틀거리다 트럭으로 환승
배에서 내리면 육지 멀미를 한다는 사람 파랑은 너를 위해 거세지고 나는 난간을 잡지 않는다 없었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시와 사상》2014년 겨울호
나는 춤춘다
나는 춤춥니다 춤추기 시작했어요 파도가 파고드는 검은 모래 위에서 아름다운 눈발은 전조였죠 폭우 속에서
우선 가슴을 옮깁니다 마음이 아니라 말캉하고 뾰족한 바로 그 젖가슴 말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너무 일찍 감정을 가지죠* 다음으로 들린 발을 뒤로 보내는 겁니다
뒷걸음질이 중요합니다 나는 아직 스탭을 다 알지 못하고 몸을 잘 가눌 줄도 몰라요 내 몸은 내가 지탱해야 합니다 허벅지와 허벅지가 스치도록 발꿈치와 발꿈치가 스치도록 이동할 겁니다 모래에 뒤꿈치를 묻은 채 서있지는 않을 거예요 멈춤과 정적을 좋아하지만 추종하지는 않아요 무한을 봐요 파도가 회오리치는
수평선 너머에 시선을 두는 겁니다 눈을 내리깔지 마세요 당신이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 나는 왼쪽으로 갑니다 당신이 당신 편에서 동쪽으로 갈 때 나는 나의 서편으로 심장을 밀고 가요
가슴 맞대고 춤추는 겁니다 마주보지만 얼굴을 살피지는 말자는 겁니다 바다 바깥으로 해변 밖으로 나가라는 방송이 거듭될수록 서로의 어깨 깊숙이 손바닥을 붙이는 겁니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 피하고 흥분하고 싸우기도 하듯이 나는 춤추겠다는 겁니다 눈감고 리듬을 느껴봅니다
당신이라는 유령, 다가오는 죽음을 인정하고 포옹하면서 매순간의 나를 석방합니다 나는 춤을 춥니다 뒤로 걷는 것처럼 보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