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개 / 전성옥
“내 오늘 그 영감쟁이 머리 다 쥐어뜯어 주고 왔다!”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엄마가 말한다. 나는 아버지가 걱정된다. 엄마에게 머리를 쥐어뜯기고서 얼마나 따갑고 화끈거릴까.
어느 해 늦겨울, 가족 모임 차 을숙도에 들른 적이 있었다. 강가 벌판에 풀어놓은 조카아이들이 불불대는 달랑게처럼 사방으로 흩어졌고 우리의 신경은 온통 아이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날 잃어버린 사람은 칠십을 넘긴 아버지였다. 한참 뒤, 긴 갈대밭 끝자락에서 아버지를 찾았다. 왜 여기 계시냐 묻자 아버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했다.
“여기서 말이다. 내가 꼭 한 가지 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이 갈대밭을 한번 마구 다녀 봤으면… 바람 많이 부는 날 말이다.”
그날, 서걱대는 갈대평원은 느린 강을 따라 천천히 길어지고 있었다.
칠십이 넘어도 생각이 여기에 머무는 아버지, 부농의 막내아들로 의식 걱정 없이 반평생을 살아온 데다, 천성적으로 전투력이나 경쟁심을 타고나지 못한 아버지는 오십이 넘어서야 제대로 된 직장을 가졌다. 그런 아버지와 살며 일곱 남매를 키워야 했던 엄마는 당연히 임계점에 이르는 고생을 했고, 우리 형제들도 성년이 되기 전에 세상으로 나와 공부도 결혼도 제 능력껏 알아서 해야 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이다. 한여름인 엄마 생일날, 휴가를 겸해 전국에 흩어진 형제들이 모였다. 좁은 친정집은 북새통이다. 산언덕에 자리한 열여섯 평짜리 낡은 연립에 아이 어른 합쳐 서른 명이 넘는 사람이 들어찼다. 앉을자리조차 부족한 판이다. 큰 아이들에게 작은 아이들 손을 잡혀 놀이터로 내보냈다.
나가는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좁은 현관이 많은 신발을 감당하지 못하자 신발들이 나가기 시작한다. 집이 꼭대기 층이라 옥상 올라가는 계단으로 크고 작은 신발들이 짝을 맞춰 올라갔다. 밤이 되자 이번에는 남자들이 나가기 시작한다. 모두들 옆구리에 무얼 하나씩 끼고 옥상으로 줄줄이 올라간다. 낮에 바깥에서 놀던 아이들은 자리 생기는 대로 잠에 빠졌다. 누울 곳이 없다고 판단한 아들과 사위들이 베개와 돗자리를 끼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딱한 것은 내 남편이다. 팔 남매 장남이 칠 남매 막내에게 장가를 오는 통에 서열이 말이 아니게 깎여 그나마 베개도 하나 챙기지 못한 빈손으로 형님들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다. 그 뒤로 ‘우야노!’를 연발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따라 올라간다.
하루 내내 음식 치다꺼리를 했던 딸과 며느리들도 자야 하는 데 베고 잘 것이 없다. 베개는 물론이요 방석이나 두꺼운 옷, 심지어 가방까지 열 명이 넘는 아이들 머리 아래 다 들어가 버렸던 까닭이다. 할 수 없이 바닥에 맨머리로 누웠는데, 뒤 베란다에서 한참 부스럭대던 아버지가 무얼 한아름 안고 와서 하나씩 나눠 준다. 설탕이었다. 5kg짜리 설탕 포대, 베고 자기 딱 맞춤한 사이즈!
그즈음 칠순이 넘은 아버지는 100세대가 채 안 되는 작은 아파트에서 경비로 일했다. 아버지의 학력은 일제강점기 소학교 육 년이 전부지만 해방 전에 학교를 다닌 터라 일본어도 가능하고 한문도 많이 알았다. 한자를 묻는 사람들이 더러더러 찾아오고, 어떤 젊은 엄마는 아이를 가르쳐 달라 부탁하고 갔다. 아버지는 한자를 배우러 온 아이에게 바둑까지 착실히 가르쳐 보냈다. 삼국지의 영웅 이야기도 실감 나게 들려주었다. 이런 아버지에게 아파트 주민들은 색다른 음식을 만들면 아버지 몫을 챙겨 오기도 했고, 명절에는 식용유, 양말, 설탕 등의 조촐한 선물들을 들고 오기도 했다. 명절 전후로, 아버지는 설탕 포대 두세 개를 한쪽 어깨에 올린 삐뚜름한 자세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다들 달게 자래이…!”
아버지는 무심한 한마디를 툭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설탕 포대를 베고 누운 우리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느라 잠이 끼어들 틈이 없다. 다음 날 아침, 토막잠을 자고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우리에게 아버지의 말이 또 툭 떨어진다.
“그래 잠은 달게 잤나?”
“예, 달게 잤심더, 너무 달아서 뒷머리가 다 물러빠졌심더!”
지금 아버지는 낯선 산자락에 한 평 땅을 얻어 누워계신다. 많이 늦긴 했지만, 평생 고생 속에 산 아내를 자각한 듯,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서너 해 전까지 남의 집을 지켰다. 용돈 정도밖에 안 되는 월급을 늙은 아내 손에 쥐여 주기 위해.
그런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말은 항상 과격하다. 공원묘원이라 해당 업체에서 관리를 다 해주니, 유족은 꽃을 갈아 꽂는 정도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다. 그럼에도 엄마는 매번 “이 영감쟁이 머리를 우째 해야지… 이래 가 될 일이 가.”라며 묏등의 잡초와 웃자란 풀들을 일일이 다 뽑아낸다. 이제는 혼자서는 가지도 못하지만 자식들 바쁠까 부탁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생각지도 않게 아들 차를 타고 영감 산소에 다녀온 것이다. 흐뭇한 모양이다. 말끝마다 “그 영감쟁이 때문에….”를 붙이는 걸 보니.
머릿밑이 화끈거리기는 해도, 오늘은 아버지도 달게 주무실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다. 오늘, 오랜만에 온 늙은 아내가 얼마 있지 않아 막내딸과 또 올 거라 했으니, 한동안은 밤새 뒤척일지도 모른다. 걱정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머리 간수를 제대로 못 할 것이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머리를 또 여지없이 쥐어뜯을 것이니.
베개를 지고 오느라 삐뚤어진 아버지의 어깨, 오래 누워 있었으니 이제는 조금 펴지셨을까. 이번에 가면 그걸 한번 여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