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분계선 협상의 난항
제 1 절 38도선과 접촉선 논쟁
1. 쌍방의 주장과 대립
'51. 7월 26일 의제의 합의를 보고 바로 실질적 토의에 들어가게 되었다. 글러자 공산군측 대표인 남일이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해야 한다고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자 유엔군측은 지난 13개월 동안 적어도 4차례나 38도선을 넘었다고 지적하고, 이 사실만으로도 그 선은 군사분계선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설명하고 "효과적인 비무장지대는 실제적 군사상황에 기초하여 설정되어애 하지, 정치적 목적의 고려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군사휴전에서 38도선과 같은 가상의 지리적인 선은 정당성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맞섰다.
나아가 대표인 조이 제독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에서 배제하면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지상. 해상. 공중 전투지대를 모두 고려해야한다. 유엔군은 지상에서 한정된 진지를 점령하고 있지만 전 해상을 통제하고 전 영공의 제공권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산군측은 ㅎ류전에 의해 유엔군측의 해군과 공군의 활동이 제한될 때 이동의 자유를 획득하고 재건을 할 수가 있다. 그러니 지상에서의 양보를 하여 이를 보상행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공산군측은 여기에 크게 반발하며 8월의 삼복더위가 시작될 때까지 38도선 주장에 매달렸다.
2. 중립위반사건과 회담의 중단
개성 내봉장에서 1주일간 쌍방이 38도선이야, 현 접촉선이냐로 한치의 양보없는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우선 8월 4일, 점심시간에 중무장을 한 중공군 1개 중대가 회담장 내의 유엔군측 대표단이 머무는 건물 가까이로 지나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계속되는 우발상황이라는 변명에 유엔군측은 물러서지 않고 복귀하겠다는 으름장으로 맞서 결국 개성지구의 완전 중립화를 보장하는 조건부로 휴전회담의 재개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8월 9일, 공산군측은 그들 대표단의 보급차량인 트럭 1대가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던 중 8월 7일 15:00시에 시변리 부근에서 유엔 공군기의 기총소사로 파손되었다고 항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조작에 의한 허위적 내용으로 결말이 났다.
제 2 절 의제 타결책의 모색
1. 개 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정리된 후에 8월 10일에 제20차 휴전회담이 재개 되었다. 먼저 발언에 나선 유엔군측 조이 제독은 군사분계선으로서 38도선에 대한 토의나 고려는 이미 끝났다고 통보하고 현실적인 군사상황에 기초하여 군사분계선을 설치해야 한다는 것과 비무장지대를 조정하기 위한 토의를 계속하자고 제의하였다.
여기에 북측의 남일이 즉각 항의하고 나서, 팔장을 낀 채 아무말도 업시 조이 제독을 노려보기만 하였다. 이 당시 상호간 노려본 시간이 무려 2시간 11분이나 되어 휴전회담사상 가장 긴 눈싸움이 되었다.
결국 조이제독이 입을 열어 우선 휴전실현을 위한 세부 협정을 토의하자고 제안했으나 남일은 장구한 변명이나 침묵으로 반대하였다. 사실 그들은 회담자체를 원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이에 유엔군측이 8월 15일, 새로운 타개책으로 합동분과 위원회를 두자고 제안하여 공산군측도 반대하지 않았다. 8월 17일 최초의 합동분과위원회가 열렸는데 북측이 새로운 38도선을 내놓았다. 동부에서는 38도선을 북측으로 4km 올리고, 서부의 남쪽에서는 4km를 내려서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고 유엔군측도 전향적으로 검토해 보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곧 공산군측은 유엔군이 중립지대에서 연이어 위반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8월 22일 회의를 취소하게 된다.
2. 중립위반사건의 날조와 협상결렬
38도선이냐 새로운 군사분계선이냐의 서로의 주장에서 공산군측의 변화된, 최초 38도선에서 동부지역에서의 4km 위로, 서부지역에서의 4km 아래를 연하는 선에 대한 것과 유엔군측의 현 접촉선에서 4km를 비무장지대로 하는 안이 합동분과 위원회에서 검토를 하게 될 때 북측에서 먼저 위반사건을 실체라며 몇가지 사례를 조사하자고 했다. 그러나 조사결과 대부분 조작된 것으로 기존의 항공기나 포병의 포격 자리에 유품을 널려놓고 유엔군이 했다고 우기는가 하면 그걸 날이 밝으면 조사하자는 유엔군측의 요구를 묵살하고 비내리는 밤에 다 치워버린다던가 하며 막무가내였다.
여기에 8월 19일에는 중공군 헌병소대가 중립지대인 송곡리에서 순찰도중에 복병의 습격을 받고 죽는 사건이 실제 발생햇다. 그러나 이 또한 유엔군측은 어더한 형태의 군사이동이 없었다. 다만 그 당시에 활동하던 유격대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계속되는 공산군측의 협정위반 날조사건에 회담은 진척이 없었고 결국 8월 24일 무기휴회로 들어가게 된다
3. 회담의 재개 노력
8얼24일, 공산군측은 유엔군측의 협정위반사건을 빌미로 회담을 취소한데 이어 8월 29일에는 우군 항공기가 개성 중립지역에 조명탄을 투하했다고 비난하였고, 다음날에는 유엔군 부대가 판문점 교량 넘어로 사격을 가하여 왔다고 하고, 9월 1일에는 두번재로 유엔군 항공기가 개성을 폭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유엔군측은 모두가 날조된 것이라 반박하고 지적하고, 개성에서의 회담은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이러한 사건으로 회담이 지연될 것이므로 판문점에서 열자라고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9월 10일 유엔 항공기가 항로 착오로 개성 상공에 진입하여 기총소사를 가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북측의 항의와 유엔군측의 위반행위 시인을 하였다.
이러한 진행과정을 거치며 9월 24일 판문점에서 연락장교회의를 가졌다. 그러나 여기서도 북측은 이전의 사건 발생에 대한 요구하고 개성에서의 토의를 거듭주장하게 된다.
이에 유엔군측은 회담장소를 개성에서 쌍방전선의 중간지점으로 송현리를 제의하게 되고 이에 북축이 10월 7일 판문점으로 하자고 역 제의하여 유엔군측이 동의함으로써 역사적인 판문점(널문리)시대가 개막하게 되었다. 언래 판문점은 널문리로 회담의 공용어(한글, 중국어, 영어)중 중국어 표기가 어려워 이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 판문점이다.
이렇게 하여 공산군측은 회담장소를 개성보다 남쪽으로 옮기는데 성공함으로써 차후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설정에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으며, 유엔군측은 이 무렵 전전선에서 공세작전을 펴고 공중에서 적을 보다 압박하며 군사적 압력을 강화하여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으로 될 것에 대비해 방어선을 개선하는 등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