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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와 패러디/ 장춘식
Ⅰ. 패러디의 정의
“산문이나 운문에서 한 작가나 혹은 한 부류의 작가들을 우습게 보이려는 방식으로, 특히 우습고 부적절한 주제에 이들을 적용시키면서 모방하는 사고나 구절의 전환으로 이루어진 구성. 원작에 다소 밀접하게 근거를 두고 모방하는 것이지만 우스꽝스런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 전환된 모방.”1) 이것은 옥스포드 영어사전에서 해석하는 패러디의 정의이다.
패러디는 인유와 혈연관계에 놓여 있는 문학적 장치2)인데 현대시, 특히 포스트모더니즘 시작품 창작에서는 핵심시학으로까지 격상된 중요한 비평개념이다. 패러디(parody)는 어원(희랍어, paradia/paradio)적 의미로 ‘반대’와 ‘모방’ 또는 ‘적대감’과 ‘친밀감’이라는 상호모순의 양면성을 띠고 있다. 이런 양면성이 원전에 대한 패러디 작가의 태도임은 말할 필요 없다. 그러니까 모방과 변용은 패러디를 구성하는 기본개념이 된다 하겠다.
일반적으로 패러디는 ‘원전의 풍자적 모방’ 또는 원전의 ‘희극적 개작’으로 정의된다. 더욱 좁은 의미로 특정한 원전의 진지한 소재나 태도, 또는 특정 작가의 고유한 문체를 저급하거나 어울리지 않는 주제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패러디는 주로 풍자적 목적을 위해 채용되며 따라서 풍자는 패러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패러디의 유형분류가 가능해 진다. 이 <주기도문, 빌어먹을>의 경우 모방의 대상은 주기도문이지만 풍자의 대상은 시인이 유희적 태도로 독자에게 직접 말 건네는 형식을 취한 괄호 안의 진술이 시사하듯이, 원전인 주기도문이 아니라 육공의 기만적 지배체제(또는 육공의 기만적인 정치적 담론)다. 그러나 문병란의 <가난>은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無等을 보며>,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등 여러 작품들(또는 미당 시인) 자체가 모방의 대상이면서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패러디시는 현대적 감수성에 의해서 원전을, 더 구체적으로 원전의 방법, 제재, 문체, 사상 등을 우롱하기 위해 패러디 전략을 채용한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패러디시는 과거보다는 당대적 관습, 당대의 정치와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진지한, 때로는 신성한 원전을 왜곡한다.
전통적으로 패러디에서 골계적인(comic) 것, 곧 희극적인 것이 강조된다. 왜냐하면 원전의 희극적 개작이라는 정의가 시사하듯이 희극적인 것은 원전을 왜곡(변용)시키는 작인이자 그 효과이기 때문이다. 모방․변용․골계는 패러디의 3대 요소다. 그러나 30년대 말 고대소설 ꡔ춘향전ꡕ을 패러디한 김영랑의 <春香>은 그 문체와 어조가 진지하고 심각해서 전혀 희극적이지 않다.
내 卞哥보다 殘忍無智하여 春香을 죽였구나
원전의 문맥과는 달리 이몽룡도 변학도와 같이 “잔인한” 존재의 반동인물 계열로 왜곡시키고 원래 문맥의 해피엔딩을 춘향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변형시킨 것은 전혀 희극적이지 않다. 말하자면 패러디의 개념은 이런 규범적인 좁은 의미로 한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패러디 개념은 비평적 관심을 초점화하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에 의하여 재정의되면서 패러디 이론이 더욱 활성화되고 있다.
Ⅱ. 상호텍스트성(참여원리)
패러디가 성립하는 필요충분조건은 패러디 ‘된’ 작품(원전)과 패러디 ‘한’ 작품의 이중구조다. 이것은 패러디스트가 원전의 독자이자 패러디 한 작품의 작자라는 이중적 지위와 상응한다. 그래서 패러디는 (원전에 대한) 모방의 형식이면서 해석의 형식이고 또 비평의 형식이기도 하다. 이 이중구조가 다름 아닌 상호텍스트성이다.
한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와 결합하여 보다 큰 담론(이것은 결코 양적 단위가 아니다)을 이루는 것이 상호텍스트적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작품은 다른 작품에 대한 부정․부활․변형이며, 각각의 작품은 유일한 실체인 동시에 그것의 비유에 해당하는 다른 작품에 대한 해석이라는 관점은3) 벌써 패러디적이며, 이 패러디적 사고는 그대로 상호 텍스트적 사고다.
70년대 오규원의 <등기되지 않는 현실 또는 돈 키호테略傳>은 중세 로만스양식을 희극적으로 패러디화한 세르반테스의 소설 ꡔ돈 키호테ꡕ를 다시 현대시로 패러디한 작품이다. 패러디의 대상이 되는 원전 자체가 패러디한 작품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원전(ꡔ돈 키호테ꡕ)의 언어는 고딕체로 인용하고 시인의 언어는 원전의 스토리를 일종의 핵 단위로, 편집자적 논평 형태로 요약한 데서 드러나도록 두 개의 언어와 두 개의 장르 사이의 경계를 뚜렷이 구분해 놓고 있다. 이상주의자의 전형인 돈 키호테는 원전의 문맥에서는(세르반테스에게는) 우롱의 대상이지만 여기서는 “등기되지 않는 현실”, 곧 환상이 실재라는 테마로 역전된다. 곧 오규원 시인은 원전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한다. 이런 패러디적 전도는 원전을 다르게 모방하는 모든 패러디의 특징이다. 이상주의를 우롱한 세르반테스 당대의 현실주의적 패러다임과 70년대 산업사회의 물신숭배를 비판하는 탈세속주의의 패러다임의 병치적 대조가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장르가 병치된 상호텍스트적 패러디로 형상화된 것이다. 패러디가 해석의 형식이며, 비평의 형식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 것이나 패러디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원칙상 패러디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정전의 작품을 대상으로 삼는다. 잘 알려진 정전이 작품을 패러디의 대상으로 한 점에서 패러디의 어원적인 의미가 시사한 상호모순의 이중성, 곧 패러디스트로서 시인의 원전에 대한 태도인 친밀감과 적대감, 달리 말하면 권위와 경멸(위반)의 이중성을 이들 패러디시에서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잘 알려진 정전의 작품만 패러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런 노골적인 패러디시들과는 달리 패러디 장치가 노출되지 않고 함축되어 있는 경우 패러디의 효과와 의미가 발생하는 두 문맥, 곧 원전과 이 원전을 왜곡한 패러디시의 두 문맥 사이의 차이를 독자가 발견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고인이 시를 지음에 시구의 출처가 없는 것이 없었다”4)는 고전시학의 용사론은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과 더불어 말할 수 없다”5)는 공자의 말처럼 작시법인 동시에 독시법이다. 원전에 대한 독자의 지식은 패러디시를 올바로 감상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이 원전의 외연은 패러디 대상의 주종인 작품과 언어(문체) 뿐만 아니라 특정의 인물(허구적이든 실제적이든), 사물, 관습, 성문화된 형식, 학파, 수법, 다른 문학장르, 다른 예술장르, 대중문화 그리고 정치적 담론, 광고, 신문기사 등 비문학적 담론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1. 양쪽 모서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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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극좌와 극우의
양쪽 모서리를
함께 꾸욱 누른다
2. 따르는 곳
⇓
극좌와 극우의 흰
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
3. 빙그레
-나는 지금 빙그레 우유
200㎖ 패키지를 들고 있다
빙그레 속으로 오월의 라일락이
서툴게 떨어진다
4. ⇒
5. ⇒를 따라
한 모서리를 돌면
빙그레-가 없다
다른 세계이다
6. ⇑ 따르는 곳을 따르지 않고
거부하고
한 모서리를 돈다
빙그레-가 보인다.
--오규원, <빙그레우유 200㎖ 패키지>
여기서 원전은 정전의 문학작품이 아니라 신문, TV, 라디오의 대중전달매체에서 매일 보고 듣게 되는 상품광고라는 비문학적 담론이다. 말하자면 이 패러디시는 시와 상품광고가 결합된 상호텍스트다. 광고시로 기술되는 이 패러디시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문맥의 옮겨놓기’ 현상이다. 사실 패러디란 문맥의 옮겨놓기다. 이 옮겨놓기가 의미의 변용을 가져오는 전략이다. 곧 원래 상품광고의 문맥에서는 단순한 상품 사용법(또는 함축적으로 상업주의 소비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지만 시적 문맥에서는 좌우 이분법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의 정치적 의미로 변용되고 있다. 이 새로운 시형식을 시인 자신은 ‘인용묘사’라는 용어로 기술한다.
오규원의 광고시가 광고의 담론과 시의 만남이라면 유하의 다음 시는 대중예술과 시의 융합이다.
중원제일미를 뽑는 미인대회에서 중원땅이 떠들썩하다
서시 같은 얼굴 수밀도 같은 젖가슴 팽팽한 둔부의
여인만이 대우 받는 중원무림
무공이 고강한 고수들만 사랑하는
강호의 여인들
난 어제 한 아리따운 남자에게 닭잡을 힘도 없는
시인묵객이란 이유로 퇴짜의 장풍을 맞고
울컥 선혈을 한모금 토해냈다.
-유하, <중원무림 태평천하> 중에서
이 시인의 경우 시의 소재는 현실이라기보다 만화, 무협소설, 포르노 영화 등 대중예술의 작품세계다. 곧 대중예술의 작품세계를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우리에게 생소한 무협소설의 용어들과 어조를 채용하고 있는 점이 전경화되어 있다. 이 새로운 상호텍스트성에 의해 시인은 억압체제하에서의, 퇴폐적인 삶 속에 위장된 거짓 평화를 효과적으로 풍자한다.
오규원의 광고시나 대중예술을 소재로 한 유하의 시는 현대시의 새로운 유형이며, 특히 유하의 패러디시는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선마저 붕괴되는 조짐을 내비치고 있다. 패러디에 의한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과 경계선의 붕괴는 현대시의 매우 의미심장한 문제다.
패러디는 과거의 것, 기성품들을 대상으로 한 점에서 사실 과거지향의 보수주의 혐의가 짙다. 또한 원전에 의존하는 만큼 패러디는 독창적이지 못하고 ‘기생적’인 존재라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 인식이다. 여기서 패러디에 관한 한, 패러디의 부각은 문학적 고갈이나 퇴폐의 징후냐 그렇지 않으면 쇄신의 징후냐? 그리고 패러디란 보수주의 산물이냐 또는 진보주의 산물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당연히 제기할 수 있다. 이런 질문들은 바로 이데올로기의 문제다.
Ⅲ. 탈중심주의(다원주의)
패러디의 대상인 원전이 과거 정전의 작품이나 문학장르로부터 모든 문화적 산물로까지 그 외연이 확대됨으로써 패러디는 단순히 문학의 한 형식이 아니라 전체 문화의 현상을 지배하는 형식이 되고, 여기서 패러디의 재정의와 재평가가 필연적으로 가능해진다. 전체 문화의 일부로서, 또는 전체 문화의 관련 속에서 문학에 접근하는 문화비평의 관점은 벌써 상호텍스트적이다. 바꾸어 말하면 패러디는 문학을 ‘불가피하게’ 미적 문맥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여러 문맥에 위치시킨다.
낭만주의가 패러디를 ‘기생물’로 거부하는 것은 예술을 개인의 소유물로 보는 자본주의 윤리관의 성장을 반영한 것이라 했을 때,6) 이것은 마르크스적인 관점을 대변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패러디는 독창성․개성을 존중하는 인문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이것은 패러디가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소외된 변두리 인간의 ‘탈중심’적 양식이라는 재정의와 재평가에서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요컨대 패러디의 이데올로기는 탈중심주의다. 절대적 진리, 절대적인 선 등의 중심이 없으므로 변두리도 없다. 그 대신 이 탈중심주의 속에는 상대주의, 차이 이데올로기, 다원주의 등 여러 유사개념들이 내포되어 있다.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하여 당신의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 곁에서 당신이 멀어지시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붙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봐 안절부절입니다 ···(중략)··· 나는 당신이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성복, <앞날>
이 작품이 만해시 <님의 침묵>을 패러디한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경어체의 엄숙하고 진지한 어조가 만해시와 닮았고 이별이라는 전통적 제재를 다룬, 그래서 연가풍이라는 점에서 만해시와 유사하다. 원전인 만해시를 희극적으로 개작한 것도 아니고 풍자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상호텍스트는 왜 패러디인가. 만나면 반드시 이별하고 이별하면 다시 만난다는 불교적 사유가, 궁극적으로는 만남과 헤어짐, 動과 靜, 色과 空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禪的 사유를, 함께 있으면 나로 인해 당신이 불행해지고 헤어지면 내가 불행해진다는, 양자택일이 불가능한 부조리의 세계관, 존재론적 모순으로 전도시킨 데서 패러디를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만해시의 사상을 패러딕하게 전도시킨 것이다. 이것이 만해시와 이 패러디시의 본질적 ‘차이’다.
같은 원전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다음 작품은 패러디의 탈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보다 뚜렷이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난다.
우리들은 약속 없는 세대다 하므로, 만났다 헤어질 때 이별의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헤어질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거리를 쏘대다가 다시 보게 될텐데, 웬 약속이 필요하담!>
-그러니까 우리는, 100퍼센트, 우연에, 바쳐진, 세대다.
- 장정일, <약속 없는 시대> 중에서
이성복의 <앞날>과 같이 같은 원전을 대상으로 한, 같은 산문시임에도 불구하고 우선 원전을 희극적으로 개작한 점에서 대조된다. 원전과 이 패러디시 사이의 세계관의 차이는 ‘약속 있는 세대’와 ‘약속 없는 세대’의 차이로 표상 된다. 만해시에서 만남은 필연적이고 목적적이며 이별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신념이었다. 그러나 <약속 없는 세대>에서 만남은 처음부터 우연적이고 반목적론적이다. 만해시에서 만남은 절대적 의미(이 절대적 의미는 ‘님’에게도 부여되어 있다)가 부여되어 있지만 이 패러디시에서는 세계관 자체가 탈중심주의고, 여기서 원전을 희극적으로 개작하는 패러디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놓칠 수 없는 것은 이 패러디시가 만해시와 달리 세속주의를 환기하는 일상회화체까지 동원하면서 그 어조가 이론적이고 선언적인 점, 곧 산문적인 점이다. 시와 비문학적 담론과의 혼합, 그러니까 장르혼합의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르혼합 또는 장르해체는 상호텍스트의 한 전형이며, 다원적이고 집단적인 글쓰기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런 텍스트의 복수화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탈중심주의의 수단이다. 이윤택의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15>, 김수경의 <펑크 펑크 펑크>, 장정일의 <늙은 창녀> 등은 희곡형식을 채용한 장르패러디의 사례들이다. 시사사진과 그림이 텍스트의 구성요소가 된 이승하의 <폭력에 관하여> 일련의 시들도 장르혼합의 한 변형이다. 이 장르혼합의 다원적 글쓰기가 시를 사회적,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미적 등 다원적 문맥 속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중심의 해체가 장르들 사이의 경계선을, 문학과 다른 예술 사이의 경계선을, 문학과 비문학적 담론(이론, 역사 등) 사이의 경계선을 그리고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사이의 경계선을 붕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탈중심주의는 총체적 해체작업이다.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 장르혼합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는 점이다.
원전을 패러디하는 자체가 다원적 글쓰기이며, 텍스트의 복수화다. 그러나 패러디스트는 두 가지 방향에서 역시 도전을 받는다. 같은 원전에 대한 다른 패러디스트의 도전이다. 어떤 경우든 원전은 동적인 존재로 지속된다. 원전이든 원전의 패러디든 모두 상대적 존재들이다. 이런 점에서 패러디는 분명히 미래로 열려진 가능성 그 자체다. 패러디가 과연 과거 지향적인가 또는 문학적 고갈의 징후인가. 여기서 패러디의 탈중심주의 속에서 상호모순 또는 이중성의 원리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시학을 패러디로 규정한 허천(L. Hutcheon)은 패러디를 과거에 대한 “비평적 거리를 가진 반복”7)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어는 물론 ‘비평적 거리’와 ‘반복’이다. 앞에서 진술한 것처럼 패러디의 어원적 의미에 의하여 원전에 대한 패러디스트의 친밀감과 적대감, 닮음과 차이의 양가적 태도가 패러디의 본질이며, 이런 상호모순의 이중적 세계관을 거점으로 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문화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패러디를 그 핵심시학으로 정립한 배경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형식적’으로 패러딕하다고 했을 때8) 이것은 패러디의 양가성을 가리킨 것이다. 과거(전통, 원전)를 소중히 간직하면서도 과거에 의심을 품으며 과거의 권위를 정립하면서도 이를 위반하는 전략이 패러디라는 것이다. 따라서 패러디는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다. 사실 패러디스트는 모방할 만한 대상, 공격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겨냥한다. 양가적 태도는 과거를 그대로 보존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변용시킨다. 패러디의 상호텍스트성은 과거를 폐기하는 욕망이 아니라 당대 세계에 적절한 창조로 과거를 개변하려는 욕망을 함축한다. 그래서 심지어 패러디와 독창성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이 없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9)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동양적 전통주의는 새로운 것은 낡은 것의 승인을 받을 때 비로소 충격을 줄 수 있는 사실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차이는 강조점을 溫故 쪽에 두느냐 知新 쪽에 두느냐에 있지 패러디가 전적으로 과거지향적인 것도 전적으로 미래지향적인 것도 아니다.
패러디의 이런 재정의와 재평가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 패러디는 한 원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여러 원전들을 끌어오기도 한다. 여기서 혼성모방 또는 중성모방의 의미를 가진 패스티쉬(pastiche)를 검토해야만 한다.
Ⅳ. 패스티쉬
패스티쉬 역시 모방적 기교의 일종이다. 마르크시스 비평가인 제임슨(Frederic Jameson)은 허천과는 대조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시학을 패스티쉬로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패스티쉬는 두 가지 상황에서 발생된다.10) 첫째 새로운 세계와 스타일이 모두 소진되어 더 이상 독창적인 것, 스타일상의 개혁이 불가능해졌다는 고갈의식이다. 둘째로 가정법을 구사해서 언어적 규범(패러디의 대상)이 상실되고 언어의 다양성만 남게 된 상황이다. 규범이 없으므로 어떤 언어의 독특성이 독특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패러디가 불가능하고 풍자적 의도가 없는 죽은 언어로서 패스티쉬가 탄생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을 새로운 것의 실패, 과거에의 구속, 궁극적으로 미학의 실패라고 못박으며 매우 비판적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제임슨이 비판한 것은 고급예술이 아니라 그가 관찰한 것처럼 향수영화(그가 명명한)와 같은 대중예술이라는 점이다. 사실 영화나 대중음악, 그리고 TV 연속극 등 대중예술에서 흔히 표절시비가 일어나고 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클래식 음악 한 소절이 상업광고의 배경음악으로 발췌되기도 한다.
풍자적 의도가 없다는 점에서 패스티쉬는 중성모방이다. 동시에 여러 원전들을 발췌하여 조립한다는 점에서 패스티쉬는 혼성모방이다. 모방기교로서 패러디가 원전과 ‘다르게’ 모방하는 것이라면 패스티쉬는 원전과 ‘유사하게’ 모방하는 것이다. 이런 패스티쉬의 기교가 한국 현대시에서는 새로운 기법으로 채용되고 있으며, 현대시의 한 가능성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현대시가 제임슨적인 패스티쉬를 역으로 수용한 셈이다.
내 누님같이 생긴 꽃아 너는 어디로 훨훨 나돌아 다니다가 지금 되돌아 와서 수줍게 수줍게 웃고 있느냐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꽃아 순아 내 고등학교 시절 널 읽고 천만번을 미쳐 밤낮 없이 널 외우고 불렀거늘 그래 지금도 피 잘 돌아가고 있느냐 잉잉거리느냐 새삼 보아하니 이젠 아조 늙어 있다만 그래도 내기억속엔 깨물고 싶은 숫처녀로 남아있는 서정주의 순아 나는 잘 있다 오공과 육공 사이에서 민주와 비민주, 보통과 비보통 사이에서 잘도 빠져 나가고 있단다 그럼 또 만나자.
- 박상배, <戱詩․3>
서간문 형식을 채용한 이 작품은 서정주의 <부활>, <국화 옆에서>, <사소 두 번째의 편지 단편> 등 여러 작품에서 이미지들을 발췌하여 조립한 혼성모방의 시다. 그러나 이 혼성모방은 희극적이고 희극적인 것만큼 순수자아에서 세속적 자아로 변해 가는 우리 삶의 보편적 현상을 풍자하고 있다. 이런 혼성모방을 시인은 ‘표절의 미학’이라고 기술한다.11) 문병란의 <가난>과 박제천의 <헌시>는 각기 의도의 차이에서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는 혼성모방의 시들이다.
그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전 우주가 동원된다고 노래하는 동안
이 땅의 어느 그늘진 구석에
한 술 밥을 구하는 주린 입술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결코 가난은 한낱 남루가 아니다
목숨이 농울쳐 휘여드는 오후의 때
물끄러미 청산이나 바라보는 풍류가 아니다
가난은 적, 우리를 삼켜버리고
우리의 천성까지 먹어버리는 독충
옷이 아니라 살갗까지 썩혀버리는 독소
우리 인간의 적이다 물리쳐야 할 악마다
쪼르륵 소리가 나는 뱃속에다
덧없이 회충을 기르는 청빈낙도
도연명의 술잔을 빌어다
이백의 술주정을 흉내내며
괜찮다! 괜찮다! 그대 능청 떨지 말라
가난을 한 편의 시와 바꾸어
한 그릇 밥과 된장국을 마시려는
저 주린 입을 모독하지 말라
오 위선의 시인이여, 민중을 잠재우는
자장가의 시인이여.
역시 서정주의 <無等을 보며>, <국화 옆에서>, <내리는 눈발 속에서> 등의 여러 구절들을 발췌․조립한 문병란의 이 <가난>은 한 끼 밥이 절실한 가난한 민중의 삶과 유리된 서정주의 시세계와 그의 ‘구부러짐’의 태도를 준엄하게 꾸짖는 비판시다. 따라서 문병란 시인의 어조는 여간 신랄하지 않다. 그러나 초기작 <自畵像>을 비롯하여 서정주의 시구들을 그의 개인시사에 따라 발췌․배열한 박제천의 <헌시>는 서정주의 팔순을 기리는 시적 모티브와 호응해서 다음과 같이 철저하게 서정적인 송가풍이다.
골짜기가 깊고, 메아리 치는 대로
되돌려 주는 시의 산을
우리 마음에 이루어 놓는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자연의 화엄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지고
한 채의 소슬한 종교와 같은 산
그 영산의 이름을
우리는 미당 서정주라고 부른다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 시제 1호를 패러디한 함민복의 <광고의 나라>는 상품광고의 언어들을 발췌하여 배열한 혼성모방의 기법까지 구사하고 있다.
제1의 더톰보이가 거리를 질주하오
천만번을 변해도 나는 나
제2의 아모레 마몽드가 거리를 질주하오
나의 삶은 나의 것
···(중략)···
제13의 피어리스 오베론이 거리를 질주하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원전의 13인의 ‘아해’를 상품명으로 바꾼 이 패러디시는 상품광고의 시화라기보다 시를 상품광고용으로 변용시킨 것 같은 아이러닉한 전도를 보여 준다. 시인이 전통시와는 달리 화자의 역할을 하지 않는 대신 시세계에 대하여 판단을 유보하는 편집자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점도 놓칠 수 없는 구조적 특징이다.
패러디와 패스티쉬는 ‘문학의 사유화’를 부정하는 관점의 소산이다. 그러나 시인이 다른 시인의 작품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과거 작품의 시구들을 발췌하는 것은 혼성모방의 특이한 변형이라 할 만하다. 김춘수의 <처용단장 4부․8>은 이미 발표한 <반가운 손님>을 비롯한 여러 작품의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오규원의 연작시 <한잎의 女子> 3편은 모두가 발상법이나 문체면에서 자신의 초기시 <한잎의 女子>의 모방이다. 특히 <한잎의 女子․1>은 <한잎의 女子>의 두 구절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과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이 서로 배열순서를 바꾼 것 이외는 전문이 똑같다. 뿐만 아니라 이 3편 모두는 자신의 <現象實驗>의 세 구절을 발췌하여 각기 부제목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연작시는 자신의 과거 작품들을 혼성모방한 셈이다. 자신의 작품들을 혼성모방한 근거는 의도의 차이에 있고 이 의도의 차이도 물론 주제의 차이에 등가된다. 이 연작 3편은 초기 시처럼 표면상 연가풍을 그대로 띠고 있지만 언어에 대한 시인의 인식과 태도를 진술하고자 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언어가 시인의 체험을 표현하는 수단이라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고 시인의 체험이 언어를 형상화하는 수단이라는 전도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이 연작시는 체험을 진술한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의도상으로 언어에 대한 시인의 인식과 태도를, 그 체험을 매개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박상배의 <戱詩․2>는 자신의 <안 팎․6>의 ‘부산’을 ‘안산’으로 바꾸고 이런 지역변경의 필연적 결과로 넷째 연의 이미지들을 바꾼 것 외에는 <안 팎․6>의 재탕이다. 김춘수의 경우 혼성모방은 새로운 문맥에 기여하는 삽입 형식이지만 오규원과 박상배의 경우는 마치 과거 작품의 개작처럼 혼성모방이 구조적이다.
고인의 시에 나타난 뜻을 자신의 말로 묘사하는 ‘환골(換骨)’과 고인의 뜻을 본보기로 고인의 시구를 개작하는 ‘탈태(奪胎)’ 그리고 고인의 뜻이나 말을 그대로 따르는 ‘도습(蹈襲)’ 등 모방기교들은 표절의 우려성이 잠재되어 우리의 고전시학이 경계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시 말하면 중성모방 또는 혼성모방의 패스티쉬 기법은 표절의 혐의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패스티쉬는 현대시의 새로운 기법으로 채용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영화들의 장면들을 발췌․조립한 향수영화에서 패스티쉬 기법을 발견한 제임슨은 이것이 결국 삶의 리얼리티와 무관한 “예술 그 자체에 관한 것”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패러디(그리고 패스티쉬)의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로서 ‘자기반영성’(self-reflextvity)을 시사한다. 패러디란 본질적으로 상호텍스트적이면서 자기반영적이다.
Ⅴ. 자기반영성과 메타詩
문학은 삶의 반영이다라는 평범한 명제로부터 출발해 보자. 그렇다면 원전의 풍자적 모방인 패러디작품은 어떻게 되는가. 패러디작품은 삶의 반영이 아니라 삶의 반영인 원전을 반영한 것, 곧 ‘반영의 반영’인 셈이 된다. 예컨대 시에 대한 시쓰기, 소설에 대한 소설쓰기, 희곡에 대한 희곡쓰기가 다름 아닌 패러디의 자기반영성이다. 이것을 메타픽션(meta-fiction) 또는 메타시(meta-poetry)라 부른다.12) 이 메타시는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매우 현대적이고 문제적인 시유형이다.
언어는 대상을 지시한다. 이 참조기능의 언어를 대상언어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말은 이 대상언어다. 그러나 참조대상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를 반성하는 언어를 메타언어라 부른다. 메타시란 이런 메타기능이 우세한 시다.
자기반영성으로서의 패러디시, 곧 메타시는 그러므로 처음부터 자의식적이며 자기비판적이다. 여기서 시인은 ‘비평가로서의 시인’이다. 많은 시인들은 자기들의 시 속에서 시와 시인에 관해서 진술한다. 따라서 시론시와 시인론시는 메타시의 대표적 하위유형들이다.
그날 밤에 한소나기 하였으니 필시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보니까 변괴로다, 간데온데 없어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갔을까. 나는 참 이런 처량한 생각에 아래와 같은 作文을 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 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詩는 그만 찢어버리고 싶더라.
- 이상, <이런 詩> 중에서
돌의 사라짐을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에 빗댄 발상법을 제외하고는 30년대 이상의 <이런 詩>는 사실상 산문이다. 중요한 것은 떠나는 님을 원망하지 않고 “내내 어여쁘소서”처럼 오히려 행복이나 행운을 비는, 전통적 이별가와 같은 시작품을 쓰고 싶지 않다는 시관이 표명된 점이고 무엇보다 시쓰기 과정을 서술한 메타시라는 점이다.
오규원의 <안락의자와 시>는 한 의미의 구상이 후속되는 다른 구상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지워져가는 시작과정을 서술한 메타시다. 이 메타시는 다음과 같이 귀결됨으로써 시인이 시 속의 일부인 동시에 현실의 일부로 분열되는 이중성의 전략으로 패러디의 자기반영성을 특이하게 보인다.
아니 나는 지금 시를 쓰고 있지 않다.
이런 ‘자기비판’, 자기부정은 다분히 해체주의적이다.
박상배의 시론시 <풀잎頌․8>은 보다 비평적이다.
딱 보구서 시가 되어 있으면 바로 그게 시다 나머지 이러쿵저러쿵은 깡그리 사족이다 군더더기요 설명의 김빠진 맥주다 그건 시밖으로의 똥․오줌누기일 뿐 시 안의 걸레질이 결코 아니다.
제목과는 전연 어울리지 않게 이 시론시는 전혀 서정적이지 않다. 그 대신 거친 일상회화체와 비속어체를 터놓고 구사해서 독자의 시에 대한 선입관과 기대감을 위반하고 거부한다. 이 시론시는 시와 비평을 겸한 것인데, 여기서 비평은 오규원과 달리 시 비평가의 비평을 겨냥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 시론시는 시비평의 패러디이기도 하다.
서사문학에서 사건은 서술자를 매개로 하여 독자에게 전달된다. 서사문학은 ‘간접성’의 장르다. 그러나 시에서 시인은 직접 자신의 경험,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진술한다. 그래서 시는 ‘직접성’의 장르다. 그러나 이승훈의 시인론시는 자전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시 속의 인물로 설정하여 자신을 타자화한다. 그래서 그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3인칭시가 탄생한다.
그는 하루 종일 담배를 입게 물고 일할 때도 입에
물고 제자를 만날 때도 입에 물고 대머리 여가수를
만날 때도 입에 물고 학장을 만날 때도 입에 물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제발 담배를 좀 줄여요 라고 했지만
그는 의지가 약하다 그는 꿈 속에서도 담배를 입에
물고 걷는다 그가 잠들면 비 오는 저녁 그의 담배가
꿈을 꾸고 그는 담배의 꿈 속에서도 담배를
입에 물고 방에 처박혀 있다 그를 불쌍하다고 하지는
맙시다 담배 때문에 어느날 그는 집에서 쫓겨
나겠지만 그는 담배를 피우려고 이 세상에 온
모양이다 그는 하루 종일 담배를 입에 물고 거울 앞에서
얼음을 생각하고 장미를 생각하고 무덤을 생각한다.
그의 얼굴은 온통 담배다 담배가 시를 쓰고 논문을 쓴다
손톱을 깎고 구름을 본다 아니면 하루 종일 혼자 술을
마신다 하루 종일 혼자 화투를 치고 트럼프를 치고
포커를 하고 마작을 하고 하루에도 마흔 번이나
술을 마시고 그는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가 아니고
하루 종일 작은 방에 처박혀 고독을 즐기신다.
말하자면 이승훈 씨는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운다
물론 이건 시다 제발 현실로 착각하지 마시길.
- <담배를 피우는 이승훈 씨>
그의 3인칭시는 자신의 일상적 삶이나 시창작의 모습을 진술한 것이다. 전통시의 관습대로라면 단연 1인칭 화자를 시적 자아로 내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승훈은 1인칭 화자 대신 자신의 이름(고유명사)이나 3인칭 ‘그’를 사용하여 언술행위의 주체와 언술내용의 주체를 확연히 구분한다. 1인칭은 화자이지만 3인칭은 어디까지나 소재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낭만주의자들처럼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의 문제로 대치된다. 이승훈의 시인론시로서 메타시는 자아탐구 양식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3인칭화함으로써 독특한 시인론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오규원의 <안락의자와 시>처럼 시인은 작품세계와 현실세계를 넘나드는 분열을 보인다.
시인론시는 반드시 자신만을 환기하지 않는다. 때로는 다른 시인의 환기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시인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시인론인 점이다. 길이의 균형이 행갈이의 기준일 뿐 미완결시행으로 한 행에 불평등하게 의미를 많이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꿈의 개입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이 붕괴되기도 하는 것이 이 메타시의 형식적 특징이다.
상호텍스트성과 자기반영성의 원리로서 패러디는 문학사처럼 개별작품들을 중립적으로 고립시키지 않고 상호관련 속에서 문학을 관찰하도록 요청한다. 패러디는 단순한 과거 보존이 아니라 과거를 끊임없이 새롭게 변용해 가는 미래지향적 열린 구조의 시학이기도 하다. 더욱이 자기반영성의 메타시는 분명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전위성과 실험성의 의의까지 지니고 있다. 문학의 독창성과 개성을 훼손하고 표절(심지어 자기표절까지)한 혐의는 완전히 불식되지는 않지만 패러디는 글쓰기의 조건과 그 기반이 무엇인가, 도대체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사회역사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문제에 정면돌파하는 글쓰기의 형식이다. 더구나 문학의 위기, 고급예술의 위기를 가져오는 배경으로 지목되는 영상매체시대에 패러디가 시사하는 문제는 다양하고 심각하다.
Ⅵ. 결 론
패러디는 포스트모더니즘 시학의 중요한 방법론이다. 그래서 그런지 시에서의 패러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시론서들은 많지 않다. 본고는 金埈五의 ꡔ詩論ꡕ(제4판)을 주요 텍스트로 요약하면서 홍문표의 ꡔ시창작 강의ꡕ와 이승훈의 ꡔ모더니즘시론ꡕ, 허치언의 ꡔ패러디 이론ꡕ 등을 참고로 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 시학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해체주의라고 한다면 패러디를 통한 기존 문화의 해체는 상당히 성공적인 편이다. 그리고 요즘 사회에서는 문화의 전 분야에 걸쳐 해체적인 사고방식이 팽배해있는 듯한데, 단순한 해체냐 아니면 선택적 해체를 통한 새로운 의미의 창출이냐에 따라 그 평가도 달라져야 할 줄 안다. 그 미학적인 효과가 완전히 달라진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홍문표, ꡔ시창작 강의ꡕ, 陽文閣, 1991.
린다 허치언 지음, 김상구․윤여복 옮김, ꡔ패러디 이론ꡕ, 文藝出版社, 1992.
이승훈, ꡔ모더니즘시론ꡕ, 文藝出版社, 1995.
金埈五, ꡔ詩論ꡕ(제4판), 三知院을, 2000(제1판은 1992).
주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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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린다 허치언 지음, 김상구․윤여복 옮김, ꡔ패러디 이론ꡕ, 文藝出版社, 1992, 55쪽에서 재인용.
2) 이밖에 패러디는 희작(burlesque), 트래비스티(travesty), 표절, 인용, 풍자, 아이러니와 혈연관계를 맺고 있다. 린다 허치언 저, 김상구․윤여복 공역, ꡔ패러디 이론ꡕ(문예출판사, 1992) 43쪽 참조.
3) Octavio Paz, Children of Mire(윤호병 역, 현대미학사, 1995), p.88.
4) 徐居正, ꡔ東人詩話ꡕ 下, “古人作詩 無一句無來處”.
5) 孔子, ꡔ論語ꡕ 季示篇 十三, “不學詩 無以言”.
6) Hutcheon, 위의 책, p.12.
7) Linda Hutcheon, A Poetics of Postmodernism(Routledge, 1988), p.26.
8) Hutcheon, 위의 책, p.23.
9) Hannoosh, 앞의 책, Parody and Decadence, pp. 7~8.
10) Frederic Jameson, Postmodernism and Consumer Society, Hall Foster 편, The Anti-Aesthetics (Bay Press, 1983), pp.115~116.
11) 박상배, <표절의 미학>(ꡔ현대시사상ꡕ 1991년 가을호).
12) René Wellek, The Poet as Critics, The Critics as Poets, The Poet-Critics, Discrimination(Yale University Press, 1971), pp. 256~261. 그리고 Patrica Waugh, Metafiction(김상구 역, 열음사, 198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