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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24 / 근심할지 믿을지 (요14:1-6)
오늘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3년 간의 공생애를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의 일부입니다.
내용은 주로 주님과의 관계, 장차 다가올 일들, 성령 강림을 비롯한 영적 세계에 관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귀한 교훈을 전하시는 첫마디가 무언가 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이셨습니다.
1절을 보세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근심하다’는 말의 원어는 ‘타랏소’인데 ‘뒤흔들다, 어지럽게 하다’는 뜻이지만, 요한복음 5:7절에서 베데스다 연못 가에 모인 병자들이 천사가 물을 동하기를 기다린다고 했을 때 ‘물이 동한다’는 말의 원어 역시 ‘타랏소’입니다. 즉 원어 상으로는 본문의 ‘마음에 근심하다’와 5:7절의 ‘물이 출렁이다’가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번역된 말만 놓고 보면 전혀 다른 의미인데 원어에서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이유가 뭘까요?
원인 관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잔잔하던 물이 출렁이려면 어떤 일이 있어야 할까요?
호수나 강이 됐든 아님 최소한 그릇에 담긴 물일지라도 물이 저절로 출렁이지는 않습니다. 돌멩이가 던져진다거나 그릇을 들고 흔드는 것처럼 뭔가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있어야 물이 출렁이게 됩니다.
‘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졌다.’
이게 근심하는 것과 물이 출렁이는 것이 가지는 공통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둘이 같은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근심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충격 때문에 생겨납니다.
평소에 여러분은 근심이 무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사전을 보면 근심은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해결되면 근심하지 않게 된다는 말인데, 만약에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건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해결할 수 없으니까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고, 그런 문제들이 있기에 사람들은 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근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사실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과연 인생에서 문제를 한 번도 맞닥뜨리지 않고 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세상 어느 누가 인생에서 맞닥뜨린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원치 않는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는 게 인생이고, 그 일들을 해결할 능력이나 힘이 없는 게 현실이다 보니 사람들은 근심하지 않으려야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겁니다.
말은 쉽습니다. ‘근심하지 말라.’ 그래서 ‘근심하지 말자’ 하면 근심이 안 되던가요?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현실적으로는 누구에게도 가능하지 않은 비현실적인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현실을 모르실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걸까요?
1절을 다시 보세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보면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라로만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 말씀하시고는 곧이어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도 함께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은 근심하지 않으려면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믿으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근심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기에 누구도 근심이 없게 하거나 근심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아무리 근심하지 않으려 해도 근심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근심하지 않을 방법을 말씀하시면서 외부로부터 충격이 온다면 내부로부터 그걸 막아 낼 방패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그 근심을 막아 낼 방패가 믿음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근심하지 않는 것’과 ‘믿는 것’이 같은 거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근심하는 것’의 반대는 ‘믿는 것’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린 늘 인생의 문제 앞에서 ‘근심할 거냐’와 ‘믿을 거냐’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근심하지 않으려 한다 해서 근심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으면 근심이 없어질까요?
아닙니다. 믿어도 근심은 계속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심하는 거나 믿는 거나 뭔 차이가 있냐 하실 겁니다.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근심하게 되면 노상 근심만 있지만, 우리가 믿게 되면 근심의 현장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하는 차이가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4장을 보게 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다 큰 광풍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사색이 되어 고물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당시 상황을 정리해 보면 우선 풍랑이라고 하는 외부의 충격이 제자들이 탄 배를 덮쳤습니다.
‘외부 충격이 닥쳤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뭐라 한다고요?
‘근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풍랑으로 인해 죽게 될까 봐.
그런데 근심하게 될 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었나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풍랑이라는 현실은 이미 제자들에게 닥쳤습니다. 근심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그 현장엔 예수님도 계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마음엔 죽게 됐다는 근심보다는 예수님을 믿자는 믿음이 발동했어야 할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겐 죽게 됐다는 두려움과 근심만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물으셨다는 겁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인생에도 수많은 외부 충격들이 있어 왔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풍파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럴 때 우린 선택해야만 합니다. ‘무서워하는 자’가 될 건지, ‘믿는 자’가 될 건지.
인생을 믿는 자로 살기 위해서라면 이제부터는 ‘근심하지 말자’는 생각일랑은 아예 잊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근심하지 않겠다고 해서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제부터는 그 어떤 외부 충격이 있다 해도 ‘하나님을 믿자.’ 또는 ‘예수님을 믿자.’는 생각만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과 근심은 늘 같이 묶여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해서 인생의 희로애락에서 ‘노와 애’는 없어지고 늘 ‘희와 락’만 있게 되는 건 아닙니다. 희로애락은 일상의 다반사입니다. 다만 그것들을 이용해서 사탄은 인생에 ‘충격’을 안겨 주지만, 예수님은 그것들 속에서 인생에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렇기에 인생의 외부적인 충격으로 인해 우리 마음이 출렁이게 되는 게 근심이라면 믿음은 인생의 외부적인 충격으로 인해 우리에게 은혜가 있게 합니다. 따라서 근심할 일이 없게 되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근심할 일들 속에서 은혜가 있게 하는 것이 믿음인 겁니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근심이 그렇습니다. 한 번 근심하게 되면 근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그러나 믿음 역시 그러합니다. 한번 믿어 은혜를 받게 되면 믿음의 은혜 역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다시, 앞서 마가복음 4장의 풍랑의 현장으로 가 보세요. 큰 광풍이 일었다고 했습니다. 물결이 배에 부딪혀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배가 가라앉아 죽는 일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 누가 알았겠습니까? 바람이 즉시 잔잔해질지를, 물결이 곧 잔잔해질 것을.
마가복음 4장의 풍랑 예화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내가 모르는 방법이 있다.’입니다.
인생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것이 은혜받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 구하자!’ 이게 믿음이라면, ‘하나님이 해결하신다!’ 이게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 겁니다. 우리 인생에 그 어떤 외부 충격이 닥쳤다 해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그러면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2절에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시면서 말미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부분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아버지 집’을 ‘천국’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3절의 ‘내가 다시 와서’와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는 말씀을 재림과 천년왕국으로 해석합니다.
종말론적인 관점에서는 그런 해석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근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말씀의 핵심은 현실에 있습니다.
봉독하진 않았지만 14장 18절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거처로 데려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오셔서 거처를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지막엔 오셔서 천국으로 데려갈 테니 당장엔 세상 근심 속에서도 잘 참고 견디라는 말씀을 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근심으로 끝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오셔서 함께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18절의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에 주목하세요. 세상적으로 볼 때도 부모가 자식을 고아처럼 버려두었다가 아이가 다 커서야 와서 좋은 집 하나 주는 것이 당장 험난한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고아에게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18절의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한다.”라는 말씀과 2절의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신 말씀은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믿는 자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누굴 위한 집이라고요?
믿는 자를 위한 집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린 인생에서 근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는 방법을 배우고 실행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마태복음 11:28절이 답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예수님께로 가기만 하면 그 어떤 외부의 충격이 있다 해도 우린 인생을 고아와 같이 힘들게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인생의 그 어떤 충격적인 자리에서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아버지의 집에 거할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께만 가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그러니 아버지께로 가자.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이게 오늘 인생의 근심 앞에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의 결단이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탕자가 어려서 아버지 집에서 자랄 때는 설령 외부 충격이 닥쳤다 해도 아버지가 다 막아 주셨더랬습니다. 그러다가 좀 컸다고 자기 뜻대로 살아보겠다며 아버지 집을 떠난 순간부터 그를 향한 외부 충격은 오롯이 그가 감당해야 할 고난이고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고달픈 인생을 견뎌내던 어느 날 탕자에게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전에도 세상의 외부 충격들은 항상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집에서 살 때는 이렇진 않았는데...?
자기 인생에서 아버지의 있고 없고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깨달은 순간 탕자는 결단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리고 그런 탕자를 향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우리 인생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순간부터 세상이 주는 외부 충격은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내 몫이 되게 됩니다. 그러면 사는 게 힘들어집니다.
사는 중에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근심은 종류를 바꿔가며 우리를 계속 근심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굳은 의지로 근심을 안 하려고 해서 안 해지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근심이 있게 되면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뿐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나는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들을 하는데, 믿음은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긴 뭘 할 수 있습니까? 머리카락 한 터럭조차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 게 우리네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존감을 잃거나 인생을 주눅 들어 살란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주는 담대함’이 어떤 건지를 분명하게 알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는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주님!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는 ‘항복’입니다. 그래야 그런 ‘항복의 믿음’이 있은 뒤에라야 ‘주님이 해주세요.’라는 ‘믿음의 기도’가 있게 되는 거고 그에 따른 응답도 있게 되는 겁니다.
이제 각자의 삶을 돌아 보세요. 할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이 있고, 안 되는 것들이 무엇무엇입니까?
매 순간마다 예수님을 향해 ‘나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시며, 매 상황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해주세요.’라고 요청하세요.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서 기대하시는 믿음이고, 듣고 싶어 하시는 기도입니다.
이제부턴 우리 모두가 그렇게 믿고 그렇게 기도해서 이후로는 세상의 그 어떤 외부 충격 앞에서도 근심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로 살아 믿음대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만 누리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