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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읽기] 김행숙 '저녁의 감정'을 연주하다
시인은 왜, 하루라는 시간의 사망 지점을 이토록 치열하게 감정이입하며 들여다 보고 있었을까.
찰나에 벌어지는 저녁의 감정은, 낮아지지 않으려는, 주저앉지 않으려는, 소멸하지 않으려는, 그 치열한 거부로 저토록 장렬하게 날마다 소멸해간다는 것.
더뷰스 시의맛 : 저녁은 어떻게 죽는가
가장 낮은 몸을 만드는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개 앞에 엎드려 착하지, 착하지, 하고 울먹이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계급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 일어서려 하는데 피가 부족해서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현기증이 감정처럼 울렁여서 흐느낌이 되는 것이다, 파도는 어떻게 돌아오는가
사람은 사라지고 검은 튜브만 돌아온 모래사장에...점점 흘려쓰는 필기체처럼
몸을 눕히면, 서서히 등이 축축해지는 것이다
눈을 감지 않으면, 공중에서 굉음을 내는 것이 오늘의 첫번째 별인 듯이 짐작되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이제 눈을 감았다고 다독이는 것이다
그리고 2절과 같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저녁의 감정 - 김행숙/ '열린시학' 2014년 봄호.
연주하고 싶은 충동을 부르는 시
이 시는 이미 평단의 주목을 받았고, 많은 공명(共鳴)을 지나온 걸출한 문자풍경이다. 뒤늦게 뭐라고 소감이나 찬사를 추가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른다.
시 읽기는, 노래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끔은 곡을 연주하거나 목청으로 불러내는 연주자나 가수의 역할일 때도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저녁의 감정'은 연주하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시적인 자극들로 가득 찬 시다.
저녁의 감정은 무엇일까. 저녁 그 자체가 지닌 감정인가. 저녁이 인간에게 자아내는 감정인가. 하루 해가 저무는 시간의 특성이 자아내는 감정인가. 그 하루를 살아내는 인간이 루틴으로 반응하는 감정인가.
시인은, 저녁이라는 시간이 빚어온 뉘앙스들을 형상화 혹은 영상화하여 감정적 질감을 부여한다.
1.가장 낮은 몸
"저녁은 가장 낮은 몸을 만드는 것이다"
저녁은 가장 낮은 몸을 만드는 감정이다. 인간에게 몸을 낮추는 것이란 무엇이던가. 겸손, 은닉, 좌절, 비굴, 굴욕, 패배, 죽음 같은 것들의 양상이다.
몸을 한껏 펼치던 때가 있었고, 영원히 펼칠 것 같은 때가 있었지만, 저녁이 되면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린다.
그것이 언제나 예감하고 있던 것보다 빨리 와서, 동의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가장 낮은 몸을 만든다.
저녁. 사실 일출 때와 같은 높이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 앞의 전망이 문제다.
2. 으르릉거리는 개
"으르릉거리는 개 앞에 엎드려 착하지, 착하지, 하고 울먹이는 것이다"
그 개는 착하지도 않고 으르릉거리는 것보다 더 순해질 리도 없다.
하지만 무방비 상태의 스스로를 내보임으써 공격할 가치도 없는 존재이며, 오직 상대의 착함에 의지하여 상황의 치명적 악화를 누그러뜨리려는 그 애걸같은 감정.
저녁은 거기에서 울먹울먹 주저앉고 있다.
3. 가장 낮은 계급
"가장 낮은 계급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 일어서려 하는데 피가 부족해서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맨처음의 '가장 낮은 몸'은 처신(處身)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가장 낮은 계급'은 저 으르렁거리는 개와 나 사이의 서열을 뚜렷이 함으로써 열등이나 패배나 몰락을 인정하는 것이다.
잠깐 그런 비굴을 보인 뒤 일어서려 했는데, 내부에서 다시 갖춰야할 높이의 연료가 이미 다 떨어졌다.
4. 현기증과 흐느낌
"현기증이 감정처럼 울렁여서 흐느낌이 되는 것이다, 파도는 어떻게 돌아오는가"
저 현기증은 앞연의 '피가 부족함'과 '어지러움'을 물고 있는 말이다.
다시 일어날 수 없이 퍼질러 누운 채 마음만 꿈틀거리는 상태는 현기증이란 증세를 감정처럼 키워 흐느낌으로 파상을 만들어낸다.
저녁의 감정은 현기증이며, 그 현기증이 울렁여서 흐느낌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돌아오는 것.
여기서 마치 하늘이 밝아지는 듯 물들이는 노을을 생각하게 된다. 그 파상은 '회광반조(回光返照)'처럼 잠깐 돌아보는 몸서리같은 것일지 모른다.
5. 점점 흘려쓰는 필기체
"사람은 사라지고 검은 튜브만 돌아온 모래사장에...점점 흘려쓰는 필기체처럼"
흐느낌을 이루던 주체(사람)는 사라지고 그를 구명하려던 검은 튜브만 돌아온 모래사장은, 이미 암회색으로 들이찬다.
점점 흘려쓰는 필기체는, 내부에서 교신하고자 하는 것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소멸되는 이미지 같은 것이다. 실낱같은 빛날들 몇이 겨우 어른거리며 점점 빠져나가는 힘으로 알아볼 수 없는 말들로 유언같은 것을 끄적인다.
6. 축축한 등
"몸을 눕히면, 서서히 등이 축축해지는 것이다"
"첫번째 별을 본 마지막 눈시울"
드디어 저녁은 거의 죽었다. 모든 동작을 멈춘 채 나자빠져 등이 축축해지는 기운만을 느낀다.
"눈을 감지 않으면, 공중에서 굉음을 내는 것이 오늘의 첫번째 별인 듯이 짐작되는 것이다"
막 눈을 감기 직전에, 캄캄해지는 하늘에서 내가 사라진 다음에 시작되는 무엇을 본다. 굉음을 내는 건, 빛과 어둠이 뒤바뀌는 난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빈사의 저녁에겐, 저 별 하나가 꿈의 첫 자리이며 이녘에서 사라진 다음의 천국일지도 모르겠다.
"눈을 감으면, 이제 눈을 감았다고 다독이는 것이다"
"그리고 2절과 같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 별빛이 눈시울을 잠글 때, 마침내 그간 보지 못했던 캄캄함을 이고, 이런 것이 눈을 감는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저녘과 이녘 사이, 2절이 있다
하지만 저녁은 '저녘'일 뿐이며 다시 '이녘'으로 돌아오는 2절이 있음을 감지한다. 우린 이걸 내일이라고 말하지만, 저녁은 그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이녘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죽어가는 인간이 그런 것처럼.
저녘이 있어야 이녘이 있으며, 이녘이 있어야 저녘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이 서럽고 놀랍고 끔찍하고 지독한 공포와 고통과 절망은 생의 광휘를 닿는 '출산'의 역(逆)감정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왜, 하루라는 시간의 사망 지점을 이토록 치열하게 감정이입하며 들여다 보고 있었을까.
김행숙 시인.
저녁 그 내부의 소란을 읽어낸 귀
찰나에 벌어지는 저녁의 감정은, 낮아지지 않으려는, 주저앉지 않으려는, 소멸하지 않으려는, 그 치열한 거부로 저토록 장렬하게 날마다 소멸해간다는 것.
저것이 비극이 아니라, 삶의 번성을 정화하고 빛의 소란을 진정시키는 영원의 치차(齒車)의 일부라는 것.
시는 저녁의 감정을 읽어내며 스스로 끝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몸서리를 치며, 영원을 받아내는 단편적 악상들을 연주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 이건 오직 한번 불러낸 1절일 뿐이라는 것.
언어들에서 무엇을 연상하는 것은 객석의 몫이고,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는 무대의 꿈일지도 모른다. 한 바탕의 저녁이 지나가는 시간이 있고, 그 주저앉고 엎드리는 자세가 있다. 눈을 감지 못하던 것이 있고, 눈을 감으며 별을 끄던 것이 있다. 우리에게 저녁이 있었고, 있고, 저녁에 묻어오는 감정들이 저녁처럼 다시 내리기도 할 것이다. 그 둔주곡에 익숙해지기도 하고 틈틈이 '기억'으로 연주되며 잊히기도 할 것이다. (빈섬 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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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의 말들 :
감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험이자 사건이다. '무엇이 어떠하다'에서 우리는 흔히 '어떠하다'를 감정으로 대체한다. 예를 들면 '마음이 슬프다'처럼. 그러나 감정은 주어가 될 수 있다. 아니 주어일 때 감정은 감정이 된다. 그리고 주어인 감정 다음에 그 감정에 대한 긴 서술어가 이어질 때, 감정은 서사가 되고 세계가 되고 우주가 된다. 나는 김행숙 시인의 저녁의 감정을 이렇게 읽었다. 또한 그 감정이 우리 모두의 감정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시인 윤의섭)
'저녁의 감정'은 중의적으로 읽히는데, 바닷가에서 저녁이 되면서 어둠으로 침잠하는 변화를 예민하고도 섬세하게 잡아낸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바다에 침몰하고 다시 별로 떠오르는 죽음과 부활의 신화성을 보여준다는 점이 그렇다. 어둡고 어지럽지만, 나직하고 따뜻한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 (시인 정한용)
"가장 낮은 몸을 만드는 것이다"로 시작되는 서늘한 문장을 "으르렁거리는 개 앞에 엎드려 착하지, 착하지, 하고 읊조리는" 김행숙의 고유한 시적 감각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우 이질적 차원의 감각세계로 우리를 인도했던 2000년대의 젊은 시가 깊은 터널에 들어온 것 같은 이 어두운 시대를 어떻게 자기 언어로 살아갈 것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할 때 대단히 모범적인 사례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문학평론가 함돈균)
"어떤 망각, 어떤 무지는 인간적인 약점이나 허점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윤리적인 구멍, 윤리가 사라진 비인간적인 빈자리인 것입니다."(김행숙 '질문들' 문학동네 2014년 여름) '저녁의 감정'은 이 문장의 여운 안에서 읽는 것이 좋겠다. '저녁'과 '감정'의 조합은 먹먹한 여운을 더 길고 깊게 남긴다. 하루가 붉은 자락을 남기며 사그라질 때, 종일을 견뎌낸 자가 느끼는 감정이란 어떤 것일까. 형언할 수 없도록 시린, 그 마음의 실물이 이 시에 아로새겨져 있다. 돌이켜보면 '저녁'이란 그런 시간이다. 황혼이 한낮의 것들을 밀어내며 별을 옮겨오고, 내일과의 길향 속에서 오늘은 속절없이 무너져간다. 때때로 잊히지만 저녁은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가깝고 빈번한 이별의 시공간이다. 이것을 시에서는 "사람은 사라지고 검은 튜브만 돌아온 모래사장에...점점 흘려쓰는 필기체"와 같다고 되뇌었다. 하루의 저녁이 그러하고 삶의 저녁이 또한 그러하다. 하릴없이 밀려가는 삶과 점점이 스며드는 죽음이 닿을 듯 놓인 곳, 그 소진과 소멸의 기로에 서면 누구라도 "몸을 눕히면, 서서히 등이 축축해지는" 서늘한 운명을 감각해야만 한다....이 시는 울먹임과 현기증과 흐느낌의 순간을 담고 있지만, 물기없이 담담하게 닿아온다. '감정'이라 썼으나 정작 시인은 감정의 단어들을 널브러뜨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것을 어떤 숭고한 형상에 담아낸다. 시의 언어를 빌자면 그것은 "가장 낮은 몸"이다. (문학평론가 전소영)
저녁의 어둠이 대지의 피부에 깃드는, 하강의 욕망과 내상의 고통이 현기증처럼 펼쳐지는, 혼몽한 착종 현상이 유발되는, 야릇한 타나토스의 비감. (시인 김명원)
무대의 말 :
누군가의 슬픔을 생각하며 썼다. '사람은 사라지고 해변으로 돌아온 검은 튜브'의 그 무시무시한 검은 구멍. 그 상실은 무엇으로도 끝내 메울 수 없다. 누구나 결코 이길 수 없는 슬픔에 대해서 힘을 내라고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위로가 되고 싶었지만 그건 가당치 않았다. 어떤 슬픔은 어떻게도 밖으로 내몰 수 없어서 평생 지니고 살 수 밖에 없으니까. 슬픔의 해변에 몸을 눕히고 축축하게 몸이 젖는 시간을 사는 것도 인간의 몸이라면, 그 몸뚱이, 그 몸의 감각만이 다른 슬픔에게 간신히 가닿을 수 있고 섞일 수 있을 것이다. (시인 김행숙)
이번 시집에 실린 몇 편의 시는 시기적으로 세월호 이후에 쓰여졌고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식한 경우도 있었지만, 의식 이전에 이미 그 영향이 깊이 들어와 있다는 걸 시를 쓰면서 알게 되기도 했다.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시인 김행숙)
시쓰기는 모르는 채로 놀랍도록 정확한, 김수영 식으로 말하자면, '정확한 미지'에 불쑥 데려다놓곤 했다. 시가 아니었다면 그만큼 예리해질 순 없었을 것이다. (시인 김행숙)
느낌은 더 풍부하고, 더 섬세하고, 한층 미묘하고 아이러니해서 불연속적인 언어의 성긴 그물에 붙잡히기보다, 결국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기 십상이다. 느낌을 붙잡으려고 하는 언어가 아니라 느낌에 참여하는 언어를 많이 생각했다. 느낌에 '대해서' 시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느낌을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도록' 하고 싶었다. 느낌을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적인 사건으로 만들고 싶었다. (시인 김행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