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마음의 진화/ 고찬근
아인슈타인의 이론 중에는 작은 물질이라도 그것을 없앤다면 큰 에너지로 변한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론은 반대로 큰 에너지가 작은 물질로 변할 수도 있다는 이론입니다. 물질이 변해서 에너지가 되는 것이 원자폭탄이라면 에너지가 변해서 물질이 되는 것이 창조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엄청난 힘으로 눈에 보이는 우주물질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질들은 길고 긴 시간 동안 진화를 계속하여 지금의 동·식물이 되고 인간도 되었습니다. 동·식물과 달리 인간은 기술문명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문자와 음악과 동영상이 허공에 가득 떠다니고, 뇌파만으로
컴퓨터를 작동하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생각하는 대로 실재가 되는 세상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므로 단순히 그런 발전이 행복을 보장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굶어 죽는 사람도 많은데 수백만 마리의 가축을 땅에 묻어야 하는 일도 있고, 인류는 언제든지 스스로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기술문명이 발전하여 우리 몸은 편해졌다지만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완전함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과연 그 완전함은 무엇입니까? 그 완전함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마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긴 세월의 진화에 성공해서 지금은 편리하게 생활하며 다른 동·식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심지어는 자멸할 수 있는 자유까지 지닌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원하시는 완전함에 이르려면 다른 측면의 진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마음의 진화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진화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을 계속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진화를 멈추면 도태되고 죽습니다. 마음의 진화도 어려운 일이고 그것을 멈추면 영혼이 죽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악인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일, 즉 오른뺨을 맞았을 때 다른 뺨마저 대주고, 싫은 사람과 함께 걸어가주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고통이 따릅니다. 자비를 베푼다는 것도 나의 손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과 손해를 통해야만 우리 마음은 진화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완전함을 향해서 진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완전함에 이르는 길이셨습
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과 손해의 멍에를 지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그 길을 먼저 가셨습니다. 하느님은 그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길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완전함에 초대받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있고, 곱게 늙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은 시간이 지나면 늙어가는 그 육체를 통해서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춘 사람이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대로 된 인격….
[마산] 원수가 내 이웃?/전병이 신부
예수님께서는 종종 우리네 삶에 신선한 충격과 경각심을 일깨우는 말씀들을 던지곤 하신다. 예를 들면 잘못 형성된 기존의 사회 질서나 관습, 아무 생각 없이 반복적이고 일상적으로 행해오던 개인의 잘못된 습관이나 윤리적 행동들에 거침없이 독설을 내뱉으시기도 하고, 평범한 인간적 삶으로는 넘기 힘든 도덕률들을 제시하시기도 한다.
“폭력을 포기하고, 보복하지 말 것이며 원수마저도 사랑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오늘 복음 말씀 역시 이런 말씀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런 말씀들을 들을 때면 꽤나 무거운 마음들을 지우기 힘들 때가 많다. 이미 죄의 굴레에 빠져 세속적으로 변해버린 우리들이기에 이 같은 말씀은 완성할 수 없는, 곧 무너져버릴 탑을 쌓아가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울러 이런 말씀들을 들을 때면 세속적인 우리네 삶과는 전혀 다른 말씀으로 인해 깊은 괴리감마저 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경우 우리는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거룩한 존재로 치부해버리고,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삶 자체를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수차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이 말씀들을 살아보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은 일들이라 완성되지 못한 채로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살아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자신의 잣대와 기준을 포기하고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새로운 가치를 제대로 정립하려는 노력을 통해 미약하나마 조금씩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악순환을 끊는 유일한 도구는 바로 하느님의 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속적 악을 하느님의 선으로 이길 수 있다면 원수를 얻어 이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죄로 인해 상처받은 인간 본성,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동화되어버린 우리의 잘못된 습관이나 삶들에 대한 충분한 성찰이 전제된다면 끝까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성령께 부단히 자신을 내어맡겨 지나온 삶들에 대한 충분한 성찰이 가능하다면 부당한 폭력이나 처사를 참을 수 있을 것이고, 쉽진 않겠지만 자신의 감정선을 정리하고, 잘못된 자신의 기준을 바꾸어본다면 ‘원수’ 같은 그 인간이 그리 돈독하지도, 살갑지도 않겠지만 ‘이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인간적 노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은총에 끊임없이 기대어 본다면 치떨리는 원수가 평범한 이웃으로 바뀌어 결국엔 원수마저도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나아가 이런 우리네 노력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 재미있는 상상 한 토막
A : 누가 네 이웃이냐?
B :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인간, 그 사람이 제 이웃입니다.
A : 허∼ㄹ
B : ^_^
[의정부]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서품 성구>/김정일 신부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함께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그 감사를 드림과 동시에 제 나약함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 분은 커지셔야 하고 저는 작아져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제가 체험한, 특별히 유학생활을 하는 중에 느꼈던, 제 자신의 모습 속에서 발견한, <나의 예수님>을 만나게 해 준 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인천]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 김성수 신부 매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는 미사 중에 독서 2개와 복음을 읽고 듣게 됩니다. 처음에 읽는 독서는 대개 구약성경의 내용이고 두 번째 독서는 복음 이외 사도행전이나 바오로 서간 등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을 읽게 됩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 이전에 쓰인 것이고 사도행전이나 바오로 서간이나 요한의 묵시록 등은 예수님 이후에 쓰인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이 당연한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구약, 신약 그리고 바오로 서간이나 사도행전을 쓰인 시간 순으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저는 먼 이국 땅에서, 제 내면의 고독과 철저하게 싸워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외로움을 넘어선 영적인 메마름과 척박함, 제 자신과 만나는 고독과 곤궁은 그야말로 ‘어둔 밤’ 같았습니다. 저는 지쳐했고 힘겨웠습니다. 저를 짓누르는 무게에 눌리고 유혹에 걸려서 수 없이 넘어졌습니다. 저는 더 깍여야 했고, 그 철저한 내면의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저의 그 하느님 찾음은 일종의 ‘부르짖음’ 같은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부르심’에 대한 ‘부르짖음’ 같은 응답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저는 그 ‘부르심’과 ‘부르짖음’이 교차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진실로 저의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았습니다. 지쳐 쓰러지고 넘어져 울고 있는 저를 꼭 붙들어 주시고 일으켜 주시던, 한없이 고마우신 나의 그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제 옆에서 손을 내밀어 주시던 분은 바로 <친구>같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저는 홀로 있었으나 결코 혼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제 상본의 성화는 화가이자 신부님이신 독일출신의 지거쾨더(Sieger Köder)의 십자가의 길 연작 중, 제5처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 지심을 묵상하는 작품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볼때마다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그 분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몬을 도와 시몬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져 주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 십자가를 함께 져 주셨던 것처럼. <친구>처럼. 나란히. 그러고보니, 아아! 성화 속의 시몬은 시몬이 아니라 바로 저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늘 부족하였고 사제품을 받은 지금에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이 부족하고 불순종한 종임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분의 도움 없이는 저는 절대로 사제가 될 수 없었음을 고개숙여 고백합니다. 저를 친구라고 불러주시고 일으켜 주시고 그 분께서 제 십자가를 함께 져 주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결코 없었을 것이며 아울러, 그 긴 은총의 여정 안에 여러분도 함께 계셨음은 물론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멘!
오늘 말씀의 전례내용을 제1독서, 복음 그리고 제2독서의 순으로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는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라고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 즉 성당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젖먹이 어린아이부터 나이 드신 어르신들까지 성당에 옵니다. 그리고 배운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아픈 사람이든, 착한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성전은 가리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성당에 앉아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은 사람을 구분합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배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자세도 다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에게는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자신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사람은 피합니다. 예수님은 구분 없이 모두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 아닌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는 그래도 너그럽게 행동하고 말을 합니다. 약간의 실수는 용서해주고 ‘그 정도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야’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족에게는 오히려 더 야박하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형제간에 더 많은 미움이 있고 다른 사람 앞에서 형제의 잘못을 드러내는 말을 하곤 합니다. 모세는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되고 사랑해야 한다.”라고 했는데, 남에게는 사랑이 담긴 표정을 지으면서 오히려 가족과 형제에게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서 모든 사람을 포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매일 만나고 함께 밥을 먹는 나의 가족 즉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 시어머니와 며느리, 할머니와 손자는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되고’, ‘달라고 하면 주고’ 서로를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겠습니다.
[전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오성기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주님의 축복을 기도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가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당부입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우리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시면서 오늘은 그 구체적 방법으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1. 사랑은 희생입니다.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하느님의 숨결이 스며있는 성전인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선과 악을 구분하여 칭송과 단죄를 하기에 앞서, 사랑을 먼저 실천하고 보여 주어야 합니다. 모든 지혜와 현명함은 사랑이 없이는 위험한 도구입니다. 사랑만이 모든 것을 완성하고 참 인간이 되게 합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레위 19,17). 미워하는 사람을 만듦은 자신이 받은 상처와 피해를 생각함에서 오는 것이요, 미움과 다툼은 그 피해를 되갚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욕심이 많으며 미움도 커지고, 상처와 피해의식이 클수록 미움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희생으로써 변화와 성숙을 기다려주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보겠습니다. 희생없이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희생으로서 사랑을 이루십시오.
2. 사랑은 용서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선에 대해서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인 것이며, 선에 대해서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인 것이며, 악에 대해서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것이라는 옛말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해야할 신앙인들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원수에 대한 사랑에서 최고로 실현됩니다. 또한 그러한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자다운 행동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원한을 가진 사람을 용서하고, 미워하는 자에게 잘해주고, 악에 대해서 기도로 응하는 것은 가장 큰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용서는 생명을 낳고, 일치는 기적을 낳습니다. 반대로 미움은 죽음을 낳고, 분열은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미워하는 사람에게 희생하고 잘해주며, 원수에게 희생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나 사이에 하느님을 개입시켜 같은 자녀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도 용서와 은총을 받을 수 있기에 서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5).
3. 어린 시절부터 외우며, 성소를 키웠던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시인 뽈 포로의 원무(圓舞)입니다. 이 세상 모든 소녀들이/ 손에 손을 잡는다면/ 바다를 둘러싸고/ 원무를 출 수 있을거야./ 이 세상 모든 소년들이/ 사공이 된다면/ 그들의 배로 파도 위에/ 멋진 다리를 놓을 수 있을거야./ 그러면 이 세계를 둘러싸고/ 원무를 출 수 있을거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는다면….
[부산] 마태 5, 38-48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신앙인 앞에 어떤 전망이 열리는지를 알립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비롯하여 인류가 지키는 법들이 열어주는 시야를 훨씬 능가하는 전망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린다는 말씀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은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일컫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가 질서 유지를 위해 만든 법입니다. 잘못한 사람에게는 잘못한 그만큼 보복을 한다는 법입니다. 보복 당할 것이 두려워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게 하는 법입니다. 예수님은 보복이 두려워 유지되는 사회질서를 훨씬 넘어서는 어떤 질서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계속합니다. ‘누가 당신의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다른편 뺨마저 돌려대시오.’ 그대로 하다가는 남아 날 뺨이 없을 것입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마저 내주시오.’ 속옷 내주고 겉옷마저 내어주면 알몸입니다.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시오.’ 천 걸음을 강요하는 사람에게는 천 걸음만 필요합니다. 그 이상 가겠다고 고집하면 또 뺨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천 걸음을 가주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새 법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법을 가르치는 율사도 아니고, 법을 집행하는 통치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예언자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도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새로운 실천을 알리는 예언자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어떤 사람과도 대결의 관계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이롭게 이해타산하지 않고, 흔연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내어주어서, 이웃과의 연대성을 소중히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이고, 이웃과의 연대성도 그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이기에, 베풂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 한 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하는 처세입니다. 나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은 동물 세계에서 개체가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기본자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달리 가르치셨습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친 분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하시는 바를 당신 스스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후에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던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악을 악으로 극복하지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악을 악으로 극복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동태복수법은 인류가 만든 모든 법률의 기본입니다. 오늘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피해를 준 그만큼 국가 공권력이 벌을 주는 것입니다. 동태복수법의 정신은 이렇게 아직도 인류역사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 정신에 익숙한 우리는 가해자에게 당연히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잘 하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도 벌주신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악을 악으로 극복하신다고 믿는 데서 나오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벌하신다는 말을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것은 흔히 말하는 인도주의(人道主義)적 박애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다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시야에서 잃지 않았던 것은 하느님이었습니다. 사회의 질서와 인간관계를 보는 우리의 시야에도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그분은 믿었습니다. 인간 사회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도, 하느님이 살아 계셔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악은 하느님 안에 없습니다. 악을 악으로 퇴치하며 질서를 보장하겠다는 생각은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그분의 자녀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남을 성토하고 비난하는 것은 그리스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생명이고, 인류의 연대성이기에, 우리가 추구하는 질서도 당연히 베푸심으로 채색된 것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비, 사랑, 용서 등을 기본 질서로 한 인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십자가 앞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빌며 그것을 감수한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세례는 한 순간에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는 마술이 아닙니다. 자유를 지닌 인간입니다. 우리의 자유가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살도록 하겠다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그 호적에 이름이 올랐기에 그 생명은 부모의 자녀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태어난 생명은 오랜 양육의 시간을 거치면서 그 부모의 정신과 삶의 자세를 배웁니다. 그래서 그 부모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을 배워 그분의 정신을 실천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자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운동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우리 삶의 모든 여건 안에 살아계시게 하겠다는 운동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살아 있게 살겠다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자비와 사랑과 용서는 나약함이 아닙니다. 부모가 나약해서 자녀를 사랑하고 용서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녀와 경쟁하지 않고, 더 많이 가져서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부모는 베풀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부모는 알든, 모르든, 자녀 앞에 하느님에게 기원이 있는 삶을 삽니다. 내어주고 쏟아서 베풀었다는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기에 그분은 하느님 안에 살아계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열어주신 전망 안에서 살라고 말합니다. ◆
[춘천] 사랑합시다/맹석철 신부
예전에 뽀빠이 이상용이 진행하던 ‘장수만세’라는 노년층을 위한 TV프로그램이 있었다. 프로그램 중에 질의응답 퀴즈가 있었는데, 부부 중 한쪽이 문제를 내면 상대방이 맞히는 게임이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영감님이 “‘당신과 나’같은 사이를 두자로 뭐라고 하지?”라고 말하자 할머니께서 “웬수”라고 답하셨고, 다시 영감님이 “‘당신과 나처럼 평생을 함께 해로하는 것’을 네 글자로 말하면 뭐지?”라고 묻자 할머니께서는 “평생웬수”라 답하셨다.
남녀가 연애하며 서로 사랑할 땐 “당신 없이 난 못 살아!” 하더니,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단물 다 빠지고 나니까 “당신 때문에 내가 못 살아!”가 된다. 여러분은 경험으로 다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우리들의 사랑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방법이 잘못되었기에 ‘부부’가 ‘웬수’가 되고, ‘천생연분’이 ‘평생웬수’가 되는 것이다. 부부 사랑도, 가족 사랑도 이웃과 원수 사랑도 바보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법을 바꾸라고 하신다. 약자에게는 맞서지 말고, 오른 뺨을 맞거든 왼뺨까지, 속옷을 뺏으면 겉옷까지, 천 걸음을 강요하면 이천 걸음을, 달라면 주고, 꿔 달래도 그냥 주어라.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결국 이 모든 말씀의 요지는 사랑에 어떤 조건도 달지 말라는 것이다. 사랑에는 좀스럽고 편협한 사랑이 있는가하면 한없이 넓은 하늘과 바다같은 사랑이 있다. 악질이나 선량을 가리지 않고 햇빛을 주시고, 표독한 자나 의인을 차별하지 않고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배우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잔머리를 굴리며 주판알 튀기는 ‘받기 위해 주는’ 이기적이고 가식적이고 소아적인 사랑이 아니다. 모두를 품어 안는 대지와 태양처럼 무조건 퍼주는 어리석은 사랑이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네 처자식만 아끼고 돌보아 준다면 그것은 세리도, 도둑강도도, 몰염치한도, 성폭력범도 … 어중이떠중이도 심지어는 짐승들도 완벽하게 살아내는 본능일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자비로운)사람이 되어라.”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어떤 행동이나 윤리도덕의 완벽함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완(온)전함을 뜻하는 것이다. 편협하고 이기적인 사랑을 넘어 혈육과 편정을 초월한 무조건적 사랑을 완성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나를 위해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부산] 사랑의 심화와 확장/ 이수락 신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탈출기 21장에 나오는 이 말씀은 법적 규정입니다.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복수가 아니라, 법적인 형벌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에 대한 공정한 처벌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사법제도는 흔히 강자들의 편에 서기 쉬운 현실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규정은 눈에만 해당되는 죄를 범하였을 경우, 그것에 해당하는 벌만 주라는 것입니다.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이 법의 관심사입니다.
복수심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가 뺨을 때리면, 반사적으로 그의 뺨을 때리려고 합니다. 상대가 나보다 강해서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멀리 가서 눈이라도 흘깁니다. “앙갚음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수심과 미움에서의 해방을 요구하십니다. 미움과 복수심은 마음과 정신을 얽어매는 모진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집착에서 자유롭기를 바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서로에게 좋고 또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늘 추구하십시오.”(1테살 5, 16)라고 충고합니다. 악을 악으로 앙갚음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강조하시는 ‘원수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사랑은 사다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다리는 두 개의 긴 나무로 이루어집니다. 사랑도 한 줄이 아니라 두 줄이어야 합니다. 한 줄은 벗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한 줄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한계를 몰라야 합니다. 벽을 허물고 사랑의 영역을 넓혀 ‘원수 사랑’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사다리의 한 줄은 ‘심화’이고, 다른 한 줄은 ‘확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심화와 확장이 균형을 이루며 나아갈 때, 사랑이라는 사다리는 하느님을 향해 뻗어갈 수 있습니다.
‘원수 사랑’은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것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복음을 마무리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의 사다리를 타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예수님께서는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도 심화와 확장이라는 두 줄로 된 사랑의 사다리를 타고 하느님께로 올라가야 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가 바로 이 사랑의 사다리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