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으신다.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신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버린다면 도와주실 것이다. 불의에서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의 지난날을 용서하실 것이다(제1독서). 살인은 율법의 금지 사항이다. 아무도 쉽게 살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라고 놀리는 일은 예사로 하고 있다. 이웃과 화해하지 않기에 살인까지 가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을 놀리고 쉽게 성을 내기에 큰 죄를 짓는 것이다(복음).
복음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모처럼 한가한 휴일 오후를 맞이하여 족구나 할까 하고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 갔습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까불대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손에 흙을 묻혀 가면서 놀이에 한창인 아이들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땅바닥에 그림인지 도형인지 그려놓고 티격태격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그림인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는데, 서로 마음이 틀어졌는지 한 녀석이 큰소리로 욕을 합니다. 다른 녀석도 질세라 내뱉는 욕지거리가 보통이 아닙니다. 옆 동무들은 재미있다는 듯 히죽거리며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금세 서로 멱살을 잡으며 주먹이 오갈 태세입니다. 얼른 나서서 아이들을 뜯어말렸습니다. 한 녀석이 저를 노려보며 성난 목소리로 “너, 이 새끼 뭐야! 죽기 싫으면 저리가, 새끼야!”라고 소리쳤습니다. 정나미가 뚝 떨어졌습니다. 더 이상 초등학생 아이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함께 운동할 신자들이 저를 불렀습니다. 저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얼른 신자들에게 갔습니다. 조금 뒤에 싸우던 아이들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욕지거리가 귀에 쟁쟁히 남아 온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요즘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욕을 너무 쉽게 합니다. 또한 욕이 너무 거칠고 잔인합니다. 욕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요즘 일어나는 수많은 엽기적 사건이 어쩌면 이런 욕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사소한 욕이라도 큰 화를 입게 될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아이들에게 욕하지 않는 고운 마음을 가르쳐야겠습니다.
백남해 신부(마산교구 장애인 복지관장)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형제에게 성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이 나면 폭언은 예사입니다. ‘바보, 멍청이’ 정도는 애교에 속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말을 하면 지옥에 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요? 이웃에게 성내는 것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살인이라는 큰 죄는 누구나 신경을 쓰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화내는 작은 잘못에는 무관심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내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 살인 같은 큰 죄를 지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얕보고 비웃는 사람이 큰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웃과 소원한 관계라면 가까이 지내라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형제와 법정 소송을 벌였다면 될 수 있는 대로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화해는 하느님의 힘과 기운을 모셔 오는 행동입니다. 작은 말 하나가 화해를 가져오기도 하고, 불목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말에서 실수하지 않으면 온전한 사람”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을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가까운 사람과 사랑하는 가족에게 성을 내고 업신여기는 말은 고칠 수 있습니다. 노력하면 됩니다. 삶의 태도를 바꾼다면 자연스럽게 고쳐집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힘써야 할 과제입니다.
찬미예수님! 우리는 삶 안에서 참 많은 만남을 가집니다. 기억은 할 수 없지만 태어나는 순간 부모님과의 첫만남을 시작으로 해서 친구와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마지막으로 가지는 만남이 있습니다. 이처럼 만남이 없이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말할 수 없기에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되는 만남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존재시켜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그 자체로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만남이 우리에게 마냥 기쁨을 주는 것만은 아닙니다. 갈등, 불화, 다툼으로 인해서 그러한 만남은 우리에게 괴롭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는 만남은 기분 좋은 만남보다는 힘든 만남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만남들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 마음 속에서도 그러한 상처를 남깁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의 몸을 모심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기 위해 미사에 참례하러 성전 안에 들어오면 그분의 사랑 때문에 더욱 나와 다투었던 가족이나 친구, 또는 이웃의 얼굴이 생각나며 마음이 괜히 무거워 지기만 하는 경험을 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미사에 집중하기 보다는 계속 그 사람과의 갈등들이 생각나며 화가 나기도 하고 그 사람에 대한 미움 때문에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도 잘못했지만 그 사람도 잘못했다. 어쩔 수 없다.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내 맘은 사람들과 화해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이 화해를 하지 않으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라고 혼잣말을 합니다. 그러한 갈등 구조 속에서 나 자신을 배제시킵니다. 마치 타인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화해하려는 노력보다는 그 사람과의 만남을 더 이상 가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그 만남 속에서 이뤄질수 있는 화해를 결코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만남은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우리가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남 속에서 생기는 갈등과 불화는 타인의 노력으로 화해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노력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방에게 미루는 것보다 내가 먼저 노력할 때 화해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등이 생겼을 때 먼저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화해하는 행동을 먼저 보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 쉬워 보이지만 막상 실천하려니 너무도 어렵습니다. 화해한다는 것은 마치 나의 살과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을 줍니다. 그러기에 화해하는 것이 너무도 두렵습니다. 그러한 아픔을 극복하라고 주님은 격려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아픔을 주는 요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는 제단에 나오기 전에 먼저 나를 아프게 하는 나 자신과 화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과 이웃 간의 아픔을 극복해야 하는 맘을 가로막는, 도저히 함께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내 맘의 고집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상 안에서 현실을 바라보았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과의 화해는 바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자신의 맘 안에 계신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서 내 형제와 이웃 안에서 하느님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와 이웃 안에서 주님을 보는 것은 바로 신앙인의 행동입니다. 믿음이란 하느님에 대한 믿음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에 대한 믿음도 함께 있어야 진정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양심이 재판하고 형리에게 넘겨주기 이전에 먼저 나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나 자신과의 화해는 다시 내 이웃과의 화해를 이끌어 냅니다. 내가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처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기쁠 때 우리는 진정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배려하게 되고 그들에게 우리의 손을 내밀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진정 주님의 참 사람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셨던 사랑을 마음껏 누리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2월 15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 마태오 5,20ㄴ-26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왜 내 안에 그 ‘몹쓸 인간’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무리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신다는 느낌입니다.
“형제에게 절대로 성내지 마라.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바보라고 부르지도 마라. 최고의회에 넘겨질 것이다. 멍청이라고도 부르지 마라.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평소에는 성인군자 같은데, 한번 ‘욱’하는 마음의 불길이 솟구치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심호흡과 더불어 단 1분만 마음을 가다듬었어도 될 일인데, 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평소에 따놓은 점수, 그 한 번에 다 까먹습니다. 내가 많이 오버했구나, 하는 생각에 평상심에로 돌아가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주 마음을 다스릴 일입니다. 특히 화가 솟구치는 순간, 그 감정을 긍정적으로 표출할 줄 아는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수행자의 당부처럼, 흔들리는 마음 앞에서도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성덕에 도달하는 지름길임이 분명합니다.
다음의 일화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두 승려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바라보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우겼고, 다른 사람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6祖 혜능이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오. 다만 당신들의 마음일 뿐이오.’”(존 CH 우, ‘선의 황금시대’ 참조).
분노의 원인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 내면의 불안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내면이 평화롭고, 고요하며, 안정되어 있다면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무시, 소외 앞에서도 자유로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화가 나고, 또 자주 우울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욕심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욕심을 버리고, 기대로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비웠다는 마음조차 한번 비워보십시오. 뜻밖의 평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올 것입니다.
올라서려고만 발버둥치지 말고 가장 밑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가장 미천한 일은 언제나 내 몫이려니 마음먹어보십시오.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람은 자기가 마음먹은 만큼만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큰 욕심을 버리고, 지나친 기대도 버리고 아주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하면, 의외로 삶이 편안해지기 시시작합니다.
한 착한 수련자 형제가 이런 생각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수도생활, 저는 너무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원에 들어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나 행복한지, 나 혼자만 이렇게 행복해서 되나, 하는 걱정과 죄송스러움을 안고 매일을 살아갑니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제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매일 하얀 백지 같은 또 다른 오늘을 선물로 주십니다. 여유 있게 기도할 기회를 주십니다. 형제들과 담소할 수 있는 기회, 기쁜 마음으로 노동할 수 있는 기회, 천진난만한 얼굴로 뛰어놀 수 있는 기회, 저를 성장시키기 위한 선물이 분명한 형제들과 함께 살게 해주신 하느님께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강도 높은 수업, 집중적인 양성과정이 계속되는 팍팍한 수행생활에 힘겨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살아가는 형제다 보니 단조로운 수도생활,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사는 데서 오는 불편함, 인간관계 안에서 오는 갖은 상처 앞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화는 상대방에게 발산하지만 머지않아 그 화는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또 다른 상처를 입힙니다. 화를 내는 자신을 괴롭힙니다. 고통이 지속됩니다.
결국 ‘마음 바꾸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왜 하루 종일 내 안에 ‘참 나’가 살지 못하고 그 몹쓸 ‘인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까? 자기 내면의 주인공, 내 감정의 주체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설 수 있도록 언제나 지지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표출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끝도 없는 고통과 상처만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인간관계가 제대로 형성되겠습니까? 건강이나 제대로 챙기겠습니까? 그 상태에 머무는 순간은 결국 불붙는 지옥에서 고생하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