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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내가 그에게 말씀드리기를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들은 대환란에서 나온 사람들이며 자기들의 옷을 씻어 어린양의 피로 희게 하였느니라.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오는데 우리가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모든 관심의 초점을 두고 있는 바로 "대환란"이다. 내가 이 강해 시리즈의 앞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 "대환란"이라는 용어는 엄밀히 말해서 7년 가운데 후3년 반을 가리킨다고 했었다. 그 설명을 여기서 되풀이하지는 않겠고 여러분이 왜 그것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각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7장의 전반부에 등장한 그 14만4천의 사역자들은 전3년 반에 활동, 활약한다고 누누히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에 대해서는 "대환란에서 나온 사람들"이라는 소개가 없다가 흰 옷을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 유독 이렇게 지칭하고 있음에 유의해 보라는 것이다.
이는 그때에 대환란이 있으리니, 그와 같은 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없었으며, 또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마 24:21).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세대주의를 공부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마 24장을 엄밀히 나눠서 공부하지 않고 있다. 주님께서는 24:4절서부터 마지막 날들에 대한 스토리들을 말씀하기 시작하셨는데 시작부터 당장 "대환란은 이러하게 시작되니..."라고 이야기를 꺼내신 게 아니라 한참 중간부를 넘어서서 21절에 가서야 "그때에 대환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4절에서 20절까지의 전체 줄거리는 그 7년 가운데 전3년 반에 해당되는 것이라 해도 전혀 무리가 없겠다. 우리가 이 관점, 곧 마 24:21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후3년 반이 전개되기 시작한다는 관점을 유지한 채로 마 24장 전반부를 살펴보면 적지 않은 "단단한 음식"(히 5:12, 14)이 눈에 들어온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며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5).
전3년 반에 많은 가짜 그리스도들이 나타나서 많은 사람을 미혹한다. 후3년 반에는 단 한 명의 절대적 적그리스도가 주권을 잡고 전세계인에게 자신만을 추앙할 것을 요구하겠지만 전3년 반은 그와 다르다.
또 너희는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들을 것이라. 그러나 삼가 걱정하지 말라. 이는 이 모든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겠지만 아직 끝은 아니기 때문이라(마 24:6).
이게 무엇인가 하면, 바로 둘째 봉인이 열릴 때의 붉은 말과 큰 칼 전쟁이 아니던가? 내가 계 6장을 주석하면서 이야기했지만 그때 전쟁의 회오리가 휩쓸지 않는 평화 지역이 이스라엘과 지중해 인근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본토에 있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저런 진술이 성립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고통의 시작이니라(마 24:8).
이제 "고통의 시작"이라는 것은 이제 전체 중에서 50%도 채 오지 않았고 겨우 30% 정도 찍었다는 뜻이다. 7절에서 "검은 말" 상황이 전개되는 것 같으니까 겨우 1/3 온 것이다. 환란의 시작이 이렇다면 진짜가 올때 얼마나 심각하다는 얘기인가?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고난받도록 넘겨주며 죽이리라. 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인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는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될 것이며, 서로 잡아서 넘겨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또 많은 거짓 선지자가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 24:9-11).
이제 본격적으로 환란 성도들이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황이다. 14만4천이 열심히 뿌려놓은 씨들이 자라고 있는 모습이다. 위 본문은 이스라엘 내에서 일어나는 상황으로 환란 때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유대인들을 이단자로 몰아서 탄압하는 광경이다. 14만4천과 그들로 인해 회심한 유대인들이 본토에서 쫓겨나서 이방으로 전도하러 갈텐데 거기서도 그들은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될 것이며...거짓 선지자가 일어나서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전3년반 중에 일어날 대대적인 배교다.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살후 2:3).
지금까지 어떤 신학자도, 세대주의 계열 가운데서 라킨이나 근래의 럭크만 박사를 포함하여 누구도 살후 2:3을 전3년 반에 적용하지는 않았다. 럭크만 박사는 그의 주석에서 "배교하는 일"을 다른 주석가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시대 말미에 집어넣는 대신 배교하는 일과 죄의 사람 멸망의 아들이 나타난다는 단락 사이에 있는 쉼표를 근거로 후자의 사건(적그리스도 등장)이 초림 때 유다 이스카리옷의 등장이라고 약간은 무리수 격의 해석을 했고 그래서 교회가 휴거 이전에 적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된다는 납득되지 않는 경우의 수는 피해갔다. 럭크만 박사가 그와 같이 어렵게 비켜가는 해석을 한 취지와 근거는 이해하는 바이지만 이 구절은 그렇게 해석되면 안 되는 것 같다.
먼저,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를 나는 그 날이 꽉 찬다(full day가 된다)의 의미로 바라보았다. 살후 2장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의 날"은 휴거에서 휴거에 이르는 날, 곧 환란전휴거에서 환란후휴거로 끝나는 기간, 약 7년 정도인 것이다. 어떤 하루가 왔다라고 할 때 50%경과 시점을 이야기한다. 유대적 관점에서는 하루가 저녁 6시에 시작되고 끝나지만 이방인들은 자정을 기점으로 하니까 이방인식으로 말해서 Full day 시작은 그 날 낮 12시 즈음이 된다. 나는 바울이 자정에서 출발하는 이방인의 하루 개념을 적용해서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를 말했지 않나 생각도 한다. 어쨌건 7년 환란 가운데 50%가 마치는 때, 그때가 그 날, 곧 그리스도의 날이 오는 때인 것이다. 내가 놓친 또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다음 기회에 더 보충 설명하기로 한다.
그래서, 살후 2:3의 그 배교라고 하는 것은 이상의 설명을 근거로 해서 말하자면 7년 환란의 전3년 반 끝무렵즘에 있을 사건이라 본다. 내가 아는 어떤 형제는 배교를 환란기로 집어넣는 듯 하면서 휴거 직후에다 설정하고 그때 "반짝 부흥"과 "반짝 배교"가 있어서 적그리스도의 연이은 출현을 가져온다고 가정하기도 한다. 그건 엄청난 무리수가 있는 주장이고 14만4천이 전3년 반에 막 등장하면서 몸풀기 하자마자 배교가 일어난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스토리가 되어 이야기가 산으로 가게 된다. 한 마디로 해서, "제대로 믿은 사람이 나와야 배교도 하지 않겠는가"는 이야기다. 14만4천이 전3년 반 동안 이스라엘과 전세계를 상대로 영적 전쟁을 벌이면서 엄청나게 복음의 씨를 뿌린 다음 수많은 회심자들이 늘어날텐데 그 무리들 가운데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된 실족자들이 발생하고, 그것이 살후 2:3의 배교가 일어나는 상황으로 나는 본다는 말이다.
물론, 교회 시대에도 많은 배교가 발생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또 앞으로도 더 생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WCC에 가입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교황을 인정하고, 교리를 이리저리 타협하고, 세상 정부와 교회가 유착하고, 그런 모습들이 배교가 아니냐고 한다. 또한 한국 교회사에서 과거에 큰 경종을 울린 사건인 신사참배 또한 집단적 배교의 한 모습이다. 나는 그런 것들이 배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그 사건들도 나름 다 배교를 한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배교자들을 징계하셨다. 그런데,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예언되고 있는 그 사건,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하다시피 엄청나게 일어날 전세계적인 배교, 그것은 교회시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은 전세계 교회가 일시에 배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개신교계는 엄청 타락했고 서로 부패의 동맹을 맺고들 있기 때문에 WCC에 소속된 교단들 간에는 배교로 가는 연결 고리가 있지만 상대적 소수일지 모르나 독립침례교회들, 특히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들은 로마로 향하는 배교의 물결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전지구적으로 모든 교회들을 한 번에 휘몰아쳐서 배교로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성경침례교회 같은 성별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사라져 주면 된다. 그야말로 휴거가 되어 버린다면 그때는 나머지 구원받지 못한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가 될 것이다. 어쨌건 휴거 이전에는 모든 교회의 전지구적 배교가 어렵다는 얘기다.
이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런 후에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왕국 복음은 예수님의 공사역 기간 중 전파된 복음이요, 사도행전 초반부에 전해진 복음 안에도 이 요소가 들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침례인 요한을 통해 이미 왕국 복음을 듣기 시작했고 사도 바울에 의해 전파될 때 완벽히 거부해 버렸다. 그들을 위해 마련된 지상 천국이라는 잔치상은 하나님께서 걷어가셨고 대신 교회시대를 허락하시면서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만백성에게 열어놓으셨다. 천국은 언제 수복될 것인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렇게 된다. 그 왕국 복음이 14만4천에 의해 전파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고 그것도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일단 전3년 반 중에 왕국 복음은 지구촌 전체에 퍼져야만 한다. 14만4천은 그린란드에서 남극까지, 희망봉에서 에스키모들이 사는 알래스카까지, 태평양과 대서양의 섬나라들까지 돌아다니면서 그 민족들의 방언들로 왕국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 시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마가복음 16장의 "지상 명령"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 비록 바란다 할지라도 100%의 전지구적인 규모를 달성하지는 못한다. 교회시대가 끝날 때까지도 어쩔 수 없이 "미전도 종족"은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 그 미전도 종족과 미전도 지역은 결국 14만4천의 방문을 받게 될 것이며 교회시대에는 여러가지 여건이 불비하고 조건이 되지 않아 성경도 번역되지 못했고 문자도 없었으므로 복음을 듣도 보도 못했던 여러 원주민들이 그 유대인 선지자들의 복음 전도를 듣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부분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는데, 어떤 내가 아는 형제들은 복음 전파에 관해 큰 비전을 갖고 있고 교회 시대가 끝나기 전에 전지구적으로 땅끝까지 은혜 복음이 전해져야만, 또 그 전파로 인해 수억 명, 그 이상이 일시에 예수님을 믿어야지만 전세계적 배교와 또 휴거가 올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다. 나는 그 형제들의 참 아름다운 꿈과 희망에 대해 재를 뿌리지는 않겠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어떤 명령과 계시도 무효화되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며 주께서 진정 "땅끝까지"라고 하셨으면 문자 그대로 언제고 되는 것이란 말이다. 교회시대가 아니라 환란 때라도 주님은 온 세상에 복음이 뒤덮도록 역사하실 예정이다. 지금 인류는 유투브라던지 모바일이라는 수단을 통해 세계 각지의 오지에서도 성경과 복음을 접할 수 있는 환경에 있다. 그런데 통신 환경이 아무리 좋아지고 온라인 복음 전파가 이루어져도 결국 진짜 복음은 맨투맨, 발로 뛰고 전하는 것이다. 또한 일시에 전세계적으로 "복음 드론"을 띄운다던지 하늘에 기구를 띄워 대북전단지 살포하듯이 복음 전도지를 뿌린다고 수백 만명이 한 번에 구원받지도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매주 길거리에 나가서 발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 하고 있다. 만일 내가 서재에만 머물면서 복음과 부흥에 대해 요설을 떠들어대는 사람이라면 그 형제들의 전세계 부흥 비전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는 것이 우스워질 것이다. 그러나 나도 복음 전파를 실행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이 말은 위선이 아니라는 점 알기 바란다.
자기들의 옷을 씻어 어린양의 피로 희게 하였느니라 여기에 환란시대만의 특징적인 무언가를 보게 되는데 환란 교리가 교회시대 교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말씀이다. "자기들의 옷을 씻어", 이것이 나타내는 바는 바로 구원을 위해 이들은 행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나는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읽는 온건한 세대주의 교리의 입장으로 이 부분을 말해 왔지만, 또 말하자면 교회 시대에는 구원을 위해서 하등의 행위가 필요 없고 구원의 순간에나 구원 이후의 삶에서나 행위는 그의 하늘나라나 지옥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지 않음을 믿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상하고 납득하기 힘들지라도 교회 시대가 끝나면 구원 교리상에 중요한 변화가 하나 생기는데 곧 "구원의 보장"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현 시대에도 구원의 보장이 있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기독교인들이 전체 기독교계 인구의 과반수는 훨씬 넘을 것이다. 물론 나는 거짓 기독교인 로마 카톨릭은 제외하고 그래도 자기들이 이신칭의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개신교 계통 교파와 교단들에서만 추린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도 "이신칭의? 그게 뭐 먹는 거임?" 수준으로 성경에 지독하게 무식해서 행위와 믿음을 구별도 못하는 영적인 바보들도 상당수 있다. 오늘날의 개신교계가 영적으로 그렇게 바닥을 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당장 여러분이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눈에 띄는 큰 교회들, 장로교든 감리교든 침례교든(침례교는 조금 낫겠지만) 들어가서 보면 "구원의 보장"에 대해서 가르치는 교회가 별로 없다. 가르치더라도 왜? 어째서?에 관해 성경을 자세히 심도있게 가르치는 대신 "에, 그것은 칼빈의 교리입니다. 5대 강령 중에 '성도의 견인'이란 게 있단 말이지요"에 그치고 로마서의 몇 개 성구를 인용할 뿐이다.
구원의 보장에 대해서 지금도 모르고 살고 있는 개신교인들은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채 환란시대로 넘어갈 때 시대가 바뀐건가 아닌가 그것도 분간 못할 게 분명하다. 분간하면 더 이상한 것이다. 그들이 구원의 보장에 대해 이해를 할 정도였다고 하면 벌써 교회시대인 지금 구원을 받고 휴거도 받아 올라갔을테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대낮에 장님 행세를 하며 살다가 진짜로 캄캄한 밤 같은 환란 시대로 넘어가는데 어차피 장님들이라서 해가 떴나, 졌나 구분할 힘도 없는 분들이다.
더군다나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신천지, 그 외 행위를 구원의 조건에 포함시킨 교리를 지금 믿고 가르치는 모든 집단들은 사정이 더 열악할 것이다. 그들은 환란 시대에 막상 처하게 되었을 때 자기들의 "행위 구원 교리"가 스스로의 파멸을 가져왔고 휴거를 못 받게 했음을 알고 허탈해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들이 지금 믿고 행하고 있는 그 행위 교리들을 대환란 때 지킨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증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게 아니라 발췌해서 자기들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지킨다. 안식교는 안식일 지킨다고 운운하지만 제대로 율법적으로 지키지 않는다. 안식교보다는 정통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더 잘 지킨다. 그 자들이 말로만 율법을 지킨다고 으스대던 것이 환란 시대에 가면 모두 애들 장난인 것으로 만천하에 판명날 것이다. 왜 그런지 아는가? 14만4천의 "정통 유대인 복음 전도자들"이 등장해서 여증, 안식교, 신천지, 기타 잡스러운 가짜 유대인 종교들의 소꿉장난을 박살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단 종파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환란 때의 거짓 선지자들이나 거짓 그리스도를 따라가거나 혹은 그들 자체가 거짓말쟁이가 되어 또 사람들을 속이고 다닐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온전한 확신 가운데서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가자. 이는 우리의 마음은 피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깨끗해졌고 우리의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겨졌기 때문이라(히 10:22).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를 통해 많은 환란 교리들을 전달하고 있는데 위 구절은 그리스도의 피로 옷 씻는 것이 어떤 식으로 되는 원리인지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환란 성도들이 실질적인 흰 옷을 외적으로 입고 다니면서 더러워지면 빨래터에 가서 또는 세탁기 돌려서 씻는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렇게 적용하고자 한다면 어린양의 피 또한 실질적인 피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것은 로마 카톨릭의 가짜 제사장들이 매주 일요일마다 "성만찬"을 가장한 카니발리즘 의식을 행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모독적인 행위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지금 "영적으로 존재하고 영적으로 뿌려질 수 있는" 것이지 실제의 피로 나타나서 심지어 카톨릭이 미사 교리에서 가르치듯 마실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이다.
대환란 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는 그 때 믿는 자들의 양심 속에 들어가서 피뿌림으로 정결케 하는 역사를 할 것이다. 그들의 양심이 깨끗해지면 그 사람들이 영적으로 입고 있는 흰 옷도 정결케 되는 것이다.
열심을 다하여 네 마음을 지키라. 이는 삶의 문제들이 거기서 나옴이라(잠 4:23).
어린양의 피로 양심을 깨끗케 한다는 것이 어떤 이단적 종파들이 실행하듯이 미신적으로 도처에 "예수의 피를 뿌리고 바르고 다니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고 믿는 피는 카톨릭이 미신적으로 추종하는 미사 교리, 성혈 숭배와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으로 주님께서는 설혹 문자적인 자신의 피를 바르거나 마시거나 뿌린다고 해서 그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생긴다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지만 셋째 하늘에 엄연히 앉아 계심을 믿고 있고 또 보이지 않지만 셋째 하늘에 그룹들과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는 것도 믿는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믿는다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의 경험 영역 바깥에 있는 불가시적인 것들이다. 인간은 보이는 것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분, 그 분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곧잘 혼동한다. 사실 보이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으며 그냥 사실로서 받아들이면 된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숭앙과 확신이기 때문에 뭔가 그에게 초자연적인 공급(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한 자에게는 그가 인식하건 못하건 그의 위에 주님의 피뿌림이 있었고 그 피가 그의 양심을 돌면서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고 순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고 환란 시대에 믿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으며 그의 성전에서 그를 밤낮 섬기고,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리라.
15절만 놓고 봤을 때 그 흰 옷 입은 성도들이 영원히 하늘나라의 성전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섬긴다,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그게 착각이라는 것은 17절에서 확인되는데 거기서는 "그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라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것이 단지 하늘나라라면 "밤낮 섬기고"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가 그 물들을 경계로 두르시니 낮과 밤이 끝나는 곳까지라(욥 26:10).
하늘들 위에 있는 물층을 통과하면 그 위의 유리 캐노피, 곧 유리바다가 나오는데 유리바다를 통과하면 셋째 하늘, 곧 하늘나라 낙원이 있다. 그곳에는 밤이 있는가 없는가? 위 구절에서는 "낮과 밤이 끝나는 곳"이라고 분명히 정의내리고 있다. 하늘나라에는 밤이 없다. 밤이 있기 위해서는 지구가 자전 활동을 하듯이 하늘나라가 구 형태여야 하고 무슨 태양 같은 별을 중심으로 자전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게 말이 되겠는가? 지구니까 낮과 밤이 있지 하늘나라에 무슨 낮이 있고 밤이 있느냐 말이다.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곧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 1:17).
하나님이야말로 하늘나라에서 최대의 "광원"이 아니시겠는가? 하나님보다 더 밝은 존재는 이 우주에도 없을 뿐더러 하늘나라의 어떤 천사 가운데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변화와 회전하는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지구상의 사물은 항상 변화와 회전하는 그림자를 수반할 수 밖에 없는데 그건 우리가 태양을 중심축으로 해서 돌고 있는 지구 행성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 그래서 결국 "그의 성전에서 그를 밤낮 섬기고"는 하늘나라가 될 수 있다 없다?. 없다! 저것은 명백히 지상의 천년왕국 예루살렘 성전의 상황이다. 천년왕국이 되어도 이 지구에 해가 뜨고 달도 뜰 것이며 낮과 밤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16 그들이 다시는 굶주리지 아니하고 다시는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이며, 태양이나 어떤 열기도 그들 위에 내리쬐지 못할 것이라.
만일 저 사람들이 머무는 처소가 셋째 하늘 낙원이라고 하면 16절의 여러 가지 조건들은 참으로 사족 같은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하늘나라에서 굶주릴 일이 무어 있겠는가, 목마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하늘나라에 태양 같은 것 자체가 없을텐데 태양 열기를 왜 염려하겠는가? 이 지구상의 사람들이나 태양열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자외선에 몸 상할까 염려해서 선그라스 끼고 선크림 바르고 다니지 하늘나라에서 그럴 필요 있나?
저 이야기들이 셋째 하늘에서 행복하게 계속 살아갈 사람들에 대한 것이라면 "실현 불가능 조건들"을 계속 나열하는 의미없는 서술이 된다. 그러나 저 사람들이 이 땅에 내려온다면, 또한 그들이 여전히 연약한 아담의 육신을 갖고 살아야 한다면(적어도 1천년 동안은) 이것은 현실의 이야기가 된다.
왜 저 사람들이 "태양이나 어떤 열기"로 인해 곤란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인지, 그래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설명하자면 간단하다. 우리는 베드로후서에서 답을 찾는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 그때 이 모든 것이 녹아 버리리니 너희가 모든 거룩한 행실과 경건에 있어 어떠한 사람들이 되어야겠느냐?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열망하라. 그때는 하늘들이 불에 타서 녹아 버리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도 맹렬한 불에 녹아내릴 것이나(벧후 3:10-12).
그냥 보통 열기가 아니라 대우주를 태워버리는 우주적 화염 방사의 열기가 덮쳐 온다. 그것이 모든 항성과 행성들 뿐 아니라 지구의 숲, 대양, 인간들과 생물들을 태워버릴 것이다. 대환란 때 구원받아 환란 성도의 자격으로 천년 통치에 참여한 저 성도들은 천년왕국이 끝날 때 엄습할 이 우주적 대재앙으로부터 면제될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셋째 하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소환되어 거기서 보호받을 것이다. 아마도 계 20장의 곡과 마곡 전쟁의 상황에서 그들은 휴거되어 거기서 보호받을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그때 보호가 필요 없는데 우리는 용광로의 풀무불 속에서도 무사했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그리스도와 같은 불사의 몸을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불로 소제하는 청소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께서 계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실 테고 그러면 보호받았던 저 성도들도 다시 새 하늘과 새 땅에 내려와 거주하게 될 것이다.
저 성도들이 우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더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같은 몸으로 변모될 것인데 환란전휴거 때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변화되면 그때는 천사와 같은 형질의 몸으로 바뀌게 되므로 먹고 마실 필요가 없는, 먹고 마시지 않아도 영원히 살 수 있는 불사체가 된다. 다만 식도락을 위해서 먹기도 하고 마실 수도 있는 그런 몸이다. 예수님께서도 부활 이후에 보통 사람들의 식사에 참여하셔서 먹고 마신 것을 보면 우리도 그렇게 된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16절의 저 사람들은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의 조건에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저들은 먹지 않는다면 굶어서 살이 빠지게 되고 마시지 않으면 갈증이 나는 조건의 그러한 자연적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해하기 힘들지라도 사실이 그렇다. 저 사람들이 목베임 당했다가 부활하고 그리스도의 천년통치에 참여하겠지만 그들은 당분간, 적어도 1천년 동안은 자연적 몸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죽을 수도, 굶주리거나 목마를 수도 있는, 또 배설하고 수면과 휴식을 취해야 사는 자연적 몸이란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각종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처지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능력이 다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몸이기에 심지어 셋째 하늘과 지구 사이를 스타트랙 같은 영화에서 워프하듯이 순간 이동도 할 수 있으나 저 사람들은 여전히 마차 타고 달구지 타고 다녀야 되는 그런 제한적 몸을 갖고 산다.
물론 나중에 나중에, 한참 나중에 가면, 계 21-22장에 가서 저들도 결국 우리와 같은 불사체, 더불어서 초자연적 능력까지 아마 부여받지 않을까 한다. 초능력의 많고 적은 차이는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죽지 않는 몸으로 바뀌는 것은 우리와 동일하게 바뀔 것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환란 시대의 성도들보다 최소 1천 년은 트랜드를 앞서 가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누구는 여러분이 1천 년 먼저 누리고 있는 불멸불사, 초능력의 몸을 경탄으로 바라보고 부러워할 것이라는 말이다. 다음 번에 누군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인의 자격으로 휴거되는 것보다 7년 환란 통과하는 게 더 상을 많이 쌓는 일이라고 현혹하거든 내가 위에 한 이 이야기를 한번 해 보라.
17 이는 그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을 먹이시고 생수의 샘들로 인도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능력에 제한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사람들은 매우 복받은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는 첫 번째 부활은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이 첫열매들(마 27:52, 고전 15:23, 계 14:4), 추수(고전 15:52, 살전 4:17), 이삭줍기(마 24:31, 계 14:14-16)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저 환란 성도들은 마지막 부분인 이삭줍기에 참여한 성도들이라서다.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한 자에게는 특권이 있다고 나온다. 그것은 "영원한 구원의 보장"이다.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되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어 천 년 동안 그와 함께 통치하리라(계 20:6).
우리 신약 그리스도인들과 구약 성도들, 또한 환란 성도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부활, 휴거되지만 한 가지 공유하는 점이 있다. 이 세 부류의 사람들은 절대 천년왕국 끝의 반란의 영향을 받아서 타락,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천년왕국에 들어가서 계속 살아갈 그 자들, 대환란을 통과하여 양의 족속으로 구분된 그 민족들은 결국 천년 끝에 대부분 멸망당하고 일부만 구원받아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은혜요 특권이 아닐 수 없고 거기에다 옥상옥이라고, 우리 크리스찬들은 영속적인 구원의 보장과 관련된 특권을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선취"로 받아 버린 것이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천년왕국이든 곡과 마곡의 전쟁이든, 또는 대환란이든 기타 모든 미래의 여러 일들을 한번에 초월해서 <영원한 보장>을 선취로 받고 믿음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는 얘기다. 바울이 이 점에 대해 여러분에게 확신있게 말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의 일들이나 다가올 일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여기서 뭐라고 말씀하는지 제대로 보라. "현재의 일들이나 다가올 일들이나". 이 표현이 단지 여러분 인생에서 앞으로 죄를 얼만큼 짓고 안 짓고, 신실하게 살고 안 살고, 그런 자잘한 이야기 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대환란, 천년왕국, 그 끝에 있을 사탄의 최후 반란, 이런 우여곡절들이 "다가올 일들"이다. 여러분이 지금 구원을 받는 의미는 다가올 일들에 대해서 "면제"가 주어지는 의미인 것이다.
나는 환란통과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싶다. 여러분이 나를 뭐라고 생각할지 잘 아는데, 아마 이렇게 험담할 것이다. "저 자는 대환란을 통과하는 게 너무나 겁이 나니까 환란전휴거를 억지로 주장하는 것이야" 이렇게 말이다. 천만에. 내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물론 대환란도 통과 안 하는 거 안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것을 넘어서 나는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 묶여 있는 보장"을 받았다니까? 그래서 지금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건, 교회 시대 끝까지 살아서 이 땅에 있다가 주님 오실 때 나꿔채어 올라가던, 내 앞 일이 어찌 되건 앞으로 내가 지옥이나 불못에 들어갈 경우의 수는 제로 퍼센트라고 감히 단언한다. 이게 단지 환란 통과 하고 안 하고 하는 그런 지엽적 문제에 그치는 이슈 같은가? 정신 똑바로 차리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열어놓으신 구원의 문은 그런 째째한 게 아니라 "영원한 보장"이라는 엄청난 보물 덩어리라는 것이다.
17절 본문으로 돌아가서 "생수의 샘들", "눈물을 씻어준다"는 부분이 언제 실현될 것인가? 천년왕국 때일 수도 있지만 보다 설득력 있는 가능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이 개막될 때이다. 계 21장을 보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내시며, 다시는 사망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이 없고 고통 또한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음이라.”고 하더라(계 21:4).
"모든 눈물을 닦아 내시며", 눈물이 계속 흐르고 마르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천년왕국 때 여전히 "자연사"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때 예수께서 그녀가 울고 있는 것과,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다가 말씀하시기를 “그를 어디다 두었느냐?”고 하시자 그들이 “주여, 와서 보소서.”라고 말씀드리니 예수께서 우시더라(요 11:33-35).
이 지구상에 한 명이라도 죽어가고 있고 죽는 사람이 존재하는 이상 눈물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무병장수하고 천년왕국이 오면 노아의 홍수 이전 시대처럼 사람들이 900살 이상씩 산다 할지라도, 또 이 시대의 생명과학자들이 노화의 원인을 규명해서 돈 많은 부자들의 수명을 두 배로 늘려준다 할지라도 여전히 "사망"과 "사망의 쏘는 것"(고전 15:54-56)이 남아 있는 이상 죽을 인간들은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셨다. 성경에서 가장 짧은 이 인상적인 구절, "예수께서 우시더라"는 말씀은 참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말하자면 사망이 완전히 거둬지고 이 우주에서 죽음이 물러날 때까지 주님의 눈물도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주님의 눈물이 멈추면 세상에 더이상 울 사람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계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세상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주님께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고 나면 그때 영원 시대가 열릴 것이며 인간들은 하나님의 창 2장 인간 창조의 뜻이 사람들에게 공연히 고통을 주는 데 있지 않고 복 받은 인류를 온 하늘과 땅에 퍼뜨려 살게 하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그가 사람들의 자손에게 고의로 고통을 주거나 슬픔을 주지 아니하심이니(애 3:33).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육체가 병들어 신음하는 것 때문에, 죽어가기 때문에 울상을 짓고 눈물을 흘린다. 자신을 포함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가고 있는 그 비참함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우울하고 비감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얻었고, 2천 년 동안 휴거를 기다려 온 모든 성도들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더욱 주님의 공중 재림과 휴거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때이다. 주님께서는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몸이 변화되어 곧장 불멸체로 바뀌게 될 그 복된 성도들을 이 시대에 무수히 허용해 놓으신 것이다. 지금 21세기에 거듭난 성도로서 살고 있다는 것은 심지어 바울과 베드로와 디모데, 1세기의 모든 유명한 성도들이 부러워하고 탐낼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이 환란전휴거를 모르고 산다면 이게 특권이 아니라 발에 채이는 돌뿌리겠지만 알면 보물이고 특권이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하시니(요 11:25-26).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이 공중에 오실 때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몸"을 순간 바뀌어 올라가게 될 것이다. 그 날이 가까이 오고 있고 거의 이르렀다. 여러분은 그 소망을 간직하고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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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계시록은 약 주후95년에 기록되었으며
대부분이 그 이후 장차될 일의 예언입니다
기술시점으로부터 현재까지 약 2천년이 지났는데
큰환란이 단지 고작 7년중에 3년반이요??
그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사단과 그의 사자들이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후
멸망의 아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때와 법을 변개했던 일들을
그 교리 그대로 따르는 님같은 분들이
그들이 누구인지 가리고자 하심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다시 짓밟히는 줄 아십니까??
계시록을 감히 그런 말같잖은 해석은 마세요
불만이 있으면 성경 가지고 반박하세요. 사사로운 이론, 거짓 교리는 사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