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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허영엽 신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세 가지가 고민, 말다툼, 빈지갑이랍니다. 그중에서 빈 지갑이 인간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다고 합니다. 돈에 대한 탈무드의 격언입니다.
한 언론사에서 젊은 대학생들에게 “당신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상당수가 “돈”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물론 돈은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돈을 우상처럼 숭배하기까지 합니다. 심심찮게 들려오는 끔찍한 뉴스들을 보면 항상 돈이 이유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오늘날 사회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씁쓸합니다. 성경에서 돈과 재물 자체가 나쁘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무분별한 돈과 재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경계합니다. 돈이 무엇이기에 천륜마저 무시하게 하는 힘이 있을까요? 문제는 돈과 재물 자체가 아니라 분수에 넘치는 인간의 욕심이 잘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구체적으로 두 주인을 섬기기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상의 재물이란 결코 내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잠시 맡고 있는 관리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잘 관리했던 사람은 재물 때문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항상 큰 유혹이 놓여 있습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다 섬기고 싶은 유혹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요구는 분명하고 단호합니다. 하나만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선택하라는 우선적인 가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삶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하
십니다. 이것은 일하지 않고 게으르거나 규모 없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지 않게 되면 실질적으로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갖게 되고 걱정을 야기합니다. 그리고 걱정은 삶을 비참하고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그렇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의 괴로움을 미리 힘들어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잘 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을 잘 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하느님께서 우리를 생각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고 구원하고 그리고 행복을 주는 것은 결코 돈이나 재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분명해 졌습니다. 무엇을 먼저 생각하고 먼저 선택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마산] 하느님의 약속 :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고태경 신부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걱정한다. 요즘은 한 가지 걱정을 더 한다. 뭐 하며 놀까? 이제 의식주가 해결되니까 그 이상을 걱정하게 된다. 어쨌든 우리네 삶은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 걱정, 자녀들은 미래와 취업에 대한 불안과 걱정, 공부와 시험에 대한 불안과 걱정. 건강과 재산, 자리에 대한 걱정과 불안. 걱정을 하고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은 마음이 평화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미래는 장막으로 가려져 있다.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미리 알아서 재난을 피하고 구원을 맞이하고자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쟁이, 주술사에 의지해서 미래의 장막을 걷어내려고 했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역겨워 하는 짓이었다(신명 18,9-12). 인간과 세상의 미래는 하느님께 달려있다. 하느님은 이런 우리에게 믿음의 길을 주셨다. 그것은 약속이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을 먼저 섬기고 그분을 찾아라!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라! 그러면 나머지는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 들꽃도 예쁘게 입히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귀한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신다. 걱정한다고 해서 음식이, 옷이 내게 오지 않는다. 걱정한다고 해서 내 생명이 늘어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신다. 예수님 말씀은 구난 지침서가 아니라 신뢰와 약속의 말씀이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바를 다하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봄이 올 것이다. 매서운 추위가 우리를 휘감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봄은 찾아오고 들판에는 봄꽃과 더불어 새 생명이 움틀 것이다. 매화, 산수유 꽃, 배꽃, 벚꽃 등등. 예수님은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했다 하신다. 겨울의 혹한 속에서도 생명은 죽지 않고 있다가 봄이 오면 다시 살아난다. 하느님의 섭리와 돌봄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잊지 않으신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는다 해도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이사 49,15). 우리가 마지막까지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이다.
[인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김민중 신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처음으로 본당 발령 받아서 나갔는데, 그곳이 바로 신설본당이었다.
땅도 없이 분가가 되어서 참 난감하기만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세’라는 것도 몰라서 전세금을 주면 몇 년 후에 다시 돌려주는 지도 몰랐고, 등기부 등본이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벽에 못 하나도 박을 줄 몰랐다. 그래도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어찌 어찌해서 성당으로 쓸 상가와 아파트까지는 얻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완전 캄캄한 절벽이었다.
당장 미사를 해야 하고, 인테리어 공사를 해서 성당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건 뭐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지식도 없으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 맛있던 밥도 무슨 모래 씹듯이 느껴졌고, 밤에 잠도 오지 않고 한숨만 푹푹 쉬었다. 사람이 궁지로 몰리게 되니 정말 기도 밖에 할 게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 어떻게 좀 해 보시라고’ 따지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들이 일어났다. 때가 되니 하느님이 천사들을 보내주기 시작하신 것이다. 부동산을 하는 형제님부터 시작해서, 인테리어 공사를 하시는 형제님, 전기 공사를 하시는 형제님, 또 가구점을 하시는 분들까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숨어있던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결국 그 본당을 떠날 때에는 땅까지 장만하고 번듯한 성당까지 장만했다. 나는 한 것이 기도 밖에 없는데, 하느님은 참 많은 것을 장만해 주셨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걱정을 하면서 살아간다. 물가는 미친 듯이 치솟는데, 아이들 학원도 보내야 하고, 아프면 병원도 가야하고, 살기도 힘든데 결혼식은 많고, 조금 더 사셔도 되는데 돌아가시는 분들은 왜 이리 많은지, 들어갈 데는 많은데 나오는 데는 한정되어 있고....... 그런데 주님은 우리들에게 ‘걱정하지 마라’고 말씀하며 위로해 주신다. 결국 하느님이 모든 걸 다 챙겨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솔직히 나는 아직도 벽에 못 하나 박지 못한다. 본당 신부로는 참으로 못났다. 그래도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때가 되면 하느님이 늘 천사들을 보내 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기도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해서 빵이나 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느님은 사람들과 좋은 상황을 우리들에게 주신다. 우리들이 바치는 기도가, 하느님이 사람들을 바꾸고 상황을 바꿔 주시는 것이다. 결국 걱정 많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바로 기도이다.
[부산] 종말론적 낙천/감상효 신부
Nella Fantasia(넬라 판타지아) [춘천] 연중 제8주일/김현준 신부
우리가 잘 아는 영화 미션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입니다. Gabriel’s Oboe(가브리엘의 오보에) 로 알려진 이 곡은 아주 특별한 장면에서 사용됩니다. 남미의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과수 폭포를 기어 올라가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원주민들에게 포위된 가브리엘 신부가 아무런 동요도 없이 천천히 오보에를 조립하고 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연주를 합니다. 미지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던 바로 그 상황에 너무도 태평스러운 음악이 연주되고 선교사와 원주민들의 첫 만남이 마무리 됩니다.
Sagrada Familia(사그라다 파밀리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지어지고 있는, ‘성가정성당’이라고 해석되는 성당 이름입니다. 1882년 3월 19일 성요셉 축일에 안토니오 가우디에 의해 설계되어 건축되기 시작한 성당입니다. 1926년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이후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완공되지 않은 성당입니다. 오로지 후원자들의 성금에 의존해서 짓는 이 성당은 언제 완공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부에 건축을 위한 비계들이 어지러이 널려있고 석회와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는 이 성당을 보기 위해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관광객들은 시간을 잊어버린 이 건축물과 이 건축물을 짓는 사람들의 배포와 신앙에 경의를 표하곤 합니다.
인스턴트와 영원 사이 어디 쯤에 우리 삶이 끼어 있습니다. 누구는 인스턴트에 가까이, 또 누구는 영원에 가까이 존재합니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 ゾ昰� 입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도 없고, 영원이 주는 끌림을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을 허덕이며 십 분 어치 의미, 한 시간 어치 목표, 한 달짜리 기쁨을 위해 나를 소진하면서도 가끔은 ‘이게 아닌데’를 외치는 내 속의 나를 다독거려야만 합니다. 신앙이란 느긋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주민들이 나를 에워싸고 목에 창을 들이밀어도 그저 지금의 오보에를 즐길 수 있는 느긋함, 내가 비록 그 성당의 완공이 주는 기쁨을 향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저 지금 짓고 있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여유. 이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단기적 목표와 초단기적 성과에 목을 매야 하는 세상에서, 나노(nano)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논쟁들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향해 신앙인은 느긋함으로 하느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 아니면 내 뒷사람이, 내 뒷사람이 아니면 끝끝내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낙천으로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것이 얼마간 비이성적이라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정머리 없는 합리성과 효율성이 얼마나 우리를 가혹하게 대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영원이 하느님의 시간 단위라면 그것은 이미 합리성과 효율성 너머에 있다는 뜻입니다. 부디 영원이라는 시간 단위에 얼른 적응하게 되길 빕니다.
찾아보기: 복음을 읽으며 제목이 되는(내 마음에 새겨지는) 말씀을 찾아보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되새기기: 위의 말씀구절을 우선 먹었으니 다시 꺼내 되새김질(묵상)을 해보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의 두 주인은 하느님과 재물(마몬)이다. 하느님 숭배냐? 마몬 숭배냐? 이다. 재물은 여기서 의인화(擬人化)되고 있는데 마몬(재물/돈)이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주님의 종’이 아니라 ‘재물의 종’ 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 숭배냐? 마몬 숭배냐 하는 실존적 결단이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는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도 돈과 행복을 밀접하게 연관 짓는다.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불법으로 돈을 모은 나쁜 사람으로 본다. 사실 돈이 있어야 일상생활을 잘 할 수 있다. 잘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잘 차려 입을 수 있다. 이렇듯 돈은 인간의 생존과 품위를 위해서는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계속 더 큰 것,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에 집착하면 ‘돈의 종’이 되고 만다. 그러기에 돈은 우리가 꿈꾸는 행복을 보장하고 담보하지는 못한다.
행복은 하느님 나라에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행복은 하느님의 ‘의로움’ 안에 있고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은 ‘뜻’을 실천하며 살아야 행복한데, ‘탓’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불행하다. 특별히 ‘남의 탓’, ‘나이 탓’, ‘운명 탓’을 하며 살아간다. ‘배움에 뜻’을 두고, ‘봉사에 뜻’을 두고, ‘기도에 뜻’을 두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3뜻’ 실천으로 하느님의 ‘의로움’ 안에 들어가야 한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루카 1,38). 그래서 오늘도 성모님은 젊고 온화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계신다. 성모상이나 성모님 그림을 보라! 언제나 젊고 온화하시다. 우리도 ‘3탓’ 하지 말고 ‘3뜻’ 을 실천하면 행복과 함께 젊고 온화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니 먹고 마시고 입는 것으로 꾸며지는 ‘돈의 종’이 될 수 있는 내일은 걱정하지 말자.
결심하기: 허황된 결심이 아닌 구체적인 결심을 하고 다음날(주) 점검해보자!
교무금은 제달에, 제일 먼저, 정성껏!
주일헌금은 기쁘게, 두손으로, 꺾어서!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리’ 봉헌성가를 입으로만 아닌 마음과 손으로도 불러본다.
기도하기: 묵상 전체를 돌아보며 감사와 결심과 함께!
지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오며 모든 것을 주셨기에, 감사와 함께 받은 것을 바칠 따름입니다(1역대 29,13-14참조).
[의정부] 그 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김정일 신부 사제품을 앞둔 피정 셋째 날, 두봉 주교님은 수품대상자들에게 사제가 재물에 자유롭지 못하는 순간, 사제로서의 삶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주인에 얽매이게 된다는 의미심장한 강론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서품도 받지 않았고 사제의 삶이라곤 단 하루도 체험해 보지 않은, 이제 막 시작하려는 이들에게마저 재물부터 경계하라시니, 주교님께서는 이미 돈에 노예가 되다시피한 요즘 세상으로 처음 발을 내딛게 되는 새 사제들이 매우 걱정되시는 모양이었습니다. [부산] 마태 6, 24-34./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재물과 하느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세상 걱정과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입니다. 아, 세상걱정이냐 하느님 나라냐 그것이 문제로다 ! 세상을 따라가자니 하느님이 울고, 하느님 따라 가자니 재물이 운다는 격입니다. 그
런데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반드시 어느 한 쪽만을 택해야한다는 ‘극단적 양자택일’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양다리’를 걸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여 세상일은 뒷전으로 미뤄두고 하느님 나라만 찾으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요. 오히려 오늘 복음은 이중 흑백논리에 빠지지 않도록, <선택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판단의 기준을 제시해 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33절) » 입니다.
먹을 것 걱정, 입을 것 걱정, 세상걱정이 쓸데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 걱정 때문에 우리의 눈을 가리는 의롭지 못한 정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세상걱정을 위시한, 마치 세상을 진짜 걱정이나 해 주는 것 같은 위선과 세상의 불공정과 그 불의함을 ‘그분의 의로움’으로 찾아내자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복음은 이거다, 저거다 선택을 종용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복음은 어떤 행동강령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의로움>이라는 정신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선택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입니다. 세상걱정을 하되 그 분의 의로움을 잃지 않도록. 하느님
나라를 찾되 세상도 함께 의로운가 잘 살필 줄알도록. 그래서 그 분의 의로운 세상걱정이란 걱정이 우리 자신만의 걱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할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어줍니다.
저는 이제 새 사제들이 행여 ‘세상의 맛’에 물들까 노심초사하시던 주교님의 염려를 이해할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선택과 책임은 고스란히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분의 의로운 정신을 잃지만 않는다면, 세상걱정도 재물의 유혹도 그 어떤 것도, 우린 아무 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시작하였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도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새들과 들에 핀 꽃들을 예로 듭니다. 새들이 먹는 일에 고민하지 않아도, 먹고 살며, 들에 핀 꽃들이 자기 치장에 애쓰지 않아도, 아름답게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은 먹고 마시는 일에 또 자기의 명예를 찾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투신(投身)해야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복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먹고 마시며 삽니다. 그리고 사람은 사회성을 지녔기에 그 사회가 자기에 대해 하는 자리매김도 중요합니다. 신앙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타나는 가치관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지배하는 나라, 곧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계신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이 ‘그 의로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삶을 지배하는 원리, 곧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배려, 사랑, 용서 등의 원리를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시작에 두 주인을 함께 섬기지 幣磯募� 원칙을 먼저 제시하였습니다. 사람은 단편적이라, 한쪽을 떠받들면, 다른 한쪽은 업신여기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신앙인에게도 재물은 주인으로 쉽게 등장합니다. 재물을 많이 갖고 누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신앙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물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합니다. 그것을 가지면, 살기에 편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대우도 받습니다. 그 편함과 그 대우에 정신을 빼앗기면, 사람은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착각하고, 오로지 그것을 향해 매진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소홀히 합니다.
자유롭게 살라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입니다. 동물이 식물보다 더 자유롭다고 말할 때, 동물은 원하는 것을 찾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자유롭게 창조하셨다고 말하면서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 27)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운 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스스로 실천할 때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창조하고, 창조한 것을 사람들에게 베풀며,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탈출 33, 19 참조)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면서 그분이 고쳐주고, 용서하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그것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아 생명을 잃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그분과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그분을 제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죽게 한 사람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결정하고 그것을 집행한 사람은 로마 총독이었지만, 그 처형이 이루어지게 그분을 고발하며, 공작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임박하였을 때, 그들을 성토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죽음으로 나가셨습니다. 루가복음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당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해 용서까지 빌었다고 말합니다(23, 34).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인류역사에 많이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역사의 현장에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이 살아야 하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증오에 증오로 맞서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인류역사 안에 출현한 종교적 직관들은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살라고 가르칩니다. 얼마 전에 입적(入寂)하신 법정스님으로 말미암아 각광 받은 ‘무소유(無所有)’라는 단어가 있고, 우리가 잘 사용하는 청빈낙도(淸貧樂道)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모두 종교적 직관을 배경으로 한 인간의 참다운 자유, 곧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은, 어떤 경지를 표현하는 단어들입니다.
그리스도 복음은 무소유 혹은 청빈낙도의 경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비극이라 말하지도 않습니다.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16, 19-31)에서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비극이라 말하지 않고, “부자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도” 라자로가 배를 채우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비극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이 말하는 참다운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누어서 관대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바울로는 고린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부유해져 매우 후한 인심을 베풀게 되고, 우리를 통하여 그 인심은 하느님에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2고린 9, 11) 재물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착각을 잘 합니다. “착각은 북한에서도 자유”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재물이나 명예가 관련 될 때 우리는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의 착각을 잘 합니다. 그런 것을 얻어내기 위해 있는 신앙인 양 착각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어떤 역할을 맡으면, 그것이 섬김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신분인 양, 다른 사람들 앞에 군림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도 그런 착각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쉽게 착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착각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부르면서 그분이 아버지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빕니다. 그러면 우리의 착각들이 보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착각들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나라를 찾고 있는지, 내 나라를 찾고 있는지, 아버지의 뜻을 찾고 있는지, 내 뜻을 찾고 있는지를 반성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도 우리가 기도 안에 잊지 말아야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간청할 것은 그 믿음의 부족을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
[군종] 가장 기본적인 행복/ 박임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다 해주시기 때문이지요. 사실 군 장병들한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나라를 수호하고 가족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군 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고 마실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병사들에게 먹을 것이 없다면 어쩌면 그들은 군대 안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끔찍한 생각도 해 봅니다. 한참 젊은 나이의 병사들은 그만큼 먹을 것에 민감하고 또 많이 먹기도 합니다. 그래서 간식에 따라 매번 종교가 바뀌는 병사들도 생기게 되지요. 어떤 때는 괘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측은해 보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면…….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군인들은 한 가지 맛밖에 느끼지 못한다. 군인들이 느낄 수 있는 단 한 가지 맛은 바로 단맛이다.’라는 말입니다. 초코파이의 수요가 가장 많은 곳이 바로 군대입니다. 단맛은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효과도 있다고 하지요? 그래서인지 집을 떠나 낯선 이들과 규율에 매여 사는 젊은이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맛이 단맛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병사들이 워낙 잘 먹다보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부릅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뭘 먹일까? 다음 주에는 또 뭘 먹이지? 하는 행복한 고민도 해 봅니다. 때로는 그런 준비를 해 주는 것이 힘들 때도 있습니다.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해 고민하다 보면 늘 그 고민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준비해 주시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은인들을 통해서, 군종후원회 분들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의 아들들이 배고파 할까봐 그분들을 통해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병사들은 그저 성당에서 먹을 것을 주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잘 모르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알아주실 것입니다.
사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걱정은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고민입니다. 일단은 내가 살아야 누군가를 바라보게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고민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가장 중요한 고민이 되진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다른 고민에 묻혀버리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돈을 모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큰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얼마나 편안해 질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이지요. 이런 고민들에 묻혀 살다 보면 어느덧 예전의 생각은 잊게 됩니다. 배부르고 따뜻해서 행복했던 시간들이지요.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또 다른 더 큰 고민들을 생각하다 보면 행복은 저만치 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봅니다. 가장 기본적인 행복을 놓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늘 걱정을 하다보면 우리는 하느님과 또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잊게 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미 잊고 있을 지도 모르겠지요.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야곱의 우물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당신이 계신 곳에는 참 자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앞날의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도록 우리 마음을 이끄소서.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주제, 재물과 앞날의 걱정에 대해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칩니다.제자들은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24절은 19 – 23절의 가르침의 절정을 이룹니다. 신약성경시대의 노예는 그들의 모든 시간과 가진 모든 것이 주인에게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이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힘들뿐 아니라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느님을 섬긴다면, 우리 마음은 순결해질 것이고, 우리 안에는 빛이 있을 것이며,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좋은 것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재물을 섬기면, 우리 마음은 더럽게 되고, 우리 안에는 어둠이 있으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제자들은 하느님을 위해 근본적인 선택을 해야합니다.컴퍼스의 바늘처럼, 우리 마음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하느님을 향해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고 걱정하지 말아야합니다.(6, 25 – 34)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 앞날에 대한 걱정이 공통 주제가 되어버린 우리한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걱정하지 말라.’ 는 것은 단지 위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확고한 명령입니다. 심지어 음식이나 옷 같은 생활필수품마저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물질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세상 현실에 무감각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초점은 ‘당신의 인생은 하느님과 관계 있다.’ 는 것입니다. 인간은 더 높은 목적을 가지고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걱정하고 애를 태우는 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딸과 아들이며, 하느님이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근심하지 않습니다. 근심은 우리를 숨막히게 할 수 있습니다. (마태 13, 22) 결국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삶의 적절한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살아야 한다는 권고입니다. (필립 4, 6 – 9; 히브 13, 5)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입니다.
걱정에 대한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것을 돌아보게 합니다. 새들은 굶어죽고, 백합도 꽃이 피기 전에 마르게 되는 것처럼 그분만을 신뢰하고 그분만을 바라보며 필요한 것을 청했던 사람들도 단지 기아와 굶주림, 전쟁과 박해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눈 앞에 둔 죽음을 앞두고 공포와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과 절망 안에서 하느님께 부르짖었으나 사형의 형벌을 당해야했습니다.
그럼에도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느님은 우리한테 실제로 필요한 것을 아시고 항상 그것을 제때에 마련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6, 8 참조) 우리는 이것이 사실임을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에서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고난 중에 원했던 것과 그분에게 실제로 필요했던 것은 다른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있던 그분에게 실제로 필요했던 것은 그분을 받쳐주고, 사랑 안에서 고통을 견뎌낼 수 있게 하고, 그분의 영을 하느님에게 봉헌할 수 있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눈은 하느님을 바라보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그분의 마음은 하느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신뢰를 지니도록, 우리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5, 3) 이 되도록 부르십니다.
묵상 (Meditatio)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써 오늘 우리가 겪는 문제와 어려움과 대결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루를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다만 오늘 하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일은 태어나지 않은 꿈이고, 어제는 우리 손에 다시 쥘 수 없습니다. 미래는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오늘을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살아야 합니다.
기도 (Oratio)
내 영혼은 오직 하느님을 향해 말없이 기다리니 그분에게서 나의 구원이 오기 때문이다.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시편 62, 2 – 3)
임숙희(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 성서영성 신학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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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앞날의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도록 우리 마음을 이끄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