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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요한 1서의 말씀 2,18-21>
18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19 그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이 아무도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20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21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또 진리에서는 어떠한 거짓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 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 이영근 어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오늘은 ‘성탄 8부 내 7일’이며 2021년을 마감하는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마지막 날에 독서를 통해서는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복음을 통해서는 “한 처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
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요한 1,1)
“한 처음에”라는 이 단어는 창세기의 첫 단어이기도 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창세 1,1)
“한 처음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베레쉬트)는 ‘집’, ‘안에’(베트)라는 말과 ‘처음’, ‘시작’(레쉬트)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세상이 집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집’(베트)이란 곧 ‘하느님의 집’, ‘하느님이 거한 처소인 성전’을 의미하고, ‘처음’(레쉬트)이란 곧 ‘첫 열매’, ‘하느님의 맏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해석해 보면, ‘맏아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집인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들’(바르)이란 단어의 뜻은 ‘집의 사람’, ‘집에 거하는 사람’, 나아가서 ‘집에 거하며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온전한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아들’은 ‘아버지가 거처하는 집’인 셈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요한 14,10)
그러니 오늘 복음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말씀은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삼아 우리 가운데 사신 것을 드러내줍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요한 1,12).
곧 우리를 ‘하느님의 집에 거하는 사람,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들’이란 말의 또 다른 뜻은 ‘집을 다스리는 사람’, 곧 ‘아버지의 집을 경작하며 아버지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집안을 맡은 아드님으로서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집안입니다.”
(히브 3,6)
그러니 ‘아버지의 집을 경작하는 사람이 바로 아들’입니다.
여기서 ‘경작하다’, ‘다스리다’는 말의 히브리어(아바드) 뜻은 성경에서 주로 ‘섬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섬긴다는 것’은 ‘집의 문을 보는 것’, 곧 ‘주인의 집에 문에서 섬기는 사람’으로 ‘종’의 모습을 말합니다.
탈출기에서는 ‘주인을 사랑하여 함께 살고자 하는 종’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은 그를 하느님께 데리고 가서 문짝이나 문설주에 다가 세우고,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는다.
그러면 그는 종신토록 그의 종이 된다.”
(탈출 21,6)
이처럼, ‘종’은 항상 주인의 집의 문에 서서 주인의 음성을 듣고 주인을 섬기는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도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7-8).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는 자녀인 우리는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진정으로 섬기는 삶이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에는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자녀가 되어야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4)
주님!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제 발길이 당신을 향하여 있는지, 제 마음에는 당신의 평화가 들어와 있는지를 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제 안에 생명의 빛을 불어넣으셨으니 이제는 죽음의 어둠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제가 당신 생명으로 새로워지고 세상에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온 세상이 생명의 빛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요한은 마귀 들렸고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인가?>
오늘 복음은 소위 ‘로고스 찬가’라고 불립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심, 곧 빛이 어둠에 내리심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 이상하리만큼 ‘세례자 요한’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빛을 증언하였던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그만큼 크게 보았던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은 빛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빛을 보았던 세례자 요한만이 빛을 증언하는 유일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과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사뭇 다른 것처럼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루카 11,18-19)
그래서인지 우리 가톨릭교회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큰 성당을 짓는 등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닮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이미 술 취한 사람들에게 또 술을 만들어주신 것도 어느 정도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를 수 있을까요?
정말 예수님은 먹고 마셨고, 세례자 요한은 단식만 했을까요?
예언자가 어떻게 증언하는 분과 닮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태석 신부님이 예수님이라면 그분의 세례자 요한과 같은 분이 ‘울지마 톤즈’를 감독하였던 ‘구수환 피디’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구수환 감독은 가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불교신자로 알고 있습니다.
유튜브 ‘체인지그라운드’에서 ‘부활’이라는 울지마 톤지 제2탄을 개봉하고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밖에서는 잘 모르시지만, 가톨릭 단체로부터 ‘왜 저널리스트인 당신이 신부님의 삶을 일반화시켜서 (돈벌이로) 이용을 하느냐?’라고 굉장한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소송까지 당했습니다.
신부님에 대해 제가 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데, 신부님을 이용해 돈벌이한다는 기사들이 주요 일간지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부님처럼 살지 않으면 사람들이 안 믿는 거예요.
제가 신부님처럼 살아야 신부님 이야기를 했을 때 ‘아, 저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니까 동시에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태석 신부님에게 누가 되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거의 개인 생활은 없습니다.
요즘 하루 생활이 뭐냐면 대중들을 만나고 해석해주고 이거에요.”
사람들은 누군가를 증언하는 사람이 그 증언하는 대상과 닮았는지를 먼저 봅니다.
그래서 닮지 않았다면 믿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의 삶이 그리스도와 닮아있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통해 돈벌이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구수환 피디는 또 말합니다.
“이 영화 찍는데 3억 들어갔고 수입이 5천만 원이었습니다.
손해 보는 게 왜 즐겁고 행복한가?
사실 코로나 때문에 많은 분이 영화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게 흥행이 되었다면 제가 더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신부님 팔아서 돈 많이 벌었어!’ 이런 이야기가 제일 두려웠습니다.
이런 잡음이 안 나와 좋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쉽게 나의 이야기를 전하지 마라, 뛰어다니며 직접 전해라!’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돈과 상관없이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전하고 사람들의 생각을 변하게 만드는데 이런 기회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구수환 피디는 영화를 찍고 하도 가톨릭에서 항의가 많이 들어와서 회사에서 다른 곳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신부님을 놓지 않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마인드를 바꿀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추적 60분’과 같은 고발 프로그램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신부님의 섬기는 삶을 보여줌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 이태석 신부님을 증언하는 이들은 그분이 가르친 아이들이었습니다.
구수환 피디는 다시 톤즈로 가서 2010년 만났던 아이들을 다시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10년 만에 만난 아이들은 의대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2010년 당시 한 60여 명 들어갈 수 있는 교실에 130명 정도가 들어가 열띠게 수업하는 모습을 찍은 적이 있는데 그때 구 피디가 물었습니다.
“너희들 하루하루 먹기 힘든데, 왜 의대에 가려고 하니?”
“의대에 가려고 합니다.”
대부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구 피디가 또 물었습니다.
“돈도 없는데 왜 의대에 가려고 하니? 의사는 왜 되려고 하는데?”
그들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의대에 간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가 아무리 가난해도 ‘그래도’ 의대는 공부를 굉장히 잘하는 학생들이 간다고 합니다.
의아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산골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에서 그 4~5년 만에 어떻게 59명의 아이가 의대에 갈 수 있었을까?’
이것이 굉장한 기적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의대에 다니는 아이들을 만나고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자, 공무원, 대통령 경호실 등에 근무하는 다른 많은 아이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잘 성장했구나!’라는 정도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센인 마을에 가서 진료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놀란 이유는 진료할 때 먼저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그들은 먼저 ‘악수’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너 왜 자꾸만 악수하니?”
“이게 신부님 진료 방식이에요.”
신부님이 쓰신 글에 이렇게 나온다고 합니다.
“의사와 환자의 만남은 아픈 사람과 치료해주는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다.”
진료가 끝나고 나서 한센인 환자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10년 만에 의사가 손을 잡아주었는데, 느낌이 어떻습니까?”
“신부님이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몸에 전율이 오는 것 같았고,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우리가 의사 이태석입니다’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 이것이 진정한 부활이구나!’라고 생각이 되어 영화 제목을 ‘부활’로 바꾼 것입니다.
빛이 있고 빛을 증언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빛을 증언하는 이가 빛과 다를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일 것으로 추측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빛과 너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세속-육신-마귀를 광야에서 이기시고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겸손으로 사셨습니다.
그분은 머리 뉠 곳조차 없으셨고 성당을 짓기보다는 돌아다니시며 공간만 있으면 아무 곳에서나 설교하셨습니다.
첫 미사를 하시기 위해 성당을 짓지도 않으셨습니다.
남의 집을 빌려 미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부자가 되고 권위적으로 된다면 더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봐야 합니다.
‘어둠’이란 사람이 되신 ‘사랑’과 반대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법과 반대되는 어둠은 곧 재물에 대한 욕심, 무절제한 생활,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러니 가난하고 절제하고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빛을 본 사람의 상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지금 나의 모습이 세례자 요한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고 혹은 그 모습으로 더욱 다가가지 않는다면 분명 나는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보다 먼저 우리가 닮아야 할 대상은 그분을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증언하는 자는 증언하는 대상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증언자와 닮는다면 그다음은 증언하는 대상과 닮으려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잊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알 수 없게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생명, 그리고 빛>
한 해의 끝자락에 왔습니다.
‘코로나19’와 싸우다가 모두가 지쳤습니다.
마음이 추운 가운데 다시금 더 나으리라는 희망을 갈구하며 마무리를 합니다.
들리는 소식은 맑고 밝은 소리보다는 어둡고 가슴 아픈 일들이 많습니다.
대선과 총선이 기다리고 있지만 후보자들에 대한 호감도는 바닥입니다.
그래도 일어서야 합니다.
힘을 내야 합니다.
절망의 구렁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어둠을 비추는 빛이 필요합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관심, 서로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 경청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됩니다.
좀 더 힘을 냅시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시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큰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감정의 기복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며 당신의 품에 머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을 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대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속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하게 주님의 품을 읽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새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목말라 해야 하겠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3-5) 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리워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요한1,10-11).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밝게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요한 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숨을 쉬는 곳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생명은 곧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기를 빕니다.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늘의 명, 하늘의 말씀, 하늘의 법칙이 살아있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느님의 복을 누리십시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비록 우리는 곤궁하고 빈약하지만 주님의 충만함으로 인해 우리는 거룩해지며 완전해집니다
세월은 이토록 속절없이, 그리고 덧없이 흐르고 흘러 또다시 우리는 다사다난했던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튼실하고 뿌듯한 결실이 아니라 하찮고 초라한 수확 앞에 큰 구멍이라도 숭숭 뚫린 듯 가슴이 시린 연말입니다.
역사상 유래없이 혹독하고 참담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온몸으로 느끼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강력한 대재앙 앞에서 우리 인간이란 존재 참으로 나약하고 부실한 존재라는 것.
때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제한적이라는 것.
이토록 암담한 시기, 길고도 지루한 대재앙의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절실한 노력이 있습니다.
매일 하느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것.
부단히 그분의 크신 자비를 청하는 것.
하루하루를 기꺼이 견뎌내는 것.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우리의 얼굴을 통해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
성무일도를 바치다가 길고 긴 시련의 터널을 지나는 오늘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이 되는 성경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여러분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고 흠 없게 지켜주시기 빕니다.”
(데살로니카 1서 5장 23절)
하늘의 성인 성녀들께서,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그리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큰 환난 속에 살아가는 오늘 우리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계심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어려움이 클수록 우리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완전하게 흠없이 지켜나가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시편 작가의 한 말씀은 또 제 마음을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 젊은 시절의 허물과 죄악을 다시는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시편 24)
지난 한 해 천천히 되돌아보니 온통 잿빛입니다.
속 빈 강정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말로는 만리장성이라도 쌓는 듯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한 것 없어 너무나 초라하고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꼼꼼히 돌아보니 주님의 은총으로 충만했던 한해였습니다.
죽을 것만 같았는데, 보십시오.
그럭저럭 살아지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불안불안하지만 견뎌내다 보면 그럭저럭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갑니다.
이 혹독한 시절도 시간과 더불어 흘러갈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곤궁하고 빈약하지만 주님의 충만함으로 인해 우리는 거룩해지며 완전해집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당신의 큰 자비와 은총으로 채워주시는 주님의 큰 사랑에 깊이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이 한해와 작별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1-4)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1요한 2,18)
‘한처음’은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시간’이라는 것은 천지 창조 때에 만들어졌으니까 ‘한처음’은 시간이 생기기 전의 시간, 즉 ‘영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 전부터 영원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계시다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오셨고,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신 다음에는 승천하셔서 영원하신 하느님과 함께 계십니다.
(동시에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종말’은 인간의 시간이 끝나는 때이고, 우리가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시간입니다.
인간의 인생은 하느님 시간 속에서(영원 속에서) 아주 짧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는 모두 흙에서 생겨나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허무하고 유한한 존재이지만(창세 3,19),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천해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은(루카 20,35)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 속에서 살게 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7)
그렇기 때문에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면서 끝나는가, 아니면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가는 각자 스스로의 선택과 실천에 달려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나기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
(시편 90,2-6)
그러나 하느님의 보호 속에서 사는 사람은 먼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새잡이의 그물에서, 위험한 흑사병에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당신 깃으로 너를 덮으시어, 네가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
그분의 진실은 큰 방패와 갑옷이라네.
너는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밤의 공포도, 낮에 날아드는 화살도, 어둠 속에 돌아다니는 흑사병도, 한낮에 창궐하는 괴질도.”
(시편 91,3-6)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요한 2,15-16)
지금 세상 사람들은 ‘일상의 회복’만을 바라고 있지만, 우리 신앙인은 ‘회개’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말고, 회개를 통해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삶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단순히 연말연시라는 이유만으로 새해 계획이나 인생의 계획을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야고 4,13-16)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지상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도 겸손해야 하고,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나의 시간’이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약간의 시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중’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되, 지금 즉시 떠날 것처럼 준비하여라.”라는 교회 격언이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날을 ‘영원’으로 이어지는 첫날이면서 동시에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오늘’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곳에 들어갈 기회가 아직 있고, 또 예전에 기쁜 소식을 들은 이들은 순종하지 않은 탓으로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였기에, 하느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날을 정하셨습니다.
앞서 인용한 대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다윗을 통하여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하고 말씀하실 때에 그리하신 것입니다.”
(히브 4,6-7)
이미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서 후회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론 후회할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은 ‘후회’가 아니라 ‘회개’를 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이라는 날은 회개하라고 주신 날입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제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제 저질렀던 어리석은 실수나 잘못들을 바로잡을 기회는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올지 안 올지, 우리는 모릅니다.
오늘 회개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또는 연말연시라고, 세속 사람들처럼 들뜨지 말고 차분하게 자신의 신앙생활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아직도 참안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던 일을 마치고 쉬신 것처럼, 그분의 안식처에 들어가는 이도 자기가 하던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히브 4,9-11)
- 전주교구 금암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2021년 한해를 마치며 - “단 하나의 소원은 하느님과의 일치”>
2021년 12월 31일, 한 해의 끝날에 서니 감회가 깊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내일은 2022년 1월 1일 새해 첫날, 끝은 새로운 시작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어제 일몰 사진이 한눈에 들어와 즉시 사진에 담았습니다.
아침의 일출 사진과는 참 좋은 대조를 이뤘습니다.
아침 일출이 희망과 기쁨으로 찬란히 빛났다면, 저녁 일몰은 평화와 행복으로 고요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일출처럼 살다가 일몰처럼 인생 마치고 아버지의 집에 귀가하는 죽음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누구나 소망하는 바일 것입니다.
일출의 희망과 일몰의 행복 인생을 생각하며 ‘바다’라는 동요도 한번 불러보기 바랍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저녁바다 갈매기는 행복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고기를 싣고
넓고넓은 바다를 노 저어 와요, 넓고넓은 바다를 노 저어 와요.”
두 가지 반갑고 고마운 깨달음이 저를 어제부터 은은한 기쁨에 젖게 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날로 기쁨을 더해 갈 수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날로 아버지의 집에 귀가할 죽음의 날이, 아버지를 뵈올 날이 가까워진다는 그런 기쁨이 어제부터는 마음에 깊고 고요한 평화를 주었습니다.
또 하나 기쁨의 깨달음은 무수한 영혼들의 기도의 힘입니다.
하루하루 얼마나 많은 분들의 소원을 담아 미사를 봉헌하는지 모릅니다.
‘이 영혼들의 기도의 힘이 1년 365일 날마다 밤 01시 전후로 일찍 잠깨어 일어나 강론을 쓰고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구나!’, 어제 소스라치게 깨달으니 참 힘이 났습니다.
‘내 존재 자체가 미사가 되어야 하겠다, 예수님을 통하여 직접 하느님과 소통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 역시 간절했습니다.
어제 코로나 전담 병원에서 중환자들을 돌보게 됐다는 의사 아들을 위해 생면부지의 자매가 내년 1월 1일날 미사 봉헌을 신청했고 주고받은 메시지입니다.
“조마리아 자매님! 예수님 위로와 평화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드림”
십자로의 예수님 부활상 사진과 곁들여 보낸 메시지에 대한 응답입니다.
“반갑습니다. 신부님의 존함이 낯익어 생각이 났습니다. 매일 좋은 묵상글을 올려 주셔서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주님 사랑 가득한 행복한 날 되세요.”
어딘가 세상 곳곳에서 알게 모르게 함께 하는 무수한 도반들이 매일 강론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용기백배 큰 힘이 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 누구나 내면 깊이에는 하느님과 일치를 향한 갈망(渴望)이, 열망(熱望)이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에서만이 비로소 영혼은 참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의 격려 말씀도 힘이 납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진리에서는 어떠한 거짓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오늘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바로 진리입니다.
예수님과 일치되어 갈수록 우리 또한 진리가 되고 하느님과의 일치도 깊어집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깊은 인격적 관계를 뜻합니다.
이런 이들은 절대로 그리스도의 적들에게 현혹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요한복음 서두의 장엄한 로고스(말씀) 찬가가 예수님의 정체를 환히 밝혀줍니다.
성탄절 낮미사 복음이자 매해 마지막 날 12월 31일 복음이 바로 로고스(말씀) 찬가(요한1,1-18)입니다.
요한복음의 요약이자 무궁한 깊이의 온갖 신비의 열쇠와 같은 복음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바로 우리 인간의 본질은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생명이자 빛이신, 진리이자 은총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맞아들임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생명과 빛으로, 은총과 진리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 이보다 큰 기쁨과 행복도 없습니다.
그러니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절감(切感)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해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다.”고 성 아타나시우스는 말합니다.
성 이레네오는 “하느님의 영광은 바로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가는 신화神化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성소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끝으로 2021년 한 해를 마치며 다시 한번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단 하나의 소원을 아뢰는 헌시(獻詩)로 강론을 마칩니다.
헌시의 단어 하나하나 깊이 마음에 새기며 한 해를 마감하시고 이 헌시의 소원이 이뤄지는 새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나, 하느님의 되고 싶다”>
“나
하느님이 되고 싶다
모세처럼
하느님과 대면하여 대화 나누고 싶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말씀이
당신의 빛이
당신의 영이
당신의 품이
당신의 길이
당신의 종이
당신의 벗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배경이
당신의 생명이
당신의 은총이
당신의 신비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지혜가
당신의 인내가
당신의 자유가
당신의 기쁨이
당신의 정의가
당신의 평화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위로가
당신의 격려가
당신의 선물이
당신의 자랑이
당신의 행복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찬미가
당신의 감사가
당신의 영광이
딩신의 천국이
당신의 모두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 남고
나는 온전히 사라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이, 당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이
마리아 성모님이
성요셉이
성아브라함이
성모세가
성요한이
바로 그러하였나이다
내가
하느님이 될 때
전인적 치유가
온전한 참나(眞我)의 구원이 이뤄지겠나이다
내 소원
단 하나 이것뿐이옵니다
오, 주 하느님!
일편단심(一片丹心) 당신만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 2021.12.8.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에 드린 헌시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몇 년 전, 체코 여행을 갔다가 독특한 성당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소위 해골 성당으로 불리는 곳으로 6만 구의 해골과 뼈로 성당 내부를 치장해 놓았습니다.
성당 안의 유골은 14세기 전후 흑사병의 창궐과 이어진 전쟁으로 인근에서 숨진 자의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골과 뼈로 성당 안을 치장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죽음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입니다.
죽음을 피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기억할 때 삶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고대에서부터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연회에서도 식사 중에 미라가 된 시체를 수레에 실어 들어온다고 합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지만, 죽음은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세 때에도 이런 생각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묘지를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시켜서 죽음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죽음을 피할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을 기억하며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지금을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12월 31일. 2021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살 더 먹는 것이 싫다고 피할 수가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2021년을 기억하면서, 2022년을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말씀의 육화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셨던 말씀, 그런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을 전해줍니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두를 내려놓고 우리와 함께하셨음을 전해줍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누군가를 돕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도 내어놓고 남을 돕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당신 스스로 완전히 낮추어 나약하고 부족한 모습의 인간이 되시고, 자신의 생명 전체를 내어놓으셨습니다.
이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우리 모두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 사랑을 쫓아 나의 이웃들에게 온전히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득했던 2021년을 기억하면서, 2022년에는 우리 자신이 사랑을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해로 만들면 어떨까요?
2021년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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