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한 후 처음으로 쓰는 연대기라 내용도 부실하고 스샷도 부실할 수도 있겠지만. 많은 양해부탁드립니다. ㅎ
기본적으로 노멀에 개척자는 200. 럭키네이션은 켰습니다. (실력때문에 하드/퓨리어스는 시도를;;)

1399년 가을. 평화롭던 중부 이탈리아를 깨운 소식은 (분열기의) 로마 교황 보니파키우스 9세의 우르비노 공국 침공이었다.
아무 명분도, 사전 예고도 없이 친밀한 이웃국가를 침공한 것은 교황령 내부에서도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지만 보니파키우스 9세는 이러한 반발을 무시하고 직접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에 나섰으며, 교황의 친정에 고무된 교황군은 두 달 도 채 되기전에 우르비노 공국군을 격파하고 안코나를 포위했다.

안코나는 교황군의 포위 속에서 1년 넘게 방어하며 선전했지만, 주위 국가들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 도시의 물과 식량은 떨어져갔고, 결국 1401년, 우르비노 공국은 교황령에 항복, 병합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이로써 교황령은 로마냐-로마가 이어지게 되어 안정적인 영토관리 및 방어가 수월해지는 이점을 얻게 되었고, 우르비노 지역 또한 얻게 되었으나 (비록 이탈리아에서 제일 맛 없는 땅 들 중 하나지만) 댓가 역시 치루게 되었다.

바로 당시 나폴리 왕국과 함께 이탈리아의 최대 세력중 하나이던 밀라노 공국의 '경고장' 이었다.
밀라노 공은 교황령의 급작스런 침공과 세력확대에 상당한 우려를 보였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은 공국으로써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보니파키우스 9세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도, 프랑스 왕국의 왕도 아닌 일개 밀라노 공작에 불과한 치의 공개 경고장에 (아비뇽의 대립 교황으로 인해 땅에 떨어진 교황권을 공개적으로 조롱하는 행위로 보였으므로) 심한 분노를 보였고, 그는 후일 실력으로 밀라노 공작의 무릎을 꿇리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바램은 그의 대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는데, 3년 후 보니파키우스 9세가 선종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 교황령에서는 나이에 따른 자연사라며 부정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교황령의 갑작스런 세력확대에 위험을 느낀 주변국들이 모의해 교황을 암살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어찌되었든 전임 교황은 선종했고 콘클라베에서는 새로운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선출되었으며 , 204대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행정능력은 떨어졌지만 군사, 외교 분야에 있어서는 평균 이상이었다고 평가받는 교황이었다.

이 시기 이탈리아의 정세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는데 우선 샤르데니아를 놓고 제노바와 아라곤 왕국이 벌인 전쟁에서는 샤르데냐를 병합하는데 성공한 아라곤이 리구리아를 점령,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고, 몇해 전 교황령에 경고장을 날린 오만한 밀라노 공국은 스위스를 집어삼켜 영토를 확장했다.
공국 남부에서는 공화정 지지자들이 공국의 지배에 항거해 대규모 반란을 시도, 시에나 일대를 장악하고 피사로 북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듬해 만투아는 모데나 점령전에 교황의 도움을 빌렸고 교황은 만투아의 동맹국으로 참전했지만, 이미 모데나에는 피렌체 공화국의 깃발이 걸려있었다. 쫓으려 했던 닭이 여우가 채여간 꼴이었다.
이 시기에 아라곤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제노바는 아라곤의 강요에 의해 코르시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시에나의 반란군은 피사일대로 점령지를 확대하였다.

교황령이 만투아 군의 페라라 공략을 지원하는 동안 교황령 내부에서 대규모의 부패행위가 적발되었고 율리우스 2세는 정치적 반발을 감수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시간이 흐르며 부패문제는 해결되었고 교황령은 정치적 안정속에서 관료제를 확산시키는 새로운 법령을 제정했다.
교황의 지원에 힘입어 페라라의 항복을 받아낸 만투아는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페라라를 평합하게 된다.

하지만 이듬에 실시된 새로운 법령이 중앙 집권적 요소를 다수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령 내 지방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특히 로마냐의 귀족들은 실력으로 이 법안을 무효화 시키려 했다.
그들의 대응은 교황령이 사전에 방지하지 못할 만큼 신속했고 로마냐의 귀족들은 사병과 용병으로 이루어진 7000의 귀족 연합군을 편성해 반란을 시도했다.

이에 대응해 율리우스 2세는 이듬해인 1410년 1월 1일, 군대의 훈련을 대폭적으로 강화시키는 국가적 제도를 채택했으며 자신이 직접 반란군과 동수인 7000의 토벌군을 이끌고 로마냐로 진군했다.

안코나와 로마냐 일대에서 수 차례 치뤄진 전투끝에 교황은 10월의 로마냐 전투에서 반란군 맹주 에기디오 그리티를 포함해 반란에 모의한 수십명의 귀족과 5000에 가까운 반란군을 포획했다.
생포된 반란군 대부분은 성당 건축을 위한 1~3년의 노동형이라는 비교적 양형을 받았으나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에게는 최소 전 재산 몰수 및 추방이라는 형벌이 내려졌고 에기디오를 포함한 십 수명의 주동자들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가족들은 대부분 반란에 항거했던 친 교황파 귀족들의 농노로 신분이 강등되었다.

물론 이러한 강경한 처벌은 다른 많은 귀족들의 불만을 불러왔지만 교황은 그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예정대로 처벌을 집행했다.

반란군에 대한 형 집행이 모두 종료되고 반란의 기억도 잊혀져 갈 무렵, 교황령은 금전적, 행정적 지원을 포함한 직물공예 진흥정책을 발표했다.
이 시기까지도 피사, 시에나 일대의 반란은 제압되지 않고 있었다.

이듬해 교황령에는 다소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교황령에 감히 경고장을 보내었던 오만한 밀라노 공국의 공작 조반니 마리아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7개 선제후국의 전원 찬성이었고 찬성국 중에는 교황령의 동맹국인 만투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교황 율리우스의 관심은 이탈리아의 남부로 향해있었기 때문에 율리우스 2세는 별 불만을 표하지 않고 마리아1세에 제관을 씌워주게 된다.
첫댓글 만투아가 유니언 잭 처럼 보엿긔
오랜만에 보는 HT ㅇ
컴이 안좋아서 DW는 너무 느려요.;;; 요즘 모두들 CK2 하시는데-. 저는 할만한 컴도 안되고 앞으로는 시간도 없을것 같아서-. 플레이한 연대기 몇개만 올리려고요.;;
올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