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 걸어간다
최형심
벽 속에는 지지 않는 별들이 있다. 벽 속에는 달빛 목초 향기가 있다. 벽 속에는 끝없이 흘러가고 싶은 투명한 물길이 있다. 벽 속에는 오래도록 침묵해야만 했던 분노가 있고 벽 속에는 이름을 잃은 고요도 있다. 아무도 내면을 들여다 봐주지 않을 때 사람은 벽이 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을 때 마주 앉은 사람은 벽이 된다. 누군가는 오래도록 불러주지 않을 때 벽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아무나 어루만지기만 해도 스르르 녹아내리는 벽이 생겨난다. 벽은 사실 벽이 아닐 수도 있다. 푸른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은하수로 이루어진 벽과 별 그림자 사이로 헤엄치는 멸치 떼를 꿈꾸는 벽과 운석지대를 지나는 보랏빛 달로 물들인 벽과 새벽 그을음 위에 남은 기침 소리를 담고 있는 벽, 그리고 무심히 서로를 지나치는 무수한 벽들…… 벽이 걸어가고 있다. 아니, 별이 걸어가고 있다. —계간 《詩로여는세상》 2023년 겨울호 --------------------- 최형심 /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8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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