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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타락청년v
[충남 서산 = 윤형진,김형준 인터뷰/정리 = 윤형진] 1977년 3월 20일, 한국과 이스라엘의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전이 서울 운동장에서 열렸습니다. 한국의 차범근이 선제골을 터뜨리고 후반 이스라엘의 말밀리안이 동점골을 뽑아 1-1로 맞선 상황. 종료 3분을 남기고 박상인이 천금같은 두번째 골을 잡아냈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른 상황이었고, 4만여 관중들이 숨죽인채 주심의 종료 휘슬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이스라엘 골문 앞 40여미터 지점에서 한줄기의 광선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골키퍼 소리노프의 손을 지나 골망을 흔듭니다. 환호하던 관중들의 시선이 집중된 장본인은 바로 최종덕. 등번호 12번이 박힌 그의 유니폼에 모든 관중들이 주목하던 그 순간. 말레이시아인 코 관 키아트 주심이 길게 종료 휘슬을 울리면서 한국은 강적 이스라엘을 제치고 월드컵 최종 예선에 진출하게 됩니다. 서산 특집의 세번째 편으로 1970년대 슈터로 명성을 떨쳤던 최종덕 감독의 선수 시절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최 감독은 중앙고-고려대를 거쳐 포항제철, 충의 등에서 활약했으며 홍콩 프로리그에서도 뛴 바 있는 1970년대의 대표적 스타 플레이어였습니다. - 최감독님의 선수시절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이곳 서산이 고향이신데, 언제 서울로 올라오셨던 겁니까? 해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미중 1학년 때까지 이곳에 있다가 서울 중앙중학교로 전학가서 중앙고등학교와 고려대를 나왔습니다. 74학번인데, 이는 전학 과정에서 1년이 늦은 때문이죠. 73년과 74년 아시아청소년대회 때 중앙고 2,3학년(졸업반)으로 참가했습니다. -축구를 시작하게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어렸을때부터 축구를 좋아했지요. 해미라는 지역이 축구 인기가 높았고, 생활화되었던데다 저보다 20~30년 선배들이 축구를 많이했습니다. 지금은 80 정도 되신 노인이 옛날에 서울에 가서 축구선수 했던 사람도 있고, 제 1회 아시아 청소년 대회때 청소년대표 선수로 발탁되셨던 김종익 선수도 있고요. 김종익 선생은 대회 출전 직전 부상으로 아쉽게도 대회에는 참가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당시 충남 서산이란 지역에서의 축구 환경은 어땠습니까?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이곳이 축구가 굉장히 성행했던 곳입니다. 해미중학교 운동장이 잔디밭이었습니다. 잔디도 좋았고, 잔디밭에서 공을 차면서 재미를 느꼈죠. - 현역 시절엔 수비수였음에도 슈터로 명성이 높으셨습니다. 축구를 시작하고 시골에서 공차다가 비교적 어렸을 때 서울에 올라가니까, 중앙고등학교 축구하던 선배들이 대개 5,6세 정도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아원 출신들도 있었고요. 지금도 그렇지만 중학교때는 1,2년 나이 차이가 기량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그러다보니 당시에 킥력이 모자라다 싶어서 제 스스로 방법을 하나 개발했었죠. 공에다 물을 묻히면 가죽이 서서 굉장히 무거워지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킥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래서 킥에 자신이 생겼고, 또 골대 양쪽에다 깡통을 달아놓고 프리킥 연습을 하면서 정확도를 높이기도 했었죠. 그후엔 대표팀에서도 프리킥은 제가 전담을 했었습니다. - 1977년 이스라엘과의 월드컵 예선전에 대한 기억이 남다르실 듯 합니다. 당시 서울에서 이스라엘을 3-1로 격파했을때 국민들의 열기가 뜨거웠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당시엔 이스라엘한테 많이 발목을 잡혔었죠. 이스라엘한테 이기면 호주한테 지고, 반대로 호주한테 이기면 이스라엘한테 지고 하던 시절이라 좀 더 감격이 컸다고 생각됩니다. - 선수시절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무엇입니까? 쿠웨이트와의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전때였습니다. 시작하자마자 5분만에 김호곤 선수(현 축구협회 전무)가 퇴장당했어요. 2-1로 지고있는 상황에서 경기종료 시간이 다 되어 갔습니다. 전광판은 꺼졌는데, 하프라인에서 프리킥을 줬고, 심판은 그거 끝나면 호루라기 불려는 태세였습니다. 그때 하프라인 근방에서 때린 롱킥을 골문 모서리로 집어넣었서 2-2로 극적인 무승부를 이뤘습니다. 경기종료후 관중들이 빨간 벽돌을 집어던지며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 당시의 원정 텃세는 어땠습니까? 그날도 대단했어요. 운동장에서 못나와서 경찰들 호위하에 에워쌓여서 경기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죠. 그때 신문에 보면 쿠웨이트 골키퍼 집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더군요. 그런 상황이니 우리가 호위를 받아 나온것은 당연했습니다. - 1980년 쿠웨이트 아시안컵이 남북대결에서 승리를 하는 등 기념비적인 대회였는데, 남북대결이었던 준결승전 당시 전반 20분 경에 상대선수가 찬 공이 손에 맞아서 페널티킥을 허용한 기억이 있습니다. 한골 허용 후 선수들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그 이전, 78년 아시안 게임 결승에서 만나기도했는데, 해가 가면 갈수록 기량이 떨어지긴 하더군요. 당시엔 호텔에서 북한 선수들 만나면 대화도 많이 했고, 먹을 것도 주고 했었죠. 그런데 경기하는 걸 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당시 남북대결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1978년 당시엔 대단히 살벌했죠. 처음에 북한과의 경기 할 때는 총들고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명동에 있는 로얄 양복점에서 단복을 맞춰 입고 갔는데, 'Royal'이라고 영문으로 쓰여있는 것을 보고 북한 선수들이 "밥도 못먹는게 외제입는다"며 뭐라고 하고. 제가 당시에 아파트에 살아서 집사진을 보여주니까 "미국에서 찍어온 사진 아니냐"고 우기기도 했는데, 점점 마음을 열더군요. 보통 같은 숙소에 있으니까 밤에 북측 감시원들이 잠들면 몰래 방으로 와서 라면도 달라고 하고...김치도 달라고 했습니다. - 당시 교우했던 선수들 중에 이름이 기억나거나 후에 다시 만났던 사람이 있습니까? 이름이 기억나는 선수는 없고...윤명찬 감독과 홍콩서 한번 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홍콩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북한이 싱가포르와 월드컵 예선 원정 경기를 치를때 그 경기를 보러 싱가포르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윤명찬 감독도 있더군요. - 당시 보도를 보면 아시안 게임 결승을 앞두고도 북한 선수들의 이름 조차 제대로 알기 힘들 정도로 연막전이 심했다고 합니다. 그 때 북한과의 경기는 정말 정보전이었죠, 명단은 감추고 하는 통에 전혀 정보가 없었습니다. - 해외원정 에피소드가 있으십니까? 말레이시아에서 78년 메르데카컵 이라크와의 경기였는데, 경기전 이라크선수들이 다가와 "이 대회에서 우승하면 우리 정부에서 선수들에게 캐딜락 승용차를 한대씩 준다고 했다. 그러니 사정 좀 봐달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정상적인 경기를 했고 후반에 저도 한골을 터뜨려서 2-0으로 이겼었죠. - 1975년 메르데카컵에서도 방글라데시와 대전 당시 비슷한 예가 있었죠? 예. 당시에 방글라데시가 전패로 꼴찌가 확정적이었고 우리도 결승 진출이 결정된 상황인데다 방글라데시 국내에서 정변이 있었다더군요. 경기전에 자기 나라 특산품으로 보이는 등나무로 만든 바구니 등을 가져와서 "잘 좀 부탁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네골만(?) 넣고 경기를 끝내주기도 했답니다. | ||||
- 현역 은퇴후 유공 코치를 거쳐 이후 동국대감독으로 가셨죠? 사실 그때 가려고 해서 동국대를 맡았던 건 아니고, 동국대가 너무 침체기라고 1년만 맡아달라고했는데, 그후 3개월만에 LG에서 감독직 제의가 와서 수락 하려했습니다. 그런데 동국대 선수들이 "감독님이 아니면 모두 축구를 그만두겠다" 공갈을 하더군요. LG 한웅수 사장이 저를 내정해놨었는데, 결국 거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현역 시절 친분이 두터웠던 선수들은 누구입니까 ? 허정무와 친합니다. 못할 얘기 없는 친구죠. 고교 시절엔 신우성(前 부산 감독)이라는 선수까지 축구 3인방이라고 해서 아주 친하게 지냈었죠. - 연고전에 대한 기억은 어떻습니까? 신입생으로 들어가서 봄철에 벌어진 3경기를 모두 연대에 졌다. 그래서 당시 이공대 운동장에서 우리가 훈련하면 학생들이 지나가다 돌을 던지기도 했는데, 그해 여름 대학선수권대회에서 이기기 시작한 후 계속 이겼고, 고연전에서도 4년 내리 승리한 기억이 있다. - 스타 대접을 받았던 현역시절은 물론이고 출신교도 고려대로 인맥도 많으신 편인데,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을 보면 다른 스타 출신보다는 힘겨운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는 스스로 택하신 길입니까? 그런것도 그렇지만, 축구발전을 위해서는 대표선수도 하고, 경력이 화려한 사람일수록 지방으로 내려가 활약해서 아래서 위로 올려줘야 된다고 봅니다. 한국 축구계 풍토는 현역 시절 좀 했다는 사람들은 만들어놓은 자리에 들어가서 편한 역할만 하려고 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좋은 경력의 사람들이 지방으로 내려가서 밑바닥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을때 축구가 발전하게 됩니다. 우리는 좀 기형적이라 '대표팀 아니면 프로팀'이라는 인식이죠. 프로팀도 각성해야 된다고 봅니다. 프로팀이 1년에 100억넘게 써도 수익은 없는 상황입니다. 구단이 자생할 수 있어야죠. 회사가 일방적으로 투자하는 것은 조만간 끝난다고 봅니다. - 선수 시절을 회상해보면 힘들었던 적이 있으셨을듯 합니다. 중학교 때 별명이 '꼬마'였습니다. 그 때는 축구를 안하려고 도망다니기도 했었죠. 해미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집에서도 워낙 아버지가 축구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했었다. 해미중학교도 수석으로 들어갔거든요. 그때 경찰공무원이셨던 아버지가 판검사 하라고 그렇게 바라셨는데, 축구를 선택하게 된 것은, 당시 학도체육대회가 대구에서 있었는데, 해미중에 선수가 없어서 반강제로 출전케 되었죠. 대회 도중 중앙중 감독이 저녁때 숙소로 찾아와서 서울로 전학와서 선수 생활을 하라고 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서울로 스카웃이 된거죠. 그 말 한마디에 서울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에와서 그말을 하니까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화를 내시면서 반대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심지어 집에서 옷까지도 감춰놓으셨습니다. 몰래 도망갈까봐서요. 궁리 끝에 당시 농고생이었던 형의 작업복을 훔쳐입고 서울로 도망갔습니다.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서산에 내려오질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숙소 비는날은 숙소 지키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고교때는 도서관 대장 관리를 하면서 계속 학교에서 지냈습니다. - 상당히 험난한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 축구 선수로의 저를 아버지가 인정한 것은 청소년 대표가 되었을 때입니다. 서울로 아버지가 올라오셔서 "기왕 시작한 거니까 계속 하라"는 말씀을 해주시는데,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 이곳 서산에도 아직 형제들이 남아계십니까? 저는 10남매중(8남 2녀)중 다섯째고, 아들중에는 3남입니다. 다른 형제분들은 다 서울에 있고, 바로 밑동생만 서산에 같이있습니다. - 고려대 입학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을듯 합니다. 원래는 국민은행으로 가려고 했었습니다. 스카웃 제의가 있었고 계약금도 괜찮아서 가고는 싶었는데, 고려대학에서 김상용위원장이 오셔서 중앙고와 고대는 같은 재단이니까 "최종덕이 고대 안보내면 중앙고 축구부를 해체시키겠다"고 반협박을 해서, 결국 고대를 갔습니다. 사실 은행간다고 예비고사 신청도 안해서 일반계로 신청을 해서 합격, 고대에 입학할 수 있었죠. 입학하기까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부산에서 청소년대회 최종선발전이 있어서 그게 끝난 뒤에 고대에서 유도선수 같은 사람들이 우리를 잡으러 왔습니다. 당시 감독이었던 유판순 선생님이 "여기에서 이탈하면 청소년대표에서 제외시키겠다"고 공갈을 하시는 거에요. 유판순 감독의 영도하에 경기장을 빠져나와 고대에서 마련해준 차에 거의 반강제로 태워져서 어디론가 출발하더군요. 도착한 그곳이 대구였고, 대구 한성여관에서 스웨터랑 청바지로 갈아입고 다시 전북 고창으로 이동했습니다. 고창에 있는 염전에 잡혀서 한달은 있었습니다. 함께 잡혀온(?) 인물들 중에 허정무와 이광은(전 프로야구 LG 감독)이 있었죠. 셋이서 "함께 고대로 가자"고 의기투합하던중 우리를 감시하던 선배들이 맹세의 증표로 담뱃불로 팔을 지질 것을 요구하더군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담뱃불로 지지면 고대 가고 안지지면 안가냐!"면서 저는 끝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이 막상 담뱃불로 팔까지 지져가며 고대행을 맹세했던 허정무와 이광은은 또 연대로 갔어요 (웃음). 결국에는 대부도까지 끌려가서 고대 시험보기 전날 밤까지 근 석달 동안 잡혀 있었습니다. 당시엔 시험은 안봐도 사람만 있으면 데려올 수 있었기 때문에 고3 선수들을 납치해서 스카웃하는 일이 많았었어요. - 기억에 남는 지도자가 있다면? 김정남 감독을 개인적으로 존경합니다. 한가지 아쉬운건, 결단력이 있어서 할 이야기 하시면 참 좋은데, 너무 점잖으셔서 말을 아끼시는, 그게 좀 흠이지요. - 故 함흥철 감독은 어떻습니까? 함흥철 감독은 축구계의 대부죠. 아마 그분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전략/전술적 면은 몰라도 선수들을 포용해주시는 것이 정말 대단했죠. 덕장입니다. 한번 믿음을 가진 선수를 끝까지 믿어주시는 스타일이죠. 반면 처음에 눈에 들지 못하면 꽤나 고생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 동국대를 맡으실 당시 안효연을 스카웃해서 화제가 되었었죠. 안효연은 1학년때부터 눈여겨봤습니다. 동국대랑 연습게임 당시 보니까 정말 좋은 선수더군요. 그래서 용돈도 주고 하면서 발판을 닦았죠. 동국대 감독 당시 3학년은 안 뽑았습니다. 주로 1,2학년들 중에서 유망주들을 스카웃해왔었죠.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부평고 재학중이던 송찬호라는 선수를 뽑아놨는데, 발목이 조각조각 부러져서 선수 활동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죠. 부평고 감독이 어떡할거냐고 하길래,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라고 동국대로 데려와 3학년 때부터 뛰게 해서 울산 현대미포조선을 보냈습니다. - 마지막으로 축구인생의 철학이나 목표라면 무엇이 있으십니까? 남들은 그럽니다. "왜 이런 시골에서 묵는 걸 고집하느냐"고 묻는데, 지금 축구협회 쪽에서도 제의가 온적 있었고요. 제 자랑 같지만, "내가 여기 나가면 이 팀 깨진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 욕심대로 갈 순 없다'는 것이죠. 오랫동안 고집부리면서 하다보니까.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했죠. 제 신조가 그렇습니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다가 숟가락 들고 가는건 싫다. 밥상을 내가 차리면 차렸지' 1970년대를 풍미했던 스타 출신이면서도 고향에서 묵묵히 축구 발전을 위해 애쓰고 계신 최종덕 감독님의 행보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후원자의 등장으로 활기를 띠게 된 서산 오메가 FC와 최 감독님의 건승을 기대해 봅니다. |
첫댓글 안습이다;;조회수의 압박:;
아앗... 내가 좋아하는 서산시민구단... 이름좋은데..ㅠ.ㅠ
감독님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