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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적인 재능은 노력보다는 타고 나야 하는지 바흐의 선대에도 많은 음악가들이 있었지만
바흐의 20명의 자녀 중에서도 성공한 음악가들이 많이 있지요.
바흐는 1707년 먼 친척의 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불과 13년 후 1720년에 마리아는 병사하고 다음 해 1721년에 16세나 연하인 소프라노 가수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하여 13명의 자녀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약 반수의 자녀는 어렸을 때 사망하고
나머지 자녀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서 장남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차남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막내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등은 음악사에도 남는 음악가들입니다.
바흐는 물론 생존시에 이미 유명한 음악인이었지만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음악이 거의 잊혀져 가고 있었는데
그의 음악이 빛을 보게 된 것은 사실상 1802년에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겔이 발표한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이라는 바흐에 대한 연구서가
전 유럽에 바흐 광풍을 몰고 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멘델스존이 20세 때인 1829년에 1729년에 초연되었던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백년만에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지휘하며 연주하므로 바흐 음악이 부활되었다고 해요.
다음 해 1830년에는 스페인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e Casals: 1876-1973)가
13세 때 아버지와 함께 고서점에 들렸다가 악보 한 묶음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작곡된지 거의 200년 가까이 묻혀 있던 바흐의
"Unaccompanied Cello suites: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었습니다.
카잘스는 이 악보로 12년 동안이나 운지법을 연구하고 연습하여
12년 뒤에 연주하였고 다시 35년이 지난 1936년에 이르러서야
이 곡을 녹음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오늘날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첼리스트들에게는
바이블같은 곡이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지요.
유럽의 어디에 가든지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많이 보이는데 일본인들은
통역하는 사람까지 같이 와서 가이드의 설명을 통역으로 들으면서 진지하게
모든 전시물들을 대하는 모습이 중국인들과는 판이하게 달라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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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는 종교음악, 세속적인 칸타타, 성악곡, 관현악, 협주곡, 실내악, 건반악기곡, 등
오페라를 제외한 당시의 거의 모든 영역의 음악을 작곡하였습니다.
'바흐'라는 의미가 '시냇물'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베토벤도 소년시절에 스승에게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곡집>을 배우고는
"바흐는 작은 강이 아니라 큰 바다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바흐를 존경했고
바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바흐의 음악은 다이나믹하거나 현란하지 않지만 잔잔하게,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듯, 조용히 마음 속으로 다가오지요.
현대 음악의 근원이 되는 바흐음악...
바흐라는 클래식 음악의 시냇물이 흘러 흘러 3백년도 더 지난 오늘날에는
5대양이 되어 지구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2014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독일의 국력, 저력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독일은 클래식 음악가들을 많이 배출한 나라입니다.
물론 유럽의 여러나라, 프랑스나 이태리, 체코, 오스트리아, 폴란드에도
우리가 이름을 꼽을 수 있는 유명한 음악가가 많지만
음악의 어머니로 일컬어지는 헨델, 그리고 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바흐,
베토벤, 브람스는 물론 멘델스존, 슈만, 그리고 바그너...등등
그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한 나라이므로
독일인들의 클래식 음악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할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음악을 하는 딸 내외한테 흘려들은 이야기이지만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현재의 지휘자를 결정하기 전에
베를린 필의 지휘자 사이몬 레틀에게 러브콜을 여러번 보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가 미국의 가장 전통적인 오케스트라의 러브콜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베를린 필에서의 위치가 자랑스럽고 확고한 것이었겠지요.
명색이 독일의 음악기행을 오랫동안 꿈 꾸다가
베토벤, 슈만, 헨델, 바흐, 멘델스존의 자취를 찾아 다니려고 계획하고 나선
일주일간의 짧은 여행은 실수 투성이었고 다 돌아보지도 못하고
아쉬움이 많았던 여행이었습니다.
짧은 기간동안 돌아 다니고서 감히 독일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할 수 없지만
그동안 다녔던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조금 다른 것이 느껴진 것은 사실입니다.
우선 독일인들은 남자나 여자 모두 키가 큰데 잘 생기지는 못했고...왠지 불친절했습니다.
동생은 다니면서 내내, 독일에 오니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 동독과 서독으로 양분되었던,
독일의 어두운 역사가 자꾸만 생각나고 거리에서도 건물에서도
의자에서도 식탁에서도, 스푼에서도... 어디를 가나 독일냄새가 나는 것같다..라고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냉정하고 딱딱한 분위기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실지로 호텔이나 식당 같은 곳에서 문 하나도 힘을 들이지 않고는 잘 열리지 않을 정도로
무겁고 단단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어디서나 문 앞으로 다가 가기만 하면 스르르 열리는 문이
습관이 되어서 그랬는지 쉽게 열려고 가볍게 밀었다가 다시 뒤로 물러나 힘을 내서 문을 열었으니까요.
모든 실내장식도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었고 둥글고 부드러운 분위기는 별로 없었습니다.
화장실의 변기 뚜껑까지 네모진 것으로 된 호텔도 있어서 그럴 때마다
'독일놈들'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고...동생은 말하면서도
바흐, 헨델, 베토벤, 슈만...등의 자취를 찾아 다니다 보니
그들의 음악이 이 모든 것을 감싸안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더군요.
물론 동감이었고 자매가 함께 다녔던 독일에서의 일주일...
꿈만 같고 벌써 아련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습니다.
바흐의 Toccata and Fugue in D minor & Cello suite No. 1 in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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