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모자
석야 신웅순
얼마 전 고등학교 졸업 반세기 행사가 있었다. 그날 내 친구 박○○는 젊은이처럼 캡모자를 꺼꾸로 쓰고 나타났다. 놀랐다. 키도 크고 배도 없고 아주 늘씬했다. 순간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럽기도 했다. 패션 감각이 아주 뛰어난 시골 촌놈 실버 친구이다. 우리는 왜 그런 파격을 생각 못했을까.
“나도 저렇게 해볼까.”
나는 통통하고 키도 작고 품도 없다. 물론 용기도 없다. 나이 들면 이미지 변신을 해야하는데, 깔끔해야 추레해 뵈지 않는데 알면서도 감각이 둔하니 늘 뒤쳐지기 일쑤이다.
어느날 청바지 입고 안경과 캡모자, 마스크까지 쓰고 외출했다. 모자는 꺼꾸로 쓸까하다 제대로 썼다. 일부러는 아니었으나 어쩌다 패션이 되었다. 지인은 그런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먼저 불렀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깜짝 놀랐다.
“아니 청년인 줄 알았어요.”
휘둥그레진 것을 보니 정말 놀란 것 같았다. 정작 놀란 건 그가 아니고 나였다.
“정말요?”
그랬더니 힘주며 정말이라고 한다.
“아니, 내가 그리보이다니요.”
집에 가서 아내에게 자랑했다.
“지인이 나보고 젊은이 같대.”
아내는 별 말이 없다. 같잖은 소리 말라는 얘기이다. 조금은 머쓱했다.
요새 나는 쓰지 않던 모자를 자주 쓰고 다닌다. 물론 햇빛 가리개용이기도 하지만 이유는 딴 데 있었다. 조금씩 빠지는 머리 때문이다. 젊었을 때 왜 나이든 분들이 빵모자를 쓰고 다니나했었다. 빵모자는 멋있는 예술가들이나 쓰고 다니는 줄 알았었다.
내가 지금 딱 그 짝이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머리 정수리 쪽이 조금씩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는 나만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런 날이 내게 닥친 것이다. 그래도 나는 빵모자는 쓰고 싶지 않다. 머리가 커서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왠지 예술가 흉내내는 것 같기도 해서 늙은이 같기도 해서 그런 것들이 싫다.
그래서 택한 것이 캡모자였다. 젊은 가수들이 캡모자를 쓰고 랩을 하며 몸을 엎었다 뒤집었다하며 이상한 춤을 춘다. 그 모습이 참 예쁘더라. 이제 캡모자는 젊음의 상징물이 되어 버렸다.
우리에게 아직은 청바지, 칼라셔츠, 캡모자, 안경 이 정도는 걸쳐도 괜찮을 듯싶다. 절뚝절뚝 어디 청바지가 어울리며, 구부정 허리 어디 칼라셔츠가 어울리며, 다 빠진 옆머리 어디 캡 모자가 어울릴까. 지팡이, 중절모, 안경만이 봄빛 따듯한 벤치 옆을 지킬 날이 앞으로 일이십년이다. 그리 멀지 않았다. 더러 노익장을 과시하며 한껏 멋 부리며 살아도 뭐라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늙은이 주책이면 어떠랴. 멋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성질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행사 때 캡모자 쓰고 나타난 그 촌놈 친구의 모습이 불현 스쳐간다.
저녁 노을빛이 참으로 곱다. 우리는 지금 곱게 익어 붉게 물들어가는 그런 저녁 노을빛이 아닌가.
-2023.3.29. 석야 신웅순의 서재, 여여재
첫댓글 캪모자에 검은 안경!
내친구 한놈도 만날적마다 많은 변신을하고 나오는 녀석이 있었슴니다
한참은 나는새도 떨어뜨린다는 곳에서 명함한장없이 전화번호를 수시로 바꾸어 연락이 잘 닿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임에는 용케도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이제는 이빨빠진 사자가 되여 질긴것을 피하는 것을 보느라면 세상사에서 영원은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힘이센 사자가 언젠가는 가장 연약한 개미의 밥이 됩니다
즐길수 있으면 마음껏 즐기시라고 건방진 말씀을 드립니다
재미있게 읽었슴니다 다음글이 기다려집니다
석봉(춘암)
'동물의 세계에서 가장 힘이센 사자가 언젠가는 가장 연약한 개미의 밥이 됩니다'
표현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나이 들면 이미지 변신이 필요합니다.
늘 젊게 사시길을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