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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 원문보기 글쓴이: 청년회장
홍암(弘岩) 나철(羅喆)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제2세 교주 즉 도사교(都司敎)로 취임된 사람은 무원 김 헌(金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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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원의 처음 이름은 교헌(敎獻)이며 경기도 수원(水原) 출생인데, 천품이 재주와 덕을 다 갖추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식견이 넓어, 일찍부터 여러 사람들의 추앙(推仰)을 받았다. 18세 되는 고종 22년(서기 1885년)에 벌써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나가 벼슬하기 시작하였으며,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홍문관(弘文舘) 수찬(修撰)·이조(吏曹) 정낭(正郎)·장악원정(掌樂院正)·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갑오경장’ 후에도 법부(法部) 참서관(參書官)겸 고등재판소 판사·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궁내부비서관·동내부윤(東萊府尹)등의 내외 요직을 역임하면서 국사에 진력하였다. 또 이 동안에는 문헌비고(文獻備考) 찬집위원(纂輯委員)·국조(國朝) 보감(寶鑑) 감인위원(監印委員)으로 문헌비고와 국조보감의 편찬간행(刊行)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김무원이 대종교를 신봉한 것은 융희 4년(서기 1910년) 봄부터의 일이었는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그는 교내에 있어서도 남도(南道) 본사(本司) 전리(典理)·총본사 전강(典講)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민족 종교 발전에 헌신 노력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평소 연주하여 오던 민족의 전통과 사실(史實)을 밝혀 신단실기(神檀實記)·신단민사(神壇民史) 등을저술 간행하여, 우리 상고사와 민족정신을 천명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대종교 총본사 펴낸 ≪대중교중광60년사≫ 제2편 1장 3절 무원종사(茂園宗師)의 조천(朝天)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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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서기 1916년 8월 제1회 교주 나홍암이 구월산에서 세상을 떠나며 무원에게 도통(道統)을 전수(專授)하는 유서(遺書)와 함께 따로이 그에게 직접주는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겨 이 세상을 복되게 하고 이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여줄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보화당(普和堂 ; 김무원의 거처하는 집 이름)보시오. 아사달(阿斯達)의 한배님 오르신 곳에 들어와서 이 세상을 위하며, 이 백성을 위하여 한번 죽기를 판단하니, 죽음은 진실로 영광이로되, 다만 다시 만나서 즐거워함을 얻지 못하고 천고의 이별을 지으니, 보통 인정으로 헤아리면 혹시 섭섭할 듯하나 죽음에 다달아서 한번 생각하건대, 선생의 지신 짐이 매우 무겁고 크오니, 오직 힘써 밥을 더하시와 이 세상에 복이 되며, 이 백성을 다행하게 하소서”(운문은 한문, 뜻 번역은 박창화(朴昌和) 펴낸 ≪홍암신형조천기(弘岩神兄朝天記)≫에 따름.)
이러한 유명(遺命)에 의하여, 그해 9월 1일(음), 서울의 남도본사(南道本司)에서 제2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한 김무원은 수난기에 처해 있는 대종교 발전에 대한 중대 책임감을 가지면서 나홍암의 뜻을 계승하여 종교 발전과 민족사 중광(重光)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교내 중진들과 방책을 협의하고, 사회 유지들과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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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제강점하에 있는 한반도 안에서는 도저히 소기의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으므로 이듬해 봄에 서울 남도 본사에는 호석(湖石) 강우(姜虞)·석농(石儂) 유근(柳瑾) 등 간부진으로 은인 자중해가며 교무를 시행하게 하고 본격적인 활동 장소는 동만으로 옮겨서 만주 및 연해주(沿海州)의 중·노령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며,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기로 하였다. 따라서 그해 어천절(御天節) 음 3월 15일에는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에 있는 총본사에서 제1차 교의회를 열고, 종래 소루한 점이 있던 교의 홍범(弘範)과 종문(倧門) 규약을 증보하여 교무 운영에 제도적 완벽을 기하고, 교직자 및 교우들을 격려해가며 포교에 힘을 경주한 결과 3, 4년간에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전교도수 40여 만을 세이게 되었다. (당시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50만정도로 추산된다. 그중 40만이 대종교도였다. 대종교가 국내에서 다른 종단처럼 활동이 가능하였다면 교도가 얼마가 되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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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미년 3·1 독립운동에 따른 일본 제국주의 백해와 이듬해 소위 적들의 ‘경신대토벌(庚申大討伐)’의 참화는 대종교계에도 큰 손실을 주었다. 국내에서도 서울 남도 본사의 석농 육근(柳瑾) 등이 대종교계를 대표하여 각 종교 사회단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해가며 운동을 진행하고, 만주 지역에서는 백포(白圃) 서일(徐一) 등이 직접 독립군을 조직 지휘하여 대일 항전을 주도하였던 만큼, 저들의 대종교인에 대한 박해는 도처에 심혹하였다. 그중에도 적의 대병력이 횡행하며 잔학행위를 자행하던 만주 지역에 있어서는 10만의 교우가 희생당하고, 수십처의 시교당이 소실 폐쇄되는 지경에 이르니 교계의 일대 타격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도사교 김무원은 적 세력과 행패의 상황을 유의 관찰해가면서 교세 부흥과 육영(育英)·저술(著述)등의 사업을 끈기 있게 진행하였다. 각 도 본사(各道本司) 아래는 다시 지역에 따라 1,2,3의 지사(支司)를 두고, 각 시교당을 해당 지사에 속하게 하여 교내 조직을 정비하며, 또 청년회 소부계(蘇扶楔) 등 방계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을 넓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적의 만주 대학살의 참화가 지나간 서기 1922년경부터는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펴서 포교는 물론, 교육·계몽에도 나섰는데, 서울 우남도본사의 음악 강습소, 노령 블라디보스톡의 여자 야학부, 동만 동 2도 본사의 역사강습회, 동일도 본사의 교리강수회(敎理講修會)와 해항(海港, 해삼위) 청년회, 용정(龍井)청년회 등의 활동은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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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무렵에는 종경회(倧經會)와 진단사(震檀社)를 통하여 신리대전(神理大全)·신사기(神事記)·회삼경(會三經)·신단민사(神檀民史)·배달민족(倍達民族) 강역(彊域) 형세도(形勢圖)·신가집(神歌集) 등 많은 경전·역사·지리 서적을 널리 간행 배포하였으며, 이런 서적들이 많이 학교·강습소의 교재로도 쓰여지니, 적의 학살 파괴행위로 하여 흩어졌던 거류 동포들도 다시 스습하여 산업에 안도하고, 교문을 찾아들게 되었다.( ≪대종교중광60년사≫ 제2편 제1장 2절 동만의 교의회, 2절 무원종사(茂園宗師)의 포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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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서기 1922~23년은 만주지역을 위시하여 국내·중국관내·노령 쌍면에서도 대종교의 교세가 크게 떨쳤다. 10개소의 지사(支司)와 80여개처의 시교당(施敎堂)이 복설 또는 신설되고, 4백여 명의 교직자와 50여 명의 순교원(巡敎員) 및 시교원이 임명 배치되어 활기 있게 활동을 펴나가4), 배달 겨레의 역사를 강설하고, ‘한얼노래’의 힘찬 노랫소리 울려 퍼지는 곳에 겨레의 가슴마다 조국 광복의 희망을 다시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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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기 1920년에 호석(湖石)강우(姜虞)는 서울에 남도(南道) 본사(本司)를 재건하고 많은 유지들을 포섭하여 교세가 일시 크게 떨치기도 하였으며, 호석은 그후에 다시 마이산(魔尼山) 제천단(祭天壇)·구월산 삼성사(三聖詞)등 단군유적을 봉심하고 부근에서 수도 선교하는 등 국내에서의 포교 및 민족 문화 선양에 크게 기여하였다. (≪호석 문집≫ 제4권 부록 중 강진구(姜鎭求) 지은 가장(家狀) 및 조동윤(趙東允) 지은 행장(行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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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세 도사교 무원(茂園) 김헌(金獻)이 서기 1923년 11월에 56세를 일기로 영안현(寧安縣) 남관(南關) 대종교 총본사 수도실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다음 그 유명(遺 命)에 의하여 이듬해 정월 도사교 즉 제3세 교주로 시무하게 된 사람은 단애(丹崖) 윤세복(尹世復)이었다.
경상남도 밀양(密陽)이 고향인 윤단애는 일찍부터 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잡지 못하여 고심하던 중 ‘경술국치’ 직후 서울에서 대종교의 도사교 나홍암(羅弘岩)을 만나 역사·종교·시국 등에 관한 담화를 들은 다음에는 개연히 깨닫고 느낀 바 있어 곧 입교하여 시교(施敎)의 임무를 맡게 되었으며, 본명 세린(世麟)을 세복(世復)으로 고치고, 아호 단애(檀崖)를 쓰게 된 것이 모두 이때부터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살길이 숭조 보국(崇祖報國)의 정신과 사상으로 서로 협동하는데 있다고 명심한 단애는 30세 되는 이듬해 봄에 곧 가산을 정리하여 가지고 만주로 건너가 환인현(桓仁縣)에 자리를 잡고, 포교와 독립운동을 병행하기 시작하였다.( 김용국(金龍國)의 ‘대종교와 독립운동’≪민족문화논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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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대종교 지사(支司)의 설치와 함께 사재(私財)로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고 이동하(李東夏)·김영숙(金永肅) 등 지사들을 맞이하여 청년자제들에게 신학문과 민족 정신을 교육하다가, 일제의 책동으로 학교가 포기되자 다시 자리를 백두산 아래 무송현(撫松縣)으로 옮겨 시교 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3·1운동을 전후하여서는 다시 흥업단(興業團)·광정단(廣正團) 등 광복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직접 항일 투쟁에도 참가한 바 있었던 것이다. 또 안도(安圖)·화전(樺甸)·반석현(盤石縣) 등지에도 교당을 설치하고 민족정신 선양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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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주 각 지역으로 전전하며 시교와 항일투쟁에 여념이 없던 단애이니만큼 실지 대종교 총본사 인사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제1세 교주 나홍암(羅弘岩)이나 제2세 교주 김무원(金茂園)과도 ‘경술국치’가 있는 해에 한번 면대가 있은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심과 애국심을 교내 및 재만주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것이기 때문에 김무원이 영안현(寧安縣)에서 세상을 떠날 때, 유서로 그에게 도사교 승진을 명하게 되었으며, 단애 역시 김무원의 유명(遺名)을 받들어 따라, 화전현(樺甸縣)에서 대종교 총본사 소재지인 영안현 남관(南關)으로 나가 44세되는 서기 1924년 정월 제3세 교주의 중임을 맡게 되었으며, 이미 전 도사교 무원 및 서백포(徐白圃)의 종사(宗師) 추숭식(追崇式) 등을 거행하고 또 홍범(弘範) 규제(規制)를 시의(時宣)에 맞게 개정하여 새로운 포교의 기반을 다지기도 하였다.( ≪대종교중광60년사≫ 제2편 3장 1절 단애종사(檀崖宗師)의 도통전수(道統傳授) 및 제4편 3장 단애종사의 조천(朝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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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난의 역경(逆境)은 엎치락 뒷치락하였다. 서기 1925년에는 다시 침략주의 일제(日帝)의 유도와 위협에 넘어가 장작림(張作霖)이 만주에 있는 우리 거류민들을 취체하는 소위 삼시조약(三矢條約)을 일본측과 체결하게 되었는데, 조약중에는 다시 부대조항으로, “대종교의 중요간부인 서일(徐一)이 대한 독립군의 수령으로서 그 교도를 이끌고 일본에 항전하였으니, 대종교는 곧 반동 군단의 모체로서 종교를 가장한 항일단체이다. 중국에서는 영토책임상 이를 해산시켜야 한다.” 는 내용까지 첨가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따라 길림성(吉林省) 독군(督軍)겸 성장(省長)인 장작상(張作相)은 대종교 포교 금지령을 발포하게 되었다. 적 일제측의 침략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한 요구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대종교의 포교금지령을 버리기까지 한 중국측의 태도야말로 오랜 동안 친구 관계를 가져온 우리 민족에 대한 배신 무의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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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하여 대종교에서는 교인 지도자인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으로 화전(樺田) 윤복영(尹復榮)·청사 조성환(曹成煥) 등 제인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길림성 당국 및 동삼성(東三省) 정권에 대하여 그 철회 교섭을 전개하였지만, 일본 세력에 겁을 집어먹고, 적 일제의 간계에 빠진 동삼성 당국이 끝내 협조하여 주지 않으니, 1929 년에는 다시 남경(南京)의 중국정부와의 직접 교섭에 나서서 겨우 해금령(解禁令)의 발포를 보게 되었다. 따라서 이 동안 대종교 관계자들의 심신상의 고통은 비할 데 없이 컸으며, 모두들 불여의한 경우에 대처할 비상한 각오로 시기를 기다렸다. 1928년에는 총본사를 영안현(寧安縣) 해림(海林)에서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으로 옮기니, 이 밀산 당벽진은 일찌기 백포(白圃) 서일(徐-)이 독립군을 거느리고 유진하였다가 자정 순국(自靖殉國)한 곳이다. 또 교통이 불편한 벽지 한촌(僻地寒村)이지만 일찍부터 대종교인이 많이 집단 거주하는 곳이요, 한편 중·노 국경지방이어서 만일의 경우에는 지경을 넘어 일시 노령 방면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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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 박찬익의 노력으로 중국정부의 해금령이 있게 되고, 현지 당국자들도 이를 마다할 수 없게 되니, 여기서 대종교의 도사교 윤단애(尹檀崖)는 교일들에게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는 보존하여야 한다”는 나홍암(羅弘岩)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직접 순회 선교의 길에 나설 것을 언명하고, 총본사의 일을 성하식(成夏植)·최익항(崔益恒) 등 간부진에 일임한 다음, 촌촌(村村) 전진하면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여 곳곳에 교당을 세우고, 1934년에는 하르빈시로 나가 김응두(金應斗)·박관해(朴觀海)·김영숙(金永肅)·김서종(金書鍾)등 여러 사람의 협조를 얻어, 하르빈시 안평가(安平街)에 대종교 선도회를 설치하게 되니, 많은 동포들이 다시 대종교 교당을 찾아 단군 성조의 위덕을 추모하면서 민족정신을 가다듬게 되었다. 이 무렵 윤단애의 그 애교 애족의 각고노력이야말로 필설(筆舌)로 다 형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종교 중광 60년사 제3편 1장 1절 포교 금지평과 해금(解禁)교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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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단애를 위시한 간부진의 각고 노력으로 대종교의 교세는 재건의 길을 걷게 되고, 많은 재만 동포들이 교당으로 모여 국조단군초상 앞에 참배하고, 민족 정신을 가다듬게 되었으며, 대종교 간부진에서는 보다 더 폭넓은 선도와 설교로 거류 동포들의 결속을 기도하였다. 그중에도 서기 1939년에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해산(海山) 강철구(姜鐵求) 등의 주선, 활동으로 대종교 서적 간행회(刊行會)를 조직하고 뒤이어 삼일신고(三一神告)·신단실기(神檀實記)·한얼노래 등 많은 서적을 출판 배포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특히 안백산(安白山)은 일찌기 국내에서 무역업상의 백산상회를 조직하고 국내외 독립운동 기관 및 지도자들의 연락과 자금 조달 업무를 담당하여 오던 인물로써 진작부터 대종교에 입교한 바도 있었지만 서기 1933년부터는 만주로 들어가 발해고도(渤海古都)인 목단강성(牡丹江省) 동경성(東京城)에 자리 잡고 발해농장을 경영하면서 대종교 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옮기는데도 주선의 힘이 컸지만 이때는 서적간행회 회장으로 여러가지 서적 간행에 앞장서서 많은 서적의 간행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때 발간된 서적 중 ‘한얼노래’ 4천부는 본국 서울에서 출판되었던 것이니 원격한 지역에서도 서로 긴밀한 연락이 취하여졌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대종교총본사 펴낸 ≪대종교 중광 60년사≫ 제3편 1장 2절 총사(總司)의 북만은피(北滿隱避)와 하얼빈선도회 및 김명길(金明吉, 대종학원 중등부 졸업생) 증언 참조.)
뿐만 아니라, 발해 고국의 옛 궁전터에 천진전(天眞殿 ; 단군 초상을 봉안하는 집)을 지을 계획도 세우고 목단강성 당국의 인가를 얻어 준비를 진행하며, 대종학원(大倧學園)를 신설하고 청소년 교육도 진행하니, 대종교를 중심으로 한 거류 동포들이 사기는 크게 진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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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일제(日帝) 당국은 대종교의 예상 이상의 발전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당황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종교 자체가 민족주의 조직이라고 일찍부터 보아오던 만큼 이러한 대종교의 발전은 곧 항일 독립운동의 진전이라고 보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혹은 교인을 가장한 밀정을 투입하여 교계의 동향을 정탐하고 혹은 표면으로 교회 사업을 협조하는 체하면서 고위 관리를 공식회의에 참석시켜 간부진의 언동을 내사하면서 탄압할 조건을 찾기에 급급하였다. 종교운동을 통한 국내와의 연락 관계에 대하여도 세심한 주의로 내용을 조사하였다. 그런데 천전(天殿) 즉 단군 초상을 모시는 천진전의 건축 준비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인 임오년(서기 1942년) 겨울, 서울의 교인이요, 한글학자인 이극로(李克魯)로부터 도사교 윤단애에게 보낸 서신 중에 동봉되었던 아래와 같은 문서가 결국 저들의 탄압의 구실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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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天運)은 빙빙 돌아가는 것이다. 한번 가고 다시 아니오는 법이 없다. 날마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밤이 가면 낮이 오며, 또 춘·하·추·동 4철은 해마다 돌아온다. 이와같이 영원토록 돌아가고 돌아오는 법이 곧 한얼님의 떳떳한 이치이다. 이런 순환하는 천리(天理)에서 인간 사회의 변천도 끊임없이 생긴다. 부자가 가난하여지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매 귀한 사람이 천하여지고, 천한 사람이 귀하여진다.동방(東方)에는 밝은 빛이 비치었다. 이는 곧 대종교가 다시 밝아진 것이다. 한동안 밤이 되어 지나던 대종교가 먼동이 튼 지도 30여 년이 되었다. 아침 햇빛이 땅위를 비치어 어둠을 물리치는 것과 같이 대종(大倧)의 큰 빛이 캄캄한 우리의 앞길을 비치어 준다. 어리석은 뭇사람은 제가 행하고도 모르며, 또 모르고도 행한다. 직접으로는 만주 대륙과 조선 반도를 중심하여 여러 천만 사람이 대종교의 신앙을 저도 모르는 가운데 아니 믿는 사람이 없고, 간접으로는 이웃 겨레들도 이 종교의 덕화(德化)를 받지 아니한 이가 없다. 삼신(三神)이 점지하시므로 아이가 나며, 삼신이 도우시므로 아이가 자란다고 믿고 비는 일이 조선의 풍속으로 어디나 같다. 이 삼신은 곧 한임·한웅·한검이시다· 황해도 구월산에는 삼성사(三聖祠)가 있고, 평양에는 숭령전(崇靈殿)이 있고, 강화도(江華島) 마니산(摩尼山)에는 제천단(祭天壇)이 있다. 발해(渤每)시대에는 태백산(太白山)에 보본단(報本壇)을 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었다.이와같이 삼신을 믿고 받들어 섬기는 마음은 여러 천년 동안에 깊이 굳어졌다. 시대와 곳을 따라 종교의 이름은 바뀌었으나, 하나님을 섬기고 근본을 갚아 사람의 도리를 지키는 교리(敎理)만은 다름이 없고 변함이 없다. 종교는 믿는 마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야 하며, 또 형식은 존엄을 보전할 만한 체면을 잃지 아니하여야 된다. 사람의 이상은 소극적으로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체면을 유지할 만한 천전(天殿)과 교당도 가지지 못하였으며, 또 교회의 일군을 길러낼 만한 교육기관도 없다. 이는 우리에게 그만한 힘이 없는 것도 아니요, 성력이 아주 부족한 것도 아니다. 그 동안에 모든 사정이 우리의 정성과 힘을 다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제는 때가 왔다. 우리는 모든 힘을 발휘하여 대교(大敎)의 만년 대계를 세우고 나아가야 된다. 이 어찌 우연이랴. 오는 복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도 큰 죄가 되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된다.만나기 어려운 광명의 세계는 왔다. 반석 위에 천전과 교당을 짓자. 기름진 만주 벌판에 대종학원을 세워서 억센 일꾼을 길러내자.우리에게는 오직 희망과 광명이 있을 뿐이다.
일어나라 움직이라.
한배검이 도우신다.
[개천(開天) 4275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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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널리 펴는 말’은 실은 대종교 교당의 본전(本殿)이라고 할 수 있는 천진전을 짓는 데에 협력할 것을 권고하는 글로써 동포들이 모두 일어나서일할 때가 왔다는 의미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무엇으로든 구실을 잡으려 하던 적 일제측은 이글 중에 있는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문귀를 “봉기(蜂起)하자. 폭동하자”로 날조하여 가지고 ‘널리 펴는 말’이란 다름아닌 ‘조선독립선언서’라고 하면서 드디어 윤단애를 위시한 대종교 간부진에 대한 검거 선풍(旋風)을 일으켰던 것이니, 저들의 포학 무도하고, 간휼(奸譎) 무법한 소위를 미루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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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지역에서 대종교를 중심으로 한 민족정신, 민족문화 선양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한편으로는 국내의 민족주의 지도자들과도 긴밀한 연락이 지어지고 있음을 간파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드디어 괴뢰 만주국의 관리들과 부동하여 대종교에 대한 탄압과 지도자들의 검속을 결행하게 되었다. 위에서 보인 ‘널리 펴는 말’의 천전(天殿) 거축에 합심 분발하자는 문귀를 “蜂起하자.” “暴動하자”는 문귀로 마음대로 고쳐가지고 그것이 곧 독립운동에 궐기하자는 선동적 문서라고 구실을 삼음은 물론,“대종교는 조선 고유의 신도(神道) 중심으로, 단군(檀君) 문화를 다시 발전한다는 표방(標榜)하에서 조선 민중에게 조선 정신을 배양하고, 민족 자결의 의식을 선전하는 교화 단체이니만큼, 조선 독립이 그 최후 목적이다.”고 하면서 임오년 즉 서기 1942년 11월 19일을 기하여 만주 및 국내에 걸쳐 대종교의 교주 단애(丹崖) 윤세복(尹世復)이하 간부진을 일제 침략하는 폭거로 나왔다. 이때 대종교 간부진의 검속당한 상항을 보면 같은 날에 윤세복(世復)·김영숙(金永肅)·윤정현(尹珽鉉)·최관(崔冠)·이재유(李在囿)·이정(李楨)·권상익(權相益)·나정련(羅正練)·김서종(金書鍾)·강철구(姜鐵求)·오근태(吳根泰)·나정문(羅正紋)·이창언(李昌彦)·김진호(金鎭晧)·김두천(金斗千)·서영제(徐永濟)·이성빈(李成斌)·김진호(金鎭晧)·안용수(安龍洙)·이종주(李鍾洲) 등 20명은 만주의 영안(寧安)·액목(額穆)·돈화(敦化)·밀산(密山)·연길(延吉)·반석현(磐石縣) 및 신경(新京)·하르빈 등지에서 검속 당하고, 이용태(李容兌)·안희제(安熙濟)·권명준(權寧濬)·성하식(成夏植) 등은 국내의 충북·경남·함북·경북에서 같은 날에 검속되었던 것이니, 저들의 사전 준비가 얼마나 철저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 일이었다.9)또한 이 대종교 간부진의 검속은 그 전달부터 있어 온 국내의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과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 관계자 중에는 장지영(張志映)·이극로(李克魯)·정열모(鄭烈模) 등 대종교인들이 포함되었다는 사실도 주의할 만한 점이었다. 요는 무슨 구실이든 붙여서 우리의 민족정신·독립정신을 말살하자는 데에 저들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대종교에서는 이 사변이 임오년(서기 1942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임오교변’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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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괴뢰 만주 정권의 소위 잠행징치반도법(暫行懲治叛徒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윤단애 이하 대종교 간부진을 검속한 적측은 영안현(寧安縣) 경무과(警務科)에 특별 취조본부를 설치하고 4개월간에 걸쳐 형언할 수 없는 악형과 야만적인 폭행을 가하면 소위 제1부의 취조 심문을 행하고, 이듬해 3월 말경에는 목단강(牡丹江) 경무처와 액하(掖河) 감옥으로 옮겨 목단강 경무청 특무과에서 3개월간에 걸친 제2부 심문을 하며, 뒤 이어서는 다시 목단강 고등 검찰청의 제3부 심문을 진행하였는데, 그동안 저들의 온갖 악형 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계 간부 애국지사들을 대하는 무례 불법적인 언행에는 애국지도자들의 정신적인 타격이 더욱 컸던 것이다. 그러나 간부진은 한 사람도 저들의 악행·만행·유도에 뜻을 굽히는 이가 없이, 단군 성조를 받드는 대종교의 포교활동이 정당함을 주장하면서 백절불굴의 기개로 대하였다. 혹은 소리 높여 저들의 만행을 타매(唾罵)하고, 혹은 함구무언(涵口無言)으로 저들의 불의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오랜 동안에 걸친 악형·기한(飢寒)·병고는 지사들의 육체를 지칠 대로 지치게 하였다. 한 사람, 두 사람, 순교(殉敎)·순절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애국동지원호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제1편 5장 9절 1항 대종교에 대하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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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5월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 소재 대일시교당(大一施敎堂) 전무(典務) 권상익(權相益)이 병보석 3일만에 세상을 떠난 것을 위시하여 그해 7,8월 중에 회봉(晦 峰) 이정(李楨)·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염재 나정련(羅正練)·설도(雪島) 김서종(金書鍾)·해산(海山) 강철구(姜鐵求) 등 제인이 혹은 옥중에서 혹은 병보석 중에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즉 1944년 1월~5월 간에는 죽포(竹圃) 오근태(吳根泰)·일도(一島) 나정문(羅正紋)·백향(白香) 이창언(李昌彦)·백람(白嵐) 이재유(李在囿) 등 제인이 또한 분한을 안고 세상을 떠나니, 수십년간 이역풍상(異域風霜)을 무릅쓰고 악전 고투하던 이들의 비장한 최후야말로 천추 의열의 사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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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당년 58세로 세상을 떠난 백산 안희제는 세상이 다같이 아는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회봉 이 정은 북로군정서 사령부 막빈(幕賓 ; 비서)으로 청산리(靑山里) 전쟁에 종군하기도 하였던 지개높은 문사이며, 해산 강 철구는 대종교 남도본사(南道本司, 국내교구)를 주관하던 호석(湖石) 강우(姜虞)의 차남으로써 교계에서도 선봉적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일찌기 북로군정서 및 임시정부 관계로 5년 체형을 받기도 하였던 지사이다. 또 죽포 오근태와 백람 이재유는 3·1운동 후 봉천성(奉天省) 무송현(撫松縣)에서 흥업단(興業團)에 참가 활동하기도 하였던 애국투사들이며 나정련·정문 형제는 대종교 제1세 교주 나홍암(羅弘岩)의 장남과 차남으로써 모두 대종교 총본사의 중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설도 김서종은 보성전문(普成專門) 출신으로 일찌기 국내 학생계에서도 명망이 높았지만, 만주에 건너가서는 다년간 농장 경영에 종사하고, 대종교 재건에 크게 힘을 써서 하르빈 선도회 총무는 물론 총본사 전강과 천전 건축 주비회(籌備會) 부회장의 중임을 띠고 활동하여 오던 터이니10), 이러한 중진 인사들의 순절이야말로 당시에 있어서 교계 또는 독립운동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종교에서는 이들 10인을 ‘순교십현(殉敎十賢)’으로 높이 받들며, 해방 후에는 그 사실을 영구히 남기기 위하여 ≪임오십현순교실록≫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아래에 보이는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의 순교 실록 서문은 그들 10현의 애국 순교의 높은 정신을 잘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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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교(國敎)를 다시 세우러 하던 그때, 기운 나라는 벌써 것잡을 수 없었다. 지성을 품고 지한(至恨)을 안아 마침내 일사(-死)로써 교의 종풍(宗風)을 보이신 ‘한스승(홍암대종사)’의 뒤를 이어서, 내외에 홍포(弘布)됨이 자못 컸었으나 그럴수록 적의 박해가 더욱 심하더니, 저즘계 북만에서는 무리에도 무리를 더하여 옥중에서 신고(身故)하신 이만 열 분이라, 이 열 분으로 말하면 다 종문(倧門)의 신사(信士)로써 이역 풍상을 갖추 겪고 ‘한 곬’만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교를 붙들고 몸을 바쳤으니 오늘날 그들의 의로운 자취를 기록하여 전함은 한갖 서자(逝者)를 위하여 말 수 없는 일일 뿐이 아니다.
인물을 아낌은 고금이 없으나, 오늘에 있어서는 참으로 묘연(渺然)함을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열 분이 그 조난(遭難)이 아니었던들 우리의 일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인가.
그러나 사람의 정신이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열 분의 변하지 아니하고 굴하지 않는 그 ‘매움(烈)’의 끼쳐 줌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뒤에 남아 있는 우리는 그 끼침으로 하여금 아무쪼록 더 빛나게, 더 장엄하게 할 책임이 있다.
또 생각하면 산 사람은 누구며, 죽은 사람은 누구냐. 뜻이 살아야 산 것이니, 몸의 존부(存否)는 오히려 제2에 속하는 바다. 이 열 분은 살았다. 누구든지 이 열 분의 눈에 산 사람 아닌 것같이 보이지 말라.(성재 이시영의 추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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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검속 당하였던 소위 잠정 징치 반도법 위반의 윤단애 이하 24명 중 성하식(成夏植)·김진호(金鎭皓)·안용수(安龍洙)·이종주(李鍾洲)는 혐의 사실이 없다 하여 석방되고, 72세의 권영준(權寧濬)은 1년간이나 악형을 당하다가 고령이므로 면소(免訴) 출옥하였으며 김진호(金鑛浩)·김두천(金斗千)·이성만(李成斌)·서윤제
(徐允濟, 서백포 아들)는 교회에 큰 책임이 없다고 하여 1944년 정월에 출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2월, 소위 목단강 고등 검찰청에서는 남은 사람, 윤세복(尹世復)·김영숙(金永肅)·윤정현(尹廷鉉)·오근태(吳根泰)·이용태(李容兌)·최관(崔冠, 서백포 사위)·나정문(羅正紋)·이현익(李顯翼, 추가 검속)·이재유(李在囿)등 9인을 다시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목단강 고등법원에 넘겼는데, 4월 고등법원에서 정식 공판이 있기까지에는, 또 나정문·오근태 2인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단애 윤세복 등 대종교의 간부진 7인만이 저들의 공판정에 끌려 나가게 되었다. 그러면 당시 저들은 대종교 또는 대종교 간부진의 활동을 어떻게 보고 이런 옥사(獄事)를 일으켰던 것인가. 그것은 아래와 같은 기소장의 내용이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즉 기소장 첫머리에서 저들은, “대종교는 그런 이름을 단군교(檀君敎)라 하고 명치(明治) 42년(기유, 서기 1909년) 음력 정월 15일, 조선 경성부(京城府)에서 나철(羅喆)이 자고로 조선 민족간의 신앙에 있어서 조선 민족의 시조이며 국조(國祖)라고 전승(傳承)하여 온 단군을 종봉(宗奉)하며, 이에 귀일(歸一)함으로써 조선 민족 정신의 순화(醇化)통일과 조선 민족의식의 앙양을 도모함과 함께 조선 민족 결합의 감화에 의하여 독립 국가로서의 조선의 존속(存續)을 목표로 하고 다수 동지와 함께 결성하여 스스로 제1세 교주라고 한 단체로서……” 라고 하여 대종교의 중광(重光) 연유를 말하고 대종교의 실천 강령과 행동방향에 대하여는, “교도의 실천 강령이라고 하여 오대종지(五大宗旨)를 만들어서 조선 민족은 단군을 신앙하여 신으로부터 받은 삼진(三眞)의 영성(靈性)을 닦아서 신에 화하도록 힘쓰는 동시에 이상 국가 배달국(倍達國)을 지상에 건재할 것이라고 하여 오던 중,……일한 합병으로 조선 민족이 독립 국가를 상실함에 따라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함으로부터 조선 민족 정신을 배양하며, 조선 민족의 결합을 도모하고, 조선 독립 의식을 앙양하며 따라서 조선 독립의 소지(素地)를 만들어 중국에서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제국 통치권의 지배를 이탈시켜 독립국으로 하고, 또 그 독립 형태를 이상 국가인 배달국의 지상 재건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으며” 라고 하여 대종교의 목적은 처음 출발할 때에는 아직 국가의 명맥이 남아 있던 시기이니만큼, 조선을 독립국가로 존속하는 동시에 이상 국가인 배달국으로 재건하려는데 있었으며, 급기야 ‘경술국치’의 변으로 독립국가를 상실하게 됨과 함께는 다시 민족정신의 배양, 민족의 단합, 독립 의식의 앙양으로 끝내는 일본의 통치권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 국가로 하는 동시에 그 독립 국가를 이상 국가인 ‘배달나라’로 재건하려는 단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는, “아국(我國, 만주국을 말함임) 건국 후 동교의 소위 배달국 재건에 대한 조선 민족의 독립은 배달국의 영역을 영토로 하고, 따라서 아 제국의 영토 전부를 탈취하며, 또 일덕일심(一德一心)의 대일본 제국 영토의 일부인 조선으로 하여금 동국의 통치권에서 이탈시켜 독립국으로 할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대종교중광60년사≫ 제3편 2장 3절 부 기소장(起訴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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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대종교는 그들의 이상국가 배달나라를 재건하는데 있어서는 그 배달나라의 영역을 만주국 전부와 한반도로 삼는 것이니, 이것은 한반도의 독립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만주국의 영토까지 전부 탈취하여 이상주의 독립국가를 세울 것을 목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고인들은 다른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종교의 그러한 목적을 알면서도 거기에 가입하고 그 목적 달성에 협력할 것을 결의하고 그러한 일에 앞장섰으니 그것이 곧 죄라는 것이다. 물론 대종교의 설립이나, 설립인물이나, 또는 단군 성조를 교조로 받들고 민족 문화를 선양하는 점에서 저들 침략주의자들로서는 그러한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만주가 단군조(檀君朝) 이래 부여(扶餘)·고구려·발해(渤海) 등 역대 왕조의 영지임을 말하며 발해 고도 동경성(東京城) 옛 왕궁터에 단군 진영(眞影)을 모시는 천진전(天眞殿)을 짓고 대종교의 중심지로 삼는다는 점에 대하여도 불만의 심리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종교적인 선도 활동을 허가하였고, 또 대종교의 활동이 종교적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데에도 새삼 다른 구실을 만들어 가지고 간부진을 구속·심문·악형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하면서 기어이 중죄에 처하고 대종교의 활동을 탄압하려 하는 저들의 태도는 너무도 횡포·간휼하다고 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윤단애 등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대종교의 교원(敎源)은 신강태백(神降太白)이요, 교의는 홍익 인간이요, 교리는 삼진귀일(三眞歸一)이요, 교정(敎政)은 진흥 문운(文運)이요, 구경(究竟)은 화성천국(化成天國)이다. 그런데 조선 독립은 국민 운동에 속할 것이요, 배달국 재건은 천국 건설이니, 이것이 대종교인의 이념이다.” 고 하면서 대종교의 천국 건설 이념과 국민적인 독립운동은 다른 것이라고 일관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저들 일제 침략주의자들에게 통할 리가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피고인 윤세복(尹世復)은 국체(國體) 변혁을 목적으로 한 단체의 지도자인 임무에 종사하였으며, 김영숙(金永肅)은 우 단체의 요무(要務)를 장리(掌理)하였고, 윤정현(尹珽鉉)·오근태(吳根泰)·나정문(羅正紋)·이재유(李在囿)는 우 단체의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여 왔으며, 이용태(李容兌)·최관(崔冠)·이현익(李顯翼)은 우 단체에 참가하여 그 단체의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를 하여 왔다.” 는 이유로 구형 기소되고 그해 6월의 판결에서는,
“피고들의 행위를 법원에서 이해 못함은 아니로되, 국가로서는 용인할 수 없다.” 라는 얼버무리는 언도 이유로 모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의 죄명을 붙여,
윤세복 무기 도형(徒刑)
김영숙 도형 15년
윤정현 도형 8년
이용태 도형 8년
최관 도형 8년
이현익 도형 7년
이재유 도형 5년
으로, 생존자 7인에 대한 징역 판결을 지으니,13)여기서 윤단애 이하 지도자들은 이역철창 속에서 한많은 옥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애국동지원호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제1편 5장 9절 1항 대종교에 대하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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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교변’은 대종교의 최대 최악의 수난이었다. 교주 윤단애 이하 교내 중진이 대개 순교 또는 옥중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교를 운영해 나갈 길이 없었다. 천전(天殿) 건축도 대종학원(大倧學園) 경영도 길이 막히고 말았다. 더구나 적측은 그 사람보다도 그 교가 반국가적 기관이라고 선언하며 행패하니, 교문(敎門)을 지킬 사람조차 없을 형편이었다.
일찌기 10년 전 밀산(密山)에서 교주 윤단애가,
“우리 대교(大敎)가 중광(重光)한지 25년 동안 저 일본의 무리한 박해를 늘 받아 왔으나, 지금 시국의 정세는 더욱 변천되고, 갈데 올데가 없는 오늘날, 나는 한배님의 묵시(黙示)를 받고, 자신 순교(巡敎)의 길을 떠나는데, 만일 저들 당국의 양해를 얻으면 국수망(國雔亡)이나 도가존(道可存)이라 하신 신형(神兄 ; 나홍암)의 유지(遺志)를 봉승(奉承)할 것이요, 또 물어 의심하면 나의 일신을 희생하여 선종사(先宗師)의 부탁하신 대은(大恩)을 갚겠노라” 는 비장한 말을 하며 길을 때나 촌촌(村村) 전진, 대교 재건의 업적 그 피와 땀과 인내의 고난으로 이루어졌던 사업이 이제는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형편이었다. 참으로 원통하고 한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에 다시 대종교 서적 간행회를 통하여 새로 펴내었던
≪홍범규제(弘範規制)≫·≪삼일신고(三一神誥)≫·≪신단실기(神檀實記)≫·≪종례초략(倧禮抄略)≫·≪종지강연(宗旨講演)≫·≪종문지남(倧文指南)≫ 등등 종교 서적 2만여 권과 전부터 소중하게 보관하여 오던 서적 3천여 권은 물론, 단군 성조의 천진(天眞)과 대종교의 인장 기타 각종 문서 등이 모두 적측에 빼앗겼으니 교문의 정상은 문자 그대로 황량 처참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인들의 굳은 종교 신앙과 민족 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옥중에 있는 간부 인사들의 지개는 더욱 굳건하였다. 분한을 안고, 욕됨을 참아가면서 대교의 부흥과 조국의 광복을 한배님께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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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도 교주 윤단애는 의연(毅然)한 마음가짐으로 수도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폭력은 한이 있고, 한배님의 은혜는 한이 없음을 믿기 때문이었다. 시조로 소회를 옮기고 신고(神誥)를 번역하며, 수도 지침서인 ‘수진삼법회통(修眞三法會通)’을 지었다. 그 중 ‘복당서정(福堂抒情)’으로 이름 한 6편 36장의 시조집 중에는 아래와 같이 최후 희생을 각오하는 내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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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옥사하여
유해 (遺骸)를 출송(出送)커던
원컨대 동지들아
그 당시 화장하여
목단강 흐르는 물에
남은 재를 던져 주.
또 만일 출옥되면
갈곳이 어디메뇨,
백두산 저 기슭에
한줌 흙이 되었다가
천진전 신건축할제
개와바침 하오리.
뭇을 위해 살았다면
그 아이 복일런가,
교를 위해 죽는다면
그 아니 영광일까,
제 한몸 돌아볼 적에
아무 근심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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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 36년간에 있어서의 대종교의 가는 길이야말로 가도 가도 험로(險路)와 준령(峻嶺)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연(毅然)한 마음가짐과 불굴의 기개, 그 험로 준령에서도 광명을 맞이할 차비를 갖추었으며, 그러기 때문에, 일제의 기반(羈絆)에서 벗어나는 일이 올 때에는 곧 부흥, 재건의 깃발을 높이 들 수도 있었던 것이다. 지성이 감천(感天)이요, 천운은 돌고 도는 것이다. 온 누리를 다 덮을 것같이 날뛰던 일본침략주의의 세력도 패망의 날이 다가오고, 1945년 8월 12일, 소련군의 만주 진출과 함께 윤단애 이하 대종교 지도 인사들은 일찌감치 목단강성(牡丹江省)의 감옥 문을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70 고령의 교주 윤단애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영안현(寧安縣) 해남촌(海南村)으로 나와서 옛날 교우들을 모아 해방 전날인 4일에 벌써 대종교 총본사를 설치하고 직원을 선임하는 동시에 재건 부흥의 발길을 내딛게 되었으니, 이 어찌 고난 속에서 얻어진 광명의 길이 아니랴?
출처: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