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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고봉군(割股奉君)
허벅지 살을 베어 군주를 모신다는 뜻으로, 군주가 은혜를 잊은 것을 참회함 또는 끈기, 충성, 효성, 청렴한 사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割 : 벨 할(刂/10)
股 : 넓적다리 고(肉/4)
奉 : 받들 봉(大/5)
君 : 임금 군(口/4)
출전 : 춘주좌씨전(春秋左氏傳), 열국지(列國志)
한식(寒食)날이다. 모두들 조상께 성묘(省墓)의 예(禮)를 올리고 산소의 관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조상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사초(莎草; 땅고르기, 잡초제거, 봉분 만들기, 잔디식재 및 보식, 주위정리)를 했을 것이다.
한식(寒食)은 동지(冬至)로부터 105일째 되는 날로 매년 청명(淸明) 다음 날이거나 같은 날이다. 한식은 설날, 단오(端午), 추석(秋夕)과 함께 우리의 전통 4대 명절이다.
계절적으로 한 해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이며,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로 조상의 묘소(墓所)을 보수(補修)하는 적합한 때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찬 음식을 먹는 한식(寒食)의 풍습은 중국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 문공(文公)과 개자추(介子推)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중국 춘추시대에 진헌공(晉獻公)에게는 본처(本妻)의 아들 세 명과 첩(妾)의 아들 두 명이 있었다. 헌공은 첩 여희(驪姬)를 총애했고, 여희는 헌공이 죽으면 자기와 아들 두 명의 운명을 걱정하여 헌공에게 모함하여 이미 태자로 임명되어 있는 본처의 맏아들 신생(申生)을 자살케 하고, 둘째 아들 중이(重耳)와 셋째 아들 이오(夷吾)를 제거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였으나 두 명의 공자는 가까스로 진(晉)나라를 탈출하여 망명(亡命)의 신세가 되었다.
둘째 공자 중이는 인품도 훌륭하고 끈기와 용맹을 겸비한 청년으로 대부분 타국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다 작은 나라인 위(衛)나라를 방문하였는데 위나라는 쫓겨 다니는 중이(重耳)를 환영하면 혹 진(晉)나라의 분노를 살 것 같아 박대하며 쫓아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그 망명의 무리들 중에 두수(頭須)라는 재물 담당자가 중이 일행의 돈과 패물 등을 챙겨 도망하는 바람에 그 일행들은 굶주리고 피로하여 움직일 기력조차 없는 상황이 되었다.
중이(重耳)도 지쳤고, 그를 따르는 10여 명의 수행자들도 지쳤는데 중이가 느닷없이 혼잣말로 "아! 고깃국 한번 먹어 보았으면" 하니까 모든 수행원들이 중이를 원망스럽게 생각하고는 고깃국은 커녕 밥이라도 실컷 먹었으면 하는 눈치이다.
그때 일행 중 개자추(介子推)라는 신하가 슬쩍 무리에서 나와 없어졌다. 조금 있다가 그가 나타났는데 어디서 났는지 따끈한 고깃국 한 그릇을 들고 와서 중이에게 바친다. 중이가 깜짝 놀라 고깃국을 먹으면서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으니 개자추가 돌아서면서 작은 소리로 "공(公)을 위해 저의 허벅지 살을 떼어 그 살로 국을 끓였습니다"고 말을 하였다.
중이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많은 것을 느끼고 다시는 밥 타령을 포함한 어떠한 불평도 하지 않고 오직 고국으로 돌아가 진(晉)나라의 군주(君主)가 될 것을 가슴속 깊이 맹세하였다.
한편 진(晉)나라는 내부의 권력투쟁 으로 여희(驪姬)와 그의 아들들이 살해되고 나라 사정이 정상화 되면서 망명하고 있는 중이를 다시 모시게 되었다. 귀국한 중이는 진나라 군주가 되어 문공(文公)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망명생활(19년)했던 쓰라린 교훈을 생각하며 진나라를 잘 다스려 춘추오패(春秋五覇)중 두 번째 패권국(覇權國)이 되었다.
진(晉)나라 군주가 된 문공(文公; 중이)은 나라의 질서를 정상화시킨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는데 망명(亡命)생활을 함께한 신하들은 거의 1~2등 공신(功臣)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잘못하여 개자추를 공신명단에서 빠뜨렸다.
이때 개자추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공신명단에 빠진 것을 알면서도 항의조차 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고 멀리 면산(綿山)에 은거하며 어머니께 효도하며 잘 살았다.
한편 이 사실을 늦게 알게 된 문공(文公)은 부랴부랴 개자추를 찾게 되었고, 면산(綿山)까지 직접 가서 찾았으나 개자추가 산에서 나오지 않자 신하 중 한 명이 "개자추는 효성이 지극하여 산에 불을 지르면 나올 것"이라고 보고하자 문공은 면산에 불을 질렀고, 산이 다 탔으나 개자추는 결국 나오지 않았다.
문공이 군사를 풀어 수색해보니 큰 버드나무를 껴안고 새카맣게 탄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두말 할 것 없이 개자추와 그의 어머니인 것이다.
그 일을 직접 목격한 문공은 이에 그를 애도하는 뜻에서 이날부터 한 달 동안 불을 쓰지 않도록 조치하고 불이 없는 동안 모든 음식은 차게 먹도록 하여 개자추에 대한 미안함을 기리게 되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찬 음식 먹는 기간을 한 달을 사흘로 사흘을 하루로 줄여 개자추를 기리고 있다.
사람의 삶에 가치(價値)는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으나 필자는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가장 으뜸가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는 하찮은 동물도 자기가 받은 은혜에 보답을 하는 판인데 사람이 되어서는 오죽하겠는가?
특히 조상의 은혜에 대한 보답은 아무리 해도 지나치다고 볼 수 없다. 전통 있는 명문가(名門家)일수록 또는 훌륭한 인격과 인성을 갖춘 엘리트일수록 조상에 대한 은혜를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조상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있고, 조상의 기반 아래 내가 자라고 배우고 현재 위치에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조상의 은혜를 벗어난 삶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은혜를 베풀었거든 보답을 구하지 말고, 남에게 주었거든 후회를 쫓지 말라(施恩勿求報 與人勿追悔)"고 가르치고 있다. 정말 인간다운 교훈이 아니겠는가! 보답을 바라고 베푸는 은혜는 사기(詐欺)에 버금간다. 이른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훌륭한 별칭(別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충(忠), 효(孝), 예(禮)라는 가장 소중한 자산(資産)을 가지고 있다. 한식의 유래를 다시 한 번 떠 올리고, 조상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참다운 정신이 되살아나길 기대한다.
청명과 한식에 대하여
개자추(介子推)에 대해서 개자추 콤플렉스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이는 개자추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로 보는 탓에 부정적으로 보지만 본인은 개자추를 충신으로 생각하니 이를 좋게 받아들입니다.
중국민간에서는 돌아간 친지들 산소를 찾아서 제를 지내는 가장 큰 명절이 청명절(清明節)이다. 한국에서는 추석이 가장 큰 제사절이지만 중국에서는 청명절이다. 나이 드신분들은 우리 민속중 하나인 한식절(寒食節)이라고 기억하실 것이다. 실은 청명절이 바로 한식절이기도 하다.
중국 4자 성구에는 할고봉군(割股奉君)라는 말이 있다. 일본인들은 또한 나무쪼각으로 만든 끌신(계다)를 즐겨 신는다. 여기에 나오는 청명절, 한식절, 4자성구, 끌신(계다) 모두 중국 산서성 개휴시 남쪽에 있는 면산과 연관이 있다.
사기(史纪)와 동주열국지(东周列国志)에 상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춘추시기 진나라(晋国)의 진현공(晋献公)의 아들 중아(重耳)가 진현공의 애첩 려희(骊姬)의 박해를 피하여 국외로 도망하여 각 나라를 돌아 다녔다. 천난만고 겪으면서 위나라(卫国)에 들어 섰는데 하루는 먹을 것이 다 끊겨 허기진채 쓰러져 버렸다.
중아를 따라 탈국한 중아의 신하는 5명이 있었다. 이중 개자추(介子推)가 허기에 찬 중아를 보고 한적한 곳에 가서 자기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 국을 끓여 중아에게 드렸다. 중아는 그 고기와 국을 먹고 기력을 회복하였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는 '할고봉군(割股奉君)'이라고 한다.
19년 지난 후에 중아는 진무공(秦穆公)의 도움하에 다시 진나라에 돌아와서 왕위를 계승받았다. 이 분이 바로 춘추5패중의 2번째 패주인 진문공(晋文公)이다.
중아가 집권한 후 동행했던 다른 신하들은 자기들 공을 자랑하며 떠들고 다녔다. 이것을 본 개자추는 그런 인간들하고 같은 대열에 들어선다는 것이 부끄럽다면서 조용히 노모를 모시고 면산속에 들어가서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는다.
진문공이 연회를 베풀고 각 신하들에게 공에 따라 높은 벼슬자리를 하사했지만 자리에 빠진 개자추를 까먹었다. 개자추 이웃인 해장(解张)이라는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불공평 함을 느껴 진문공에게 시를 한수 지어서 드렸다.
有龙娇娇, 悲失其所.
용 한마리 있는데 비참하게 거처를 잃어버렸네.
数蛇从之, 周游天下.
수마리의 뱀(작은 용이라고도 함) 동행하여 천하를 누볐노라.
龙饥乏食, 一蛇割股.
용이 배를 곪았을 때 한 마리 뱀이 허벅지 돌려서 올렸도다.
龙返于渊, 安其壤土.
용이 늪에 돌아와 안식하노니
数蛇入穴, 皆有宁宇.
따라다니던 수마리 뱀도 같이 입구하여 모두들 안락했을 때
一蛇无穴, 号于中野.
그 한마리 뱀은 자기 은처를 찾지 못하고 허허벌판에서 헤매더라.
이것을 읽은 중아는 대뜸 '할고봉군'한 개자추가 떠올라 수하들을 시켜서 개자추를 찾게 했지만, 개자추가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에 들어간 뒤였다. 개산 곡곡마다 찾았지만 끝끝내 찾지 못 하였는데, 한 신하가 이르기를, "개자추는 지극히 효성이 깊은 사람으로서 산에 불을 지르면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산속에서 하산할 겁니다" 하였다.
중아는 산에 불을 지르게 했다. 수림으로 꽉 들어찬 면산은 연 몇일동안 불이 꺼 지지 않았다. 하지만 산불이 다 타버릴 때 까지 개자추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산속을 들어가 보니 한 버드나무 밑에 어머니와 부둥켜 안고 죽어버린 개자추가 발견되였다.
충신을 잃은 중아는 비통을 감추지 못 하였다. 개자추 모자의 시체를 면산 아래에 묻고 사절을 지어서 제를 지내게 했었다. 중아는 또 산에 불을 지른 날에 나라 안팍에서 불을 금하게 하였고, 전에 개자추가 자기에게 "할고봉군으로 저의 일편단심을 드리오니 주공께서 늘 청명하시면 진은 구천에서도 즐거워 할것이오니 나라 일에 정성 다 하시고 청명에 청명하시기를 비나이다(割股奉君尽丹心, 但愿主公常清明, 臣在九泉心无愧, 勤政清明复清明)" 하던 말이 떠올라 이 날을 또 청명절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듬 해 청명절에 면산에 다시 오른 진문공이 고목으로 되였던 그 버드나무에 새싹이 티어나는 것을 보고 이것이 개자추가 되 살아난 뜻한 감이 들어 버드가지를 꺽어 땅에 파 묻었는데 그 뒤로부터 산불에 타 버린 면산에 버드나무가 울창하게 자랐다 한다.
진문공은 고목으로 된 버드나무 한 조각을 깎아서 끌신으로 만들게 하고 늘쌍 신고 다니면서 개자추 생각이 나면 "족하(足下), 족하(足下)"라고 불렀으니 중국 고문에서 극친한 친구를 족하(足下)로 칭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진문공이 신고 다니던 끌신이 그 뒤에 일본으로 넘어가서 일본인들에게 유행되었는데 '계다'라고 불린다.
진무공은 원 정현(定县)을 개자추가 휴식하는 곳이라 는 뜻에서 개휴현(介休县) 으로 이름 고치고 면산을 개산(介山)으로 이름 지었다. 이때부터 중국 민간에서는 청명절에 고인의 산소를 찾아서 제를 지내고 산에 나무를 심는 풍속이 시작 되었다.
지금의 개휴현은 개휴시로 되였고 개산은 명승풍경구로 되어 해마다 청명절이면 개산에 올라 개자추에게 제를 지내는 관광인들로 차 넘친다.
해마다 청명 즉 한식날엔 조상님 찾아 뵈려 노력하지만 항상 일에 밀려 찾아뵙지 못한다. 살아 계실적 불효하더니만 돌아신 후에도 불효하니, 이 어찌 자식된 도리를 한다 할 수 있겠는가? 내 자식 바라보기도 미안하고 부모한테 잘해라 말도 못하겠다. 그저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한식과 청명의 차이는 무엇인가?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하루 차이'라는 말이 있다. 양력 4월 5일 전후로 하루 차이가 있는 한식과 청명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기본적으로 청명(淸明)은 봄 일을 시작한다는 농사력의 기준이 되는 24절기의 하나이며, 한식(寒食)은 고대의 옛 풍속으로 이날은 풍우가 심하여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춘추시대 진문공의 신하인 개자추 전설을 기리기 위함이라는 설이 있다. 조금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한식절의 유래 (개자추 전설)
'좌전(左傳)'의 기록에 의하면 진(晉) 문공(文公) 중이 (重耳)가 천하를 망명하며 고생하다 왕으로 복귀하였다. 귀국한 진 문공은 고생한 신하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으나, 유독 개자추 (介子推)에게만은 상을 내리지 않았다. 개자추는 그 뒤 모친과 함께 깊은 산에 은거하였다. 개자추가 은거한다는 소식을 들은 문공은 사람을 보내 그를 궁으로 불렀으나, 개차주는 끝내 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깊은 산속으로 숨어 버렸다. 문공은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해서 산시성(山西省) 면상 (綿上)의 개휴현 남쪽, 개산 (介山)일대를 개자추에게 식읍으로 추증하였다.
그런데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개자추의 식객들은 진나라 궁문에 유독 뱀 하나만이 원망에 잠겼다" 란 글을 궁문 앞에 붙혔다. 문공이 이 글을 보고 개자추를 소환해 불렀다. 그러나 개자추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개자추가 면상 (綿上)으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진 문공은 면상을 봉했다. 그리고 '개산(介山)'으로 개명하였다. 이 기록은 <좌전>의 내용과 비슷하다.
그러나 한나라 시대의 유향(劉向)은 '신서(新書)'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개자추는 문공이 자기에게 상을 내리지 않자 개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문공이 그를 궁중으로 소환하였지만 그는 하산하지 않았다. 문공은 개산을 불바다로 만들면 그가 부득불 하산할 것으로 생각해서, 수하를 시켜 불을 놓았으나 개자추는 결코 하산하지 않고 불에 타 죽었다."
그 뒤에 나온 잡기 '여남선현전(汝南先賢傳)'은 이렇게 썼다. "태원 군 (太原郡)에 이런 풍속이 있다. 즉 개자추가 불에 타 죽은 것을 기념하여 백성들이 한 달간 생식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후한서(後漢書)에는, 태원군에서는 개자추가 불에 타 죽은 것을 기념하여 용의 금기를 지키는 풍속이 있다. 즉 개자추가 불에 타 죽은 그 달은 신령이 불을 지피는 것을 꺼려 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겨울에 한 달간 생식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에 현지 부임한 병주 자사 주거(周擧)가 부임한 즉시, 벽에 주련(柱聯; 벽에다 글을 써서 붙이는 것)을 써서 붙이고, 백성들의 생활에 지장을 주는 생식을 금하게 하였다. 이후 생식 습관은 고치기 시작하였으며, 종묘나 능원에 제사 지내며 산소를 돌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위의 모든 기술을 감안 시, 고대의 한식절은 지금처럼 음력 2~3월이 아니라, 겨울에 있었다고 한다. (출처: 경세 지략 )
청명 (淸明)은 무슨 날인가?
청명은 춘분과 곡우 사이에 들며, 음력 3월, 양력 4월 5일 경이 된다. 태양의 황경이 15도에 있을 때라고 한다. 이 날은 한식의 하루 전날이거나 때로는 한식과 같은 날이 된다. 동시에 오늘날의 식목일과도 대개 겹치게 된다. 대부분 농가에서는 청명을 기해서 봄 일을 시작한다.
농사력으로는 청명 무렵에 논 밭둑의 손질을 하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특히 논농사의 준비 작업이 된다. 다음 절기인 곡우 (24절기 중 6번째로 4월 20일 정도) 무렵에는 못자리 판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농사를 많이 짓는 경우에는 일꾼을 구하기 어려워서, 청명 곡우 무렵부터 일꾼을 구하기도 하였다.
청명절은 땅에 물이 촉촉하게 올라오는 시기로서 나무를 심기 좋은 때인데, 우리 겨레가 즐겨 부르던 나무 타령을 보면 힘든 나무 심기도 흥겹게 일하려고 했던 민요다. 간단하게 서설만 들어 보자.
"청명 한식 나무 심자. 무슨 나무 심을래, 십 리 절반 오리나무, 열의 갑절 스무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방귀 뀌어 뽕나무, 오자마자 가래나무,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 거짓 없어 참나무, 그렇다고 치자나무, 칼로 베어 피나무, 네 편 내 편 양편 나무, 입 맞추어 쭉 나무, 양반 꼴에 상나무, 너 하구 나하고 살구나무, 아무 데나 아무 나무....
온 세상이 봄꽃으로 만발하는 한식 청명은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절기임이 확실하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산에도 맘대로 갈 수 없는 불편함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고생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 또한 지나가지 않겠는가? 어려운 시기에 마음이라도 여유를 가져야 하겠다.
할고봉군(割股奉君)
찬 음식만 먹는다는 한식(寒食)은 춘추전국시대 개자추(介子推) 이야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진(晉)나라 문공(文公)은 군주가 되기까지 19년 동안 파란만장한 망명생활을 했다. 며칠 동안 굶어 아사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개자추라는 신하가 허벅지살을 베어 국을 끓여 먹임으로써 살려냈다.
그러나 문공이 즉위한 뒤 개자추에게 벼슬을 내리지 않자 그는 노모와 함께 면산(聃山)으로 은둔했고, 뒤늦게 이를 안 문공은 그를 등용하려 했지만 세상에 나오기를 거부했다. 개자추를 나오게 하기 위해 면산에 불까지 질렀으나, 그는 끝내 노모와 함께 타죽고 말았다. 그래서 개자추를 기리기 위해 이날만큼은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 음식만 먹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퍼지면서 '개자추 콤플렉스'란 심리학 용어도 생겨났다.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당했을 때 그걸 시원하게 말하는 대신 자신을 망가뜨림으로써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심리를 말한다. 개자추의 사당이 세워진 면산(綿山)은 깎아지른 벼랑에 공중도시가 만들어져 유명한 관광지로 변했다.
허벅지살을 베어내 주군을 살리는 것을 할고봉군(割股奉君)이라고 하는데, 백범 김구는 25살 때 위독한 아버지를 위해 허벅지살을 베어내 구워드렸다. 그러나 두 번째는 고통 때문에 도저히 못하게 되자 "나 같은 불효자가 어찌 효자가 되랴"하고 '백범일지'에서 한탄했다. 허벅지살로 부모의 병을 고치는 것을 할고료친(割股療親)이라고 한다.
할고(割股)와 관련한 이런 이야기도 있다.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이라는 방배추(본명 방동규)는 인생에서 딱 3번 패배를 했는데, 첫번째가 만나자 마자 그의 따귀를 후려 갈긴 백기완 선생이고 두번째가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이었다.
세번째는 '장충동 독종'이었는데, 방씨가 장충동 어느 집에 빚을 받으러 갔더니 주인 명을 받고 집을 지키던 깡패 하나가 형님 오셨다고 제 허벅지 살을 베어내 숯불에 막소주와 함께 내어놓더라는 것. 방씨는 눈앞이 아득했다고 한다. 봉군(奉君)이나 료친(療親)을 위한 것이 아닌 이런 할고는 좀 너무한 것 같다.
[참고] 개자추(介子推)
춘추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일명 개지추(介之推), 달리 개추(介推), 개자(介子)라고도 불린다. 문희(聞喜) 사람이다. 진문공의 신하로 진헌공 대에 여희가 진나라를 어지럽힐 때 진문공과 함께 적나라로 떠났으며 함께 고생하면서 충의를 다했다.
그는 진문공을 진나라로 돌아가 진후가 되게 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에 원망하지 않고 늙은 어머니와 산으로 들어가 살았으며 진문공은 그에게 상을 주기 위해 개자추가 머무는 산을 불지르면 빠져 나올 줄 알았으나, 그는 불타는 산에서 어머니와 같이 최후를 맞이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진문공은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을 추념하기 위해 그날을 한식이라고 부르고 불을 피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 자신의 넓적다리를 진문공에게 먹이다
여희의 난 이후 공자 중이 즉 진문공과 함께 적나라로 도피했다. 현명한 신하 5명과 도피했는데, 그들은 호언, 호모, 조최, 선진, 개자추였다. 개자추는 19년 동안 진문공의 도피에 참여해, 각지를 떠돌면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의 목표는 진나라로 돌아가서 국정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진문공이 위나라 경계에 머무를 당시에 진문공 일행이 지닌 식량이 바닥났다. 이는 신하 중 하나인 두수(頭須)가 배신했기 때문이다. 두수는 머리가 좋아 계산 능력이 무척 좋아서 문공이 총애하던 신하였으나, 재빠른 머리만큼 포기하고 먹을 것과 돈을 챙겨 달아나 버렸다.
이로 인해 문공과 신하들은 굶주림으로 인해 곤란해 하던 차에 개자추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먹였다. 그렇게 개자추가 충의를 보였기에 사관들은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진문공을 옹립했다고 평했다.
2. 논공행상에서 빠지고 면산에서 최후를 마치다
진문공은 진목공과 5현인들의 도움을 받아 19년의 방랑 생활 끝에 진후가 되었다. 진문공은 논공행상을 할 때 개자추를 제외한 4명 등에게는 벼슬과 상을 분배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공이 높다고 일컬으면서 다투었으니 이것을 두고 탐천지공(貪天之功)이라고 했다.
하지만 개자추는 그것에 실망하지 않고 초연히 늙은 어머니와 함께 면산에 숨어 살았다. 그의 어머니 역시 아들의 이 사정을 듣고 오히려 웃으면서 "역시 내 아들이야. 암! 선비가 공로를 다투는 건 소인배와 같음이니라"고 아들과 함께 면산으로 들어갔다.
이후에 진문공은 그를 잊었음을 생각해 내고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이미 면산으로 간 지 오래라 진문공은 그를 나오게 하기 위해 면산에 불을 질렀더니 어머니를 업으면서 나무를 붙들고 생을 마감했으며 산이 전소된 뒤에야 군사 중 한 명이 서둘러 상황을 보기 위해 산에 올라가서 그와 그의 모친의 소사한 시신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두 사람이 사망했다고 외치자, 진문공은 그 행위를 후회하면서 큰 소리로 하염없이 울었다.
이후 진 문공의 명으로 매년 그의 기일에는 소사한 그를 기리기 위해 뜨거운 음식을 먹지 않고 차가운 음식만 먹었다. 이날이 바로 한식(寒食)과 청명절의 유래다.
그리고 그가 붙든 나무로 신밭 밑바닥을 만들어 신었으며 죽는 그날까지 그를 그리워하고 그의 은공(恩功)을 생각할 때마다, 그 신발을 보며 말했다고 한다. "발아래 있는 그대를 생각하니 슬플 따름이다(悲乎, 足下)." 즉 문공 자신의 사람됨은 개자추의 발 아래에 있다는 말로 족하(足下)라는 호칭은 여기에서 생기게 되었다.
참 얄궂게도 어렵게 굶주림을 막아내며 주군을 살린 그는 이렇게 죽었지만, 정작 돈과 먹을 걸 챙겨 달아난 두수는 나중에 문공이 다시 돌아와 제위하자 뻔뻔스럽게 얼굴을 드러내고 궁궐에 나타났다. 문공이 분노했지만, 두수는 나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자면 저를 용서해 달라했고, 문공은 그를 살려주고 후한 벼슬을 주고 등용해 천수를 누렸다는 점이다.
3. 미디어 믹스
고우영 십팔사략과 고우영 열국지에서 등장한다. 진문공을 따라다니면서 여러가지를 보고 느끼는 듯하는 모습을 보이며, 충심은 그대로이나 평소에도 원래 공명정대하고 지혜로웠던 이기에, 진문공에 대한 충심을 제외하면 다른 것은 권력 등에 대한 탐욕은 거진 놓고 다니신다.
이후에 진문공이 왕위에 오른 다음에 자신이 개국공신의 포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전혀 개의치 않고는 마치 이젠 더 이상은 할 것은 없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가서 짐을 싸면서 어머니와 함께 떠난다.
이후에 진문공이 고깃국을 먹다가 개자추의 충심을 기억하고 찾을 때도, 모습을 하나도 보여주지 않고, 병사들이 찾는 모습만 보여주다가 불타는 산 이후에, 불타 죽었다고 언급으로 넘어가고 진문공은 그것에 괴로워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다만 여기서도 진문공이 "그리도 섭섭했단 말인가"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독자에 따라서는 개자추가 삐쳐서 숨어버린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열국지와 십팔사략에서 미묘하게 차이가 있는데, 열국지에서는 어머니가 등장하며 개자추 본인 또한 권력에 초탈한 모습을 보이지만, 십팔사략에서는 어머니는 등장하지 않고 바쁜 와중에 논공행상에서 소외되어 개자추가 시무룩하게 낙향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캐릭터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문공의 태도도 다르게 나오는데 십팔사략에서 문공은 한번 크게 안타까운 탄식을 하지만 열국지에선 말 그대로 끝도 없이 울어댄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개자추가 삐졌다는 거로 나온다. 본래는 공을 내세울 때 본인만 초연하게 공을 내세우지 않고 은거한 것인데 본방송에서는 개자추가 자기한테 상을 안 주자 화가 나서 은거했고 뒤늦게 알아차린 진문공이 그제서야 상을 주려고 하는데도 단단히 삐져서 나오지 않았다고 각색되었으며 한식은 '역대급 소심쟁이 덕에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마무리했다.
▶️ 割(벨 할)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일이 잘 되지 않도록 방해하는 뜻을 가진 害(해, 할)로 이루어졌다. 소를 수술(手術)하다의 뜻인 개(犗)를 칼로 수술하므로 割(할)로 고쳐 쓴 것, 또 칼로 '가르다', '뻐개다', '상처내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割자는 '베다'나 '자르다', '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割자는 害(해칠 해)자와 刀(칼 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害자는 집안에서 큰 소리로 다투는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해하다'나 '해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해치다'라는 뜻을 가진 害자에 刀자가 결합한 割자는 칼로 누군가를 베어 해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割(할)은 어떤 수나 수량(數量)을 10으로 나누어, 그 가운데의 몇을 나타내는 말로 ①베다, 자르다, 끊다 ②끊어 버리다 ③나누다, 쪼개다 ④가르다, 갈라서 찢다 ⑤영토를 나누어 주다 ⑥할거(割據)하다, 차지하다 ⑦빼앗다 ⑧해(害)치다, 손상(損傷)하다 ⑨판단(判斷)하다 ⑩파다, 파헤치다 ⑪재앙(災殃), 불행(不幸) ⑫할(割), 비율(比率) ⑬어찌, 어떻게,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일정한 값에서 얼마를 덜어 냄을 할인(割引), 여러 몫으로 노느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몫을 할당(割當), 아쉬움을 무릅쓰고 나누어 줌을 할애(割愛), 지급할 돈을 여러 번으로 나누어 줌을 할부(割賦),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막아 지킴을 할거(割據), 한 지방을 점령하고 지킴을 할거(割去), 가죽을 벗기고 살을 도려냄을 할박(割剝), 제 값어치의 물건 밖에 조금 더 얹어 주거나 받는 물건을 할증(割增), 배를 갈라 자살함을 할복(割腹), 썰어 삶아서 음식을 조리함 또는 그 요리를 할팽(割烹), 이웃한 남의 논밭을 개개면서 가는 짓을 할경(割耕), 보리를 세로 2등분 한 뒤 다듬어 정제한 보리쌀을 할맥(割麥), 구성원의 자격을 빼앗고 명부에서 이름을 지워버림을 할명(割名), 반에 나누어 벰을 할반(割半), 자리를 달리함 또는 절교함을 할석(割席), 원둘레 또는 그밖의 다른 곡선에서 둘 또는 둘 이상의 점을 지나는 곧은 줄을 할선(割線), 땅이나 물건의 일부를 떼어서 남에게 넘겨 줌을 할양(割讓), 베어 주거나 쪼개어 주는 일을 할여(割與), 은정을 끊음을 할은(割恩), 밑나무를 가르고 접붙일 나무를 끼워 넣는 접붙이기를 할접(割接), 발목을 부러뜨림을 할족(割足), 한 부분을 빼앗아 가짐을 할취(割取), 제가 하여야 할 제 앞의 일을 역할(役割), 나누어 쪼갬을 분할(分割), 똑같이 나눔을 균할(均割), 벤 듯이 아픔을 여할(如割), 위험에 부딪칠 때 일부 동물이 제 몸의 일부를 스스로 끊어버리는 일을 자할(自割), 팔뚝을 베어 피로 맺은 맹세라는 뜻으로 남녀의 굳은 사랑의 맹세를 이르는 말을 할비맹(割臂盟), 공복을 채우기 위해 허벅살을 베어 먹는다는 뜻으로 한때를 모면하기 위한 어리석은 잔꾀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할고충복(割股充腹), 사귐을 끊어서 자리를 같이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할석분좌(割席分坐), 허벅지의 살을 잘라내어 부모를 치료한다는 뜻으로 효행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할고료친(割股療親), 가죽을 벗기고 살을 벰을 할육거피(割肉去皮), 몸의 반쪽을 떼어내기는 고통이라는 뜻으로 동기를 잃은 슬픔을 이르는 말을 할반지통(割半之痛), 배를 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일컫는 말을 할복자살(割腹自殺), 고을 원이 백성의 재물을 갈취하여 긁어 모으는 나쁜 정사를 일컫는 말을 할박지정(割剝之政) 등에 쓰인다.
▶️ 股(넓적다리 고)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육달월(月=肉; 살, 몸)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殳(수, 고)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股(고)는 (1)고본(股本) (2)구고현(勾股弦)의 하나. 직각(直角) 삼각형(三角形)에서 직각(直角)을 낀 두 변 가운데서의 긴 변. 현(弦) 등의 뜻으로 ①넓적다리 ②정강이 ③고(股; 직각삼각형의 직각을 이룬 긴 부분) ④가닥(한군데서 갈려 나온 낱낱의 줄) ⑤가지 ⑥끝 ⑦가닥이 지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넓적다리의 힘줄을 고근(股筋), 넓적다리의 살을 고육(股肉), 두 다리의 사이를 고간(股間), 사타구니와 손바닥을 고장(股掌), 사타구니와 장딴지를 고비(股腓), 몹시 두려워서 다리가 벌벌 떨림을 고전(股戰), 두려워서 다리가 떨림을 고율(股慄), 기린을 달리 이르는 말을 고고(股股), 남자가 입는 저고리를 고첩(股褶), 남자의 홑바지를 고의(股衣), 여자 속옷의 한 가지로 고쟁이를 고장(股藏), 여러 사람이 공동하여 사업을 경영할 때에 일정한 방법으로 각각 내는 밑천을 고본(股本), 다리와 팔이라는 뜻으로 온몸을 이르는 말로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중신을 고굉(股肱), 다리를 찌름을 자고(刺股), 허벅지의 살을 도려냄을 할고(割股), 물체의 옆으로 갈라진 부분을 횡고(橫股), 키를 돋우려고 할 때 발 밑에 괴는 물건을 의고(義股), 다리와 팔의 힘이라는 뜻으로 온몸의 힘을 이르는 말을 고굉지력(股肱之力), 다리와 팔뚝에 비길 만한 신하라는 뜻으로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중신을 이르는 말을 고굉지신(股肱之臣), 허벅다리를 찌르고 머리털을 대들보에 묶는다는 뜻으로 분발하여 열심히 공부함을 이르는 말을 자고현량(刺股懸梁), 공복을 채우기 위해 허벅살을 베어 먹는다는 뜻으로 한때를 모면하기 위한 어리석은 잔꾀를 비유해 이르는 말을 할고충복(割股充腹), 상투를 천장에 달아매고 송곳으로 허벅다리를 찔러서 잠을 깨운다는 뜻으로 학업에 매우 힘씀을 이르는 말을 현두자고(懸頭刺股), 허벅지의 살을 잘라내어 부모를 치료한다는 뜻으로 효행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할고료친(割股療親), 매우 놀라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리가 떨림을 심경고전(心驚股戰) 등에 쓰인다.
▶️ 奉(받들 봉)은 ❶회의문자로 捧(봉)과 동자(同字)이다. 丰(봉; 신령)과 収(수; 두 손)의 합자(合字)이다. 신령을 맞이하여 두 손(手)으로 받든다는 뜻을 합(合)하여 '받들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奉자는 '받들다'나 '바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奉자는 大(클 대)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크다'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갑골문에 나온 奉자를 보면 약초를 양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거나 채취한 귀한 것을 황제나 지역 관리에게 바쳐야 했다. 그래서 奉자는 귀한 약초를 바치는 모습으로 그려져 '바치다'나 '섬기다'라는 뜻을 표현한 글자이다. 참고로 여기에 扌(손 수)자가 더해진 捧(받들 봉)자도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奉(봉)은 ①받들다 ②바치다 ③섬기다, 힘쓰다 ④제사를 지내다 ⑤기르다, 양육(養育)하다 ⑥이바지하다 ⑦돕다 ⑧편들다 ⑨준수(遵守)하다 ⑩보전(保全)하다 ⑪대우(待遇)하다 ⑫녹봉(祿俸: 벼슬아치에게 주던 급료) ⑬기름, 양육(養育) ⑭손위 어른의 일에 대한 높임 말 ⑮씀씀이 ⑯임금이나 신불(神佛)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섬길 사(仕), 이을 승(承)이다. 용례로는 남을 위하여 일함을 봉사(奉仕), 웃어른을 받들어 섬기는 것을 봉사(奉事), 물건을 받들어 바침을 봉헌(奉獻), 주장하여 일을 하는 사람을 곁에서 거들어 도움을 봉족(奉足), 물의 근원이 전혀없어 끊임없이 비가 내려야 경작하게 되는 메마른 논을 봉답(奉畓), 공직에 종사함을 봉직(奉職), 경건하게 노래 부름을 봉창(奉唱),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골을 그릇이나 봉안당에 모심을 봉안(奉安), 공경하는 마음으로 축하함을 봉축(奉祝), 남의 글을 만들어 읽음을 봉독(奉讀), 귀인이나 윗사람을 모시어 배웅함을 봉송(奉送), 나라나 사회를 위하여 힘을 바침을 봉공(奉公), 조상의 제사를 받듦을 봉사(奉祀), 어버이나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받들어 모시고 섬김을 봉양(奉養), 믿고 받듦을 신봉(信奉), 부모를 모시어 받듦을 시봉(侍奉), 거룩하게 여겨 떠 받듦을 숭봉(崇奉), 자기 몸을 스스로 모양함을 자봉(自奉), 이웃 나라에서 보내온 예물에 대하여 답례로 그 값을 치르던 일을 회봉(回奉), 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이 고을의 원이 되는 기쁨을 일컫는 말을 봉격지희(奉檄之喜), 나라 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며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함을 일컫는 말을 우국봉공(憂國奉公), 보는 앞에서는 순종하는 체하고 속으로는 딴마음을 먹음을 일컫는 말을 양봉음위(陽奉陰違), 사를 버리고 공을 위하여 힘써 일함을 일컫는 말을 멸사봉공(滅私奉公), 위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아내와 자식을 거느림을 일컫는 말을 상봉하솔(上奉下率), 집에 들어서는 어머니를 받들어 종사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입봉모의(入奉母儀) 등에 쓰인다.
▶️ 君(임금 군)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尹(윤, 군)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尹(윤, 군)은 손에 무엇인가를 갖는 모양으로 천하를 다스리다는 뜻과, 口(구)는 입으로 말, 기도하다의 뜻의 합(合)으로, 君(군)은 하늘에 기도하여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君자는 '임금'이나 '영주', '군자'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君자는 尹(다스릴 윤)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尹자는 권력을 상징하던 지휘봉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다스리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직책이 높은 사람을 뜻하는 尹자에 口자가 결합한 君자는 군주가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君(군)은 (1)친구나 손아랫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에 그 성이나 이름 아래에 붙여 쓰는 말 (2)조선시대, 고려 때, 서자(庶子) 출신인 왕자나 가까운 종친이나 공로가 있는 산하(傘下)에게 주던 작위(爵位). 고려 때는 종1품(從一品), 조선시대 때는 정1품(正一品)에서 종2품(從二品)까지였으며, 왕위(王位)에 있다가도 쫓겨나게 되면 군으로 강칭(降稱)되었음. 이를테면, 연산군(燕山君), 광해군(光海君) 등이다. 이와같은 뜻으로 ①임금, 영주(領主) ②남편(男便) ③부모(父母) ④아내 ⑤군자(君子) ⑥어진 이, 현자(賢者) ⑦조상(祖上)의 경칭(敬稱) ⑧그대, 자네 ⑨봉작(封爵) ⑩군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백성 민(民), 신하 신(臣)이다. 용례로는 세습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을 군주(君主),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를 군국(君國), 임금의 명령을 군령(君令), 임금의 자리를 군위(君位),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군자(君子), 처방에 가장 주되는 약을 군제(君劑), 임금의 총애를 군총(君寵), 임금의 덕을 군덕(君德), 임금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를 군도(君道),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군림(君臨), 임금과 신하를 군신(君臣),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아버지를 이르는 말을 가군(家君), 엄하게 길러 주는 어버이라는 뜻으로 남에게 자기의 아버지를 일컫는 말을 엄군(嚴君), 남의 남편의 높임말을 부군(夫君), 남의 부인의 높임말을 내군(內君), 거룩한 임금을 성군(聖君), 어진 임금을 인군(仁君), 재상을 달리 일컫는 말을 상군(相君), 임금께 충성을 다함을 충군(忠君), 포악한 군주를 폭군(暴君), 임금의 신임을 얻게 됨을 득군(得君), 덕행을 베푸는 어진 임금을 현군(賢君),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첫째는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둘째는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 셋째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자삼락(君子三樂), 임금과 신하와 물과 물고기란 뜻으로 떨어질 수 없는 친밀한 관계를 일컫는 말을 군신수어(君臣水魚), 임금은 그 신하의 벼리가 되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군위신강(君爲臣綱),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의 은혜는 똑같다는 말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큰 의리를 일컫는 말을 군신대의(君臣大義),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는 말을 군자무본(君子務本), 군자는 큰길을 택해서 간다는 뜻으로 군자는 숨어서 일을 도모하거나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옳고 바르게 행동한다는 말을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군자는 한 가지 재능에만 얽매이지 않고 두루 살피고 원만하다는 말을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표범처럼 변한다는 뜻으로 가을에 새로 나는 표범의 털이 아름답듯이 군자는 허물을 고쳐 올바로 행함이 아주 빠르고 뚜렷하며 선으로 옮겨가는 행위가 빛난다는 군자표변(君子豹變),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아서 백성은 모두 그 풍화를 입는다는 뜻으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을 군자지덕풍(君子之德風),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욕신사(君辱臣死)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