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일 부활2주간 수요일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21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쓸데없는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내가 ME주말 모임을 갔을 때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말이 바로 “하느님께서는 쓸데없는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정말 필요한 사람’, 둘째 ‘있으나 마나한 사람’, 그리고 셋째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가 “우리는 이 세 사람의 분류에서 어디에 해당 되는지 생각해보고 서로 얘기를 나눠보라.”고 하였는데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자기는 ‘있으나마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ME주말 모임을 갔을 때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말이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어려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면 참 엉터리로 만들고도 항상 가슴 부듯하고 애착이 갔습니다. 무엇 하나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없는 것이면서 내가 만든 것만큼은 버리지를 못하였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이 보시고 좋은 것이 이 세상이고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완벽하신 주님께서 창조하신 완벽한 것에 어찌 애착이 가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애착이 가는 존재인 우리가 스스로 완벽하지 못하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서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 신체적인 결함이나 정신적인 결함을 주님 탓으로 돌리고 주님을 원망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들의 잘못으로 기인된 것이니 어찌 모든 책임을 주님께 전가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의 완벽한 작품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 사랑을 ‘너무나 사랑하신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누구를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하는지 자신 있게 그리고 자세하게 표현하실 수 있습니까? 문학가들이 아주 그럴듯하게 표현하고 그 감정을 잘 묘사하지만 그래도 완벽하지 못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오묘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다.’고 썼나봅니다. 독생자(獨生子)를 보내셨다고 하지만 독생자는 단순히 외아들이라는 말보다는 ‘혼자서 나시고, 스스로 나신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은 영어의 표현대로 - only begotten Son - 하느님 스스로 사람이 되신 유일한 아들이라는 말이고 또한 아들은 하느님의 분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이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고, 우리에게 멸망을 없애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는 말씀이 됩니다. 심판하지 않으시고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에 대하여 항상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아주 쉽게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판단합니다. 또한 사람들이 ‘잘 했고 못 했고.’를 자주 판단합니다. 그러나 누구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그 잘잘못을 심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며 심판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교회에서, 집에서, 사회에서도 그렇듯이 하느님의 몫인 심판을 우리가 서둘러 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없는 자격을 행사한 것이니 엄청난 월권(越權)행위를 하고 있는 셈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심판할 자격이 있으신 분이고 세상을 심판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구원을 위해서 오셨다고 강조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하실 계획이신 것입니다. 내가 죄에서 나 스스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나를 도와주시고 죄와 악에서 건져 주시어 내가 원죄와 본죄로 얼룩진 상태에서 모든 죄를 없애주시고 하느님의 품에 받아 더 나은 상태로 올려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믿고, 믿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가르친 것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고 선교하는 일을 무척 어려워합니다. 이는 믿고 있다고 고백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데 게으르다면 나는 헛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선생이 되어 지식을 전수하듯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모범이 되어 살지 못하고 좋은 표양을 보이기보다 그렇지 않은 표양으로 하느님과 교회에 먹칠을 하고 비난을 받게 합니다. 우리가 말은 쉽게 하면서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이 삶입니다. 이렇게 하면 잘 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하고 모범을 보이는 삶은 그렇듯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사는데 말로는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고 용서한다고 편하게 말하고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옹졸한 마음을 활짝 열어 놓으면 아주 검고 시커먼 속내를 보일 것만 같아서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감추고 살 수 있겠지만 심판자로 계시는 그 분 앞에서 시커먼 모습에 나 스스로도 놀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사도는 다시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멀리하고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빛을 선이라고 한다면 어둠은 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빛이고, 선이라고 한다면 악마의 세력에 들어 있는 것을 어둠이며 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어의 ‘kakos’라는 악을 가리키는 말은 '인간의 책임에 귀속하는 해로운 행위'를 가리킵니다. 모든 악의 책임은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는지 모릅니다. 양심에 따라 살기가 참 어려운 것이 이 사회의 현상이기 때문에 매일 어두운 악의 표징들이 뉴스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항상 선을 행하고 선한 빛의 세계에 살겠다고, 또 하느님과 같이 살겠다고 매일 결심합니다. 그러나 나는 결국 내 자신과 하느님과 한 모든 약속을 무시하고 내 의향대로 악에 묻혀서 살아갑니다. 당연히 우리가 있어야 할 빛의 세계이며, 자연 질서에 속하는 선을 우리가 간직하지 못했을 때 악의 소굴에 떨어져 버립니다. 반드시 간직해야할 선에서 왜 그렇게 부족함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을 두려워합니다.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은 밖에 나갈 때 자외선을 차단하는 햇빛차단 크림(sun cream)을 발라 피부를 보호하고 주름살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듯이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성덕(聖德)의 크림을 바르고 나가야 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아름답게 꾸미고 마음을 열고 빛으로, 빛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흡혈귀처럼 빛을 미워하면 결국 우리를 어둠에 숨어있게 하고 악으로 치장하게 합니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17-26
그 무렵 17 대사제가 자기의 모든 동조자 곧 사두가이파와 함께 나섰다.
그들은 시기심에 가득 차 18 사도들을 붙잡아다가 공영 감옥에 가두었다.
19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데리고 나와 말하였다.
20 “가거라.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전하여라.”
21 그 말을 듣고 사도들은 이른 아침에 성전으로 들어가 가르쳤다.
한편 대사제와 그의 동조자들은 모여 와서
최고 의회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원로단을 소집하고,
감옥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22 경비병들이 감옥에 이르러 보니 사도들이 없으므로 되돌아가 보고하였다.
23 “저희가 보니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24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은 이 말을 듣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사도들 때문에 몹시 당황해하였다.
25 그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여러분께서 감옥에 가두신 그 사람들이
지금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6 그러자 성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가서 사도들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않았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