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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 1서의 말씀 4,7-10>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 복음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로 나타나셨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6,34-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34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35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36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37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40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41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42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43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44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소유적 사랑과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요한 1서 4,7)
오늘 요한의 편지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서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거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자연스럽게 사랑을 하려면 다른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은 무엇이고, 그런 사랑이 가능하기는 할까라는 질문도 또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물론 다른 사랑을 할 수는 있겠지요.
그것도 사랑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좋아하는 사랑'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해야 할 것을 '나 너 좋아해'라고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 좋아하는 것이 실은 사랑하는 것의 반대이지요.
사랑하는 것은 나를 내어주는 것인데 반해 좋아하는 것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고, 좋은 것이 있을 경우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줍니다.
이것을 제게 처음 깨닫게 해준 영화가 있습니다.
1970년 대 영화인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입니다.
방속국 디제이를 사랑하는 여자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곡을 신청하는데, 그런 식으로 자기를 각인시키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합니다.
그러나 디제이가 자기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랑을 자기에게 돌리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자 죽이려 합니다.
내가 소유할 수 바에는 파괴하자는 겁니다.
이처럼 소유적 사랑은 사랑의 이름으로 소유하려고 하고 폭력적이게 되는데, 요즘 흔하게 된 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이 다 이 소유적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유적 사랑과 데이트 폭력은 요즘 현상만이 아닙니다.
요즘 이것이 부각되었을 뿐 전에도 많이 있었던 것이고, 하느님에게서 온 사랑이 아닌 인간적 사랑을 하면 이런 사랑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사랑을 한다고 해도 자기 중심성이 있기 때문인데, 사랑할수록 더 좋은 사람이기를 요구하고, 사랑할수록 더 많은 사랑을 바라고 요구까지 하는 것이 다 이 때문이지요.
그러나 진정 사랑한다면 내 입맛에 맞는 사람이기를 요구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기를 요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지금 받는 사랑도 과분하다고 하지 더 많은 사랑을 요구하지 않고, 사랑하기에 사랑할 뿐 사랑해줄 것을 바라거나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런 뜻에서 저는 짝사랑 또는 외사랑을 참으로 아름답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사랑 중에서 꽤 괜찮은 사랑은 다 짝사랑 또는 외사랑입니다.
엄마의 자식 사랑은 다 짝사랑이고, 그것에 불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인간 사랑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대부분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배우며 자라듯 신적인 사랑도 하느님 사랑을 받으며, 배우며 자라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는 오늘도 주님 공현의 연장선상에서 참 빛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빛을 가장 가까이서 가슴에 기대어 체험했던 사도 요한이 오늘 제1독서에서 그 빛의 본질을 꿰찔러 선포해 줍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1요한 4,10)
그렇습니다.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참 빛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영성체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당신 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으로 보내셨네.”
(에페 2,4; 로마 8,3 참조)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늦은 시간이 되자,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 6,36)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 6,37)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까닭입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당신의 배고픔으로 여기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먼저 굶주리는 이들의 먹을 것을 챙겨주십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허기진 모세와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듯이 말입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당신 몸을 양식으로 내놓으셨듯이 말입니다.
그토록 당신 자리를 떠나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마르 6,41)
이리하여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당신의 사랑을 공현으로 보여주시고 드러내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나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 사랑을 실행하도록 맡겨졌습니다.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그 지고한 사랑에 참여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시며 이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안으로 몸소 들어오십니다.
그토록 차고 넘쳐나는 사랑을 우리도 ‘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우리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나를 향한 사랑으로 애끓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러 미사에 나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일까요, 아니면 백성들일까요?
제가 보기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당신을 만날 수 있는지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납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셨지만 오천 명 중에 진정 그분의 은혜를 받은 이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하셨을 때, 빵을 먹은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여기고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는 왜 발생할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의 능력을 본 것뿐만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마음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마음으로 만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육체로, 어떤 사람은 정신으로만 만나려 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마음으로 만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사랑이 흐르는 곳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부모가 되면 자신의 자녀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습니다.
채널A ‘금쪽같은 내 새끼’ ‘아이와 부정적인 소통 방식의 이유, 엄마의 과거 때문이었다…?’ 편에 엄마의 이름을 막 부르고, 심지어 엄마를 새엄마, 쓰레기, 똥이라고 부르는 딸아이가 나왔습니다.
왜 이 아이는 엄마가 조금만 무엇을 해주지 않거나 혹은 무엇을 하라고 하면 짜증을 내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오은영 선생은 어머니가 과거에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을 그 원인으로 찾았습니다.
어머니는 부모에게 ‘사랑한다, 잘한다’라는 말 한마디만 들어보고 싶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서운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한 번도 해주지 않고 돌아가셨고, 그래서 동생들을 돌보며 어머니도 도망가지나 않을까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어떤 부모도 마음으로 딸을 만나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가슴에서 시작하여 머리로, 그리고 몸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가슴을 만나고 싶은데 엄마는 가슴이 닫혀있어 딸을 만나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슴과 가슴이 만나는 방식은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내 가슴에 있는 사랑이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흐르려면 가슴이 찢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본 것은 빵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흘려야 하는 그리스도의 ‘피’를 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만난 예수님의 마음은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스프랑크니조마이)입니다.
이 동사는 본래 인간의 ‘내장’(스프랑크논)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의 ‘애간장이 끓는다’라는 말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배고픔을 보시며 당신 사랑을 빵과 물고기를 통해 전해주려고 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마음’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가 진정 그리스도를 만났느냐, 만나지 못했느냐를 결정합니다.
빵을 먹은 이들은 이 마음을 보지 못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얼굴에 모반을 지니고 태어나 부모로부터 버려진 ‘김희아’ 씨는 ‘감사’를 찾음으로써 자녀들도 잘 키우며 살아갑니다.
부모도 없이 자란 김희아 씨가 이렇게 잘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의 마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애간장 끊는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제가 스물세 살 때 보육원에 있던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은 남자도 사귀고 결혼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나도 가정이란 것을 가져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잠을 자기 전에 주먹을 쥐고 ‘하느님, 이 주먹이 지우개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나서 얼굴에 있는 점을 한없이 문질렀습니다.
점이 지워지게 해 달라고...
이 점 때문에 아프고, 슬프고, 부모님에게 버림받았고 다른 사람이 꿈꾸는 것을 나는 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우고 지우다 보니 눈물이 볼에 떨어질 때마다 따가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지워주실 것이라고 믿고 계속 문질렀습니다.
그러다 그때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느님 모습을. 울고 계시는 거예요.
제가 우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당신으로부터 쏟아지는 눈물이 너무 많아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을 만큼 울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다시 기도했습니다.
‘제가 다시는 얼굴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제 모습 때문에 기뻐서 눈물을 흘리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느님 죄송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제가 잠이 들고 아침에 깼을 때 여전히 제 얼굴에 상처가 남아있었지만,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하느님이 점을 지워주셨습니다.
제 ‘마음의 점’을 지워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제 얼굴을 어떻게 보든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가장 중요하고 나 자신이 나를 사랑하면 남들도 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자살만 생각하던 한 자매가 우연히 누군가의 초대로 참석했던 ‘소공동체 모임’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날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관한 복음을 나누는 날이었는데,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는 대목을 읽을 때 예수님이 그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던 것입니다.
‘아, 내가 사랑받지 못한 것만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항상 나를 가엾게 지켜보고 계셨구나!’
그 이후로 삼 년 동안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애끓는 마음’을 만나야 진정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인 성체 성혈을 영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성체 성혈에서 그리스도의 애끓는 마음, 곧 십자가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본래 인간이 아닌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내가 하느님을 만나고 싶거든 하느님 마음, 곧 사랑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애간장이 끓고 끊어지는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뚫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영하는 이유입니다.
성체를 영할 때 그분의 마음을 만나지 못하면 그냥 빵을 먹은 것이 됩니다.
이제 모든 에너지를 ‘예수님 우리를 향한 애끓는 사랑의 마음을 만나려는 데’ 쏟으십시오.
그러려면 육체와 정신적 배고픔은 잊는 게 낫습니다.
하나만 원해야 간절한 것이고, 죽도록 간절히 원해야 그분도 죽음을 통해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어라>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
(루카 6,38)
누구에게 무엇을 받으려 하기 전에 ‘주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습니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마르 6,35-36)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야 된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 순간을 최선을 다해 베풀어야 할 시간으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내놓기를 바라셨습니다.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적은 것이라도 고마운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고 나누니까 많아졌습니다.
이는 기적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감사하게 나누면 우리 삶의 자리가 기적의 자리가 됩니다.
세계적으로 하루 4만 명씩 굶어서 죽어가는 기아 문제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통계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합니다.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쓰지 않아서 문제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늦은 시간이든, 외딴곳이든, 다시 말하면 언제 어떤 장소에 있든, 항상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도록 헤쳐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눔으로써 서로 일치시키는 몫을 하라고 일깨워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 2,25-27)
물질에 굶주린 사람뿐 아니라 영적인 갈망이 있는 사람, 사랑에 굶주린 사람, 인정받고 싶은 사람,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은 사람, 마음을 헤아려 줄 상대를 찾는 사람...우리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베푸는 삶, 행동하는 믿음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작은 나눔이 위대한 빵의 기적의 원동력이자 구심점, 출발점이 됩니다>
혹시라도 이삼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쫄쫄 굶어본 적이 있습니까?
단 하루만 굶어보십시오.
눈이 핑핑 돌면서 오로지 머릿속은 먹을 것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흘을 굶어보십시오.
아무리 고상한 사람, 박학다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짐승으로 돌변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좋은 말씀이 선포된다 할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느라 군중들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다니던 백성들의 구체적인 현실, 쓰라린 뱃속을 외면한 채 말씀만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의 필요성, 그들의 눈물, 그들의 슬픔,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하려는 동질감, 합일감, 일체감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귀여겨들어야 할 메시지의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기적의 첫 출발점은 바로 우리 인간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풍성함은 그분의 한없는 자비와 측은지심, 풍요로움에서 시작되지만, 우리 인간 측의 미약하고 작은 노력도 소중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군중 가운데 있던 사람들의 작은 나눔(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어떻게 보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나눔을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시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작은 나눔이 빵의 기적의 원동력이자 구심점, 출발점이자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사랑의 큰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내가 내어놓을 수 있는 작은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에서 우리가 눈여겨 바라볼 특징적인 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능력과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의 협조 없이도 속전속결로 엄청난 일을 다 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빵을 많게 하시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측의 협조를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 측의 정말 작은 기여-손때 묻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반으로 만 여명의 사람들을 배 불리는 사랑의 대기적을 일궈내십니다.
오늘 내가 이행하고 있는 작은 사도직이 교회나 사회에 별로 큰 기여가 되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작은 사도직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하느님과 연결시키고 교회와 연결시키면 그 일이 곧 하느님의 사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웃들에게 행하는 작은 친절 하나, 해맑은 미소 한번, 환한 인사 한번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하느님 앞에서는 엄청나게 큰 사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를 먹이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 6,34)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사람들이 모두 ‘잃은 양’처럼 되어서 방황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목자가 없었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목자이신 주님을 떠나서 살았을 뿐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목자를 찾으려고 애쓰는 양들입니다.
여기서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는 말은 그곳에 모여 있는 군중만 가엾게 여기셨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가엾게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는 인류 전체를 가엾게 여기셔서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라는 말은 우선 먼저 사람들에게 ‘말씀의 양식’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들이 ‘몸의 양식’보다 ‘말씀의 양식’에 더 굶주려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일에서, 미사 전례 때에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기 전에 먼저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는 것이 연상됩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배고픔보다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또 어떤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아직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자는 제자들의 건의는 그 상황에서 그들이 생각해낸 최선책이지만, 자기들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뜻이 들어 있기도 합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말만 하지 말고, 너희는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반문에는 “저희가 일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말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사람이 하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해야 할 말은, “주님, 도와주십시오.”입니다.
‘기적’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능은 빵과 물고기가 전혀 없어도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을 먹이시는 권능입니다.)
여기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는 제자들의 대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군중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빵과 물고기를 재료로 삼아서 기적을 행하시긴 했지만, ‘빵의 기적’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무리를 지어 자리 잡게 하신 것은 ‘질서 유지’를 위해서, 또 ‘빵의 분배’를 쉽게 하기 위해서인데, 한 사람도 소외당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그리고 한 사람도 차별당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배려’이기도 합니다.
(무질서에서 소외와 차별이 생깁니다.)
하느님 나라는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고, 차별당하지도 않고, 모두가 똑같이 행복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여기서 ‘백 명씩 또는 쉰 명씩’이라는 말에는 사람들을 수만 세어서 나누었을 뿐이고, 직업, 남녀, 신분, 계급에 따라서 나눈 것은 아니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앉은 것도 아니고, 같은 부류의 사람들끼리 모여서 앉은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렇게 구분해서 나누는 일 자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마르 6,41-44)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행복해졌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의 양식’을 받아먹었을 때에도, 또 ‘기적의 빵’을 받아먹었을 때에도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우리를 먹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빵의 기적’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항상 요한복음에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요한 6,26-27).
예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체험하게 해 주시는 것은 그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일입니다.
만일에 육신의 배부름만 생각하고 목적지를 잊어버린다면 예수님의 기적은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 전주교구 금암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이 되기(Becoming Love) - 사랑의 여정旅程>
작년 연피정 때 피정 주제가 다시 생각납니다.
'토마스 머튼의 삶과 영성-사랑이 되기(Becoming Love)'입니다.
사랑이 되기, 바로 존재론적 변화를 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이 되기’는 바꿔 말하면 ‘하느님이 되기(Becoming God)’란 말과 통합니다.
그래서 ‘새해 2022년 소원’이란 기도문 중 첫부분이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
하느님이 되고 싶다
모세처럼
하느님과 대화하고 싶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올해는 ‘오소서, 주 하느님!’ 짧은 말마디를 만트라로 삼아 끊임없이 기도 훈련에 전념할까 합니다.
호흡에 맞춰 ‘오소서’ 들숨에, ‘주 하느님!’ 날숨으로 끊임없이 기도로 바치는 것입니다.
호흡은 기도가 되고 하느님을 숨쉬는 느낌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이,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 1서의 짧은 네 구절에도 무려 사랑이란 단어가 10회 나옵니다.
하나도 생략할 수 없는 내용이라 전부 인용합니다.
오늘도 시간나는 대로 소리 내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체험은 비상하지 않습니다.
사랑 체험이 바로 하느님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선물, 사랑의 지혜입니다.
사랑이 없는 온갖 지식이나 언행, 선물들은 무거운 짐이 되거나 쓰레기가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결국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이런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탓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우리의 부족한 사랑입니다.
그분 예수님 사랑을 통하여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이 거룩한 미사 은총입니다.
그러니 평생 공부가 사랑 공부,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요, 평생 여정이 하느님이 되는 공부, 사랑이 되는 공부뿐임을 깨닫습니다.
끊임없는 발전도상중에 있는 사랑이요, 사랑에는 늘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예전에 들었던 주교님의 평이했던 두 예화가 여전히 생생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관계도 만나지 않으면 저절로 멀어지기에 자주 만나야 하듯, 주님과의 깊어지는 관계를 위해서도 자주 주님을 만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 물 주지 않으면 모종도 시들어 죽기에 계속 물 줘야 하듯 영혼도 계속 사랑의 물을 줘여 산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끊임없는 사랑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지 않으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진다는 것이며, 끊임없이 사랑의 기도라는 물을 주지 않으면 사랑도, 사람도 점차 시들어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집무실에는 ‘세심한 사랑’이라는 꽃말의 ‘스파트필름’이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집무실 안에 가장 오랫동안 살아 있는 식물입니다.
물 주는 것을 잊어버려 거의 시들어 죽어가다가도 물만 주면 금방 살아나는 모습이 영혼에 사랑의 물주기와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받지 않으면 영혼이, 사람이 시들기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똑같습니다.
며칠 전 읽은 인터뷰 기사 중 길다 싶지만 감동적인 어머니 사랑을 나눕니다.
“하지만 삼형제를 키우실 때 어머니는 항상 당차고 강인하셨고, 아버지가 감옥에 가셨을 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지요.
어머니는 저를 ‘괴테의 문장’으로 키우셨어요.
제가 과음을 한 날이며 어김없이 책상 위에 이렇게 쓰인 쪽지를 놓아주셨지요.
“인생의 절반을 술과 담배로 탕진하려느냐”(괴테)
아무튼 아버지 덕에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우리 삼형제는 결핍을 몰랐고 불안도 몰랐어요.
어머니의 힘이었죠.
그때는 원망스러웠지만 아버지의 말이 제가 지금까지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힘이 되었어요.
아버지는 말씀하셨죠
“누리야, 될 수 있으면 생활 수준을 높이지 말아라!”
너무 황당했어요.
이렇게 가난한데 도대체 어떻게 더 가난해지란 말인가.
하지만 아버지 말씀의 의미를 이젠 알아요.
생활 수준을 한번 높여 놓으면 그것을 내리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그러면 세상과 타협을 하게 되는 거지요.
전 가난이 그다지 두렵지 않아요.
가난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방법을 자연스레 익힌 거지요.”
말 그대로 어머니의 힘, 아버지의 힘, 말의 힘, 사랑의 힘입니다.
모두가 그렇지만 사랑도, 기도도 보고 배웁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삶이 얼마나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습니다.
어제 면담고백 성사 중 도반과도 같은 본당 사제와의 대화도 잊지 못합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사랑처럼 신자들의 반응이 시큰둥해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하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느님처럼 지칠 줄 모르는 아가페 사랑을 본받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말고 태풍은 곧 미풍으로 만드세요.
바로 이것이 실제적인 사랑의 힘입니다.”
이어 주고 받은 문자 메시지입니다.
“새해에도 멋지고 착한 목자로서 열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도 풍성한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수사님,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살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은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이요,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하는 지칠 줄 모르는 진인사대천명의 사랑, 아가페 사랑이요 사랑의 기적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착한 목자로서 이런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말 그대로 진인사대천명, 사랑의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 두 마리’라는 절체절명의 절박한 순간, 태풍이 올듯한 예감의 상황 중에도 진인사대천명의 믿음과 사랑으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시니 그대로 사랑의 기적입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고,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명이었다 합니다.
예수님의 지극정성의 사랑이 하늘이신 하느님을 감동시켰고 군중을 감동시켰으며, 이어 감동한 군중들이 마음을 활짝 열어 각자 가진 것을 다 나누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대로 성체성사의 사랑을, 기적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말 그대로 폭풍같은 위태한 분위기를 사랑의 기적으로 미풍의 평화로운 분위기로 바꾼 착한 목자 예수님입니다.
그대로 시편 23장 전반부의 고백이 절로 나오는 분위기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누여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시편 23,1-3ㄱ)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사랑이 되어가는 사랑의 여정에 우리 모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제가 늘 마음에 명심하는 바를 말씀 드립니다.
“미풍을 태풍이 되게 하지 말고, 태풍은 즉시 미풍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처럼!”
답은 오직 하나!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항구하고 간절한, 충실한 사랑의 기도 하나뿐입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의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초등학교 도덕 문제입니다.
정답을 골라보세요.
“철수는 영희의 장난감을 빌려왔습니다.
철수는 빌려온 장난감을 ( )처럼 아껴 쓰고 영희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1) 내 것 2) 빌려온 것
정답은 무엇일까요?
아마 대부분 1번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공식 정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빌려온 것을 더 아껴 쓰고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내 것이야 조금 상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내 것이 우선일까요?
남의 것이 우선일까요?
어떤 것이 더 우선이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기준을 맞춰본다면 우선해야 할 것을 명확하게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기준에 맞춘다면 선택의 방향을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무조건 내 것에 기준을 맞추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의 것에 기준을 맞추며 사랑의 실천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사랑의 나라에서만 가장 행복한 나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데 그들을 모두 배불리 먹으시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이 빵의 기적을 통해 ‘내 것’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주님 것’에 주목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수 있으십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빵의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빵의 기적을 행하시지요.
‘내 것’을 내놓은 누군가 때문에 그 놀라운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왜 내놓았을까요?
자기 혼자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보다, ‘주님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빵을 받았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낮은 풀밭에서 스스로를 낮추어 하느님의 빵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참회와 신앙을 간직한 사람만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 것’을 ‘내 것’이라고 말하는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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