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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부지탄(招賢不至歎)
명종은 훌륭한 선비를 신하로 곁에 두고자 수차례 벼슬자리를 제안했지만, 퇴계는 번번이 건강상의 이유 등을 내세우며 이를 거절했다. 이에 명종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음을 탄식하노라(招賢不至歎)"고 하였다.
招 : 부를 초(扌/5)
賢 : 어질 현(貝/8)
不 : 아닐 불(一/3)
至 : 이를 지(至/0)
歎 : 탄식할 탄(欠/11)
선비의 처신에는 나갈 때를 아는 것보다 물러설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명현들은 이러한 처신을 몸소 실천했다. 역사는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는 재상과 이를 만류하는 왕과의 갈등 아닌 갈등의 기록이 넘쳐난다. 그들의 물러남은 마지막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었다. 세종 조는 18년간 사직을 청한 명상 황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황희와 더불어 조선조 최고의 재상으로 칭해지는 서애 유성룡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징비록'이라는 걸작을 남겼으며 퇴계 이황은 숱하게 벼슬을 받았지만 실제로 벼슬에 나간 일수는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과감하게 벼슬을 버렸고 벼슬의 유혹을 과감하게 버렸기 때문에 조선성리학은 눈부시게 빛날 수 있었다.
물러날 줄 아는 지혜 아니 물러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혜를 통해 자신을 빛내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선현들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자. 물러날 때를 분명히 알고 바르게 처신했던 이들 선현들의 자세는 우리 역사의 황금기를 만들어 냈고, 조선성리학을 우뚝 세웠으며, 사상 초유의 국난을 극복하는 자양분이었다.
18년 동안 사직 청한 명정승
- 방촌 황희 -
흔히 청백리로 알려진 명정승 방촌 황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자제들과 관련한 비리 문제로 자주 구설수에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도덕정치를 지향하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이렇듯 자제들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음에도 그가 세종 치세 내내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우리 역사의 황금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었음은 정승에서 내려오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방촌이 사직을 처한 기록들이 많이 전한다. 실제로 그는 세종 치세 내내 사직을 청했고 결국 세종 말년에야 정승에서 내려온다. 그가 세종에게 사직을 청한 기록을 실록에서 간추려 보자.
세종 13년(1431년) 9월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세종 14년 4월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세종 14년 12월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17년 3월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지 않다.
세종 18년 6월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20년 11월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다.
세종 21년 6월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세종 21년 6월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세종 22년 12월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세종 25년 12월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解免)을 청하나 듣지 않다.
세종도 그가 없었으면 수많은 치적을 이루어 낼 수 없었다는 것이 후세의 지배적인 평가이다. 그가 이룬 많은 업적은 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태도도 큰 몫을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벼슬을 구하지 않고 학문을 탐구하다
- 퇴계 이황 -
명종 말년에 여러 번 불렀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오지 않았다. 명종이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다는 탄식(招賢不至歎)'으로 시제(詩題)를 내어 근신을 시켜 시를 짓게 하고 화공(畫工)을 시켜 이황이 사는 도산의 경치를 그려 오게 하여 그것을 볼 만큼 그 경모하는 정도가 이와 같았다.
(중략)
금상(今上; 선조)이 즉위하자 조야에서는 아주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바라, 사론(士論)이 한결 같이 이황이 아니면 성덕(聖德)을 성취시키지 못한다고 하였고, 임금도 이황에게 마음을 두었으나, 이황은 스스로 자기 재지(才智)가 대사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또 말세에 유자가 일하기 어렵고, 임금의 마음 역시 잘 다스려 보려는 정성이 부족하며 대신 또한 학식이 없는 터이라 한 가지도 믿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작록(爵祿)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곤 했다. 도산으로 간 뒤에는 당시 정사를 말하지 않았으나, 여론이 다시 나오기를 바랐는데 갑자기 별세하니 나이 70세였다.
율곡 이이가 평한 퇴계 이황의 삶이다. 퇴계가 얼마나 나가고 물러남이 엄격했는지를 한 눈에 보여준다. 벼슬자리에 연연해 남을 해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속유와 확연히 구분되는 처신이다.
이렇듯 자신에게 엄격했기에 퇴계는 율곡과 더불어 조선성리학의 양대 기둥으로 우뚝 설수 있었다. 태산북두와 같은 그의 학문은 그의 삶에서 철저히 체화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속세의 가치에 연연하지 않는 퇴계의 태도는 고봉 기대승과의 사단칠정 논변에서도 여실히 보여진다. 환갑을 앞둔 나이인 58세의 당상관인 대사성 퇴계는 갓 과거에 급제한 32세의 선비 고봉과 사단칠정에 관해 수년간 논변을 한다. 논변에서 퇴계는 자제 뻘인 고봉의 학문을 존중하며 당시 임금이 존중하던 대학자로서의 위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낙향 후 '징비록'을 남긴 명재상
- 서애 류성룡 -
임진년에 시작된 7년 전쟁은 서애 류성룡이라는 명재상이 있었기에 극복이 가능했던 우리 역사상 최대의 재난이었다. 그가 7년 전쟁 과정에서 보여준 재능은 전쟁에 참가했던 한중일 3국에서 공히 인정받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에 승리한 뒤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고 바로 복직됐음에도 과감하게 사직하고 낙향한다. 그러나 그의 낙향은 그의 업적의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서애는 전란이 끝나갈 무렵 1598년에 이산해와 정인홍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되어 낙향했다. 불과 2년 뒤인 1600년 복직되었으나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저술에 힘썼다. 이 때 쓰여진 저작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징비록'이다.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실태와 참상, 그리고 이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저술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임진왜란 연구사의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출간될 정도로 명저이다.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남대문의 상인들은 철시를 하여 애도를 표했고 백성들은 "류정승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며 슬퍼했다. 또한 청렴했던 탓에 집안에 재산이 없어서 백성들이 제수용품을 차려 장례를 지냈다고 한다.
권력과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서애의 처신이 그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심을 한층 더 높였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권력과 명예에 초연했던 스승인 퇴계의 행보를 다시 생각나게 한다.
■ 퇴계와 사직소
퇴계(退溪)는 1501년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퇴계의 이름은 황(滉)이고, 아명(兒名)은 서홍(瑞鴻)이며, 본관은 진보(眞寶) 또는 진성(眞城)이라고도 하였다. 자는 경호(景浩)이고, 퇴계는 그의 호이다.
퇴계는 아버지 이식(李埴)과 어머니 춘천박씨(春川朴氏) 사이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식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하였으니 퇴계의 유년시절은 그리 넉넉하지만은 않았다.
퇴계는 6세에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세에는 숙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에는 넷째 형 이해(李瀣)와 숙부를 모시고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하였고, 16세에는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홀로 공부하기도 하였다. 17세에는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였다.
이후 대부분을 스승 없이 홀로 공부하였다. 이 때문에 자기 힘으로 연구하는 힘을 기르게 되었다. 20세에는 '주역' 연구에 무리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21세에 혼인을 하고, 23세 되던 겨울에는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28세에 비로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27세 되는 해 10월에 둘째 아들 채(寀)가 태어났으나, 채를 낳다가 얻은 병으로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이후 30세에 다시 재혼하고 32세에 문과별시(文科別試) 1차에, 34세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이로부터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퇴계가 본격적으로 과거시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세부터 였다고 한다.
34세에 대과에 급제했으니 무려 15년을 노력한 셈이다. 그리고 이후 43세 때까지는 그럭저럭 관료 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50세 이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寒栖庵)과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고 찾아오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을 계속하여 제수하였다. 퇴계는 거듭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 벼슬을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직하고는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국왕 명종이 자꾸 사양하는 퇴계에게 벼슬과 함께 내린 교지(敎旨)의 내용이다. "내가 불민(不敏)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부족하여,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늘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하니, 나의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대는 나의 지극한 심정을 알아주어 속히 오라!"
은근하면서도 간곡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끊임없이 사직하려는 퇴계와 붙들어 두려는 임금의 마음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49세 되던 해 8월에 풍기군수의 사임장을 감사에게 올린 것을 시작으로 70세 되는 해 9월의 마지막 사직서를 올리기까지 21년에 걸쳐 무려 53회나 되었다.
사직의 이유로는 병과 늙음, 재능의 부족과 무능, 염치 등을 거론했다. 퇴계는 정치보다는 조용히 학문에 정진할 수 있기를 진정으로 원했다.
퇴계는 벼슬길에서 많은 회의(懷疑)와 큰 울분을 느껴야만 했다. 기묘사화(1519년)에서 조광조의 도덕정치가 물거품 되는 현실을 목격했고, 을사사화(1545년)에서는 권벌(權橃), 이언적(李彦迪) 등 존경 받던 영남의 큰 선비들과 넷째 형인 이해(李瀣)가 이귀(李貴)의 모함을 받아 유배되는 일이 있었다.
특히 형 이해는 갑산으로 유배 가던 중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해는 호를 온계(溫溪)라고 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권세 있는 자들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어려서 이웃에 살았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권력을 잡고 그의 당파로 끌어들이려 했을 때도 응하지 않았다. 퇴계는 이런 형을 가장 의지하였고 마음으로부터 존경하였다.
퇴계는 형의 '묘지명'에 이 같은 사실을 자세히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새겼다. "간의 피를 찍어 만세에 고하노니, 이 글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분함과 원통함이 섞여 있음을 알리라."
퇴계의 글로서는 보기 드문 과격한 표현이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바로 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명종은 이귀를 비롯한 윤원형 등 간신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퇴계에게 큰 충격이었고, 더 이상 정치에 뜻을 두지 않게 하였다.
퇴계는 분함과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간의 피를 찍어 기록하는 심정으로 형의 '묘지명'을 지었다. 마찬가지 심정으로 권벌과 이언적의 행장도 지었다. 이후 명종은 앞의 교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퇴계를 불러 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임금에 대한 실망과 마음의 병은 깊었다.
제자가 물었다. "선비가 가난하여 벼슬에 나아가고자 하나 임금이 임금답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퇴계가 답했다. "나아가서는 안 된다." 임금답지 않는 임금에게 나아가 세상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퇴계에게 있어서 나아가고 물러남의 근원이었다.
이러한 사이에도 퇴계는 여러 차례 조정에 불려나갔지만, 온 힘을 다해 사퇴하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퇴계는 스스로를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겼다"고 술회하였다. 명종 또한 바른 소리를 듣거나 세상을 맡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허수아비로 붙들어 두고자 했다. 그것으로 명분을 삼고자 했을 뿐이었다.
오늘날의 일부 지식인들은 나아가기를 안달하고, 물러나기를 도리어 부끄럽게 여긴다. 더구나 출세를 위해서라면 권력의 나팔수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식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이렇게 바뀐 것인가? 그럼에도 지식인에 대한 세상의 기대는 여전하다.
■ 나아가고 물러남
조선시대 유자(儒者)가 걷는 길에는 여러 갈래가 있었다. 정치 일선에 뛰어든 경우도 있고, 일생을 재야에 머물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자로서의 위치에 만족하던 학자적 존재도 있다. 유자의 본분이 자신의 수양(修己)과 함께 사람을 다스리는 데(治人)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관료가 되어 출세하여 자신의 경륜을 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비판자로서의 입장을 고수하는 선비들도 적지 않았다. 세상은 이들을 처사(處士)라고 불렀다. 이들은 임금의 부름을 받아 조정에 들어가면 산림(山林)이 되기도 하였지만, 일생을 처사로 보내는 경우가 보다 일반적이었다. 특히 영남에서는 이런 처사가 그 어느 곳에서 보다도 더 존경받았다. 그래서 과거도 벼슬도 아무 품계도 가지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의 신위(神位)에 하나같이 '처사'라고 표기했다. 처사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표상으로 생각했다.
무릇 선비는 아래로는 농민(農民), 공인(工人)과 나란히 서며, 위로는 왕공(王公)과 벗하며, 지위는 등급이 없고 덕을 아름다운 일로 삼으니, 한 선비가 책을 읽으면 은택(恩澤)이 온 세상에 미치고 공훈(功勳)이 만세에 드리워진다.
연암 박지원이 선비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모든 선비가 아니라 진정한 선비, 지극히 이상화된 선비상이다. 이때는 벌써 이런 진정한 선비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역할도 가능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러니 더욱 신비화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선비적 삶은 멀리 원시 유교에서부터 꿈꿔오던 이상이었다.
옛 사람은 뜻을 얻으면 은택(恩澤)이 백성에게 더하여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으며 세상을 살아가나니 궁(窮)하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고 현달(顯達)하면 천하를 아울러 선하게 한다.
맹자가 한 말이다. 이 역시 유자(儒者)의 삶과 처신을 이야기한 것이다. 연암의 선비상과 다르지 않다. 선비들에게 나아감과 물러남은 별개로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나아가고 때로는 물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아가고 물러남, 곧 출처의 원칙은 도가 행해지면 나아가고, 그렇지 못하면 물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나아가서는 하는 일이 있어야 했고, 물러나서는 지키는 것이 있어야만 했다. 이러한 나아감과 물러남에는 이윤(伊尹)과 안연(顔淵)이라는 사람이 가장 모범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이윤은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그 임금이 요순 같지 않음을 부끄러워했고, 안연은 누추한 길거리에 거처하면서도 3개월 동안 인(仁)을 어기지 않았다.
나라에 도(道)가 시행되면 나아가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 동안 쌓아온 경륜을 펴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물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도가 시행되는 데도 나아가지 않는 것도 문제이긴 하지만, 도가 시행되지 않는 데도 나아가 벼슬한다는 것은 선비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도가 시행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은 군주가 왕도(王道)정치를 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한다.
왕도정치란 인의(仁義)의 덕으로 정치를 하는 것이고, 인정(仁政)을 가장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패도(覇道)정치가 된다. 도의 시행여부와 왕도, 패도의 기준은 스스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도가 시행되지 않은 시대라고 생각한다면, 나아간 사람들은 절개를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선비로서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은 큰 불명예였다. 선비라면 나아갈 것인가 물러날 것인가를 한번쯤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당시대가 도가 행해지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도 어렵지만, 국왕이 몇 번이나 거듭하여 부른다면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충(不忠)이 된다. 불충이란 신하로서 할 도리가 아니었고, 또 그 자체만으로도 큰 죄가 될 수 있었다.
이런 경우 굳이 벼슬에 뜻이 없다면 임금에게 감사 인사(謝恩)를 한 후에 다시 사직소를 올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사직을 허락해 주기를 요청하는 상소가 많다. 그 이유는 흔히 병이나 늙음을 핑계하였다. 퇴계도 역시 그러했다.
이를 두고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군자가 도(道)를 배워 벼슬에 나아갔으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계책이 쓰이지 않아 구차하게 조정에 남아 있고 싶지 않으면 곧 병을 핑계하고 도를 지켜 돌아가게 마련이다. 이번에 이황이 부름에 응하여 오지 않는 것이 어찌 단지 자기 한 몸의 병 때문이겠는가."
물론 사직한 이유는 출처와 무관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행위들을 출처와 관련 지워 포장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더구나 조선후기 영남의 선비들에게는 나아가고 싶어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은둔 처사나 진정한 선비로 자처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 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 어느 누구 없이 나아가고 물러남(出處)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 은거강학의 생활
선비가 물러나 갈 곳은 다름 아닌 고향이었다. 거기에는 익숙한 자연이 있고, 일가친척이 있으며, 친구가 있고, 전답과 노비가 있었다. 무엇에 더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강호자연(江湖自然)을 벗하여 노래하기도 하고, 친척과 친구를 맞이하는 도리를 다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답과 노비에 대한 경영을 살들이 하여 집안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들은 별개면서도 하나였다. 다만 조금 더하고 덜한 차이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선비의 중요한 역할은 교육(講學)에 있었다.
고향으로 물러난 퇴계도 교육에 힘을 쏟았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다양했다. 직접 투쟁하는 방법도 있지만, 학문을 통해 근원적 진리를 밝히고 그러한 교육을 받은 선비들을 길러내어 세상을 바로잡는 방법도 있었다. 퇴계는 후자를 택했다.
퇴계는 교육을 위해 우선 집 부근에 계상서당을 지었다. 찾아오는 선비들과 함께 글을 읽고 시를 주고받으며 지냈다. 서당을 지은 후 교육에 힘쓰자 배우러 오는 선비들이 더욱 많아지자 도산서당을 지어 본격적으로 교육에 힘썼다. 퇴계는 찾아오는 선비를 싫어하거나 귀찮아하지 않았으며 친구처럼 대하여 끝내 스승으로 자처하지도 않았다.
퇴계는 단순 지식만 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감화를 줄 수 있는 '진정한 스승'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제자 대하기를 마치 벗처럼 하였고, 비록 어린 제자라 하더라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으며, 보내고 맞이할 때는 항상 공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비록 병으로 아파도 강론(講論)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퇴계의 강론은 숨을 거두기 며칠 전까지 계속되었다.
평소에 올바르지 못한 견해를 가지고 종일토록 강론한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네.
이것이 퇴계의 마지막 강론이자 제자들에 대한 마지막 인사였다. 제자에 대한 정중한 예의와 성실한 강론은 높은 인격과 제자에 대한 깊고 뜨거운 애정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퇴계의 문인(門人)은 참으로 많았다.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수록된 제자만도 310여 명이 넘는다.
퇴계는 개별적인 교육에만 몰두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교육운동인 서원창설에 열과 성을 다했다. 당시 교육기관으로는 성균관과 향교 등이 있었지만, 출세를 위한 과거 교육에만 힘쓸 뿐이었다.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도학교육을 역설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도학(道學)이란 우주의 본질과 이성의 탐구라는 성리학에 대한 진실된 이해와 그 이해의 실천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입으로 외우고 글이나 쓰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실된 이해와 그 이해한 바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과거를 통한 출세에만 급급하였던 성균관이나 향교의 교육으로는 이를 기대할 수 없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도학에 뜻을 둔 참다운 선비들이 필요했고, 이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낼 교육기관이 필요했다. 퇴계는 서원에서 그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최초의 서원은 중종 38년(1543) 주세붕이 건립한 백운동서원이다. 애초에는 선현(先賢)을 봉사하는 데 보다 큰 목적이 있었다.
퇴계는 이것을 성리학의 교육기관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사액과 경제적인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서원의 운영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사림에 의한 자치와 자율을 강조하였다. 퇴계는 이 같은 서원의 건립에 적극 앞장섰다. 역동서원이 그 중의 하나이다. 역동서원은 역동(易東) 우탁(禹倬)을 모신 서원이다.
커서 고압적이거나 위압적이지 않으며, 너무 작아서 군색하지 않을 만큼의 규모이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안정감 있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게 지어졌다. 퇴계의 성품을 보는 듯하다. 퇴계가 만년에 기거했던 도산서당은 조촐하기 그지없고, 묘소에도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새겨진 조그만 묘비만이 있을 뿐이다.
도선서원은 역동서원을 그대로 옮겨지은 것처럼 규모만을 조금 키웠을 뿐이다. 아무튼 이 같은 서원을 통해 마침내는 훈구세력을 몰아내고 사림의 세상을 만들었다. 퇴계는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벼슬에서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
군자의 물러남과 나아감에 대하여
(古今君子隱顯論)
평생토록 벼슬살이 한번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살면서 현달한 정승 판서들에게 욕이나 해대던 초라한 선비. 그 사람이 삶의 행적이 올곧았다 하여 죽은지 290년이 지나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니 그가 곧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다.
그는 3살 때에 이미 시(詩)를 지었고 5살에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능통하여 신동(神童)이라 일컬음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21살 되던 해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中興寺)에서 공부하던 중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나아갔다는 소식에 접하자 읽던 책을 불사르고 결연히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 후로 조선팔도를 두루 유람하며 글을 짓기도 하고, 경주(慶州) 금오산(金鰲山; 남산)에 매월당이라 이름붙인 초막을 짓고 들어앉아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쓰기도 하였다. 한 때 환속하여 농사를 지은 적도 있으나, 그것도 잠시일 뿐, 세상에 나와 벼슬아치들을 만나면 욕설이나 퍼부으며 미친 척을 하면서 운수(雲水) 노릇을 하였다.
그는 항상 "삭발을 하는 것은 세상을 피하자는 것이요, 수염을 남겨둔 것은 대장부임을 나타낸 것(削髮避當世, 留鬚表丈夫)"이라고 스스로 말하였다 하는데, 이 말처럼 그의 사상도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월당(梅月堂)이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추구한 것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경륜(經綸)을 펴는 선비, 그것이었다.
절간을 노닐며 미친 행세를 하고, 속된 인간을 만나면 조롱하기를 서슴치 않았으나 가슴깊이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꿈은 버리지 않았다. 고금제왕국가흥망론(古今帝王國家興亡論), 고금군자은현론(古今君子隱顯論), 고금충신의사총론(古今忠臣義士總論), 위치필법삼대론(爲治必法三代論) 등은 모두 나라 경영의 이념을 논하고 있다.
다음의 고금군자은현론(古今君子隱顯論), 즉 '군자의 물러남과 나아감에 대한 고찰'을 읽어 보자.
군자는 처신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롭다 하여 조급하게 나갈 수도 없고, 위태하다 하여 빨리 물러설 수도 없다. 공자께서 물에 일던 쌀을 건져가지고 가신 것은 구태어 빨리 가려던 것이 아니었고, "더디고 더디다, 나의 걸음이여"라고 말씀하신 것은 구태어 천천히 가고자 하신 것이 아니었다.
성현의 나가고 물러가는 것은 오직 의리(義理)가 온당한가 온당하지 아니한가와, 시대(時代)가 옳은가 옳지 않은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윤(伊尹)은 신야에서 농사짓던 한낱 늙은이로서 논두렁 속에 살면서 요순(堯舜)의 도를 즐겨 스스로 만족하였는데, 제을(帝乙)의 세 번 초빙을 받고, 그 옳은 것을 보고 나아가 보형(保衡)이 되었다.
부열(傅說)은 부암들의 한낱 죄수로서 성을 쌓는 공사장에서 모서리에 세우는 나무 기둥을 붙잡는 것으로 평생을 즐기려 하였는데, 무정(武丁)의 꿈에 보여 널리 구함으로 때를 타서 나아가 총재(冢宰)가 되었다.
태공(太公)은 위수가의 고기 잡는 일개 늙은이였다. 바야흐로 낚시를 맑은 위수에 던지고 있을 때는 잔디 위에 앉아 고기 낚는 것으로 장차 몸을 마칠 듯 하였는데, 사냥 나온 서백(西伯)을 만나 생각이 합치고 뜻이 같아서 상보(尙父)가 되었으니 이 세 사람의 은퇴함은 어찌 몸만 깨끗이 하고 윤리기강을 어지럽히려고 한것이었으며, 그 현달(顯達)함은 이름을 팔아 이익을 얻으려고 한것이겠는가! 쓸모있는 때를 기다려 서로 합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중략)
그러므로 선비가 나아가고 숨는 것은 반드시 그 의리가 마땅한가 마땅치 않은가와, 도를 행할수 있는가 행할수 없는가에 달려 있을뿐이고, 반드시 버리고 간다하여 어질고, 나아간다 하여 아첨이 되고, 은퇴한다 하여 고상하고, 벼슬을 한다하여 구차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버리고 가야 하는데 버리고 갔기 때문에 미자(微子)가 상주(商紂)를 버리고 갔으나 상나라를 배반하였다 말하지 않고, 마땅히 나아가야 하는데 나아갔기 때문에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이 은나라에 나아갔으나 뜻을 빼앗겼다 말하지 않고, 마땅히 숨어야 하는데 숨었기 때문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서산에 숨었으나 고상하다 말하지 않는다.
(이하생략)
아마도 매월당(梅月堂)은 죽는 날까지 세상에 나아갈수 있는 명분을 찾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매월당은 동시에 죽는 날까지 자신이 세상에 나아갈 기회와 계기는 찾아오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깊은 산 속에 숨어산다 한들 어찌 세상을 잊을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조선시대에 올바른 비판의식을 지닌 선비들의 이율배반(二律背反)의 심정이었다.
고금군자은현론(古今君子隱顯論) 원문은 매월당문집(梅月堂文集) 卷之十八에 있는데 아래와 같다.
君子之處身。難矣哉。不可以利躁進。不可以危勇退。接淅而行。非強速也。遲遲吾行。非強緩也。聖賢之進退。惟在義之當否。時之可不可如何耳。伊尹。莘野一耕叟也。方其處畎畝之中。樂堯舜之道。以爲自得焉。及其帝乙之三聘也。見可而進。而爲保衡。傅說。傅岩之野一胥靡也。處版築操楨幹。樂以平生焉。及其武丁之夢得而旁求也。乘時而出。而作冢宰。太公。渭濱一釣叟也。方其投竿淸渭。坐茅以漁。若將終身焉。及其逢西伯之獵也。計合志同。而爲尙父。是三人者。其隱也豈欲潔身亂倫而已。其顯也豈欲市名沽利而爲之哉。特待其有爲之時。沕然相合故也。易曰。見龍在田。何謂也。子曰。水流濕。火就燥。雲從龍。風從虎。聖人作而萬物咸覩。言遇時也。至於四皓之避秦。靖節之不臣於宋。世我乖也。伯夷去周。言聖之淸。展禽仕魯。言聖之和。伊尹之殷。言聖之任。其爲聖則一也。斯仕於秦。雄仕於新。出處雖殊。其干利犯義則一也。是故。士之去就隱顯。必先量其義之適與不適。道之可行與不行而已。不必去而賢。就而謟。隱而高尙。顯而苟且也。故當去而去。微子去紂。不可言背商。當就而就。伊,傅就殷。不可言奪志。當隱而隱。夷,齊西山。不可言高尙。當顯而顯。呂望鷹揚。不可言苟且。易蠱之上九曰。不事王侯。乾之九二曰。利見大人。各因其時也。至若巧臣貪利。辭爵以要君。僞士干名。沽隱以避地。甚者才劣德薄。爲世所棄者。自處窮村。無吹噓之勢。有交謫之實者。悻悻然告人曰。我亦隱者之徒。是嫫母而效西施之粲也。何足道哉。
(終)
■ 나아가고 물러남의 어려움
요즈음 우리나라의 형편에 비추어 보니 나아서고 물러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새삼 느끼던 차에, 이에 대한 옛 분의 좋은 말씀이 있어 다시 새겨본다.
眞隱者能顯也(진은자능현야)
眞顯者能隱也(진현자능은야)
진실로 숨어 살 수 있는 덕을 가진 사람은 출세할 수 있는 역량도 있으며,
참으로 출세할 역량이 있는 사람이면
숨어서 살 수도 있는 것이다.
- 임춘(林椿) 일재기(逸齋記)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능력 있는 사람이 세상에 쓰이지 못하거나, 반대로 능력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인사(人事)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비판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능력이 있을 줄 알고 발탁했는데 정작 그 자리에 올라가서는 형편없는 성과를 내거나, 반대로 별 볼일 없을 줄 알고 임명을 꺼렸던 사람이 의외의 성과를 내서 임명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머쓱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잘못된 인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서하(西河) 임춘(林椿)선생의 윗글은 인사가 아니라, 인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조용히 은거하면서 역량을 기르고 있다가, 때가 이르면 세상에 나아가 그 역량을 발휘하고, 여의치 않으면 다시 조용히 물러나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진퇴의 모습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재기(逸齋記)의 주인공 이중약(李仲若)은 어렸을 때부터 도교에 심취하여 항상 마음을 물질 밖에 두고 얽매이는 데에 초탈한 이른바 진짜 은자였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의학을 연구하여 많은 백성들을 살려냈고 그 공으로 조정에 들어와 높은 벼슬을 하기도 하였으며, 후에는 중국에 건너가 도의 요체를 배우고는 본국에 돌아와 도교(道敎) 사원을 설립하고 설법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주인공에 대해 서하 선생은, '도와 함께 행하여 이른바 진정으로 출세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숨고 싶을 때는 (혹은 숨어야 할 때는) 숨어서 도를 닦고, 세상에 나오고 싶을 때는 (혹은 나와야 할 때는) 나와서 역량을 발휘한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서하 선생은 이 글에 덧붙이기를, "벼슬하는 것을 더럽게 여기며 부귀를 천하게 생각하고, 흰 돌을 베개 삼고 맑은 물에 이를 닦는 자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을 파고들며 괴상한 짓을 행할 뿐이니, 그에게 출세할 역량이 있겠는가? 공명심에 사로잡히고 벼슬에 골몰하여 머리에 감투를 쓰고 허리에 관인(官印)을 차고 다니는 사람은 세력을 얻기 위하여 허덕이며 이익을 쫓아다닐 뿐이니, 그에게 숨어 있을 덕이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능력도 없으면서 고상한 척하는 거짓 은자들과, 안달복달 해가며 권력에 붙어 이익을 탐하는 속물들을 싸잡아 비판한 셈입니다.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커다란 화두이고 고민입니다. 나아갈 만할 때 나아가고 물러날 만할 때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자리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 기를 쓰고 그 자리에 오르려 하다가 정작 자리에는 올라보지도 못하고 패가망신만 하고 말거나, 오르기는 올라도 그 과정에서 안팎으로 만신창이가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또는 문제가 생겨서 물러나야 할 때 바로 물러나지 못하고 미적거리다가 사방에서 집중 공격을 당하여 마침내 온갖 더러운 치부가 만천하에 다 까발려진 다음에 등 떠밀려 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아서 적절히 처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라 하겠습니다. 서하 선생 말씀처럼 진실로 역량을 갖춘 사람이라면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 있어 이렇게까지 구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백강 이경여 선생의 부친이신 동고 이수록 선생은 광해군이 어머니 인목대비를 유패하고 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패륜적 행태가 심각하자 일체의 벼슬길을 사양하였고 백강 선생 자신도 벼슬길에서 물러나셨는데, 이후 인조반정후에 이미 돌아가신 동고 선생은 영의정에 추증되시고 백강 선생은 다시 부름을 받아 공직과 백성에 봉사하시며 훌륭한 봉사와 모범의 삶을 살아갔다.
이분들은 투철한 선비 정신으로 부자가 한 몸처럼 이처럼 물러남의 선택을 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들에게는 무엇보다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은 이분들이 살던 시대에는 알지 못하던 심오하고 복된 진리의 말씀들도 우리들은 더 넓게 접하고 배울 수가 있으니, 더욱 정진하여 참으로 복된 인생을 누려가도록 해야겠다.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은 그의 목적에 따라 각 사람에게 모두 달리 능력 등을 부여하시고 마지막에 하나님은 많이 준 자에게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며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즉 만인은 가진 능력 등에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매우 귀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헛된 세상의 평가에 휘둘러 사사로운 욕심으로 자리를 탐하다가 결국은 참담한 일을 당할 것이 아니라, 천국 즉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고 오직 인격을 갈고 닦아 성인의 품성을 기르는 데에 무엇보다 힘써야 한다. 아울러 이 세상에 봉사하고 사랑을 펴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능력 등을 갈고 닦는 일에도 소홀이 함이 없어야할 것이며, 사심 없이 공익을 위해 나아가고 공익을 위해 물러설 줄 알아야한다.
주목할 점은 높은 자리에 오르면 오를수록 그만큼 환란이 닥칠 위험도 커진다는 것이다. 그런 위험 부담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런 인격적 수양이 되지 않았으면 높은 자리에 오르면 안 된다. 앞에 언급한 백강 이경여 선생은 정승의 신분이 되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면서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있다고 하며 초연하게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 招(부를 초, 지적할 교, 풍류이름 소)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召(소, 초)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召(소, 초)는 신령(神靈)을 부르다, 사람을 부르는 일, 招(초)는 손짓으로 사람을 불러 오게 하는 일을 말한다. 본디 召(소)와 招(초)는 같은 글자였으나 나중에 나누어 쓰게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招자는 '부르다'나 '손짓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招자는 手(손 수)자와 召(부를 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召자에는 이미 ‘부르다’라는 뜻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다시 手자를 더한 것은 손짓하며 누군가를 부른다는 뜻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招(초, 교, 소)는 먼저 부를 초의 경우는 ①부르다, 손짓하다(초) ②묶다, 결박(結縛)하다(초) ③얽어매다, 속박(束縛)하다(초) ④구하다(초) ⑤나타내다, 밝히다(초) ⑥흔들리다(초) ⑦몸을 움직이다(초) ⑧과녁(초) ⑨별의 이름(초) 그리고 지적할 교의 경우는 ⓐ지적하다(교) ⓑ걸다, 게시하다(교) ⓒ들다, 들어 올리다(교) ⓓ높다, 높이 오르다(교) 그리고 풍류이름 소의 경우는 ㉠풍류(風流)의 이름(소)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부를 소(召), 읊을 음(吟), 부를 호(呼), 부를 창(唱), 부를 환(喚), 부를 징(徵), 맞을 요(邀), 부를 빙(聘), 읊을 영(詠)이다. 용례로는 불러 옴 또는 그렇게 되게 함을 초래(招來), 청하여 불러 들임을 초청(招請), 예를 갖춰 불러 맞아 들임을 초빙(招聘), 사람을 불러서 대접함을 초대(招待), 혼을 부름을 초혼(招魂), 불러서 위로함을 초안(招安), 불러서 이르게 함을 초치(招致), 적을 타일러서 항복하도록 함을 초항(招降), 자꾸 흔들림이나 이리저리 헤맴을 초요(招搖), 불러서 권유함을 초유(招誘), 재판 사건에 관계자를 불러 들이던 서류를 초체(招帖), 여럿 속에서 뛰어남을 초군(招軍), 빈객을 부름을 초빈(招賓), 사위를 맞음을 초서(招壻), 죄인을 불러 들여 심문함을 초문(招問), 남을 자기 집에 불러 들여 함께 삶을 초접(招接), 인재를 불러 들여 뽑아 씀을 초탁(招擢), 스스로 그러한 결과가 오게 함을 자초(自招), 죄를 지은 사람이 죄의 사실을 진술하도록 하는 심문을 문초(問招), 검시관이 받은 죄인의 진술을 검초(檢招), 죄인이 신문에 대하여 함부로 꾸며서 아무렇게나 횡설수설 대답하는 진술을 난초(亂招), 다시 문초함을 갱초(更招), 임금의 명령으로 신하를 부름을 명초(命招), 문초에 복종하여 죄상을 털어 놓음을 복초(服招), 역적의 진술 조서를 역초(逆招), 예를 갖춰 불러 맞아 들임을 빙초(聘招), 어떤 모임에 오기를 청하는 문권을 초대권(招待券), 손님을 초대하여 베푸는 잔치를 초대연(招待宴), 초대하는 뜻을 적어서 초대받을 사람에게 보내는 글발 또는 초대하는 뜻을 적은 편지를 초대장(招待狀),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 초청하는 뜻을 담은 서신을 초청장(招請狀), 사람을 부르는 신호로 울리는 종을 초인종(招人鐘), 전사 또는 순직한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를 초혼제(招魂祭), 정원 외의 사람으로서 외부에서 초청된 교수를 일켣는 말을 초빙교수(招聘敎授), 외부의 강사를 불러서 학술이나 기술 따위를 설명하여 가르침을 일컫는 말을 초청강의(招請講義), 남의 이목을 끌도록 요란스럽게 하며 저자거리를 지나간다는 뜻으로 허풍을 떨며 요란하게 사람의 이목을 끄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초요과시(招搖過市), 죄상을 낱낱이 자백함을 일컫는 말을 개개복초(個個服招), 불러 오고 불러 감을 일컫는 말을 호래초거(呼來招去), 심중의 슬픈 것은 없어지고 즐거움만 부른 듯이 오게 됨을 이르는 말을 척사환초(慼謝歡招) 등에 쓰인다.
▶️ 賢(어질 현)은 ❶형성문자로 贤(현)은 간자(簡字), 贒(현)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조개 패(貝; 돈, 재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구휼(救恤)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글자 臤(현, 간)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재화를 가지고 있어 남에게 나누어 준다는 뜻이 전(轉)하여 뛰어나다, 어질다는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賢자는 '어질다'나 '현명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賢자는 臤(어질 현)자와 貝(조개 패)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臤자는 신하가 일을 능히 잘 해낸다는 의미에서 '어질다'나 '현명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본래 '어질다'라는 뜻은 臤자가 먼저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사람이 어질고 착해 재물까지 나누어 줄 정도라는 의미가 반영되면서 지금은 여기에 貝자가 더해진 賢자가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賢(현)은 흔히 편지에서 자네의 뜻으로 아랫 사람을 대우하여 쓰는 말의 뜻으로 ①어질다 ②현명하다 ③좋다 ④낫다, 더 많다 ⑤넉넉하다, 가멸다(재산이 넉넉하고 많다) ⑥존경하다 ⑦두텁다 ⑧착하다, 선량하다 ⑨지치다, 애쓰다 ⑩어진 사람 ⑪어려운 사람을 구제(救濟)하는 일 ⑫남을 높여 이르는 말,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어질 인(仁), 어질 량(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어리석을 우(愚)이다. 용례로는 마음이 어질고 영리하여 사리에 밝음을 현명(賢明), 어질고 훌륭함 또는 그런 사람을 현준(賢俊),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의 다음 가는 사람을 현인(賢人),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의 다음가는 사람을 현자(賢者), 어진 신하를 현신(賢臣), 어짊과 어리석음을 현우(賢愚), 어질고 훌륭한 사람을 현영(賢英), 현명한 보좌를 현좌(賢佐), 어진 이와 착한 이 또는 어질고 착함을 현량(賢良), 여자의 마음이 어질고 깨끗함을 현숙(賢淑), 현명하게 생긴 얼굴을 현안(賢顔), 남보다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을 현재(賢才), 남의 아내를 공경하여 일컫는 말을 현합(賢閤), 어진 사위를 현서(賢壻), 덕이 높고 현명한 사람을 고현(高賢), 매우 현명함이나 아주 뛰어난 현인을 대현(大賢), 성인과 현인을 성현(聖賢), 유교에 정통하고 행적이 바른 사람을 유현(儒賢), 밝고 현명한 사람을 명현(明賢), 재주가 뛰어나서 현명함 또는 그런 사람을 재현(才賢), 뛰어나고 슬기로움을 영현(英賢), 이름이 난 어진 사람을 명현(名賢), 어진 사람을 존경함을 상현(尙賢), 어진 어머니이면서 또한 착한 아내를 일컫는 말을 현모양처(賢母良妻), 현인과 군자로 어진 사람을 일컫는 말을 현인군자(賢人君子), 남의 눈을 어지럽고 아뜩하게 한다는 말을 현인안목(賢人眼目), 현인은 중용을 지나 고상한 행위를 함을 이르는 말을 현자과지(賢者過之)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부적절(不適切),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나 죽여 없애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을 불구대천(不俱戴天), 묻지 않아도 옳고 그름을 가히 알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불문가지(不問可知),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도 없다는 뜻으로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묘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사의(不可思議),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일컫는 말을 부정부패(不正腐敗), 지위나 학식이나 나이 따위가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함을 두고 이르는 말을 불치하문(不恥下問),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는 뜻으로 마흔 살을 이르는 말을 불혹지년(不惑之年), 필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음을 일컫는 말을 불요불급(不要不急), 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난관도 꿋꿋이 견디어 나감을 이르는 말을 불요불굴(不撓不屈), 천 리 길도 멀다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먼길인데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달려감을 이르는 말을 불원천리(不遠千里) 등에 쓰인다.
▶️ 至(이를 지, 덜렁대는 모양 질)는 ❶지사문자로 새가 땅(一)을 향하여 내려앉는 모양이라 하여 이르다를 뜻한다. ❷상형문자로 至자는 '이르다'나 '도달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至자는 화살을 그린 矢(화살 시)자가 땅에 꽂힌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至자를 보면 땅에 꽂혀있는 화살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목표에 도달했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至자는 대상이 어떠한 목표지점에 도달했다는 의미에서 '이르다'나 '도달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至(지, 질)는 ~까지의 뜻을 나타내는 한자어(공간이나 시간에 관한 낱말 앞에 쓰임)의 뜻으로 ①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②영향을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③과분하다, 정도(程度)를 넘다 ④지극(至極)하다 ⑤힘쓰다, 다하다 ⑥이루다 ⑦지향(志向)하다 ⑧주다, 내려 주다 ⑨친근(親近)하다 ⑩표(表)하다 ⑪진실(眞實), 지극(至極)한 도(道) ⑫실체(實體), 본체(本體) ⑬동지(冬至), 절기(節氣)의 이름 ⑭지극히, 성대(盛大)하게 ⑮크게 ⑯최고(最高)로, 가장 ⑰반드시 ⑱마침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이를 도(到)이다. 용례로는 더할 수 없이 급함을 지급(至急), 더할 나위 없이 독함을 지독(至毒), 더할 수 없이 가장 높은 위를 지상(至上), 더할 나위 없이 천함이나 너무 흔해서 귀한 것이 없음을 지천(至賤), 더할 수 없이 어려움이나 아주 어려움을 지난(至難), 지극한 정성을 지성(至誠), 더할 수 없이나 지극히 착함을 지선(至善), 더할 수 없이 크다 아주 큼을 지대(至大), 더없이 높음이나 뛰어남 또는 더없이 훌륭함을 지고(至高), 지금까지를 지금(至今), 몹시 가까움이나 더 없이 가까운 자리를 지근(至近), 지극한 즐거움이나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을 지락(至樂), 더할 나위 없는 재능을 지재(至才), 더할 나위 없이 곤궁함을 지궁(至窮), 더 할 수 없이 존귀함을 지존(至尊), 어떠한 정도나 상태 따위가 극도에 이르러 더할 나위 없음을 지극(至極), 한군데로 몰려듦을 답지(遝至), 수량을 나타내는 말들 사이에 쓰이어 얼마에서 얼마까지의 뜻을 나타냄을 내지(乃至), 장차 반드시 이름이나 필연적으로 그렇게 됨을 필지(必至), 지극한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한다라는 뜻으로 무엇이든 정성껏 하면 하늘이 움직여 좋은 결과를 맺는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지성감천(至誠感天), 지극히 공평하여 조금도 사사로움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지공무사(至公無私), 지극히 공정하고 평등함을 일컫는 말을 지공지평(至公至平), 매우 가까운 곳을 이르는 말을 지근지처(至近之處), 진정한 명예는 세상에서 말하는 영예와는 다르다는 말을 지예무예(至譽無譽), 지극한 정성이 있는 사람은 그 힘이 신과 같음을 일컫는 말을 지성여신(至誠如神), 지극히 도리에 맞는 말을 말없는 가운데 있음을 이르는 말을 지언거언(至言去言), 매우 인자함을 일컫는 말을 지인지자(至仁至慈), 지극히 가깝고도 정분 있는 사이를 일컫는 말을 지정지간(至情之間), 더할 수 없이 높고 순수함을 일컫는 말을 지고지순(至高至純), 죽음을 당하는 처지에 이르러도 끝까지 굽히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지사불굴(至死不屈), 거의 죽다시피 되는 어려운 경우를 일컫는 말을 지어사경(至於死境), 매우 어리석은 듯 하나 그 생각은 신령스럽다는 뜻에서 백성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듯하지만 그들이 지닌 생각은 신령스럽다는 뜻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지우이신(至愚而神), 몹시 천한 물건을 일컫는 말을 지천지물(至賤之物), 절대로 복종해야 할 명령을 일컫는 말을 지상명령(至上命令), 지극한 정성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지성진력(至誠盡力),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일컫는 말을 지우금일(至于今日), 지극히 원통함을 일컫는 말을 지원극통(至冤極痛), 그 이상 더할 수 없이 매우 곤궁함을 일컫는 말을 지궁차궁(至窮且窮), 더할 나위 없이 정밀하고 미세함을 일컫는 말을 지정지미(至精至微), 매우 가난하여 의지할 곳조차 없음을 일컫는 말을 지빈무의(至貧無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남을 나무라는 데는 총명하다는 뜻으로 자신의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탓만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지우책인명(至愚責人明), 끊임없는 지극한 정성이란 뜻으로 쉼 없이 정성을 다하자는 의미로 지극한 정성은 단절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냄을 일컫는 말을 지성무식(至誠無息), 초나라로 간다면서 북쪽으로 간다는 뜻으로 목적과 행동이 서로 배치됨을 이르는 말을 지초북행(至楚北行) 등에 쓰인다.
▶️ 歎(탄식할 탄)은 ❶형성문자로 叹(탄), 嘆(탄)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하품 흠(欠; 하품하는 모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가만히 참는다의 뜻을 가지는 부수를 제외한 글자 (난)으로 이루어졌다. 크게 숨쉬고 정신상의 커다란 자극을 참는다는 뜻으로 한숨 쉬다, 근심하며 슬퍼하다의 뜻에서 널리 감탄하다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歎자는 '탄식하다'나 '한탄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歎자는 難(어려울 난)자의 생략자와 欠(하품 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歎자는 이렇게 '어렵다'나 '근심'이라는 뜻을 가진 難자에 欠자를 결합해 근심 걱정에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탄식하다'는 뜻은 口(입 구)자가 들어간 嘆(탄식할 탄)자가 있기도 하지만 주로 歎자가 쓰이는 편이다. 그래서 歎(탄)은 ①탄식하다 ②한탄하다 ③읊다, 노래하다 ④화답하다 ⑤칭찬하다 ⑥탄식 ⑦한숨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탄식할 차(嗟), 한숨 쉴 희(噫), 한 한(恨)이다. 용례로는 한숨쉬며 한탄함을 탄식(歎息), 탄식하는 소리를 탄성(歎聲),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도와주기를 몹시 바람을 탄원(歎願), 감탄의 말을 탄사(歎辭), 한탄하며 하소연함을 탄소(歎訴), 탄복하여 크게 칭찬함을 탄미(歎美), 감탄하여 마음으로 따름을 탄복(歎服), 탄식하여 마음이 상함을 탄상(歎傷), 탄복하여 크게 칭찬함을 탄상(歎賞), 한탄하며 애석히 여김을 탄석(歎惜), 감탄하여 우러러 봄을 탄앙(歎仰), 의분이 북받쳐 탄식함을 개탄(慨歎), 원망하거나 또는 뉘우침이 있을 때에 한숨짓는 탄식을 한탄(恨歎), 몹시 탄식함 또는 그런 탄식을 통탄(痛歎), 어떠한 대상을 대단하다고 여겨 감탄함을 찬탄(讚歎), 감동하여 칭찬함을 감탄(感歎), 자기 일을 자기 스스로 탄식함을 자탄(自歎), 슬퍼하며 탄식함을 비탄(悲歎), 목소리를 길게 뽑아 심원한 정회를 읊음을 영탄(詠歎), 매우 감탄함 또는 몹시 놀라 탄식함을 경탄(驚歎),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일컫는 말을 풍수지탄(風樹之歎), 달아난 양을 찾다가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길을 잃었다는 뜻으로 학문의 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어 진리를 찾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망양지탄(亡羊之歎), 때늦은 한탄이라는 뜻으로 시기가 늦어 기회를 놓친 것이 원통해서 탄식함을 일컫는 말을 만시지탄(晩時之歎), 넓은 바다를 보고 탄식한다는 뜻으로 남의 원대함에 감탄하고 나의 미흡함을 부끄러워함을 일컫는 말을 망양지탄(望洋之歎), 보리만 무성하게 자란 것을 탄식함이라는 뜻으로 고국의 멸망을 탄식함을 일컫는 말을 맥수지탄(麥秀之歎)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