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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처처의 안동 권씨 이야기(4) ... 부정공파
안동 권씨는 10세 때에 이르러 15개파로 갈라지는데 8번째 부정공파 파조는 副正 權通義 이다. 부정공파는 14세 때 權正平의 장자 權德生과 차자 權伯宗으로 갈라진다.
權德生은 복야공파 權重의 사위가 된다. 권덕생의 고손자 權徵(1426-1467)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다 순직하였고, 그 증손자 權偉器가 퇴계 문인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권위기의 아들 權宣은 문과에 급제 성균 학유가 되었다. 권위기의 손자 權益昌은 趙穆의 문인으로 학식이 높았으며 만년에 와룡면 늪실에 이거함으로써 그 후손이 늪실에 세거하게 되었다.
權偉器의 동생 權大器(1523-1587)도 퇴계 문인이고, 생원이며 아들 松巢 權宇(1552-1590)는 문과에 급제, 왕자사부로 문명이 높았으나 요절하였고, 그 후손은 와룡면 이하동에 계거하고 있다.
송소 권우의 아우 權宏(1580-1652)과 二友堂 寏(1580-?)은 이하에서 임하로 이거하여 나가고, 송소 宇의 차자 益鄰은 상주로 이거하여 나갔다. 영조때의 학자 청대 權相一(1679-1760)은 益鄰의 현손이다.
權德生의 차자 權乙衡의 후손은 서후면 마애에 거주한다. 만년에 남후면 단호리에 낙강정을 짓고 산수를 즐겼던 마애 권예(1495-1549)는 大司諫․大司憲으로 있을 때, 三奸과 三兇의 죄상을 上奏하여 중죄에 처하도록 하였다. 1535년 慶尙道觀察使를 거쳐 戶曹․刑曹․吏曹判書를 지내고 우참찬에 이르렀다.
한편 權正平의 차자 權伯宗은 시내 안기동에 거주하며 그 부인도 역시 안동 권씨 였다. 권백종의 아들 權專(1372-1441)은 딸이 문종비 현덕왕후로 책봉되면서 화산부원군으로 봉군되었고, 그의 묘와 정부인 권씨의 묘는 안동시 안기동에 있다.
權專의 아들 權自慎(? -1456 )은 1456년 단종복위 때 일족(아들 瑕, 仇之 형제, 아우 自謹, 종질 箸, 暑 형제)이 禍를 당하여 겨우 살아 남은 후손이 군위군 효령면 노행리에 은거하게 되었고, 예천 신풍에 거주하던 부원군의 사위 權山海(1403-1456, 좌윤공파)는 단종복위가 실패로 돌아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정공파에서 특기할 사항은 同姓同本간의 혼인관계이다. 權專의 어머니도 안동 권씨이고 權專의 백부 권덕생의 부인도 안동 권씨이며, 權專의 사위 역시 안동 권씨라는 사실이다. 또 다른 사위 金永命은 의성 김씨의 상계가 된다. 권전의 아우 權忖의 손자 權策은 영해로 유배되어 그 후손이 영덕군 영해면과 창수면 일원에 거주하고 있다.
안동권씨 부정공파 계보 通義(副正公派祖)-均弼-景輔- 休-正平-德生 -伯宗 -德生-子衡- 諧-可後- 徵-甲成- 燁- 偉器- 宣-益昌 (늪실 거주) - 大器- 宇-益民 (이하 거주) -益鄰-...相一 (상주 이거) -寏-益時 (임하 이거) -乙衡- 當-居約-自謙-哲經- 輗 (마애 거주) -伯宗- 專 - 自慎-瑕-希壽 (군위효령거주) - 自謹 -夫 權山海 (예천지보신풍거주) -夫 金永命 - 漢哲 - 萬詮 (의성김씨 상계) - 女 李埴 (퇴계 부친) -夫 文宗 (顯德王后) -忖-自弘- 箸 - 暑 - 策- 仁衡- 世平-希彦-應當-宜範-瓚-尙吉 (영해 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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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징(權徵) 1426(세종 8, 병오) ~ 1467(세조 13, 정해)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 안동(安東). 호는 등암(藤巖). 수의부위(修義副尉) 가후(可後)의 자. 부내(府內)에 살았다. 1447년(세종 2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5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임용되었다. 세조 때 형조(刑曹)․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벌할 때 함길도절도사(咸吉道節度使) 허종(許琮) 휘하에서 함길도병마평사(咸吉道兵馬評事)로 참전하여 진두(陳頭)를 맡아 힘껏 싸우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자 반란군을 꾸짖고 자결했다. 사후에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 永嘉誌․宣城誌․安東鄕土誌(宋志香)
권우(權宇) 1552(명종 7, 임자) ~ 1590(선조 23, 경인)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정보(定甫). 호는 송소(松巢). 북평사(北評事) 징(徵)의 현손. 생원(生員) 대기(大器)의 자로 이계(伊溪 : 現 臥龍面 伊上里)에서 출생했다. 이황(李滉)의 문인. 소장학자로 일찍부터 학명(學名)이 높았다.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을 단념하고 성리학에 전념했다. 1586년(선조 19)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고, 1589년 세자(世子 : 光海君)의 사부(師傅)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에 서울에서 두역(痘疫)으로 타계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좌승지(左承旨)가 추증되고, 안동(安東)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배향되으며, 문집에 『송소집(松巢集)』이 있다. 와룡(臥龍) 이계촌(伊溪村)에 살았다. ■참고문헌 : 永嘉誌․安東鄕土誌(宋志香)
권상일(權相一) 1679(숙종 5, 기미) ~ 1760(영조 36, 경진)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상주(尙州 : 現 聞慶 山北) 출생. 송소(松巢) 우(宇)의 후손. 심(深)의 자.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등을 거쳐, 1527년(영조 3) 만경현령(萬頃縣令),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그 후 홍문관의 계청(啓請)에 의해 경연(經筵)에 참석했다. 군자감정(軍資監正)․울산부사(蔚山府使) 등을 역임하고, 1745년 봉상시정(奉常寺正)․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동부승지(同副承旨)․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역임하고, 1748년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한 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80세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경(聞慶)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초학지남(初學指南)』『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역대사초강목(歷代史草常目)』등이 있다. ■참고문헌 : 英祖實錄․國朝人物考․聞慶郡誌
권예(權輗) 1495(연산군 1, 을묘) ~ 1549(명종 4, 기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경신(景信). 호는 마애(磨厓). 생원(生員) 철경(哲經)의 자. 서후(西後) 금계(金溪)에서 살았다. 1516년(중종 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 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봉교(奉敎)가 되고,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관(史官)으로서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구원에 앞장섰다. 이 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 삼간(三奸)과 삼흉(三兇)의 죄상을 상주(上奏)하여 중죄에 처하도록 하였다. 1530년 직제학(直提學)․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1535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호조(戶曹)․형조(刑曹)․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1538년(중종 33)년 모친상을 당하여 향리로 돌아온 후 다시는 환로(宦路)에 나가지 않고 낙동강 언덕에 낙강정(洛江亭 : 南後面 丹湖里 所在)을 짓고 산수를 즐기며 노후를 보냈다. 문집에『마애집(磨厓集)』이 있다. ■참고문헌 : 嶺南人物考․永嘉誌
권전(權專) 1372(공민왕 21, 임자) ~ 1441(세종 23, 신유)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시호는 경혜(景惠). 효자(孝子) 한성윤(漢城尹) 백종(伯宗)의 자로 부내(府內) 성남리(城南里)에서 태어났다. 문종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생부. 문과에 급제하여 1425년(세종 7)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지가산군사(知嘉山郡事)로 있던 중 1431년 딸이 세자궁승휘(世子宮承徽)로 간택되자 세종의 총애 속에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사재부정(司宰副正)․한성소윤(漢城少尹)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공조(工曹)․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다. 1437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중추원부사(中樞院府使)가 되었다. 1440년 공조판서(工曹判書)․중추원사(中樞院使)․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올랐다. 1441년 향년 70세로 몰한 후 원손(元孫)의 외조부라고 하여 1445년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고, 1454년(단종 2)엔 영의정부사화산부원군(領議政府事花山府院君)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아들 자신(自愼)이 사육신(死六臣)의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관작(官爵) 추탈과 함께 서인으로 격하되고 무덤이 헐렸다. 1699년(숙종 25)에 신원이 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영월(寧越) 창절사(彰節社)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世宗實錄․國朝人物考
권촌(權忖)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한성윤(漢城尹) 백종(伯宗)의 자. 문종비(文宗妃)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아버지인 전(專)의 제. 부내(府內)에서 살았다. 관은 행수(行首)․안동부(安東府)의 부사직(副司直)․지강진현사(知康津縣事)를 역임했다. 보충 : 1456년(세조 2년)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한 후 단종의 외척이라 하여 아들 자홍(自弘)이 영해(寧海)로 유배를 당하여, 그 후손이 영해에 거주하고 있다. ■참고문헌 : 世宗實錄․安東權氏譜
권자신(權自愼) ? ~ 1456(세조 2, 병자)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시호는 충민(忠愍).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전(專)의 자. 문종비 현덕왕후(顯悳王后)의 동생. 1453년(단종 1)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다가 단종(端宗) 즉위 후 좌승지(左承旨)로 승진했다. 이 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세조는 민심수습을 위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올리고 좌승지를 봉했다가, 1455년 즉위할 때 단종의 외삼촌이라 하여 세조의 즉위에 협조하지 않았음에도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하고, 1456년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렸다. 그러나 이 해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자(妻子)와 함께 심한 국문(鞫問)을 당한 끝에 거열형(車裂刑)을 받고 죽었다. 1513년(중종 8) 관직이 복구되고, 뒤에 강원도 영월(寧越)의 장릉(莊陵 : 端宗陵)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권산해(權山海) 1403(태종 3, 계미) ~ 1456(세조 2, 병자)
조선 전기의 의인(義人). 본관 안동(安東). 자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 감찰규정(監察糾正) 희정(希正)의 증손. 경력(經歷) 관(寬)의 자. 처부(妻父)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 어려서 종조부 우의정(右議政) 진(軫)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문종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이모부(姨母夫)로 1440년(세종 22)에 창덕궁녹사(昌德宮錄事)․주부(主簿)가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과 사귀었다. 1454년(단종 2) 어린 왕을 도우려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올랐으나, 1455년 단종의 손위(遜位) 이후로는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수양대군이 찰방(察訪)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고 있다가, 이듬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관직이 추복(追復)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이 추증되었으며, 경주(慶州) 운곡서원(雲谷書院)․예천(禮泉) 노봉서원(魯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예천(醴泉) 대죽리(大竹里 : 現 知保面 新豊里)에 살았다. ■참고문헌 : 世祖實錄․醴泉郡誌
저작자 김석규
출처 禮安(宣城)金氏 인터넷 宗親會
[출처] 안동 권씨 이야기(4) ... 부정공파 |작성자 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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