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둘째 금요일은 아사가 차관에서 차회가 있는 날이다.
처음 경주 왔을 때 시내 한복판에 오두막 같은 찻집 아사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길가에 면한 쪽은 평범한 상가의 건물처럼 보여지나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타임머신을 타고 반 세기쯤 뒤로 날아온 것 같은 옛집이 있었다.
손바닥만한 마당에는 손금의 홈처럼 작은 연못도 있고 그 둘레에 잡초가 무성하여 버려진 듯 무심한 누옥이었다.
낡은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병적일 만큼 강한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시골 마을을 지나다가 흙담이 다 허물어져가는 외양간을 보아도 어찌 그리 좋은지 귀신들린 것 처럼 급흥분한다.
차를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라 집의 내부가 궁금해서 들어갔다. 서까래며 기둥의 목재가 가늘고 삐뚤하여 방금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불안했다. 처음 지을 때부터 아주 어설프게 지어진 집이었던 것 같앗다.
벽지는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잠시 머물다간 묵객들의 서화가 누렇게 탈색이 되고 빗물이 새어 곰팡이가 시커멓게 쓸어있는 곳이 많았다. 같이 갔던 친구가 앉고 싶지 않은 눈치로 내 의중만 살피고 있었다. 낡고 허름할수록 더 좋아하는 줄 알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니 이런 표정이었다. 나도 다소 심하다고 여겼지만 이 분위기를 고수하는 주인의 취향에 동질감을 가지며 가히 고수라는 생각에 호기심이 더해졌다.
(참, 이 찻집은 후에 '경주' 영화에서 다른 이름의 찻집으로 나왓다. 이 때의 주인은 바뀐 뒤라 나와는 일면식도 없었다 )
그 후 풍문에 그 찻집에서 하는 차회가 특별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석해보고 싶었지만 어떤 절차로 어떻게 가입하는지 몰라 답답해 하던 중에 친구의 지인이 연고가 있어 같이 가게 되었다.
찻집 여인은 신윤복의 미인도 속에서 막 걸어나온 듯 단아하고 여성스러웠다. 게다가 음식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차회 전에 간단히 내놓은 먹거리가 요새 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이 말을 아주 싫어하지만 어느새 가끔 이 말을 대신할 단어가 궁색해질 때가 있다)
나는 그 때까지 녹차와 보이차 정도로 접하고 음용해왔지만 차를 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제는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격식에 맞게 마시고 싶었다. 15명 정도의 회원들과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마지막 경품 추첨에서 정답을 맞추어 상으로 작은 다반을 받았는데 첫 대면에서 죄송하여 수석 팽주에게 선물로 주고 왔다.
이렇게 첫 걸음을 한 아사가 차회에 지금껏 인연을 맺고, 그 후 두 번이나 자리를 옮긴 보문호 근처의 차관에 모처럼 참석을 하였다.
오늘 차회는 아사가 주최로 3년 전에 시작하여 해마다 가을에 개최하는 세계국제차회 금년 행사에 대한 협의를 시작으로 진행되었다.
1회 때는 100석의 찻자리가 보문호 둘레에 차려져 그 자체가 장관이었다.
내로라하는 차인들이 자신의 의상은 물론이거니와 아끼는 귀한 다구들을 가져와 정갈한 찻자리를 만들어 정성껏 차를 다려내는 일은 개성있는 설치 미술이자 행위 예술이었다.
아사가와 교유하는 중국, 일본 차인들이 부스를 맡아 그들의 고유한 차를 가지고 와서 시연을 했다. 처음 보는 차를 시음해보고 싶은 내방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나는 전통방식의 차를 우려 내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부담스러워 대용차로 오미자 코너를 맡아 가벼운 분위기로 찻자리를 꾸몄다.
격식을 갖춘 찻자리에 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했던 사람들이 와인잔에 담긴 오미자와 찻자리 둘레에 자연스럽게 매달린 가을꽃들을 보고 신선함에 마음이 자유로워진 듯 보였다.
3회 동안 거듭하면서 오미자차는 이제 나의 브렌드가 되고 작년에는 처음 매긴 최다 판매 찻자리로 부상을 받기도 했다. 평소 상을 주는 일도 받는 일도 그 의미에 늘 물음표를 다는 사람이었음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경주 지진으로 민심이 어수선한 가운데 강행되었던 2회에는 70석으로 줄였고, 4회째인 올해는 추석이 지난 9월 28일 토요일로 예정되었다. 별다른 변수가 없으면 이번에도 오미자 찻자리를 맡게 될 것 같다.
차회 시작 전에 처음 참석하신 분들의 자기 소개가 있었다.
sns의 영향도 있거니와 해를 거듭할수록 알려져 전국에서 찾아오시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중에 ‘홍푸르메’라는 화가가 있었다.
몇 해전 biff 포스터를 묵화로 매치시킨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으로 화가와 그림을 검색했던 일이 생각났다.
영화제 포스터를 그림으로, 그것도 강렬한 현대감각의 수묵화를 접목했기에 저 그림이 영화제에 상영되는 어느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일까 연관성을 유추해보며 인상깊게 보았던 그 그림의 작가였다. 경주의 소산 박대성 화백도 묵화를 그린다. 솔거미술관이 소산 전용 전시관이며 삼능쪽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스케일이나 강렬함이 공통점으로 느껴졌다.
홍푸르메의 작품 실물이 보고 싶어 물어봤으나 한국에서는 전시가 어려워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부산에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공공장소가 드문지 따로 안내하겠다더니 흔쾌한 답을 듣지 못하고 예상보다 늦어지는 찻자리에서 조금 먼저 떠났다.
인상깊었던 작품의 작가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이런 행운이 나의 호기심 순례를 멈출 수 없는 하나의 큰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차회를 여는 첫 차는 늘 그렇듯이 우리 녹차로 시작했다.
조태연가의 햇녹차 특우전이라고 했다. 우전이란 곡우 전에 따는 잎으로 만든 차에 붙이는 이름이다. 차나무에서 가장 먼저 나온 어린 잎으로 차를 만든 것이다.
해마다 햇차를 처음 마실 때면 왠지 경건해진다. 자연에 대한 특별한 의식이라도 행하고 받들어 마셔야 할 것 같은 경외감에 괜히 엄숙해진다. 햇차는 숙성이 좀 되어야 맛이 풍부하고 깊어지는데 아직은 좀 이르다고 했다. 코 끝에 감도는 여린 향이 애처롭기도 했다. 찻물 위에 솜털이 몇 개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동방미인, 노백차, 보이차 8582를 마셨다.
노백차는 1년 지나면 차, 3년이 지나면 약, 7년이 지나면 보물이라고 할 정도로 약성이 뛰어나다는데 오늘 노백차는 94년에 생산되어 25년이나 되었으니 불로장생의 신령성을 가졌을지 모르겠다.
우리 말에 물건을 모르면 돈을 많이 주라는 말이 있다. 이 뜻은 가격이 물건의 가치라는 해석이 된다. 가끔 가치가 전혀 짐작이 안 되는 생소한 분야의 사물들에 대해서는 특히 가격에 의존하게 된다. 나의 경우는 보석이나 예술작품이 해당이 되는데 차종류 역시 마찬가지다. 마셔봐도 우열을 식별할 능력이 없고 가격이 높으면 당연히 가치가 높다고 여길 뿐이다.
보이차 8582는 차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마셔보고 싶어하는 고급차로 명성이 높다.
오늘 차회에서 특별히 관장님이 소장하고 있던 원년 8582 보이차를 처음 개봉한다고 했다. 원년 8582는 8582 보이차 중에서도 등급이 높은 차라 포장부터 감상하고 모두들 기대에 차서 집중하고 있었다. 관장님은 살점을 떼어내는 비장함으로 차를 20그램 떼어냈다. 그 차는 약 35년의 나이를 먹었으며 요즘 가격으로는 천만원이 훨씬 넘는다고 했다. 320 그램쯤 되는 병차에서 20그램을 뗐으니 최소한의 가격이 대충 짐작된다.
아주 귀한 차를 마셨다는 자랑을 이렇게 무식하고 천박하게 돈으로 밖에 말할 수 없어서 유감이지만 가치가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가?
헤어지는 인사 자리에서 요즘 우리 집 뜰이 예쁘지 않냐는 집안부를 묻는 분이 몇 있었다.
사실 이 계절에는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어서 혼자 보기에 아까운 것들이 너무 많다.
돌아오는 길에도 석탄일을 준비하는 인근 사찰들에서 밝혀둔 기도등이 호수에 비쳐 일렁이고 있엇다.
오색의 아름다운 빛깔들이 어둠과 대비되어 천상의 세계에 있는 듯 몽환적이었다.
첫댓글 가깝게지내던 친구가 ''꼭 이집에서 찻집을 해야겠나?''하고물었을때ᆢ저는''응!이집이어서하고싶어''라고답하며천정이뚤려하늘이보이고 흘러내린 벽채가 만삭처럼 일그러진 시내의 ''아사가''를 시작한지 17년이 흐르고 있네요ᆢ가끔은 지병처럼 이곳의 추억이 꿈틀거릴때 이미 옛이야기가 되어버려 아쉬웠는데 오늘 이글을 읽으면서 새순처럼 돋아나는 찻잎처럼 싱그러운 꿈이 꽃을 피웠습니다ㆍ이젠신윤복의늙은주인공이되어 어떻게 기억될지 모르는 저잣거리에서 <茶>만큼은 야무지게 붙들고 세월을 맞이합니다ㆍ곧 무성한 앞산의 이야기도 언젠가는 선생님의 글속에 묻히겠지만더운날 힘없이쓰러진마당의꽃들도내년이면또만날수있겠지요^^
들꽃님의 차회 후기를 보면서
섬세하신 표현이 감동으로 연결되면서
아사가 회원이되려면 문장력과 표현력이 남달리 탁월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멎진후기에서 아사가의 처음과 현재를 모두 회상할수있는 좋은글 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지난5월 차회는 참석하진 못한터라 차회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게 아쉽네요
멎진.후기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스물스물 아스라한 기억들이 떠오르게하는 글입니다.
언제그런적있었던가 싶은더
벌써 10년도 훨씬 지나가버린
시간들이네요.
지금의 차회도 멀지않아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을테지요.
추억을 먹고산다는 말이가슴에
와닿는 글 잘 읽었습니다~~
멋진후기ᆢ
감사합니다ᆢ
선생님 글 읽으며 차로 이어지는 인연을 생각해봅니다.
늘 멋지시고 아름다우신 모습 오래오래 뵙기를요.
효은님의 인품이 느껴지는 글에서 저 개인적으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시내 거주할 때 아사가와는 불과 몇 백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라
종종 들러 아사가님과 인연이 되었고
아사가 이전, 찻집 시무외 에서 동국대 미대 김호연 교수의 춘화가 벽에
너져부레 걸려있는 데서 친한 친구와 거의 살다 시피 했던 기억들이 다가 옵니다.
제대로 한 것 하나 없이 시간만 보내다 늦게서야 아사가를 다시 찾게 되어 차 인연에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날 차회에서 만난 홍푸르메 작가의 작품이 궁금하여 저도
인터넷 검색해서 한참을 보았습니다.
채색을 배재한 묵의 농,담만으로 일필휘지로 표현한 작가의
작품에 한국화의 미래를 기대해도 좋을 듯 했습니다
많이 송구합니다
사석에서 쬐끔 내보인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하셔서 잠시 공개하리라 올렸더니 벌써 뿌리가 내려버렸네요
아사가와는 전혀 인연이 없는 다른 목적의 카페에 쓴 글이라 어색한 부분도 보입니다
한가할 때 수정해서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역시!!
아사가찻집에 이런 내력이 있었군요♡♡
멀리서 동경하며 카페글만 보고 있지만
인연 닿아
저 또한 그곳에 있을 날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좋은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