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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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사무엘 하권 1,1ㄴ-4.11-12.19.23-27 그 무렵 1 다윗은 아말렉을 쳐부수고 돌아와 치클락에서 이틀을 묵었다. 2 사흘째 되는 날, 어떤 사람이 옷은 찢어지고 머리에는 흙이 묻은 채 사울의 진영에서 찾아왔다. 그가 다윗에게 나아가 땅에 엎드려 절을 하자, 3 다윗이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물었다. 그가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빠져나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다윗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말해 보아라.” 하자, 그가 대답하였다. “싸움터에서 군사들이 달아났습니다. 또 많은 군사가 쓰러져 죽었는데, 사울 임금님과 요나탄 왕자님도 돌아가셨습니다.” 11 그러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었다.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12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탄, 그리고 주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집안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애도하고 울며, 저녁때까지 단식하였다. [다윗이 애가를 지어 불렀다.]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되어 언덕 위에 누워 있구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23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힘이 세었지. 24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생각하며 울어라. 그는 너희에게 장식 달린 진홍색 옷을 입혀 주고 너희 예복에 금붙이를 달아 주었다. 25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26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27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복음 마르코 3,20-21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저는 지금 방학 중에 갑곶성지로 실습 나온 네 명의 신학생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제는 그 신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등산 다녀온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지리산에 다녀온 이야기였습니다. 너무나 힘들었고 그래서 이제 산에 간다고 하면 다들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지요. 하지만 너무나 재미있는 것은 그때 그렇게 힘들었고 다시는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산에 대해서 안 좋은 추억이 있다고 하면서도, 이 지리산 등반한 이야기를 가지고 자그마치 30분 이상을 쉬지 않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네 명의 신학생이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서 말이지요.
분명히 기억하기도 싫은 추억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때 지리산 등산을 하게끔 했던 분에 대한 안 좋은 기억까지 갖게 되었다고 했는데... 5년이 지난 지금, 신학생들에게 그 힘들고 기억하기 싫은 추억들은 하나의 중요한 시간이 되어서 이렇게 서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끔 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그땐 그랬지’를 외치고 있지만, 그 당시에야 너무나 힘들어서 모든 것이 다 싫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다짐을 한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요?
“내가 다시 산을 가면 성을 간다.”
하지만 지금은 정작 웃으면서 그 이야기만을 가지고서도 오랫동안 말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그 어려운 일들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니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고 멋진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순간에는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좋았음을 느끼는 경우는 우리 삶에서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지금 그 순간의 감정에만 충실합니다. 그래서 그 감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나요? 조금만 더 지켜본다면 오히려 내게 좋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참지 못해서 서로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그래서 서로 단죄하는 죄를 범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고 적혀 있지요. 당시에 미친 사람은 마귀 들린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린 사람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이 더 이상의 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친척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100% 틀렸습니다. 그 판단이 틀렸음은 후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지요.
순간의 감정에 의지하는 판단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랫동안 생각을 했다하더라도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서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순간의 판단이 얼마나 제대로 될 수 있을까요?
순간의 판단으로 예수님을 미쳤다고도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오랫동안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하는 신중한 판단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맙시다.
삶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없다('좋은 글' 중에서) 삶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삶에서의 그 어떤 결정이라도 심지어 참으로 잘한 결정이거나, 너무 잘못한 결정일지라도, 정답이 될 수 있고, 오답도 될 수 있는 거지요.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답을 찾아 끊임없이 헤매고 다니는 것이 습(習)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모두가 정답이 될 수도 있고 모두가 어느 정도 오답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지나온 삶을 돌이켜 후회를 한다는 것은 지난 삶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정답이 아니었다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정확히 내 자리가 맞습니다.
결혼을 누구와 할까에 무슨 정답이 있을 것이며 대학을 어디를 갈까에 무슨 정답이 있겠고, 어느 직장에 취직할까에 무슨 정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그때 그 대학에 입학했더라면 그때 또 그때... 한없이 삶의 오답을 찾아내려 하지 마세요
정답, 오답 하고 나누는 것이 그 분별이 괴로움을 몰고 오는 것이지 우리 삶에는 그런 구분이란 애초부터 없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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