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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이 유신 본당인데
새누리당은 한나라당이 전신이고 한나라당의 전신은 민정당, 민정당의 전신은 정몽준 의원이 비난하고 있는 유신정부 시절 여당인 공화당이다.
난민전 출신이 이재오 의원이나 운동권 출신인 김문수 지사도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보수성향의 표심을 지원받아 누릴수 있는 모든 혜택을 모두 받고서도 유신을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과거를 가지고 입지를 돈독히 하려고 하지만 보수성향의 새누리당의 뿌리를 기준으로 보면 해당행위 인 것이다.
따라서 조국근대화를 획기적으로 이룬 유신정권을 비난하려면 탈당해야 한다.
이회창 후보의 “차떼기 정당”이라는 치명적인 오명으로 한나라당이 수렁에 빠졌을 때 박근혜 의원이 천막당사에서 고군분투하여 당을 구하였고 여기에 이명박씨가 무임승차하여 대통령까지 거머쥐었다.
그대의 부친 정주영회장께서 5공비리 국회청문회에서 유신정권에 온갖 특혜를 누리고서도 5공화국에 다시 밀착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기업인은 시류에 따라 처신해야 한다”고 답한 것을 생생히 기억하며 당시 국민 전체가 묵인 한 것은 유신정권의 눈부신 경제발전에 현대그룹의 역량을 무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정몽준씨!
그대는 저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 하였으나 여론조사 결과 이회창 후보의 압도적인 우세로 노무현 후보를 배반 하였는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젊은 층의 반발로 오히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되는데 1등공신이 되었다.
그대가 다선의원이라고 자랑하면서 유신을 비난하는 것을 보고 못믿을게 정치라더니 정치인들 중에는 이런 사람도 있구나 새삼 느끼는 바 크다.
울산은 현대왕국이다.
방어진 쪽으로 해안선을 따라가면 현대자동차를 비롯하여 현대 중공업과 미포조선 및 현대중전기 등 대형회사들이 독차지 하고 있다.
적어도 2개 군 단위 정도의 수천만평의 땅이 조상대대로 뼈를 묻고 살아온 울산시민들의 땅을 박정권의 강력한 지원 아래 헐값으로 매입하여 오늘의 현대왕국이 되었다.
모든 재벌이 그러하듯이 그대의 부친 정주영 회장의 시류론에 의하면 그대도 국회의원 출마를 응당 한나라당 소속으로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대 소속의 수십만 노동자들의 야당적 성향을 고려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여야 했을 것이다.
또 선거 때마다 특별보나스 지급도 합법적이어서 표심을 얻기가 쉬웠을 터, 누구라도 그런 유리한 여건을 이용 할 수 있는 일이니 의구심이 가는 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다선의원이라는 것이 그리 자랑 할만도 아니다.
그대가 비난하는 유신에 대해서 언급하고져 한다.
1.시대적 배경
1971년의 10월 유신이다.
당시의 급변하는 한반도의 주변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아시아 최빈국으로부터 민족중흥의 사명을 이룩하고 김일성 집단의 적화통일을 위한 끊임없는 도발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구국의 결단임을 온 국민이 인정하는데도 재야세력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 미 해군사상 106년만에 처음 당한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북한군은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비무장지대 서부지역에서 네 차례나 미군을 습격하여 11명을 죽였고, 남한의 국군도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 시설을 공격하는 등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끊이지 않았던 상황에서 1968년 1월23일 오후 1시 45분 동해 공해상에서 4척의 북한 해군 초계함정과 2대의 미그기의 위협 아래 미 해군 최신예 전자첩보함 프에블로호가 납치되었다. 장교 6명과 수병 75명, 민간인 2명을 포함하여 총 83명이 탄 프에블로호는 납치 당시 북한 원산항으로부터 40km 떨어진 공해상(公海上)에 있었다.
납치된 정보함의 암호 등을 포함한 육해공군의 모든 비밀정보가 쏘련으로 넘어갔으며 따라서 미국방성은 일시에 정보체계를 변경하기 위해 막대한 국방비가 소모됨에 반해 김일성은 막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를 소련으로부터 제공받아 북한 인민들에게 우상화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진함 침몰
1967년 1월19일 오후 1시50분에는 동해 거진 앞바다에서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우리 해군 소속 PCE 56함(당진함=650 톤, 함장=金承培 중령, 승무원79명)이 북한 해안포의 집중사격을 받아 침몰하면서 해군 장병 39명이 전사했다.
-청와대 습격사건 및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사건 1968년 1월21일 저녁10시경 북한의 124군 부대(게릴라 특수부대)소속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북악산 인근 까지 침투하여 경비중이던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죽이고 지나가는 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시민들은 죽였던 사건과 11월의 울진·삼척 무장 게릴라 120명의 침투사건, 이듬해 4월 4월15일 오후 2시 경에는 동해 상공을 정찰비행 중이던 미해군 EC121 정찰기 한대가 북한의 대공포화에 격추되어 31명의 승무원 모두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닉슨독트린
1966년 월남전에 한국군 1차파병 이후 4차에 걸친 파병으로 한미동맹이 더욱 강화 됨에따라 김일성은 적화통일을 위하여 미그 17기를 자체 조립하는 등 군사력을 강화와 끈임없는 도발로 한반도에는 긴장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슨이 미국의 제3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같은 해 7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고 1970년 미 의회를 통과하였다.
실제로 71년 3월 실제 2만명 가량의 미 7사단과 3개 공군비행대대가 철군했고 남한에는 5만명 가량의 미 2사단만 남게 되었다.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계획이다.
이에 경제적 군사적으로 한국보다 월등한 김일성 정권의 무력도발에 대비해야 정부로서는 막대한 국방비 부담으로 경제개발계획이 초기부터 내내 발목을 잡히게 된다.
2. 7.4공동성명과 남북조절위원회
1960년대 말 비무장지대 교전이 비일 비재하게 일어나는 무력충돌은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지만 1972년 닉슨대통령이 죽의 장막을 혜치고 모택동을 만나면서 미중관계개선과 쏘련 수상 후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으로 동서 간에는 냉전체제로부터 해빙무드가 조성되고 있었다.
한반도의 전역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주한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던 한국정부도 국방비를 줄이고 경제개발을 위해 동서와해무드에 편승하여 1972년 5월 분단 이후 최초의 대북밀사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의 모란봉초대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일성과 악수(청산가리를 만지던 손)를 하면서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후 북한의 박성철부주석이 극비리에 남한을 찾아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고 이후락과 7.4공동성명이 남북의 합의하에 이루어졌다.
1972년 7월 4일, 남과 북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밝힌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는 조국통일을 위한 기본입장과 방도를 밝힘으로서 우리 겨레의 통일의 밝은 전망과 희망을 안겨준 역사적인 성명이다. 동년 11월 4일 7.4 공동성명의 합의사항을 추진하고 양측관계를 발전시키며 각분야별 힘을 합쳐 조국통일 원칙에 기준하여 통일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후락과 북한의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가 만나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할 것을 합의하였다.
3. 10월 유신선포
미군 철수에 대비하여 경제개발과 자주국방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남한으로서는 7.4공동성명을 주도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위해 3차례의 남북조절위원회를 개최하였으나 소극적이던 김일성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들어 북한측의 일방적 파기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김일성이 1962년 12월 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南朝鮮 解放戰爭을 위하여 채택된 이른바 4대군사노선(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을 비밀리에 추진하여 8년 만에 완성한 것이 남한정부에 노출되고 나서야 남북협상이 김일성의 위장 전술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일성은 1970년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의 보고를 통해 "4대 군사노선을 적극 추진한 결과 전체 인민이 총을 쏠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지역에 철통같은 방위시설을 구축해 놓았으며 중요한 생산시설까지 요새화하였다.
자립적 국방공업기지가 창설되어 필요한 현대적 무기와 전술기재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있다"라고 언급, 4대 군사노선의 완성을 호언했다.
따라서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서 남북적십자 회담에 이은 7·4 공동성명으로 인하여, 이념적인 공백상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즉 사회적 안정과 안보의식을 높여야 하고, 경제발전을 한 단계 더 높여야 하고 무었보다도 자주국방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어 역사적 구국의 결단을 위해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신의 명분이 국가의 안정과 국력의 극대화로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 하여 평화적 통일을 이룬다는 것에 있었으나, 실은 국민의 판단과 비판 그리고 선택권을 제한하려는 비민주적이고, 장기 집권을 위한 기반 다지기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자원빈국에서 선진국민소득 2만불의 선진 경제대국에 진입하게 되는 튼튼한 기초를 딱은 것을 전 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남북이 일촉즉발의 긴장상태에서 남한보다 위를 점하고 있는 북한의 경제와 국사력을 능가하기 위해 김일성의 지도력을 압도하는 국가적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구를 감안한 것이다.
4. 결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2년 4월 24일 북한은 군창건 60주 기념보고회에서 군총참모장 최광 보고를 통해 4대 군사노선의 강화와 함께 「전군의 주체사상화」를 강조하며 △군사기술 향상 △철저한 규율확립 △기본전투단위인 중대의 강화 등을 촉구했으나 남한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막대한 국방예산을 사용하므로서 경제, 군사면에서 북한에 대해 비교가 않되는 것은 유신정권의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단결된 국민의 노력으로 이루어 진 결과이다.
-5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그대로 옮기면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1960년대부터 국내 좌익운동의 이론가로 활동하다가 1980년대 중반 공산주의의 허상을 깨닫고 1995년 전향했다. 한때 ‘학생운동의 대부(代父)’로 불렸던 그가 1960, 70년대 주요 시국사건으로 꼽히는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 통일혁명당(통혁당) 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안 교수는 오늘 출간되는 책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에 직·간접으로 겪었던 사건들에 관한 생생한 육성(肉聲)을 남겼다.
우리 사회 일각에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사건은 권위주의 정부가 반공주의를 앞세워 조작한 사건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1979년 발각된 남민전 사건 관련자 29명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이들의 활동이 유신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행위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안 교수는 이들 사건이 정부에 의한 용공조작 사건이 아니라 실체가 있는 공산혁명 기도였다고 증언했다. 물론 수사 과정에서 때로는 폭력이나 고문이 있었지만 실체가 없는 사건을 날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1962년 서울대 대학원생이던 안 교수는 빨치산 출신이자 인혁당 가담자인 박현채를 만나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고 밝혔다. 1964년 전모가 드러난 인혁당은 남한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공산혁명을 위한 조직이었다는 게 안 교수의 고백이다. 1968년 발각된 통혁당에 대해서는 “북한의 지령에 따라 결성된 혁명조직이었다”고 그는 밝혔다. 통혁당의 서열 2위 김질락은 서울대 상대생이던 신영복(현 성공회대 석좌교수)을 지도했으며 신영복은 역시 서울대 상대생이던 박성준(전 성공회대 겸임교수)을 지도했다고 한다.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은 북한과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했고 무장게릴라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강도 행각을 벌이고 총기를 보관한 적도 있다.
-북한 인민 300만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이는 단군이래 처음있는 역사적 수치이다.
그럼에도 유신정권 당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사람들 중에 정치에 화려하게 입문을 하고 거금의 보상금을 받으며 영웅대접을 받는 사람들은 김정일을 비난하기는 커녕 수구OOO으로 매도하는 현실속에서 이들에 대해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는 법개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몽준이 유신을 비난할려면
박대통령은 노동집약형 산업으로 일본처럼 조선소 건설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박대통령은 추진력 있는 정주영 회장을 불러서 “임자가 조선소를 지어 배를 한번 만들어 봐..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 줄테니까" 하니
정주영이 "각하 우리는 자본도 기술도 부족합니다. 조선소라니요?절대 불가능합니다" 하면서 실제 6개월정도 박대통령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박대통령이 정주영에게 마지막으로 "임자도 기업인 아니야? 나라가 없으면 기업도 없는거야 그냥 군말 말고 하시오" 라고 강력하게 지시(?)해서 할수없이 조선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소가 울산에 건설되었으며 지금의 현대 중공업의 모태가 된다. 현재 6개의 조선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고 최대 주주는 정몽준이다.
따라서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이루기 위하여 유신을 선포한 이래 정주영 회장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고려하면, 아무리 정치판이 그렇다손 치더라도 정몽준이 유신을 비난할 수 있는가?
그대가 유신을 비난할려면 부친의 업적도 거부하고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은 현대중공업을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이 나라 경제발전의 뿌리이며 국민을 대표하는 집권 보수정당을 탈당하여 유신을 비난하면서 한 몫 보는 야당으로 옮기는 것이 정도가 아닌가?/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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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몽준이가 유신어쩌구 한다는것은 애비없는 호로자식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