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에 대해 잘못 알려지고 있는 점-
1 조선 수군이 울돌목 앞에서 일자진을 치고 역류를 거슬리며 방어하였다.
난중일기의 어느 부분에도 이러한 기록이 없다.
전투 지역은 조류의 영향이 없었던 우수영과 양도와 해안을 끼고 있던 깊이 1.2km 넓이 0.6km 해역이다.(난중일기)
2. 울돌목 전방에 철색선을 드리워 일본수군을 전복시켰다.
가장 황당한 이야기. 조류의 힘과 선박의 무게를 견딜 그러한 구조물을 설치하는 것은 당시의 기술로는 불가능하고
당시의 후퇴 중이었던 조선의 수군에게는 그러한 시간과 물자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한 역사적인 기록의 진실성이 없다.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을 중시하였던 이유중 우리가 간과하였던 것
1. 조류
조류의 빠르기가 가장 빠를 때 넓을 지역는 시속 10km, 좁은 지역는 시속20km. 이 정도의 속도는 역류를 거슬러 이동하는데는
조심하여야 하며 순류를 타고 노를 저으면 속도가 배속이 되므로 진행시 질서를 유지하지 않으면위험하므로 철저한 통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전투를 벌인 다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운 것으로 조선수군의 전투함의 피해가 전무하였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2,. 얕은 수심과 암초
일본 수군중 대형전투함이 울돌목을 통행하지 못한다.
일본의 전 함정 330척 중 200척이 전투에 투입되지 못하고 전투력의 4분의 1만 투입된다.
3. 명량해협는 조선에서 3번 째로 큰 진도를 끼고 있다.
잔여 함정의 200척은 진도를 돌아 조선수군을 포위하기 위해 진도를 돌고 있었으나 그 일주 거리가 약 100km이므로 시간이 8시간이상 걸린다.( 전투가 끝난 후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와 서쪽 당산도로 이동하는데 배후로 돌아오는 적의 주력부대를 염려하여서다) .
이 시간동안 130척과의 전투를 마무리 지어야 하므로 만약 울돌목 앞에서 방어진을 펴게 되면 일본은 포위망을 완성될 때까지 전투를 회피할 가능성이 크다. 또는 조류의 속도가 가장 빠를 때 충격적으로 조선의 일자진을 파괴할 수도 있다. 즉 전투개시의 선택권과 전장의 주도권을 일본이 쥐게 된다.
조선수군의 전술적인 목표
조류의 흐름이 바뀌어 그 유속이 거의 최대가 되었을 때 일본 선단을 600m 정도 명량해협의 본류 속으로 밀어 낸다.
이것은 군세가 열세이더라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장군은 전투가 마무리 된후 천운이라고 하였다.
전술적인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전투 중 고려사항
1.아군의 기세를 올리고 적군의 기세를 죽여라
대장선이 먼저 돌격을 하고 안위의 공격을 재촉하며 적함에 다가갈때는 대포를 울리며 수 많은 화살을 날린다.
적의 대장의 머리를 베어 돛대에 높이 단다. 등등
2. 대열을 유지한다.
뒤처진 제장들은 독촉하여 앞장서게 한다.
3. 협조적인 공격을 한다.
대장선이 위험하면 다른 장수를 불러 도우게 하고 다른 함정이 위험하면 대장선이 달려가 도와 각개전투를 피하였다.
전투의 종결
조선수군이 일제히 나아가며(대형 유지) 각종 대포를 쏘니 그 소리가 천지를 울리더라(기세 유지) 31척을 쳐부수니 적이 멀리 물 러서고 감히 다가오지 못하였다(전술적 목표의 완료)
전과
130 척중 조선수군의 공격으로 31척 파괴,울돌목의 병목지역에서 혼란으로 70여척 파손
왜 일본수군의 피해가 울돌목에서 그렇게 커졌을까?
물론 병목지역에 몰려드는 파괴된 선체들의 잔해와 전사자들의 시체와 물에 빠진 자들의 필사적인 몸부림과 천지을 울리는 적의 포성과 금방 달려올 것 같은 조선수군의 기세에 공황상태에 빠져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아니 한 것에도 원인이 있지만
일본병사들의 낮은 사기에 큰 원인이 있는 것 같다. 끝없는 전쟁(임진왜란에 이은 정유재란 ) 이길 것 같지 않은 전세 등등이 이들의 사기를 꺾어 버린 것이다.
명량해전 지도.bmp
명량해전 1.bmp
명량해전2.bmp
명량전선3.bmp
명량해전4.bmp
첫댓글 얕은 수심과 암초는 과연 가능성이 있네요. 배밑마닥이 평평해서 제자리 선회가 가능한 것이 판옥선이니까 물에 깊게 들어가지 않으니까 얕은 수심을 지나가는 반면 왜선의 배들(임진왜란에 그렇게 당했으니 상당히 큰배들이 많았겠죠.)의 바닥이 뾰족하니까 꼼짝못하는 경우도 있었겠네요.
일본의 '일본전사 조선역'에 얕은 수심과 암초'로 대형 선박이 통과하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답니다.
실제 울돌목에 가봤는데, 그정도 유속이면 미친듯이 노를 저어도 제자리 유지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소리가 어마어마해서 옆 사람 말도 안들릴 정도 입니다.
난중 일기에 그런 기록도 없구요. 조선수군을 미화하려고 만들어 낸 영웅담이 과정을 이해할 수 없는 전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만약 울돌목 앞에서 방어진을 치게 되면 혼전 중에서 적군과 함께 휩쓸러 대열이 흩어져 각개격파되거나 울돌목의 급한 조류속에서 동반자살하게 됩니다. 이런 바보짓을 영웅담이라고 지어내다니!
오히려 우수영 앞바다에서 진을 침으로써 일본수군의 도발을 유도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수군의 전투개시의 선택권과 전장주도권을 조선수군이 쥐게된 고도의 전술이었답니다.
닭치고 치트공. 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군 사기에 대해선 약간 이해가 안가네염. 일본군의 사기가 조선군을 압도해야 하지 않나? 왜 반대로 된거임여? 치트공이 사자후라도 시전했나? 일본 해군은 막 이겨서 사기가 올라있지 않았을까염?
전투력 비교
조선수군:일본수군= 1(포함13척): 10(등선육박선330척)
울돌목에서 1(포함 13척): 3(중형등선육박선 130척)
양도 앞바다에서 전술적목표로 인해 1(밀어내기):1(이순신 제거나 조선수군의 격멸)
전투중 기선제압,대열유지,협조공격으로 3:1
산출결과 오히려 조선수군이 유리한 전투였고 그 결과 이런 전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조선이나 일본수군이나 사기가 떨어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수군은 전투전 배설의 탈영, 김억
추의 전장이탈등으로 사기가 떨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일본수군의 경우,안위와 김응렴이 대장선에 쉽게 접근하고 안위가 위험에 빠졌을 때 대장함의 접근을 허용하고 대장의 유해를 수습하지못하는 등 사기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수가 있답니다. 전투가 진행될수록 장군의 독려로 조선수군의 기세가 점점 살아나는 것을 알수가 있답니다.
닭장에 미친 개들을 풀어놓은 꼴이 된거지요.
정유재란때 일본수군이 무서운 전투력을 발휘한 때는 그들의 살길을 막았을 때 , 즉 노량해전때 입니다. 노량해전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투였습니다. 오히려 무사철군의 조건으로 납치조선인의 귀환과 배상금의 요구등 전후재건을 생각했어야 했습니
다. 무능한 군주인 선조가 결단했어야 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한일합방의 치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명나라는 멸망, 조선은 쇠퇴, 일본은 오히려 국력이 보존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이순신장군이 명나라 제독 진린에게 한 말 '정전은 장수가 논 할 일이 아니다' 씁쓸하게 다가 오네요.
한일합방과 임진왜란은 별 상관 없습니다...-_-; 또한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명나라가 망했다는 얘기도 일종의 [식민사관]이거든요?! 명나라는 이미 왜란 전부터 휘청거리고 있었고, 왜란 후에도 상당기간 버티다가 내부변란인 '이자성의 난'으로 망합니다. 중국이 대단한 대일본을 상대로 고전하다 국력 말아먹고 망했다는 식의 얘기가 식민사관입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은 [만력 3대정]의 하나일 뿐, 국가 존망을 어찌할 정도의 전쟁은 아니었죠...^^; 오히려 만력 할아방이의 무덤짓기나 '광세의 폐'가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만력제 정릉의 공사비가 무려 800만냥인데, 왜란 전비와 맞먹죠...ㄷㄷ
또한 전근대 전쟁에서는 공식적인 포로송환이나 전쟁배상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뭐 '호군전'이라고 해서 전비배상 비슷한 것이 있기는 했지만 어쩌다 나오는 케이스고요. 더구나 왜란 당시 일본은 조선-명의 파상공세에 의해 밀려난 것이 아니라, 일본국 내부의 정치변동으로 인한 [철군]이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밑지는 것도 없는데 뭔 전쟁배상에 포로송환 얘길 할까요?!...-_-; 게다가 일본이 철병할 때 한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국가적 약속을 강제할 [국제체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어요. 오히려 조선이 일본의 재침을 우려하는 상황이었고, 명나라도 전쟁피로로 인해 종전을 바라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입장에서는 철병하는 왜군을 공격하여 왜군의 '전력손실'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이 일본의 재침을 방지할 최선의 방책이었습니다. 이미 히데요시가 죽고, 철병이 결정난 시점에서 왜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고요...^^; 이순신 장군이 괜히 노량에서 왜군을 막아선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조선은 왜란의 수습과 전후재건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고 봅니다. 새로운 일본의 주인이 된 이에야스의 [국교재개] 요청에 대해서는 가짜 '범릉적(왜란 때 왕릉을 파헤친 왜군도적)'을 인도받으면서 최소한의 체면을 차리고, 대내적으로는 이 범릉적들을 헌괵하여 태묘에 바치고 효수하여 인민들에게 보임으로써 국교재개의
명분을 얻습니다. 뭐 벙찐 인간들이 가짜 범릉적을 인도받은 ㅄ같은 조선정부를 운운하기도 하는데,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거고요...ㅋ 그러나 사실 왜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조선이 외교적으로 꺼내들 수 있는 카드가 사실상 '국교재개'뿐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정부는 대내외적으로 조건을 충족시킨 겁니다. 또한 국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피로인 송환'의 조건을 내걸면서 포로를 일부 송환하기도 했죠. 다만 이 과정에서 일본의 다이묘들의 포로들을 숨기고 내놓지 않는 행태를 보인 것으로 보아- "무사철군의 조건으로 납치 조선인의 송환"을 도모한다는 한중도사님의 의견은 거의 타당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해동천자님의 의견에 많은 부분 동의를 합니다. 물론 임진왜란만으로 명이 멸망, 조선이 쇠퇴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철군조건으로 운운 한 것은 너무 오버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조선수군이 패전으로 내몰리게 된 이유가 범릉적의 부대장이었던 가등청정(?)을 부산 앞바다에서 요격시키라는 선조의 명령때문이었습니다. 노량해전때 조선수군이 다소 피해를 보더라도 적의 전력손실을 최대한 이끌어 내어 일본의 재침을 방지하는 것이 어느 면에서는 타당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조선수군이 그때까지 지켜 왔던 원칙 '내가 산 후 적을 죽여라' '도망하는 적은 좇지 마라'를 어기는 일입니다. 그 때 일본은 무질서한 철군이 아닌 데에 더 큰 위험이
있었습니다. 노량해전으로 이순신이 전사함으로 실제 조선수군 전력의 반 이상을 잃어버린 결과가 되었죠. 이제 우리는 무능한 선조대신 고민하여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명분과 실리를 좇으며 어떻게 전쟁을 마무리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말입니다.
이런 고민은 현재 우리 앞에 놓인 남북관계에도 적용이 되겠지요.
왜군 철수 당시 조선의 분위기는 철병하는 적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실록> 등에 실린 국왕 선조의 발언이나 이순신 장군의 발언을 살펴보면 "내가 산 후 적을 죽여라, 도망하는 적은 쫓지 마라"는 내용과는 거리가 아~주 멉니다. 애시당초 왜병은 조선에서 완전철병하려 했습니다. 이는 명군과의 교섭에서도 잘 드러나고요...^^; 근데 부득부득 우기면서 기어이 노량에서 왜병을 가로막은 것은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이었습니다. 도망하는 적을 쫒지 말아야 할 때는 따로 있습니다. 적이 근거리에 소굴을 두고 있으면서 반격이 예상되는 상황... 즉 당시로 치면 왜병이 부산을 소굴로 퇴각했다가 언제든 반격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죠. 근데 노량해전의 상황은 아주 다릅니다. 현해탄을 넘어 퇴각하는 왜군의 반격을 받을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량에서 적을 추격하여 섬멸한 것은 현지 지휘관인 이순신의 판단이었지- 선조가 죽을 구멍으로 밀어넣은 것이 아닙니다...-_-; 만약 노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살았다면, 주사를 수습하여 '현해탄'을 가로막았을 겁니다. 당시로써는 그게 최선이었어요.
말씀하시는 명분과 실리라는 것이 대체 뭔지 궁금하네요...^^; 결과론적인 내용만 보고 무능이니 어쩌니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후인들의 입장일 뿐,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아닙니다!
정말 좋은 충언에 감사드립니다. 조선수군의 패전은 칠천량 해전을 의미합니다 .' 내가 산 후에 적을 죽여라'의 나는 이순신이 아닌 아군을 의미한답니다. 병법의 원칙을 의미합니다. '我生後 殺他'이지요. 이제 논란을 그치고 제가 '천안함의 진실'과 '연평도 포격 사건의 진실'이라는 글을 며칠 후에 올리고자 합니다. 시중에서 떠도는 글과 정부의 발표문과는 전혀 다른 글을 보시면 제가 여기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충언을 부탁드립니다.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