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 가시와 같은 양심, 양심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봄나물 중 가장 맛있는 나물이 곰취와 두릅이다. 지인이 보내준 곰취와 두릅을 먹기 위해 손질하다가 두릅의 가시가 손끝을 파고 들어갔는데도 모르다가 가끔씩 콕콕 찌르기 때문에 자세히 보니 보여서 어젯밤에야 겨우 뺐다.
시원하고 또 시원하다.
눈에 겨우 보이는 그 작은 가시가 들어가서 나를 순간순간 놀라게 하는 것을 보며 ‘손끝에 가시가 양심’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오래 전 소설로 영화화 되었던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에서 영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심이란 손끝에 가시 같은 것이에요, 손끝에 가시가 박혀 있으면 조금만 잘 못을 해도 계속 찌르거든요, 그런데 양심의 가시를 빼면 그 때부터는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그리고 그는 권총강도를 하고 감옥에 가게 된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단순한 것 같지만 무척 복잡하다. 한 사람의 삶도 그럴진대 하물며 국가나 세계 그리고 집단은 말해 무엇하랴.
건축왕 사건, 빌라왕 사건은 새 발의 피고,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여기저기에서 비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돈과 권력이 최고이고, 가진 자들은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주 가끔씩 상기하는 양심? 양심이란 무엇일까?
“그렇다면 이 우주에서......,” 하인리히가 말했다. “공포와 고통, 결핍과 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날은 언제인가요.?”
“이 세상에 단 하나의 힘만 존재하게 되는 날이지. 양심의 힘 말이야. 그리고 자연이 겸손하고 도덕적이 되는 날이지. 이 세상엔 단 하나의 악의 근원이 있어. 그건 바로 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나약함이야. 그리고 이 나약함이란 다름 아닌 도덕적 감수성의 빈약을 뜻하는 거야. 또한 자유의 매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해.”
“양심이라는 게 무엇이라는 게 뭔지 설명해주세요.”
“내가 그럴 수 있다면 하느님이겠다. 왜냐하면 양심이라는 것은 양심이 뭔지 이해할 때 비로소 생기거든. 자네는 나한테 시문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설명해줄 수 있겠나.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를 납득이 가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자신이 직접 관여할 수 없는 것들의 비밀은 더욱 그렇단다. 귀머거리한테 음악을 설명할 수 있겠니?”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이란 이 마음을 통해 깨닫게 되는 세계의 일부란 말인가요?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꼭 갖고 있어야 하나요?“ 우주는 한 없이 많은 수로 나누어져, 그리고, 각각의 세계는 반대로 보다 큰 세계들에 의해 포괄되지. 결국 마음은 하나의 마음인거야. 하나의 마음은 하나의 세계처럼 점점 모든 세계로 나아가는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은 나름대로의 시간과 방식을 갖고 있어. 오직 인간으로서의 우주만이 우리 세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어.(...)
“양심은 분명히......, ” 실베스타가 대답했다. “모든 인간의 타고난 중재자라고 할 수 있지. 양심은 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최고의 것이자 궁극적인 것이야.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덕목 또는 윤리학이라고 부른 학문은 이 숭고하고 포괄적인 인격적 사고의 순수한 모습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어.
양심은 완전히 정화된 형태의 인간의 가장 독특한 정수야. 신성한 태곳적 인간이라 할 수 있지. 양심은 이것과 저것이 아니야. 양심은 보편적인 격언으로 명령하지 않아. 양심은 여러 가지 개별적인 덕목들로 이루어져 있지도 않아 단 하나의 덕목이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결정의 순간에 주저하지 않고 결심을 하고 선택을 하는, 순수하고 진지한 의지 말이야. 양심은 생기 있고, 독특한 불가분성에 살면서 인간의 육체라는 연약한 상징 속에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모든 정신의 사지가 진정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주지. “
노발리스 의 <푸른 꽃>에 실린 글이다.
산다는 것이 단순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누구도 양심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가 않다.
매일 매일 점검하면서도 스스로를 단속하기가 정말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바로 잡으라고 옛 선인들은 말했던 것은 아닐까?
2023년 4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