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바른 뜨락 큼직한 괴석 곁에 찔레꽃 향기로운 날, 나비며 벌들 꽃 찾아 분주한데, 어진 암탉이 병아리 떼를 돌본다. 어머니 사랑이야 금수인들 다를 건가? 자애로운 어미 닭의 눈빛이 또로록 구르는가 했더니 어느 샌가 부리 끝에 벌 한 마리를 꼭 물었다. 동그마니 모여든 병아리는 모두 여섯, 하나같이 예쁜 새끼들이 주둥이를 꼭 다문 채 모이 노느이길 기다리고 섰다. 병아리 몸은 어미 닭의 십분의 일도 못 되지만 눈망울들은 아주 커서 또랑또랑하니 마치 사람의 어미와 자식인 양하다. 정약용은 같은 화가의 다른 닭 그림을 보고 이런 시를 지었다.
어미 닭은 낱알을 찾고도 쪼는 척만 하고 있어 새끼 사랑 한 맘으로 배고픔을 참아내네.
그림의 핵심은 암탉과 병아리의 정다운 눈망울이 모여 원을 그린 곳에 있다. 그러나 병아리 여덟 마리가 더 있으니, 자식이란 한 뱃속에서 나왔어도 오랭이조랭이란 옛말이 맞는지 찬찬히 둘러볼 것이다. 우선 아래쪽에 지각생 병아리가 눈에 띈다. 종종걸음으로 어미에게 다가가기는 하나 의외로 서두르는 기색은 없다. 그 곁의 두 마리는 덜 여문 주둥이로 서로 실지렁이를 마주 물고 제법 힘을 쓰며 줄다리기하는 품이 귀엽다. 왼편 구석의 이 빠진 백자 사발 위엔 눈매가 순한 녀석이 고개 숙여 물을 마시고 다른 놈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본다. 그저 엄마 품만 파고드는 녀석은 둘인데, 그 중간 한 녀석은 눈알이 보이지 않으니 까부룩 낮잠이 든 게다. 한데 수탉이 보이지 않는다. 정약용은 앞의 시 끝 부분에
듣자니 이 그림 다 되었을 때 수탉들 잘못 알고 법석댔다네
하는 구절을 두었다. 그러니 그가 봤던 변상벽 그림도 암탉과 병아리만 그린 사실적인 작품이었던 모양이다. 「모계영자도」 역시 닭과 병아리, 찔레꽃과 벌 나비를 극히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그려낸 그림인데, 특히 반들반들한 암탉의 깃털과 보송보송한 햇병아리 솜털의 다른 질감을 어떻게 한 붓으로 그렸는지 의문이 갈 정도다. 우리네 토종닭은 꽁지깃이 엄청 길다. 더구나 수탉 꼬리는 길다랗게 뻗쳐오른 기세가 하도 장해서, 만약 함께 그렸다면 화폭 속 암탉과 병아리를 그만 압도했으리라.
영리한 화가는 괴석(怪石)을 대신 그렸다. 불쑥 솟은 괴석은 유난스레 거칠고 강렬한 흑백 대비로 장닭의 기상을 지녔다. 하지만 그 기이한 형태가 첫 눈에는 시선을 잡아당기지만, 자세히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어미 닭의 따사로운 모정(母情)만 더욱 빛나게 한다. 세상에 닭 그림이 많아도 이렇듯 정감 어린 작품이 또 어디 있으랴? 화가 변상벽은 어쩌면 이토록 살갑게 어머니 사랑을 그렸을까? 나는 상상한다. 이것은 닭 그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어느 집 정 많은 친정 부모가 시집간 딸을 위해 정성껏 주문해 보낸 그림이라면……. 그 딸아이가 늘 건강하고 병아리처럼 예쁜 자손 많기를 기원하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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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래된그림과글 잘보았습니다!!~
다람쥐 무늬군요..사진 잘 봤습니다..
정말 어미닭과 병아리 방향도 그렇고 비슷한 광경인것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