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자기의 손으로 빚은 차를 찬탄하는 나에게 마시게 하는 것만으로 황홀해지고 넉넉해진다 . 그 넉넉함과 황홀을 위하여 그녀는 얼굴 살갗이 가시에 긁히고 성치 않는 무릎 아픈 것도 잊고 그 신산(辛酸)의 작업을 마다하지 않고 밤새워 한 것이다 . 좌우간 그리하여, 심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아내의 차를 마시면서는 눈물이 나려고 한다 ."
고향인 전남 장흥에 '해산토굴'이라는 집필실을 지어놓고 차(茶)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작가 한승원 씨의 산문집 '
차 한잔의 깨달음'(김영사)에 나오는 구절이다. 자신을 위해 차잎을 따서 말리고, 그것으로 차를 끓여내온 아내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절절히 묻어나는 구절이다.
차에 대한 그의 예찬은 하나의 경지를 느끼게 한다.
"나는 차 향기를 통해 순수를 배운다 . 순수는 한 생명체가 막 태어났을 때, 어떤 일을 처음 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사람을 처음 사귀었을 때의 첫 마음 첫 정성 첫 사랑 속에 오롯하게 스며 있다 . 그 순수는 차의 향기와 같다 ."
최근 유명 문인들의 산문집들이 출간되어 눈길을 끈다. 산문집에는 시나 소설로는 쓸 수 없었던 더욱 내밀하고 따뜻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한승원 씨 이외에도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인 김광규 씨와 이문재 씨도 산문집을 냈다. 김광규 씨의 산문집은 '
천천히 올라가는 계단'(작가)이고, 이문재 씨의 산문집은 '
이문재 산문집'(호미)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시인이자 독문학자인 김광규 씨는 문학과 사회현상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한마디로 '남처럼' 되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다 . 되도록 '나답게' 살아가야 할 터인데, 실제로는 그와 반대로 남처럼 교육받고, 남처럼 되려고 경쟁하고, 남처럼 살다가 죽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우리네 인생이 되어버렸다 ."
읽는 순간 뜨끔하다. 바로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자문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처럼 시인의 산문에는 일상적인 듯하지만 아무나 찾아낼 수 없는 절묘한 깨달음이 곳곳에 녹아 있다.
시인이 고등학생 딸을 마중나간 장면은 가슴이 싸하다.
"아, 저기 오는구나 . 바른쪽 어깨에는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왼쪽 손에는 도시락 두 개와 신발주머니를 주렁주렁 들고, 마치 물건을 하나도 팔지 못한 방물장수처럼 축 늘어진 꼴로 나의 딸내미가 걸어나온다 ."
시인 이문재 씨는 날카로운 눈으로 기계시대를 비판한다.
"커서의 움직임과 전송 속도 또는 프린트 속도에 의해 기다림과 그리움은 박멸되고 있다 . 속도 지상주의, 속도 패권주의 앞에서 편지로 대표되는 종이 위의 글쓰기는 골동화하고 있다 . 그러나 나는 아직도 종이위의 글쓰기가 갖고 있는 위력을 신앙하고자 한다 . 손(촉감)과 눈(읽는 방식)으로 대표되는 몸의 기억력을 나는 믿고자 한다 . 속도를 상품화하고, 마침내는 기다림과 그리움을 멸종시키는 이 디지털 문명의 그늘을 감시하고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다 ."
이씨의 책에는 따뜻한 생태학적 권유가 담겨 있다.
음식을 먹을 때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생각하고, 가끔 휴대전화와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 차를 버리고 걷는 것. 그것이 이문재가 말하는 느림의 전략이다. 내가 나답게 하루를 사는 것이 그가 말하는 온전함 삶인 것이다.
초창기 잠수함에는 토끼를 태웠다고 한다. 산소가 부족해지면 토끼가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예민한 토끼는 먼저 죽음으로써 인간에게 위기를 알려주었다.
문인들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이들이 21세기 잠수함 속의 토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연 기자]
책소개
아름다운 차의 맛과 향기를 찾아서 펼쳐지는 다론!
차향 번지듯이 오묘한 삶을 실천한 소설가 한승원이 들려주는 차와 선, 그리고 깨달음의 이야기, 『차 한 잔의 깨달음』. 직접 차밭을 일구고 찻잎을 따서 말려 아홉 번 이상 덖어 세상에 하나뿐인 '화엄차(華嚴茶)'를 마시는 저자가 한국 차문화의 시조, 초의 스님의 <동다송>과 <다신전>을 한 자 한 자 해석해 읽으며 마음에 새긴 고고한 정신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차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있다. 생명력 넘치는 그윽한 문학 세계를 추구해온 한국문학사의 선지식으로, 다인 중의 다인인 저자가 70년 간의 삶의 환희심(歡喜心)을 차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차와 함께 하는 것이 일상인 저자가 얻은 깨달음을 특유의 생명력 넘치는 문체로 신화적인 사색과 함께 펼친다.
또한 이 책은 차에 대한 모든 것을 전해주고 있다. 저자는 차와 삶을 하나로 보고 음미한다. 찻잎을 따거나 덖을 때는 삶의 정성과 고달픔을 배우고, 정성스럽게 차를 우리면서는 삶의 인내심과 향기로움, 그리고 최상의 아름다움을 얻어낼 수 있는 시기와 기회를 알아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차로 삶의 환희심을 느끼고, 차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정결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저자가 번역한 초의 스님의 <동다송>과 <다신전>도 수록했다.
저자소개
한승원
'흔들리면 차를 마신다'고 말하는 작가 한승원은 생명력 넘치는 그윽한 문학 세계를 추구해온 한국문학사의 선지식이다. 40년 만에 내려온 고향 장흥에 '해산토굴'이라 명명한 집필실을 마련하고 토굴 뒤란 언덕에는 몇 해 전부터 아내와 함께 죽로차 밭을 일구고 있다. 매년 봄 그의 토굴 주위는 손수 덖은 배릿한 차향으로 가득하다. 따로 차 만드는 법을 전수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차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초의스님의 『동다송』과 『다신전』을 공부한 덕택이고, 그의 마음결을 사모하는 차인들의 손길 덕분이다.
차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어디까지가 탐욕이고 어디까지가 아름다운 의지인지를 고민하면서도 좀처럼 차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죽로차 밭에서 딴 찻잎으로 덖은 차처럼 향기로운 글을 쓰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지니고 있다. 꿈꾸면 삶이 향기로워지고 삶이 향기로워지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그의 생각처럼 한승원은 끊임없이 향기로운 글을 쓰고 있다. 차를 통해, 차 마시는 행위를 통해 인생의 참맛을 유려한 문장으로 완성한 『차 한 잔의 깨달음』이 그 결실이다.
『불의 딸』『아제아제 바라아제』『원효』등 굵직한 작품으로 명실공히 한국 문학사의 한 기둥으로 자리매김한 그는 환갑이 훨씬 넘은 최근에도 『꿈』『사랑』『멍텅구리배』『화사』『물보라』『초의』등의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며 작가로서의 열정을 쏟아내고 있다. '살아 있는 한 글을 쓰고, 글을 쓰는 한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한국 문학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진정한 장인으로서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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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작가의 말
1장 꽃나무를 쳐내니 먼 데 산이 보인다
차 마시는 마음
다신을 찾아서
차향 속에서 사는 행복
차향, 그 불가사의한 무늬와 결
스스로 향기로워지는 비법
차와 신화를 마신다
누가 차를 욕되게 하는가
2장 흔들리는 마음밭에 차와 선의 씨를 심으며
화엄차를 아십니까
차인, 혹은 달과 안개를 먹고 사는 사람들
흔들리면 차 한 잔
차, 내 마음의 리트머스 시험지
향기의 씨앗, 혹은 순수의 뿌리
화쟁차를 아십니까
차의 향기 사람의 향기
3장 한 잔의 꽃, 한 잔의 달, 한 잔의 시
아내의 손맛, 혹은 품내 배인 차
초의 스님께 보내는 편지
평상심에 대하여
차나무의 뿌리에 대하여
차의 가학과 피학에 대하여
신화의 파괴와 재건
차가 세상을 바꾼다
차 선물하기는 넥타이 선물하기와 같다
4장 죽로차 밭에서 얻는 깨달음의 약
무애차에 대하여
차시 창작을 부탁한 여인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차
차는 차다
차의 홀로그램에 대하여
죽로차 밭에서 운명 바꾸기
멧돼지는 차 밭을 뒤지지만 찻잎을 먹지 않는다
물 흐르듯이 꽃 피듯이
사랑하는 아들달에게 차바시기를 권하며
차에 대한 중대한 오해
부록
다신전
동다송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