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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지훈(過庭之訓)
뜰에서 가르친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자식에게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過 : 지날 과(辶/10)
庭 : 뜰 정(广/7)
之 : 의조사 지(丿/3)
訓 : 가르칠 훈(言/3)
(유의어)
이정(鯉庭)
이정지훈(鯉庭之訓)
정훈(庭訓)
추정(趨庭)
출전 : 논어(論語) 계씨편(季氏篇)
공자(孔子)가 아들 백어(伯魚)를 가르칠 때 자식이라고 해서 특별히 많은 교육을 시키거나 편애하지 않고, 그저 뜰을 지나다 몇 마디 가르침을 주었는데, 이 가르침을 일러 얘기한 것이다. 뜰을 지날 때의 가르침이라 하여 과정지훈(過庭之訓) 또는 추정(趨庭)이라고도 한다.
할아버지의 재력,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정보력, 이 3요소가 성공적인 자녀 교육의 필수란 우스갯소리가 있다. 부모 찬스가 장관 청문회나 유력 인사 검증 때 매번 등장하는 것을 보면 부모의 무관심은 절반의 진실인 듯하다. 존재감만으로 후광 효과와 강력한 원격조종 효과를 발휘해서다.
공자도 아빠 찬스의 의심을 받았다. 소장파 인사인 진항(陳亢)이 총대를 메고 공자의 외아들 백어에게 돌직구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가 (제자들 몰래) 더 가르쳐준 게 있는가?"
백어는 이렇게 답한다. "없습니다. 혼자 서 계실 때 내가 바삐 뜰을 지나가는데 '시는 배웠느냐?'고 물어보셔서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했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단다' 하셔서 시를 배웠지요. 또 후일 '예는 배웠느냐?'고 하시기에 '못 배웠다' 하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 하셔 예를 배웠습니다. (아버지께 들은 바는) 두 가지가 전부입니다."
진항은 기뻐하며 말한다. "나는 질문 하나로 세 가지를 얻었다. 첫째와 둘째는 시와 예의 중요성이다. 셋째는 군자는 아들도 (제자들과 다름없이) 똑같이 대한다는 것을 알았다."
'과정지훈(過庭之訓)'이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평상시 가정교육을 뜻하게 된 유래다. 자상함이 연상되지만 사실은 거리 두기다. 성지시자(聖之時者; 시류에 맞춰 진퇴를 조절할 수 있는 성인)라는 평대로 윤리의식과 정무감각, 아버지의 고차원 사랑을 함께 갖췄다. 윤리의식 면에서 아들과의 별도 공부 시간, 상호작용 자체를 별도로 갖지 않아 불공정 시비 소지를 없앴다.
공자는 제자들에겐 자상한 평가를 남겼지만 외아들 백어에 대해선 언급이 없다. '물보다 진한 피의 속내'는 역설적으로 수제자 안회의 장례 대처에서 드러난다.
그의 죽음에 애통해 했지만, 공자의 수레를 팔아 외관(外棺)을 마련하자는 제안엔 거절한다. "잘났든 못났든 자식 사랑은 다 같게 마련이오. 우리 아들 때도 외관을 번듯하게 만들어 장례를 치르지 못했는데 그렇게 해줄 수는 없소." 공자가 특별대우를 했다면 백어는 소외되거나, 특혜의식으로 성격이 나빠질 수도 있었다.
맹자는 "부모가 직접 나서 가르치기보다 차라리 자식을 바꿔 가르치라(易子而敎)"고 조언한다. 이해충돌 때문이 아니라 부모 자식 관계를 위해서다. 부모는 높은 기대치 때문에 과잉 잔소리를 하고, 자식은 부모의 언행 불일치에 반감을 느끼게 돼서다.
유력 인사들의 과잉 교육열, 부모 찬스 논란 때마다 공자의 '과정지훈(過庭之訓)', 맹자의 '역자이교(易子而敎)' 지혜를 되새기게 된다. 부모의 지나친 자녀 사랑은 빛이 아닌 빚이, 힘이 아닌 짐이 될 수 있다. 자녀 교육에도 적절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 과정지훈(過庭之訓)
어느날 공자(孔子)가 뜰을 거닐다 아들 공리(孔鯉, 또는 伯魚라고 함)를 만났다. "요즈음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느냐?"고 공자가 아들 공리에게 물으니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다시 공자가 아들에게 "시경(詩經)을 읽었느냐?" 물으니 "아직 제대로 읽지 못 하였습니다"고 답하였다. 이에 공자가 "시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바른 말을 하지 못 하느니라(不學詩, 無以言)"고 하였다.
훗날 공자와 아들 공리가 뜰에서 다시 마주쳤다. "시경을 공부하였느냐?" "예! 공부 하였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예기(禮記)를 읽거라. 예(禮)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서지 못 하느니라(不學禮 無以立)"고 하였다.
공자가 아들 공리를 가르치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엿보던 제자 진항(陳亢)이 공리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대는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가르침을 받지 않았는가(陳亢問於伯魚曰, 子亦有異聞乎)?"
공리가 말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시를 모르면 바른 말을 할 수 없고(不學詩 無以言), 예를 알지 못하면 바르게 설 수 없다(不學禮 無以立)'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진항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 또한 이미 스승으로부터 시경을 공부하라는 말씀과 예기를 공부하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이번에 스승께서 당신의 아들을 편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이야말로 한 번 물어 세 가지를 얻은 것이 아닌가(陳亢退而喜曰 問一得三 聞詩聞禮 又聞君子之遠其子也)!" 하였다.
이 이야기는 공자(孔子)가 자식을 편애(偏愛)하지 않고, 제자들과 똑 같이 가르쳤다는 예화로 뜰을 지나며 가르쳤다고 하여 과정지훈(過庭之訓) 또는 추정(趨庭)이라고도 한다.
과정지훈이 전하는 메시지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과정지훈의 해석 관점을 달리하여 제자 진항의 인간성을 주목해 살펴보고 싶다.
진항은 무언(無言)의 상황에서도 스승의 큰 뜻을 깨달았으니 아마도 그는 매우 똑똑한 제자였으리라 짐작된다. 마치 '석가모니가 연꽃을 보이니 가섭이 미소했다'는 염화시중(拈華示衆)의 교훈에 등장하는 가섭(迦葉)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진항은 훗날 지금의 산동성 단부(單父)의 재상까지 지냈다고 하니 비록 유자(有子)나 증자(曾子) 같은 수제자 반열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요즈음 표현을 빌리면 잘나가는 범생이(우등생)였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듯 하다.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모범생 제자만 두었을까? 예수는 12명의 제자를 두었다. 예수 자신이 평범한 목수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 중 베드로와 안드레아 등은 평범한 어부였고 마태는 하천민인 세리였다.
베드로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는 예수의 기적을 보고서야 제자가 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어쩌면 예수의 가르침보다 세속적인 이익 때문에 예수를 따르기로 마음 먹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자신을 은화 30전에 자신을 팔아넘긴 가롯 유다조차 제자로 삼았으니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예수의 제자 선발은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도 있다. 성경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가 평범한 사람들을 제자로 삼은 까닭을 헤아릴 수 없지만 예수는 똑똑한 사람만을 제자로 삼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과정지훈에 등장하는 진항도 똑똑한 영재였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심성까지도 고왔던 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스승의 가르침을 곡해하고 스승의 뒷 조사를 일삼는 행실 때문에 공자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던 문제 학생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활지도의 교과지도보다 생활지도가 더 어렵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도를 잘 따르는 편이지만 몇몇 아이들은 선생님의 속을 뒤집어 놓을 정도의 막무가내 식 행동도 주저하지 않기 때문에 생활지도 담당 업무가 교사들로부터 기피 1순위란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 교육은 바른 사람을 만드는 일이다.
맹자(孟子)가 진심장(盡心章)에서 "천하의 영재를 모아서 가르치는 것이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에 하나(得天下英才而敎育之三樂也)"라고 하였듯이 똑똑한 제자를 지도하고 그들이 커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보람되고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소위 싹수가 노랗다고 평가받는 문제학생들을 바른 길로 안내하고 참사람으로 키울 수 있다면 그 보람은 영재를 가르치는 것 보다 보람이 더욱 크리라 여겨진다.
세기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공자조차 진항같은 제자를 두었으며, 예수는 은화 30전의 욕심 때문에 스승의 목숨까지 팔았던 제자를 두었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보통 선생에게 맡겨진 제자들이야 이보다 낫지 않겠는가! 삐뚤어진 행동을 하는 제자를 만나더라도 언젠가는 '하나를 물어 셋을 배웠다(問一得三)'라고 외치게 되는 날을 기대하며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주어진 도리를 다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 철학가 공자의 자식 교육
2500년 전 공자의 정신은 지금도 그의 후손과 제자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야말로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사상가인 공자는 부모에게 어떤 가르침을 받았을까? 또 자식은 어떻게 가르쳤을까?
공자는 자식과 거리를 두었다. 흔히들 공자하면 명문가의 후손으로 유복하게 자랐을 걸로 짐작하지만, 사실 공자의 어린 시절은 매우 어려웠다. 그의 아버지는 몰락한 귀족의 후손으로 하급군인이었다. 노년에 어린 여자를 첩으로 들였는데, 그녀가 바로 공자의 어머니다.
공자의 나이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공자의 어머니는 아들과 집을 나와 서로만을 의지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공자가 열?곱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죽고 공자는 홀로 남았다.
어머니의 상을 치른 지 얼마 안 돼, 노나라의 재상이 귀족들을 초청해 잔치를 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공자는 상복을 입은 채 그 자리에 갔다. 그러나 몰락한 가문의 신분이라며 큰 수모를 당한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공자는 중앙 정치 무대에 서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공자 어머니의 자식 교육 - 공자를 직접 가르친 홀어머니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가 위대한 사상가로 자라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찍이 교육을 받아 학식이 풍부했던 공자의 어머니는 마을에 아이들을 모아 글자와 계산법, 노래, 예절, 의식을 두루 가르쳤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약간의 쌀과 장작을 받아 생계를 이었다.
공자는 여섯 살이 되기도 전에 다른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머니의 보조 교사 역할도 곧잘 해냈다. 어머니의 세심한 가르침 덕분에 공자는 열 살이 채 되지 않아 어머니가 가르치는 초급 교육과정을 모두 끝냈다. 이처럼 어머니가 작은 학당을 운영하고 그런 어머니를 도왔던 경험은 이후 공자가 사학을 열고 교육자의 길을 걷는 데 깊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는 아이가 열 살이 되면 집 바깥에서 스승을 찾아 공부를 시켜야 했다. 그래서 공자의 어머니는 자신의 학당 문을 닫고, 공자를 고을에서 가장 훌륭한 학당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공자는 시가, 전적, 역사 등을 배우고 시경, 서경, 예기, 악기 등을 익혔다. 그 학당은 나라에서 세웠고 매우 엄격한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었는데, 노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스승들이 모여 있었다.
음악 교육으로 세상의 이치 깨닫게 해
기원전 516년, 36살의 사내가 오늘날 산둥성에 위치한 제나라(춘추시대의 강대국)를 방문했다. 사내는 제나라에서 유서 깊은 음악 연주를 감상하고, 제나라의 악사와 음악에 관해 깊은 담론을 나누었다. 그리고 자신이 감상한 음악을 배우기까지 했다. 이때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던 36살의 사내가 바로 공자다.
공자가 이토록 음악에 깊은 조예를 지녔던 건, 어머니 안징재의 교육 덕분이었다. 남의 집 일을 하며 홀로 자식을 키우는 악조건 속에서도 안징재는 자식 교육에 남다른 식견을 보였다. 어린 공자에게 장난감을 사주는 대신 악기를 사주었다. 때로는 연주자를 초청해 공자를 위한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친척과 이웃 사람들은 이런 안징재의 교육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군거렸다. 간혹 "없는 형편에 무슨 음악이냐?"며 대놓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안징재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사람이 되려면 뿌리와 기초가 중요하고 일을 처리할 때는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음악은 규칙이나 원칙을 중시합니다. 연주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연주하면 곡이 성립되지가 않지요. 아이에게 일찍부터 음악의 이런 원리를 알게 하면 훗날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어머니 안징재의 예상대로 공자는 악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음악의 묘미를 터득해갔다. 그리고 삶의 이치도 깨달아갔다.
음과 음 사이에 박자가 있고 음부와 음부 사이에는 일정한 규율이 있듯이, 인간관계도 수없이 많은 가닥의 실처럼 얽혀 있구나. 음악에 삶의 이치가 있어.
공자의 정치 인생은 실패작이라고들 한다. 그는 무너진 예악을 복구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수용되지 않았다. 이후 공자는 제자를 양성하면서 예악을 교육과정에 포함시켰다. 정치가로서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교육가로서 사학을 창시하여 자신의 모든 경험을 종합한 교육프로그램을 실천해 추앙받았다.
공자의 교육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이었는데, 이 가운데 시와 예와 악(樂)이 모두 음악과 관련 있었다. 이런 면모는 음악 교육을 중요하게 여겼던 어머니 안징재의 교육 철학 덕분이다.
공자의 자식 교육 - 자식과 제자에게 공평한 공자
공자에게 자식이 정확히 몇 명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딸에 관한 언급은 '논어' 공야장편에서 찾을 수 있다. 공자가 공야장을 두고 이야기했다. "사위 삼을 만하다. 비록 옥에 갇힌 몸이지만, 그의 죄는 아니다. 그러고는 자기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아들은 태어날 때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자는 열아홉 살 때 송나라 사람과 결혼해 이듬해 아들 공리를 낳았다. 노나라 소공이 그 소식을 듣고 잉어를 하사하며 축하하였다. 임금이 직접 관심을 보이며 축하하자, 공자가 성은에 감격하고 또 기념하기 위해 아들의 이름을 '리(鯉; 잉어를 뜻함)'라 지었다.
이렇듯 귀한 아들을 공자는 어떻게 가르쳤을까. 당시 공자는 수많은 제자를 거느린 최고의 스승이었다. 그 정도 인물이라면 자신의 아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교육을 시키지 않았을까.
공자의 제자 중에도 이런 의문을 품은 이가 있었다. '논어' 계씨편에는 진항이라는 제자가 공리를 만나 평소 궁금하게 여겼던 것을 물어보는 대목이 나온다. "그대는 선생님께 혹시 우리가 듣지 못한 특별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받는지요?"
이에 공리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어느 때인가 제가 뜰을 지나쳐 가는데 아버님이 저를 부르시어 '시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기에, '아직 배우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 '시를 배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고 하셔서, 저는 그뒤 시를 배웠습니다. 어느 날엔가 또 제가 뜰을 지나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아버님은 저를 불러 '예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기에, '아직 배우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 앞에 설 수가 없다'고 하시어, 저는 그뒤 예를 배웠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이 두 가지 말씀을 들었을 뿐입니다."
진항은 공리의 이야기를 듣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가지를 묻고서 세 가지를 알게 되었다(聞一得三). 시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예의 가치를 알게 되었으며(聞詩聞禮), 군자가 자신의 자식과 거리를 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又聞君子之遠其子也)."
공자가 자식을 교육하는 방법은 특별하지 않았다. 평소 제자들을 가르치듯이 자신의 자식을 가르쳤다. 진항은 보통의 스승들이 그러하듯, 공자 역시 제자들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은 무슨 특별한 것을 자식에게 가르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가 자식과 제자에게 공평하게 가르침을 주었음을 듣고, 공자의 치우치지 않은 사랑에 감동했다.
공자도 자식 교육은 남에게 맡겼다
공리가 뜰을 바삐 지나다 아버지에게 한 수 지도를 받은 이야기를 '과정지훈(過庭之訓)'이라고 하는데, 부모가 자연스러운 기회를 틈타서 자식을 가르치는 교육을 말한다.
공자는 제자를 자식처럼 대했다. 또 제자들 역시 공자를 부모처럼 모셨다. 부모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꾸짖은 것이 스승의 자리에서 공자가 보여준 모습이었다면, 스승의 마음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꾸짖은 것은 부모의 자리에서 보여준 공자의 모습이었다. 공자는 공리에게 필요한 공부를 슬쩍 알려주고 자식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리는 교육을 펼쳤다.
공자가 자식과 제자를 차별하지 않을까 의심했던 진항의 태도는 '자신의 능력 없음을 탓하라'는 공자의 가르침과 정반대되는 행동이다. 그런 모습이 어찌 진항뿐이겠는가. 진항의 말에서도 언급되었던, 자식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원기자(遠其子)'는 오늘날에도 되새겨볼 만하다.
공자의 교육관은 맹자와 그의 제자 공손추의 대화에도 등장한다. 공자가 자기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았던 이유를 공손추가 물으니,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군자가 자녀를 직접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교육의 자세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교육자는 바른길로 가르치나, 바른길로 가르쳐도 실천하지 않으면 꾸짖게 되고, 꾸짖고 때리면 도리어 감정을 상하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멀어지는 것은 죄악이다."
이같은 맹자와 제자 공손추의 대화에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다. 자기 자식은 부모가 가르치기 어려우므로 자식을 남과 서로 바꾸어서 가르친다는 뜻으로, '맹자'의 이루상편에 나오는 말이다.
■ 공자의 자녀교육
1. 공자의 가정환경
공자의 교육관을 살펴보자면 그의 일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인명사전에 의하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은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성은 공(孔)이고, 이름이 흘(紇), 자가 숙량(叔梁)이다. 노의 양공(襄公) 때 추읍(郰邑, 또는 鄹邑)의 대부(大夫)가 되었다. 용감하고 무예를 갖추었으며 완력이 있었다.
양공 10년 진(晉)나라가 제후(諸侯)의 군사와 함께 노나라의 핍양(偪陽)을 공격했을 때 현문(縣門)의 갑문(閘門)이 갑자기 내려앉았을 때 그가 들어 올려 문을 빠져나가게 했다. 17년 제(齊)나라가 노나라를 치자 장흘(臧紇)이 방(防)에서 제경(齊卿) 고후(高厚)에 의해 포위되었는데 그가 장주(臧疇), 장가(臧賈)와 함께 포위를 돌파하여 장흘을 호송했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지켰다. 처음에 시씨(施氏)를 아내로 얻어 딸 아홉을 낳았는데, 다시 안씨(顔氏)의 딸 징재(徵在)를 아내로 얻어 공자를 낳았다.
공자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64세 때 밭에서 일하는 16세의 처녀를 겁탈하여 첩으로 들였는데 그녀가 공자의 어머니다. 공자의 유년 시절은 불우했다. 세 살 때 부친을 잃었고, 정부인과 이복 형제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공자의 어머니는 공자를 데리고 나와 모자가 의지하며 살았다.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매우 곤궁한 결손가정이었다.
공자는 이런한 성장환경으로 열등감이 매우 깊었다. 이런 공자를 훌륭하게 교육한 것은 공자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공자가 네 살이 되던 해부터 매일 집에서 재를 올리게 했다 귀족에게 필요한 예법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다.
공자는 스승이 없었기에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면서 스스로 해답을 구했다. 공자는 어느 것하나 소홀히 여기지 않고 배움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예법을 익히기 위해 제사를 드리는 장소까지 찾아가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통해 예법과 학문에 정통하게 된 것이다.
공자는 당시 명성이 높아던 노자를 네 번이나 찾아가 배웠다고 했다. 여씨춘추에는 공자가 처음으로 노자를 찾아가 만난 때가 17세 였으며, 마지막으로 만난 때가 47세 때라고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 한비열전에는 "달리는 짐승을 그물을 쳐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를 드리워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을 쏘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 같은 존재였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공자가 17세 때 어머니 마져 사망하게 되어 공자는 고아가 되었음에도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30세에 성인으로 칭송을 받았고, 제자가 3,000 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공자는 19세 때 송(宋)나라 견관씨의 딸과 결혼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들 백어(伯魚)를 낳았고, 그 뒤 딸 하나를 더 낳았다. 백어(伯魚)는 이름이 이(鯉)이다. 이 이름에는 사연이 있었다. 공자는 처음 아들의 이름을 백어(伯魚)라고 지었다. 그런데 당시 노(魯)나라 임금인 소공(昭公)이 사람을 보내 축하하면서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보냈다. 이에 공자가 백어(伯魚)의 이름을 잉어를 뜻하는 한자인 이(鯉)로 고쳐 지었다.
백어(伯魚)는 공자에게는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는데, 나이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백어(伯魚)는 공급(孔伋; 자사)을 낳아, 공자의 가계를 이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증자(曾子; 증삼)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유학의 정통 학맥을 이었다.
공자는 51세가 되어서야 노나라의 관리로 등용되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중도현의 현장을, 다음에 대사구(大司寇; 사법권의 책임자. 법무부장관)을 역임한 후에는 대리재상(代理宰相; 국토교통부장관)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실권자인 계손씨의 배척을 받아 물러나 55세에 여러나라를 주유하는 여행길에 오른다. 이러한 여행은 공자의 수제자 중 부유한 상인이었던 자공 덕분에 공자는 13년 가까이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또한 총 72명의 수제자가 그를 따랐다고 한다.
공자는 69세에 외아들인 리(鯉)가 죽고, 이어서 연연하게 제자 안희와 자로의 죽음으로 마음에 충격을 받아 병상에 누워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공자의 교육방법
(1) 인재시교(因材施敎)
공자는 중국에서 관학(官學)의 독점을 타파하고 사항(私學)을 창시한 분이시다. 획일적인 관학에서 저마다 타고난 능력과 소질에 맞게 가르쳐야 한다는 인재시교(因材施敎; 논어 선진편)을 주장하였다. 맹자의 불설지교회(不屑之敎誨) 즉 상대가 달가와 하지 않더라도 가르쳐 깨닫게 하여야 한다는 적극적인 교육방법론과 함께 생각할 교육론이다.
(2) 유교무류(有敎無類)
교육대상에 있어서 "교육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有敎無類)." 종족, 신분, 재산의 유무와 관계 없이 누구든지 배움을 청하는 자라면 가르친다.
(3) 거일삼반(擧一三反)
학생들에게 "하나를 보고 열을 알게 하고(擧一三反)", 선생은 학생이 독립적으로 연구에 몰두하는 기초 위에서 계발과 지도를 해야한다. 즉 계발실 교육을 중요시 하였다.
(4) 겸허호학(謙虛好學)
배우는 자의 학습태도는 겸허호학(謙虛好學; 겸허하게 배우기를 좋아함)하여야 한다. 즉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고 해야 바로 배울 수 있다.
(5)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
학습방법은 반복학습을 강조하여 몸에 완전히 베일 때까지 공부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여,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고(溫故而知新)",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하였다.
가이위사의(可以爲師矣)는 "낡은 것만 붙잡지 말고 새로움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배우고 익히되 과거에 머물지 말고 새로운 것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6) 학이부사칙(學而不思則)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워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게 된다(學而不思則, 思而不學則殆)고 하였다. 학습은 사고를 잘해야 하며 학습과 사고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말이다.
공자의 교육방법론은 오늘에도 적용되는 교육론이다. 교육의 평준화는 교육 받은 기회의 평준화여야 하고, 교육은 개인의 소질과 능력에 따른 인재시교가 정답이다.
공자는 직접 제자들에게 설명하여 가르치기 보다 스스로 공부해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방식으로 교육했다고 한다. 질 문 위주로 수업을 할 경우 학생들은 먼저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교수(敎受) 방법도 주입식, 암기식에서 공자의 질의식 거일삼반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3. 공자의 자녀교육
父母之心,對着弟子, 老師, 孩子心情.
부모의 마음으로 제자를 대하고, 스승으로 마음으로 자식을 대한다.
공자는 19세 때 송(宋)나라 견관씨의 딸과 결혼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들 백어(伯魚)를 낳았고, 그 뒤 딸 하나를 더 낳았다. 백어(伯魚)는 이름이 이(鯉)이다. 이 이름에는 사연이 있었다. 공자는 처음 아들의 이름을 백어(伯魚)라고 지었다. 그런데 당시 노(魯)나라 임금인 소공(昭公)이 사람을 보내 축하하면서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보냈다. 이에 공자가 백어(伯魚)의 이름을 잉어를 뜻하는 한자인 이(鯉)로 고쳐 지었다.
백어(伯魚)는 공자에게는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는데, 나이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백어(伯魚)는 공급(孔伋; 자사)을 낳아, 공자의 가계를 이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증자(曾子; 증삼)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유학의 정통 학맥을 이었다.
백어(伯魚)는 아주 어려서부터 아버지인 공자(孔子)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 때문에 공자의 제자들 중에는 공자(孔子)가 자식인 백어(伯魚)에게만 무슨 특별한 것을 가르치지 않나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논어(論語)' 계씨(季氏) 편에 나온다.
공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진항(陳亢; 자금)이 백어(伯魚)에게 물었다. "그대는 선생님께 혹시 우리가 듣지 못한 특별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는가?"
이에 백어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어느 때인가 아버님이 마당에 홀로 서 계시는데, 제가 빠른 걸음으로 뜰을 지나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버님이 저를 부르시어 '시(詩)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기에, '아직 배우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버님께서 '시(詩)를 배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고 하셔서, 저는 그 뒤 시(詩)를 배웠습니다. 어느 날엔가 또 아버님이 마당에 홀로 서 계시기에, 제가 빠른 걸음으로 뜰을 지나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아버님은 저를 불러 '예(禮)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기에, '아직 배우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예(禮)를 배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 앞에 설 수가 없다'고 하시어, 저는 그 뒤 예(禮)를 배웠습니다. 저는 아버님에게 이 두 가지 말씀을 들었을 뿐입니다."
진항(陳亢)은 물러나 기뻐하며 말했다. "한 가지를 물어서 세 가지를 얻었다. 시(詩)를 듣고, 예(禮)를 듣고 또 군자는 자신의 아들과 제자들을 다르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들었다."
공자가 자식을 교육하는 방법은 특별하지 않았다. 평소 제자들을 가르치듯이 자신의 자식을 가르쳤다. 진항(陳亢)은 보통의 스승들이 그러하듯, 공자 역시 제자들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은 무슨 특별한 것을 자식인 백어(伯魚)에게 가르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가 백어(伯魚)에게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시(詩)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주었을 뿐이라는 것을 듣고, 공자의 치우치지 않은 사랑에 감동한 것이다.
안연(顔淵)의 경우에서 보듯, 공자는 제자를 자식처럼 대했다. 또 제자들 역시 공자를 부모처럼 모셨다. 부모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꾸짖은 것이 스승의 자리에서 공자가 보여준 모습이었다면, 스승의 마음으로 자식을 가르치고 꾸짖은 것은 부모의 자리에서 보여준 공자의 모습이었다.
공자는 직접 제자들에게 설명하여 가르치기 보다 스스로 공부해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방식으로 교육했다고 한다. 질문 위주로 수업을 할 경우 학생들은 먼저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래된 미국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을 4차 산업시대에 가장 이상적인 교사상으로 꼽고 싶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입시제도가 존재하는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키팅 선생님처럼 수업을 한다면 학부모와 학생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키팅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목적에 국한된 학교 교육을 부정했다. 삶의 목적이 아닌, 방식과 도구에만 얽매이는 교육 현실을 '죽은 시인의 사회'라고 표현했다.
대한민국 학교는 이미 죽은 사회이고 시인으로 표현할 만한 교사가 없는 게 현실이다. 죽은 사회가 아닌 살아 있는 사회가 되려면 학교 교육의 방향이 성적 위주에서 전인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나만 되면 된다는 교육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배우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다시 조선시대로 공자의 시대로 되돌아 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의예지(仁義禮智)의 수직적 예절에서 '너와 내가 같다'라는 사랑(仁)의 가치로 사람과 사람의 수평적 예절을 가르치는 인성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일대 교수였던 전혜성 박사는 여섯 자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 미국 내에서도 존경을 받는다. 자녀교육의 비결로 공자의 말씀인 덕이 재주보다 우선이라는 '덕승재(德勝才)'를 첫 번째로 꼽았다. 덕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인품이다. 난 사람보다 된 사람이 더 아름답다. 가장 중요한 인성교육의 장이 가정이고 부모인 시대가 됐다. 부모가 자녀의 인성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는다.
재승덕(才勝德)
덕승재(德勝才)
재주가 덕을 넘어서게 하지 말고, 덕이 재주보다 낳게하라.
재주가 덕을 앞지르지 못하게 하고, 덕이 재주를 앞서게 하라.
德勝才(덕승재) 謂之君子(위지군자)
才勝德(재승덕) 謂之小人(위지소인)
덕이 재주보다 많은 사람을 군자(인격자)라 하고, 재주가 덕보다 많은 사람을 소인(속물)이라 한다.
▶️ 過(지날 과, 재앙 화)는 ❶형성문자로 过(과)는 간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咼(와, 과; 입이 삐뚤어짐)의 뜻이 합(合)하여 바른 길을 지나쳤다는 데서 지나다를 뜻한다. ❷형성문자로 過자는 '지나다'나 '경과하다', '지나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過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咼(가를 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咼자는 '뼈'를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過자는 어떠한 상황이나 상태가 지나갔음을 뜻하기 때문에 길을 걷는 모습을 그린 辶자가 '지나가다'라는 뜻을 전달하고 있다. 다만 지금의 過자는 '초과하다'나 '넘치다'와 같이 한계를 넘어선다는 뜻이 확대되어 있다. 그래서 過(과)는 지나치는 일, 통과하다, 도를 넘치다, 과오(過誤) 따위의 뜻으로 ①지나다 ②지나는 길에 들르다 ③경과하다 ④왕래하다, 교제하다 ⑤초과하다 ⑥지나치다 ⑦분수에 넘치다 ⑧넘다 ⑨나무라다 ⑩보다, 돌이켜 보다 ⑪옮기다 ⑫허물 ⑬잘못 ⑭괘(卦)의 이름 ⑮예전 그리고 ⓐ재앙(災殃)(화)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지날 력/역(歷), 지날 경(經), 그릇될 와(訛), 그르칠 오(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공 공(功)이다. 용례로는 일이 되어 가는 경로를 과정(過程), 지나간 때를 과거(過去), 예정한 수량이나 필요한 수량보다 많음을 과잉(過剩), 지나치게 격렬함을 과격(過激),정도에 넘침을 과도(過度),지나치게 뜨거워지는 것을 과열(過熱), 잘못이나 그릇된 짓을 과오(過誤), 지나간 일을 과거사(過去事), 조심을 하지 않거나 부주의로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를 과실(過失),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빎을 사과(謝過), 통하여 지나가거나 옴을 통과(通過),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사물의 한도를 넘어섬을 초과(超過), 공로와 과오를 공과(功過), 대강 보아 넘기다 빠뜨림을 간과(看過), 때의 지나감이나 시간이 지나감을 경과(經過), 모르는 체 넘겨 버림을 묵과(默過), 능력 같은 것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나 딱 알맞지 않음 또는 중용을 얻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과불급(過不及), 모든 사물이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이 중요함을 가리키는 말을 과유불급(過猶不及), 밀밭을 지나면 밀 냄새만 맡고도 취하게 된다는 뜻으로 술을 도무지 마시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을 과맥전대취(過麥田大醉), 뜰에서 가르친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자식에게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과정지훈(過庭之訓), 눈에 스쳐 지나가면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말을 과목불망(過目不忘), 아는 이의 문전을 지나가면서도 들르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과문불입(過門不入), 성인이 지나가는 곳에는 백성이 그 덕에 화하고 성인이 있는 곳에는 그 덕화가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을 과화존신(過化存神), 지나친 공손은 오히려 예의에 벗어남을 이르는 말을 과공비례(過恭非禮), 잘못을 하면 즉시 고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함을 이르는 말을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그 사람이 내 집 앞을 지나가면서도 나를 찾아주지 않았다 하여 별로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김을 이르는 말을 과문불감(過門不憾), 사실보다 지나치게 평가함을 일컫는 말을 과대평가(過大評價), 잘못을 서로 고쳐 줌을 일컫는 말을 과실상규(過失相規),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음을 일컫는 말을 과여불급(過如不及), 잘못하고서 고치지 않는 것이라는 뜻으로 그것을 잘못이라고 하는 의미의 말을 과이불개(過而不改), 지나간 일을 일컫는 말을 과거지사(過去之事), 지나가는 불에 밥을 짓는다는 뜻으로 어느 특정한 사람을 위해 한 일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음을 이르는 말을 과화숙식(過火熟食), 다리를 건너고 나서 그 다리를 부수어 목재를 훔쳐간다는 뜻으로 극도의 이기심이나 배은망덕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과하탁교(過河坼橋), 분수에 지나치는 욕망을 일컫는 말을 과분지망(過分之望), 사물을 지나치게 떠벌림을 일컫는 말을 과대황장(過大皇張), 분에 넘치는 일을 일컫는 말을 과분지사(過分之事), 과오를 저지른 후에 능히 고침 즉 한 번 잘못을 저지른 연후에 잘못을 참회함으로써 선하게 됨을 이르는 말을 과연후능개(過然後能改), 보통 사람보다 훨씬 센 힘을 일컫는 말을 과인지력(過人之力), 한 번 보기만 하면 그대로 욈을 일컫는 말을 과목성송(過目成誦) 등에 쓰인다.
▶️ 庭(뜰 정)은 ❶형성문자로 閮과 동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엄호(广; 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廷(정)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廷(정; 조정에서 신하들이 임금의 말을 듣던 곳)과 지붕이 있는 마당(엄호(广; 집)部)이라는 뜻을 합(合)하여 '뜰'을 뜻한다. 옛날엔 지붕이 없는 안뜰에서 儀式(의식)이 거행되었다. 庭(정)은 대궐 안의 안뜰이며 본디는 廷(정)과 같은 글자였으며 나중에 庭(정)은 건물(建物)을 가리켰으나, 더 후에 건물(建物)을 聽(청), 대궐 안을 廷(정), 여염집의 뜰을 庭(정)이라 하였다. ❷회의문자로 庭자는 '뜰'이나 '마당'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庭자는 广(집 엄)자와 廷(조정 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금문에 나온 庭자를 보면 ㄴ자에 人(사람 인)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계단을 오르는 사람을 표현한 것으로 '조정'을 뜻하는 廷자이다. 廷자는 庭자 이전에 만들어진 글자로 계단을 올라가야 할 정도의 큰 집을 뜻했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廷자가 임금이 신하들과 업무를 보던 '조정'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소전에서는 여기에 广자가 더해진 庭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큰 집에나 있을법한 '뜰'이나 '마당'을 뜻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庭(정)은 ①뜰, 집 안에 있는 마당 ②집안 ③조정(朝廷) ④궁중(宮中), 궁궐(宮闕)의 안 ⑤관청(官廳), 군이나 현의 정청(政廳) ⑥곳, 장소(場所) ⑦사냥하는 곳 ⑧동떨어진 모양 ⑨사이가 멀다 ⑩곧다, 바르다 ⑪내공하다(內攻--: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속으로만 퍼지다) ⑫동떨어지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한 가족으로서의 집안 또는 부부를 중심으로 혈연 관계자가 모여 사는 사회의 가장 작은 집단을 가정(家庭), 집안에 있는 뜰을 정원(庭園), 시집간 여자의 본집을 친정(親庭), 학교의 마당을 교정(校庭), 집안의 동쪽에 있는 뜰을 동정(東庭), 집안의 북쪽에 있는 뜰을 북정(北庭), 집안의 남쪽에 있는 뜰을 남정(南庭), 집안의 서쪽에 있는 마당을 서정(西庭), 나라와 정치를 다스리는 조정을 묘정(廟庭), 생가를 높이어 일컫는 말을 생정(生庭), 양가의 높임말을 양정(養庭), 대궐 안의 마당을 궁정(宮庭), 관청의 뜰을 관정(官庭), 집 뜰에 있는 나뭇가지나 뜰에 심은 나무를 정가(庭柯), 정도의 매우 심한 차이를 경정(逕庭), 주인의 허락이 없이 남의 집안에 쑥 들어감을 일컫는 말을 내정돌입(內庭突入), 관가에서 신문을 받는 사람이 관원에게 욕설을 하며 덤비는 행동을 일컫는 말을 관정발악(官庭發惡), 앓은 사람이나 늙은이가 겨우 마당에까지만 드나듦을 일컫는 말을 호정출입(戶庭出入), 집에 사람이 많이 찾아 온다는 말을 문정여시(門庭如市), 대문 안 뜰이 저자와 같다는 뜻으로 집안에 모여드는 사람이 많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문정약시(門庭若市), 뜰에 가득한 복숭아꽃을 일컫는 말을 만정도화(滿庭桃花), 뜰에서 가르친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자식에게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과정지훈(過庭之訓)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訓(가르칠 훈, 길 순)은 ❶형성문자로 训(훈)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川(천, 훈)으로 이루어졌다. 바른말(言)로 가르친다는 뜻을 합(合)하여 '가르치다'를 뜻한다. 순서 있게 가르치다, 알아듣게 이야기하다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訓자는 ‘가르치다’나 ‘타이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訓자는 言(말씀 언)자와 川(내 천)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川자는 시냇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고 그 흐름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러니 訓자는 말(言)의 흐름(川)이 자연스럽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스럽다는 것은 ‘이치에 맞다’라는 뜻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나 훈계라도 이치에 어긋나면 안 된다. 그래서 訓자는 마치 물이 흐르듯이 조리 있게 얘기한다는 의미에서 ‘가르치다’나 ‘타이르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訓(훈, 순)은 (1)한자(漢字)의 뜻의 새김. 海를 바다 해라고 할 때의 바다를 가르킴.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가르치다 ②타이르다 ③이끌다 ④인도(引導)하다 ⑤새기다 ⑥주내다 ⑦가르침 ⑧훈계(訓戒) ⑨모범(模範) ⑩표준(標準) ⑪준칙(準則) 그리고 ⓐ길(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인도할 도(導), 가르칠 교(敎), 가르칠 회(誨),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닦을 수(修), 배울 학(學), 익힐 련(練), 익힐 습(習)이다. 용례로는 무예나 기술 등을 실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되풀이하여 연습하는 일을 훈련(訓鍊), 타일러서 경계함을 훈계(訓戒), 남이 하는 일 특히 바둑이나 장기 따위에서 좋은 수나 방법을 알려 줌을 훈수(訓手), 글방의 스승으로 교사의 낮은 말을 훈장(訓長), 알아듣도록 깨우치고 타이름을 훈고(訓告), 가르치어 훈계하는 말을 훈언(訓言), 한자의 뜻을 새기어 읽음을 훈독(訓讀), 교훈 또는 훈시하는 말을 훈화(訓話), 가르치어 보임을 훈시(訓示), 가르치어 타이름 또는 그런 말을 훈유(訓諭), 가르치고 타일러 착하게 함을 훈화(訓化), 글방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침을 훈학(訓學), 가르쳐 길러냄을 훈육(訓育), 어린아이나 처음 배우는 이에게 글을 가르침을 훈몽(訓蒙), 가르치고 깨우치고 훈계함을 교훈(敎訓), 집안 어른이 그 자녀들에게 주는 교훈을 가훈(家訓), 학교의 이념을 간명하게 표현한 표어를 교훈(校訓), 학급의 교육 목표를 나타낸 가르침을 급훈(級訓), 엄격한 가르침이나 교훈을 고훈(苦訓), 한자의 우리말 새김을 자훈(字訓), 뜻글자의 음과 뜻을 음훈(音訓), 자혜로 가르침 또는 자비로운 가르침을 혜훈(惠訓), 뜰에서 가르친다는 뜻으로 아버지가 자식에게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과정지훈(過庭之訓), 시와 예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자식이 아버지에게서 받는 교훈이라는 말을 시례지훈(詩禮之訓),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교훈을 이르는 말을 의방지훈(義方之訓),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산 위에서 그리스도 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에 관하여 행한 설교를 이르는 말을 산상수훈(山上垂訓), 세상을 깨우치고 사람들을 타이름을 이르는 말을 경세훈민(警世訓民), 자식을 위하여 황금을 남기느니보다 경서 한 권을 가르치는 것이 나음을 이르는 말을 일경지훈(一經之訓)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