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작 기도
주님...
이 종은 우매무지하여 깨닫지 못하는 짐승과도 같나이다.
주의 뜻을 안다고 하면서도 지금 당장 내가 보기에 좋은 것, 느끼기에 편한 것을 취하여 그것을 좇아가는 악인이니이다.
이런 나에게 필요한 것은 주의 공의요 공의의 심판이오니 나를 쳐서 주의 말씀에 복종하는 자로 서게 하소서.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이 지식과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全 삶에서 나타나게 하옵소서.
나의 양식은 썩어질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의 양식이요 그것이 바로 말씀과 성령이오니 오늘도 그 양식을 먹고자 나아오는 나를 외면하지 마시고 품으사 먹여주옵소서.
나의 더럽고 추한 죄를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시어 말씀을 깨닫는데 지각을 열어 주옵소서.
옛 사람은 쓸모없어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것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거룩한 불구자로 살게 하시고 오늘도 영적 하루살이로 하루를 살아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사 53:7-12
제목 : 분리의 고통을 온 몸으로 겪으시며 부르짖으신 주님 앞에서 분리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 나의 묵상
여호와의 종은 매를 맞는 고초와 온갖 고난을 당하여 몹시 괴로울 때조차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억울하게 모욕과 고난 그리고 채찍에 맞으며 거칠게 끌려가서 결국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였지만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는 포악한 악행을 행하지 않았고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있었다.
이 말은 메시야가 악인들과 함께 매장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행악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그 행악자들 중 하나로 여겨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다.
이것은 당시 십자가刑은 가장 비참한 처형이기 때문에 죽은 자들은 매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골짜기에 던져서 짐승의 밥이 되도록 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주님의 시체는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부자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두었던 새 무덤에 매장되셨다.
오늘 본문은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기 700년 전에 예언되었으며 이런 메시야의 대속 사건이 곧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창 3:15, 21절)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여호와의 종이 상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고 그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고 상하게 하신 이유는 그를 속죄제물로 삼으셔서 사람들의 죄를 씻기 위함이요, 이를 통하여 그의 후손을 보게 될 것이며 그의 날은 영원할 것이다.
이런 그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이다.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자신이 당한 고난의 결과를 보고 나중에는 만족할 것이다.
여호와의 종인 메시야는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며 또한 그들의 죄를 친히 짊어지실 것이다.
그런 종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장 위대하고 존귀한 자로 높여줄 것이며 강한 자들과 함께 빼앗은 것들을 다 나누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종이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렀고 죄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고 죄인들을 위해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였다.
어제에 이어서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계속된다.
여호와의 종은 곤욕을 당하고 괴로움을 받을 때에도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으셨다.
곤욕과 심한 고난을 당하는 종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당하는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종은 어떠한 포악한 행동을 하지 않으셨고 그 입으로 거짓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들과 함께 죽으셔서 악인처럼 취급을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는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셨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700여 년 전에 예언된 말씀임에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난 받는 종으로써의 모습이 아주 세세하고도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부자와 함께 있었다는 이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700년 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세우셔서 사용하신다.
사람은 누구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것을 변론하기 위하여 온갖 애를 다 쓴다.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요, 그렇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면서 어떠한 고난에도 반응하지 않으셨다.
육신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그것에 전혀 반응하지 않으신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마치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과 같이 말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그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군병들의 채찍으로 온 몸이 다 찢기셨다.
채찍 끝에는 동물의 뼛조각이나 쇳조각 같은 것을 매달아 그것을 휘두르면 죄인의 몸통을 감고 그 끝에 있는 뼈나 쇠의 조각이 몸통을 뚫고 박히는 것이다.
그 고통도 말로 다할 수 없지만, 채찍질 하는 사람은 그렇게 박힌 채찍을 힘껏 잡아당긴다.
그러면 몸통에 박힌 조각이 빠져나오면서 몸통의 살점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이다.
채찍질로 찢어지고 터진 온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피로 범벅이 된다.
(마 27: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예수님을 인계 받은 군인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다.
그의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려준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희롱한다.
이처럼 희롱을 하면서 주님께 침을 뱉기도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기도 하며 주먹으로 치기도 하였다.
(막 14: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이렇게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이미 온 몸을 피로 물들였고 기진맥진 할 수밖에 없었다.
30대의 건장한 체구로 그 십자가 가로대 하나쯤 지고 수 백 미터에 지나지 않는 골고다 언덕을 오르지 못하실 리 없지만, 이렇게 이미 탈진하였기 때문에 중간쯤에서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오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간에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들게 한 것이다.
골고다 언덕에 도착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의 머리 위 곧 십자가의 맨 꼭대기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죄패를 붙여 놓았다.
육신의 고통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은 그를 견디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얼굴에 뱉는 침의 모욕,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고 때리는 수욕,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러면 십자가에서 한 번 뛰어 내려 봐라. 그러면 우리가 믿을 테니까 하는 치욕적인 언사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어떤 모욕과 수치에도 반응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의 품속에 거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품속에서는 벌거벗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딱 한 번 십자가에서 부르짖으신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분리되는 고통, 곧 영적인 분리를 경험할 때였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이요, 또한 너는 내 아들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죄악 덩어리가 된 예수님을 버리신 것이다.
그 분리의 고통을 주님은 견디지 못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절규한다.
(마 27:46) 제구시 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분리되셨지만 주님은 이내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부르짖으신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내어 맡기는 의탁의 부르짖음이다.
(마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이렇게 대속의 죽음을 받으셨다.
억울함으로나 억지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 기꺼이 받으셨다.
아들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십자가에 죽기까지 단 한 번도 아버지의 품에서 떠난 적이 없으시기에 분리의 고통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지를 잘 아셨다.
그러나 나는 이 땅에 태어나는 그 시간부터 하나님과 분리된 자요, 또한 영적 고아였기 때문에 분리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래서 영적으로 고무되고 무언가 제법 성령 충만한 것 같으면 내가 무엇이나 된 것 마냥 기뻐하면서도, 그런 상태가 사라진다 해도 별로 그 고통을 잘 느끼지 못하였다.
그것은 나의 삶의 대부분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날마다 아버지의 품속에서 거한다.
특히 말씀묵상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에 거하는 이 시간은 아버지의 영광 가운데 거하는 시간이기에 더더욱 그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
따라서 말씀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나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느끼기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나의 영이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오늘도 주님의 품 안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살기 위해서 말씀 앞에 나아간다.
지금 이 자리가 그 영광의 자리요 아버지의 영광이 임하는 영생의 자리이며 영원에 잇대어 있는 생명의 자리임을 믿는다.
이렇게 아버지의 품속이 좋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영 죽을 날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신데, 나는 그런 주님을 외면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나는 백 번 천 번이고 죽어 마땅한 자임을 고백합니다.
주님과 분리 되어 살았고 또한 살고 있음에도 분리의 고통을 모르는 이런 무지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
이런 자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공의의 심판인줄 아오니 나를 벌하소서.
주님은 날 위하여 하나님의 벌을 받으셨으나, 나는 나의 죄로 인하여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오니 나를 벌하소서.
나를 심판하소서.
그 심판을 통하여 공의가 세워지고 내 안에 진정한 평강이 임하길 원하나이다.
세상의 상황과 환경에 의한 평강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과 환경일지라도 그 안에서 진정한 평강이 임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공의의 심판이 옳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임을 믿나이다.
이런 나를 주님은 심판하시고 공의를 세우시며 그 때 주시는 솔로몬은 주님의 선물이오니 내게 주신 솔로몬으로 인하여 참된 평강을 누리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의 평강이 나를 휘감아 그 안에서 누리는 영생의 복이 넘치게 하소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