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꼬불꼬불 좁은 논두렁길 따라
나도 엄마 젖 만지러 가야지
지용이는 자꾸만 엉덩이로 내려오고
팔 힘은 점점 빠져 가는데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쯤에야
울 엄마 손 흔들며 논에서 나오시네.
지용이, 제 엄마한테 젖 물리고
나도 묽어진 엄마 젖 한번 빨고
“아이고, 한하는 아직도 엄마 젖 먹냐?”
어른들 저마다 놀려대어도
울 엄마 젖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마흔 살에 낳은 늦둥이
엄마 젖은 쪼그라진 풍선이 되고
내 볼은 어느새 보름달이 되고
씀바귀)
장날 엄마는
검정 고무신을 사오셨습니다.
여자들 고무신 코엔
작은 꽃이 그려져 있는데
줄 하나만 그어져 있는
사내애들 고무신을 사오셨습니다.
동무랑 나물 캐러 가던 날
고무신의 한쪽을 찢어 버렸습니다.
씀바귀 쑥부쟁이
넘치게 한 바구니 캐왔어도
엄마의 손바닥 도장이
제 등에 벌겋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날 밤 엄마는 찢어진 고무신을
한 땀 한 땀 꿰매 놓았습니다.
아침 밥상에 씀바귀나물
먹음직스럽게 무쳐 나왔지만
그날 나는 찢어진 고무신처럼
울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도랑)
가을걷이가 끝날 쯤 아버진 온 식구들에게 삽과 양동이를 하나씩 들게 하고서 도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물이 줄어든 도랑 이쪽과 저쪽에 흙으로 둑을 만들어 막아 놓고 오빠들이랑 양동이로 바닥이 보일만큼 물을 퍼내었습니다.
바닥의 물을 퍼내고 나면 그 속에서 장어, 참게, 가물치, 메기, 붕어들이 고무다라이로 서너 개가 찰 만큼 많이 잡혔습니다. 장어나 가물치는 할머니 할아버지 고아드리고, 참게는 게장을 담아 놓고, 메기랑 붕어는 동네 사람들 나눠주고, 나머지는 배를 따고 쪄서 말려두었습니다. 참게장과 말린 물고기는 반찬이 되어 넉넉한 겨울 밥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담장 위 채반에 널려있는 물고기들을 고양이가 훔쳐가지 못 하도록 지키고 앉아 있다 보면 우리 집도 부자가 된 듯 흐뭇했습니다. 저식들에게 고기반찬 한번 배불리 못해 먹이던 아버지는 철없던 자식들과 함께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도랑 속에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현호색)
산은 오래전부터
가슴에 바다를 묻고 살았다.
봄마다 산이 키가 커지는 것은
그리움들이 하나, 둘 헤엄쳐 나왔기 때문이다.
먼 바다를 보기 위해
까치발을 하고 서 있기 때문이다.
고들빼기)
절집 담장에 고들빼기
보금자리 잡았다.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은 지
고개를 쭈욱 빼들고
담장 안을 기웃 거린다.
스님들 발걸음도 조심스럽다.
금낭화)
인적 없는 산사에
누구를 기다리나
어여쁜 새악시
초롱불 밝혔다
처마 끝 풍경 소리도
나그네 발걸음도
조롱조롱……
이 환한 봄날에
봄바람)
간밤에 초목들
바람이 났나 봅니다.
비바람 끌어안고
밤새 뒤척이더니
초야를 치른 새색시처럼
수줍은 연두 치마폭
물방울 잎새마다
햇살 머금고
풋내음
여린 싹들 돋아납니다.
봄 햇살)
산 그림자마저
연두 빛으로 물들겠다.
어찌 그리 투명한지
처녀 속마음까지도 훤히 들여다보겠다.
추운 겨울, 아직 잠도 덜 깬
제비꽃과 눈 마주치다
부끄러운 봄 햇살
얼굴 더욱 붉었다.
국밥집 참새)
국밥집 할머니는 무서운 게 없습니다.
쌩쌩 달리는 차들 사이를
무대포로 달려 나가기도 하고
“호랭이 물어갈 놈”
“짐승만도 못한 것들”, 입에선
시도 때도 없이 욕들이 튀어나옵니다.
국밥집 앞에는 늘 진돗개가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 옆 시멘트 바닥엔 아침마다
반찬 없는 밥상이 하나 차려져 나옵니다.
한 무리의 참새들이 날아와
아침 식사를 합니다.
실눈 뜨고 잠시 귀찮은 듯 바라보다
모른 척 다시 잠을 자는 진돗개나
옆에 개가 있어도 아랑곳없이
밥알을 주워 먹는
참새들의 풍경이 일상인 듯합니다.
풍란)
기와에 풍란을 붙인다.
오래 입은 옷처럼 자연스럽다.
뿌리 내릴 흙 한줌 움켜 쥘 수 없지만
그래도 버틸 공간이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베란다 한 켠 기와 위에
난꽃 하나 피어 있다.
내 하나님은)
내 안에 하나님은
어떤 종교의 신보다 가난하다.
십자가에 내 죄를 대신 짊어져주진 않지만
종종 시름에 빠져 방황하고 있을 때
나 스스로 찾아갈 수 있게 깨달음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햇빛도 들지 않는 지하 단칸방에 홀로 사신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는 나를 기다리는
늙고 병든 나만의 하나님
그림자와 더 친숙한 골방에서
헌금이나 시주를 하지 않아도
내 삶을 오히려 풍요로움과 감사함으로
가득 채워주시는
기도 한번 하지 않은 나를
집 나간 아이가 돌아온 듯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나의 하나님
우렁각시의 꿈)
가끔 나는 누군가의
우렁각시가 되고픈 꿈을 꾼다.
남루하고 우울한 그의 집을
구석구석 거품 많이 나는 비누로
깨끗하게 닦아 놓고
하얀 찔레꽃 향기 가득
넘치게 채워 두리라.
맛있는 한 끼의 식탁과
그가 나를 상상할 수 있는
촛불 하나 밝혀두고
하룻밤 꿈에서 깨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우렁각시 꿈을 꾼다.
- 우렁각시의 꿈, 징검다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