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불성無情佛性과 무정설법無情說法 12장 결어結語
무정설법의 공안선公案禪은 그 시원始原을 도생법사道生法師의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진여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靑靑翠竹盡是眞如 鬱鬱黃花無非般若)라는 취죽황화翠竹黃花로 상정想定할 수 있다. 이를 법거량法擧揚 곧 문답의 양식을 빌려서 정리한다.
“어떤 것이 진여법신眞如法身이냐?”(如何是眞如法身)
“취죽翠竹이니라.”
“어떤 것이 실상반야實相般若이냐?”(如何是實相般若)
“황화黃花이니라.”
이 취죽황화라는 무정설법은 전적으로 교종의 문제이고, 그 원조元祖는 도생법사이다. 혜충국사는 취죽황화의 무정설법을 절대 긍정하며, 또다시 장벽와력廧壁瓦礫이라는 무정설법을 제시한다. 이에 혜충국사는 화엄의 무정설법을 맨 처음 선문으로 수용한 또 하나의 원조로 볼 수 있다.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입니까?”(有南方禪客問 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이 똑같이 고불의 마음이니라.”(師曰 廧壁瓦礫 無情之物 並是古佛心)
이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한다.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이냐?”(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니라.”(廧壁瓦礫)
도생법사(355~434)는 혜충국사(675~775)와 출생년도로 비교하면 320년의 차이가 난다. 도생법사가 취죽과 황화라는 무정설법을 제창한 이후 3백여 년 동안 무수한 고승들 사이에 찬탄과 힐난詰難이 동시에 교차했다. 동진東晉 의희義熙14년(418)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삼장이 60권 화엄경을 번역했고 보면, 화엄경을 공부한 일승학인은 찬탄했을 것이고, 삼승교설을 국집한 학승들은 힐난에 동참했을 것이다.
진여법신이나 실상반야 그리고 고불의 마음이 또한 불성과 다를 것이 없다. 이 글의 제명이 무정불성無情佛性과 무정설법無情說法이다. 취죽과 황화 그리고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은 모두 무정이지만, 또한 진여법신이나 실상반야도 되고, 그리고 다시 고불의 마음도 된다. 이 무정설법은 “일체 법이 모두 무성인 줄을 알기 때문에 일체지를 얻는다.”(知一切法皆無性故 得一切智) 라고 하는 무성법문無性法門과 함께 지고무상의 법문이다. 혜충국사의 논법을 빌리면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의 경지라야 비로소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다.
어떻든 달마 7세손 혜충국사가 선양한 이후 8세손 석두스님을 위시하여 10세손 위산스님 운암스님이나 11세손 동산스님 등은 무정설법을 선문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선가의 제사諸師가 수용한 무정설법은 달마대사가 상전한 선문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남양혜충南陽慧忠 국사가 도생법사의 유지를 이어받아 상전한 선문이다. 이에 나는 무정설법의 공안선公案禪을 남양선南陽禪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화엄선華嚴禪이라 말하는 것이 또한 옳을 것이다. 공안선을 굳이 화엄선이라 정의하지 않는 것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당말과 송조에 이르러서는 선가에서 무정설법이 일상사가 되었다. 이는 화엄에 대한 선가의 절대 수용이고, 또한 항복 선언이다. 선가의 일체 무정공안은 무정설법에 대한 주석이고, 그 밖에 공안은 무성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 선종의 자긍심 “선은 불심이고, 교는 불어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는 양언揚言도 또한 적반하장이다. “불어佛語와 불심佛心을 종취로 삼고, 무문을 법문으로 삼는다.”(佛語心爲宗 無門爲法門)라는 명문과 명백히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이 불심을 대표할 수도 없다. 육바라밀 중에 불심을 대표할 수 있는 바라밀은 오직 지혜뿐이다.
동일한 달마대사의 법손法孫이지만, 4조 도신대사와 혜충국사는 무정불성을 수용하고, 6조 혜능대사와 신회대사 그리고 6조의 4세 법손 대주스님은 무정무불종의 종지를 견지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육조스님이 무정설법을 몰랐다고 하여 전혀 이상할 것도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무정설법은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과 같은 묘각보살이라야 수용할 수 있는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원효대사도 관음보살을 눈앞에서 친견하고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삼현보살은 십지보살의 출몰出沒을 알 수 없고, 십지보살은 십일지보살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원효보살이 관음보살의 현신現身을 몰랄다고 하여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이냐?”(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니라.”(廧壁瓦礫)
위 법거량에서 두 개 관문觀門을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상상근기上上根機가 취하는 관문이니, 바로 고불심古佛心이다. 불심과 여래심 고불심은 말만 다르고 그 뜻은 같다. 고불심에서 어떻게 관문을 얻을 수 있을까?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면
반드시 부처지혜를 관찰해야 한다.
부처의 지혜는 의지처가 없는 것이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도다.
欲知諸佛心 當觀佛智慧 佛智無依處 如空無所依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면 반드시 부처지혜를 관찰해야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게송을 그 본문을 인용하여 부연敷衍한다. “불자여, 여래의 심의식心意識은 모두 알 수 없느니라. 그렇지만 응당 이 지혜가 무량하기 때문에 여래심을 알 수 있느니라.”(佛子 如來心意識俱不可得 但應以智無量 故知如來心) 이 지혜가 무량하기 때문에 여래심如來心을 알 수 있고, 여래의如來意를 알 수 있으며, 여래식如來識을 알 수 있다.
“부처의 지혜는 의지처가 없는 것이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도다.” 이도 또한 본문을 인용한다. “비유하면 허공은 일체 만물의 의지처가 되지만, 그러나 허공은 의지하는 곳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여래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여래의 지혜는 일체 세간 지혜와 출세간 지혜의 의지처가 되지만, 그러나 여래의 지혜는 의지하는 곳이 없느니라.”(譬如虛空爲一切物所依 而虛空無所依 如來智慧亦復如是 爲一切世間出世間智所依 而如來智無所依)
불심이나 여래심 또는 고불심을 관하는 차서가 이러하다. 내가 나의 마음을 알 수 없고, 부처나 여래 또는 고불도 또한 그 마음을 알 수 없다. 오로지 이 지혜가 무량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관건은 지혜이다. “부처의 지혜는 의지처가 없는 것이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도다.” 이것이 바로 상상근기의 관이다. 상상근기는 삼매에 들어가 경문을 읽기 때문에 저절로 관이 되지만, 범부는 망상 속에 읽는데 어찌 관을 이룰 수 있으랴.
이미 고불은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았거나와, 지혜가 없는 이 중생은 또한 어떻게 해야 옳겠는가?
“어떤 것이 고불古佛의 마음이냐?”(如何是古佛心)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니라.”(廧壁瓦礫)
후자를 취한다. “고불심을 어째서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이라 했는고?”
단도직입單刀直入하여 간단명료하게 제시한다. “어째서 조약돌이라 했는고?”
2023년 2월 18일 75세 길상묘덕 씀
첫댓글 무정불성無情佛性과 무정설법無情說法 중에 12장 결어結語 편을 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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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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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하단을 보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