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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도 기독 신춘문예 당선작품)
물 꽃 (단편소설)
봄바람이 불면 가지에 나무 꽃이 피는 건 보았다.
겨울에 눈이 내릴 때 눈꽃이 피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겨울비 추적추적 내린 후 삭정가지에 물꽃이 피는 건 처음 보았다.
눈물로 터널을 헤쳐 나왔을 때 겨울 끝 무렵 햇살 반짝이는 가지마다에 물꽃들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눈물을 빚으면 물꽃이 된다.
1.
깊은 터널 같은 밤이었다.
알람이 끼꼬끼꼬, 새벽 4시를 알리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불면이었다. 언제나 이 밤이 새려나, 속울음 같은 어둠의 신음을 덮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한지가 벌써 오래다.
아무래도 아내와 분방을 상의해야 할 것 같다. 그러면 아내와 네 살배기 금비가 잠을 깰까봐 불도 켜지 못하고 아파도 꾹 참고 자는 척해야 하는 고문의 밤을 지내지 않아도 되겠지. 아플 때 불을 켜면 덜 아픈 것 같고, 아픔 이상으로 허세를 부리며 끙끙 앓으면 아픈 것이 좀 상쇄되는 것 같은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 통증이란 놈이 더 기승을 부리는 듯하다.
아내는 내 병을 이미 알고 있으나 그 심각성은 모르고 있다. 왜냐면 아내는 그 병을 앓아본 적이 없고, 지금 아주 건강하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이가 달팽이처럼 뒤엉켜 자고 있다. 창안으로 스미는 밖의 희미한 불빛이 그것의 윤곽을 그려낸다. 이불 속에서 등을 보인 아내의 어깨선이 안쓰럽다. 병을 앓기 전에는 이불 속에서의 아내 냄새는 파고들듯이 동그란 찐빵처럼 포근하고 아늑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슬프고 안쓰러운 것이다. 병을 앓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든다. 식구에게 몹쓸 짓을 하는 거니까.
하지만 새벽 4시면 이제는 불을 켜도 된다. 불쌍한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나 몸을 금방 일으키지 못한다. 어깨가 뻐근하게 아프고 손목, 손가락이 시리고 굳어 있다. 게다가 약의 부작용으로 위장이 쓰리고 딸꾹질이 나고 입천장이 벗겨져 있다. 몸뚱이 전체가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 무겁고 축 늘어져 힘들게 이불 속에서 기어 나온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린다. 아내가 눈부신 듯 한쪽 팔로 눈을 가리고 상체를 일으킨다. 금비는 제 엄마에게서 떨어져 꿈틀하다가 댓자로 늘어져 계속 잔다.
“벌써 시간이야?”
아내가 벌어진 잠옷의 앞가슴 단추를 여미며 잠 속에서 말을 건넨다.
“그냥 자! 갔다 올게.”
그러나 어깨 통증 때문에 옷 입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옷을 든 채 끙끙대자, 내가 입혀줄게, 얼른 아내가 일어나 옷을 챙겨 입혀준다. 씨름하듯 한동안 옷 입기가 계속된다. 그러면서 아내는 우리 큰 아들 옷두 잘 입네, 내 궁둥이를 두드려준다. 마지막으로 잠바 깃을 세워 여며주고 장갑을 끼워주고 마스크까지 씌워주고는 권총 강도 같네, 하며 웃는다. 그리고는 여보 잘 갔다 와, 하며 나를 안아준다. 나를 안고 있는 아내의 동산 같은 가슴에선 서거기는 풀냄새가 난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별할 연인들처럼 잠시 이렇게 포옹하고 있다. 그러나 내 두꺼운 잠바를 뚫고, 웃고는 있지만 무엔가 절망스러운 아내의 슬픔 같은 것이 내 가슴 속으로 못 견디게 밀려듦을 느낀다.
“미안해!”
“뭐가?”
아내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묻는다.
“그냥…”
“기도 많이 하구 와, 이 몸은 어서 푹 주무실게!”
아내를 떼놓고 현관을 나서자 1월 초순의 새벽 칼바람이 훅하고 얼굴을 후려친다. 나는 주춤하다가 뒷곁 조그만 화단 길을 돌아 대문으로 향한다. 담 밖 가로등 불빛이 추위에 움츠러든 채 화단 쪽길을 비추고 있다. 화단의 키 작은 마른 가지들이 꺾어질 듯이 흔들린다. 앞쪽 안채 주인 네는 아직 깊이 잠들어 있는 것 같다. 도둑고양이처럼 살짝 철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담 밑에 세워둔 교회 봉고차에 오른다. 아픈 손에 힘을 주어 시동을 걸고 엔진이 녹을 때까지 잠시 기다린다. 시동을 거느라고 힘을 준 탓인지 오른쪽 손목이 시큰하고 아파 왼손으로 주무른다. 그리고는 오른쪽 어깨 통증을 덜기 위하여 오른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힘을 쭉 빼지만 어깨가 빠질 것 같은 통증은 갈아 앉지 않는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크러치를 밟고 기어를 넣고 서서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출발한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태우고 새벽기도회에 나가기 위해서다. 변속을 할 때마다 어깨와 손목 통증 때문에 몸이 움찔거린다. 그러나 몸은 아파도 차는 달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몸이 아파도 사명도 달려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나는 이것이 꿈으로 가는 역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동남아 이슬람권 선교를 꿈꾸어왔다. 신학대학 때 채플시간에 어떤 선교사의 간증을 들은 후부터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선교지를 인도네시아 부톤섬에 사는 찌아찌아족으로 정했다. 신문에서 그들이 한글을 자기들 언어 표기문자로 사용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읽은 때부터다. 그 기사를 읽는 중, 바로 여기다, 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글을 사용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겪는 언어소통 문제도 그만큼 수월해질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정하자 오랫동안 미루어오던 숙제를 푼 것처럼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물론 아내도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오케이, 하며 둘이 손바닥을 마주쳤었다. 나는 그때 눈이 시큰하도록 아내가 고마웠다. 물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교회에 도착하자 동승했던 성도들이, 전도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들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지하 벧엘성전 계단을 내려간다.
바지런한 관리집사가 이미 난방과 강대상 마이크 조절을 해놓고 있었다. 학생회장 인권이는 설교 중 마이크 볼륨조절을 하려고 앰프 옆에 앉아 기도하고 있었고, 뇌성마비로 손발이 돌아가는 기수가 뒤에 앉아 침을 흘리며 주여 주여 하고 있었다. 백 장로는 그가 항상 앉는 앞자리에, 담임목사 사모와 관리집사는 그들이 앉는 뒷자리에, 그 외 몇몇 성도가 군데군데 앉는 자리에 앉아 예배를 기다리고 있다. 아내는, 교회에서 작은 사모, 또는 아내 이름을 붙여 유진 사모라고들 부르지만, 애기 때문에 새벽 기도회만은 면제 받고 있는 터였다.
담임 김 성태 목사는 이 시대에 보기 드믄 성자 풍의 목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뜻에서 이 교회에 오게 된 것을 나는 행운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다. 그리고 이 교회에서 아픈 것 빼고는 뼈가 떨릴 정도로 행복하다. 사람 잘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나는 아내와 담임목사를 두고 실감하고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하노라면 아리아리 마음이 저려오고 행복해진다. 이 행복 때문에 내가 생각해도 나는 자꾸만 착해지는 것 같다.
새벽 5시가 되면 담임목사가 강단에 오른다. 말라깽이 멀대 같이 키가 삐쭉 크고, 머리카락이 있는 대로 쭈뼛하게 서 있고, 얼굴이 바짝 말라 눈두덩과 볼이 움푹 파이고, 와이셔츠와 양복은 신경 쓰지 않은 듯 후줄근하고, 넥타이를 빼또롬하게 맨 얼굴에 언제나 속에서 스며 나오는 듯한 미소와 착하디착함을 달고, 입속에 알밤을 문 듯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 말로 천천히 생각하며 설교를 한다. 그런데 여기에 그의 매력이 있다. 이상하게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 감동을 주는 것이다. 얼굴과 배에 살이 오르고 기름이 번지르르 흐르고 소리가 우렁차고 호통을 치는 듯한 설교를 하는 다른 목사에 비하면, 물론 감히 세례 요한에게 빗댈 수는 없지만, 촌스럽기 그지없는 희귀 목사라는 생각에 친근감을 더하는 것이다. 마음 놓고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는 목사, 그가 바로 김 성태 목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34년간이나 목회를 하고 있음에도 소형교회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에게는 목회 수단이란 게 없다. 타 교회 교인이 제 발로 들어와서 등록하겠다는데도, 타 지방에서 온 사람이 아니면 잘 타일러 본 교회로 돌려보낸다. 그러면서도 자기 교회 교인은 타 교회에 빼앗기는 것이다. 그러니 부흥이 되겠는가. 그는 대형교회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예수의 명령에 따라 교회가 작아도 ‘세상의 빛’이 되기를 열망할 뿐이다. 따라서 그 흔한 부흥회 한번 나가본 적이 없고, 뻔질나게 해외 나들이하는 다른 목사들처럼 외국물 한번 먹어본 적이 없다. 오직 교회 밖에 모른다. 자기 양떼 하나하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심방 위로 격려 양육하는 데만도 숨 쉴 틈 없이 바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만의 변명 같은 영웅으로 다른 목사들에게 비칠 뿐이다. 그의 후배들까지도 모두 교회가 성장하고 교세가 확장되어 지방회장도 하고 총회 임원도 하며 거드럭거리는데, 그는 그 밑에서 혼자만 고고할 뿐 수치와 모멸을 당하는 꼴로 전락해 있는 것이다. 그의 진가를 이 세상에서 과연 아는 사람이 있을까 씁쓸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비로소 참 목회를 발견한 느낌이다. 나는 서울에서 신학대학 재학 중 3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한 적이 있다. 세군데 모두 비윤리적인 물량주의 경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매년 교구와 부서를 맡고 있는 부교역자들에게 골(goal)을 주어 그 부흥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인사 조치를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도원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한직으로 보내든지, 그것도 아니면 무능력자 딱지를 붙여 면직시켜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숫자를 채우려고 혈안이 된다. 콧등이라도 물어뜯는 가혹한 경쟁이었다. 이것이 내가 사역했던 대형교회의 이면들이다.
이런 물량주의에 염증을 느꼈다. 이것은 참 교회 상이 아닌 것 같았다. 앞으로 이런 비정의 경쟁지역에서 어떻게 목회를 한단 말인가. 그래서 기도 중 선교사의 꿈이 주어졌고, 또 교회 밀집지역인 서울을 벗어나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국내의 교회 과잉밀집지역에서는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비윤리적 제살 깎아먹기 식 경쟁 때문에 본래의 교회이념이 짓밟히고 만다. 따라서 이런 혐오스런 경쟁이 없는 교회 불모지역에 선교사로 가서 참 교회를 이루고 싶은 것이다. 퓨리턴들이 미 신대륙으로 갔듯이. 김 목사처럼 도매금이 아닌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르는 목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목회자의 사랑이 작용하는 목회, 자 교회 이기주의가 아닌 이타의 목회, 그래서 진정 이웃에게 그리스도와 사랑과 평화를 심는 목회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목회를 나는 여기 김 목사에게서 배우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은 나에게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사전 교육을 시키시는 것이다.
새벽기도회 예배는 30분 만에 끝난다. 1년에 성경 1독을 하기 위하여 하루에 새벽마다 3-4장씩 성경을 윤독한다. 윤독이 끝나면 그중 영감 받은 어느 한 구절을 가지고 5분 정도 해설 설교를 하고 주기도로 예배를 마친다. 그리고는 앰프 찬송을 작게 틀어놓고 각자 개인기도로 들어간다. 설교를 마친 김 목사는 강대상 옆에 놓인 피아노를 가리개로 그 뒤에 방석을 깔고 앉아 기도하고, 성도들은 각자 제 자리에 앉은 채 기도한다. 개인기도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피아노 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김 목사 소리다. 그는 기도했다고만 하면 언제나 운다.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눈물의 사내다. 그는 자기 기도보다는 성도들 하나하나를 위하여 애절하게 기도한다. 거기에 나를 위한 기도도 포함되어 있음을 나는 안다. 나는 이 교회에 전임전도사로 왔으나 발병 이후 시간제인 교육전도사처럼 일하도록 그는 나를 배려해주었다. 사례비는 전임의 액수를 다 받으면서 일은 타임제로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부담이 되어 거절했으나 그는 호통을 치며 막무가내였다. 교회 형편도 어려운 판인데,… 입맛이 썼다.
그가 피아노 뒤에서 그렇게 우는데도 성도들은 그것이 식상이 되어 일상이듯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건 말건 자기들 기도에만 열중하는 것이다. 나도 기도자리에 앉기만 하면 눈물이 난다. 몸뚱이가 아파서인지, 김 목사 울음에 전염되어서인지, 황무지 속의 꿈이 막막해서인지, 아니면 아내와 김 목사와 몇몇 성도들의 사랑에 감격해서인지, 여하튼 못 견디게 아프고 서럽고 좋고 슬프고 몸부림이 난다.
그러나 내 기도는 김 목사처럼 마음 놓고 오래가지 못한다. 동승했던 성도들이 돌아갈 때 차를 운행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면 대게는 아내는 아침 준비를 하고 있다. 밖에서 부룽부룽 담 밑에 봉고차 정차시키는 소리가 들리면 거실 뒷벽에 숨어 있다가 현관 마루로 올라서는 나한테 웍! 하며 튀어나와 나를 놀래곤 했다. 무방비로 들어서던 나는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러면 깔깔거리며 뱃살을 쥐고 웃는다. 예를 들면 아내의 행사가 이랬었다.
그랬는데 내 발병 이후 그 짓이 없어졌다. 몸뚱이가 근질근질해서 어떻게 그 싱그러운 짓거리를 참는지.
추위에 몸을 움츠리며 현관에 들어서자 아내가 인사하듯이 허리 굽혀, 서방님 어서 오세요, 하며 생글거린다. 그러면서 마루로 올라서는 내 팔짱을 가볍게 끼면서, 춥지? 아프지 않았어? 말하는 입 꼬리 옆으로 보조개가 우물처럼 파인다. 나는 아내의 말소리를 들을 때마다 먼 산에서 울려오는 청량한 새소리 같다는 생각을 한다. 범접할 수 없는 품위 같은 걸 지니면서도 아내는 가끔 철없는 듯 어리광을 피워 거리감을 없앤다. 지금도 말하자면 그런 모습을 연출하고 있지만, 언뜻 어둠 같은 슬픔이 그 속에 감추어져 있음을 나는 느낀다.
“금비는?”
나도 짐짓 내 속내를 덮어두려는 듯 아이에게로 말꼬리를 돌린다.
“아직 자요.… 아침 다 됐으니 어서 세수하세요!”
아내는 내가 사람들 앞에서, 특히 자기 앞에서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는 어색함을 피해주듯이 주방으로 돌아서며 세수를 재촉한다. 내가 아파하면 자기도 함께 아파할까봐 겁내는 나를 아내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쾌활한 척 하는데, 그런 그녀를 보는 것이 나는 괴롭다. 그래서 아무의 시선도 받지 않고 혼자 있게 될 때는 나는 종종 마음 놓고 울어버린다. 우리는 뻔히 아는 것을 서로 숨기고 숨기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속에 있는 것이 겉으로 터져 나오면 둘 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휘몰릴지도 모르니까. 병이란 게 이렇게 우울하고 거북한 것이란 걸 기분이 언짢도록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겉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세면대 앞에서 면도를 하는데, 한손이 아파 좀 덜 아픈 왼손으로 면도를 하자니 잘 되지 않는다. 오늘은 꼭 전기면도기를 사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오른손을 올리려고 하면 어깨 손목 손가락이 시큰거리고 아파 올릴 수가 없다. 세수도 한손으로 하는 게 여간 힘들지 않다. 세수마저도 두 손이 협력해야 할 수 있다는 게, 전혀 몰랐던 사실을 새삼 알게 된 것처럼 놀라웠다. 언젠가 대중 목용탕에 갔을 때 체중을 달아보니 50kg에서 5kg이 빠져 있었다. 그때도 두 손으로 목욕을 할 수 없어 대충 한손으로 머리만 감고 그냥 나온 적이 있다. 왼손으로 서툴게 면도를 하다말고 세면대 앞 거울을 보니 볼이 쑥 들어간 내 몰골이 해괴한 탈처럼 보인다. 나는 욱하고 치미는 눈물을 도로 밀어 넣으며 독하게 마음을 다잡는다.
“명우 씨, 아빠, 아직 멀었어요? 밥상 다 차려놓았는데…”
아내는 나를 명우 씨, 아빠, 여보, 박 명우 전도사님, 당신, 큰 아들 등,… 그때그때 상황과 기분에 따라 여러 호칭으로 불렀다. 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내 발병 이후 그런 호칭의 어감이 전과 같지 않음을 느꼈다. 무엇인가 한 꺼풀을 가리고 우정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듯한 그런 어색함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어느새 잠이 깨서 제 엄마 치마꼬리를 붙들고 있던 금비가 나를 보고는 아빠, 하며 달려와 안긴다. 딸내미를 안고 번쩍 들어 올리는데 어깨가 떨어질듯 우지끈 아파 악, 소리 지르려다 꿀꺽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금비를 얼렀다.
“금비야 내려와, 아빠 식사하셔야 해!”
식사를 핑계로 금비를 나한테서 떼놓으려는 것임을 나는 안다. 내 통증을 덜어주기 위해서. 병은 일상에서의 기쁨도 앗아가는 것이란 걸 느낀다.
“오늘 병원 가는 날이죠?”
“응, 아침 10시야, 예약시간이…”
아내는 말없이 금비에게 밥을 떠먹여주고 있다. 식탁에 서먹함이 흐른다. 나는 수저질도 거북하고 속이 쓰려 더 먹기 싫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맛있네, 하며 된장 국말이를 해서 입 속으로 쑤셔 넣는다. 그 동작이 어색하리란 걸 스스로 느끼면서.
“천천히 먹어요, 명우 씨. 먹기 싫어두 먹어요. … 저녁 땐 고기 사다 불고기 해줄까?”
“무슨 돈으루?”
“내가 벌잖아.… 참 오늘 눈 온댔어, 테레비에서. 옷 단단히 입구 가요. 마스크 하구, 장갑 끼구…”
“아, 알았어. 그만 해” 나는 아내의 말을 자른다.
“치, 어린애처럼 짜증은!…”
아내는 입술을 삐죽이듯 한쪽 옆으로 밀어 보조개를 만들며 하얗게 눈을 흘긴다. 나는 아내의 나긋한 제스처가 곤혹스러워, 서둘러 거기서 빠져나오듯 오늘두 출근해? 언뜻 묻는다.
아내는 이웃 대형교회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집’ 보조교사로 일하고 있다. 금비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다른 데 취직하느니, 아예 아이를 맡긴 ‘어린이 집’에 취직하면 아이와 함께 출근을 해서 일거양득이라 했다. 지금은 겨울방학 중이지만 맞벌이 부부 아이들을 봐줘야 하기 때문에 매일 출근을 한다. 맞벌이 부부 아이들을 돌보면서 금비도 함께 보는 것이다.
며칠째 혹한이 계속되더니 오늘은 좀 누그러진듯하다. 대신 산달이 다 된 암소처럼 하늘에 무거운 구름이 어둡게 실렸다. 아내의 말대로 눈이 올 것 같다. 언제나 정기 진료일은 발걸음이 무겁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은 심정이다. 차라리 죽으러 들어간다면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들어갔다가 또 나와야 한다. 다음 진료 일까지 한 달 동안 통증으로 신음하기 위해서.
버스가 S동 모롱이를 돌아가자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지고 그 오른쪽에 우뚝 솟은 K의료원의 흰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아침부터 환자들로 북적댄다. 웬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지 올 때마다 놀라곤 한다. ‘류마티스 내과’ 앞에 부착되어 있는 ‘꽂이’에 진료예약일자 쪽지를 꽂는다. 벌써 그 앞에 놓여 있는 장의자들에는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를 비롯하여 자가면역 질환자들이 촘촘히 앉아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는 이미 변형이 와서 손가락이 튀어나와 휘어진 사람, 발가락이나 발바닥이 튀어나와 신발을 신지 못하는 사람, 무릎이나 고관절에 변형이 와서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걷는 사람 등, 눈이 시어 보기 어려울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병은 이미 그들의 가슴을 절망과 아우성으로 태워, 이제는 재만 남은 듯 포기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늘어져 앉아 있게 한다. 아직 변형이 오지 않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한 결 같이 두려움이 서려 있다. 그래서 진료실 앞 장의자들은 무거운 침묵에 짓눌려 말이 없다.
류마티스 내과 과장만큼 친절한 의사도 드믈 것이다. 그는 언제나 좀 부끄러운 듯한 은근한 미소로 환자를 맞는다. 그는 우선 손을 내밀라고 하여 변형의 진행여부를 살피고, 다른 데 이상 유무를 문진하고, 이어 컴퓨터에 수장되어 있는 진료기록을 살핀다. 지난번에 위내시경을 했네요. 네. 약간의 출혈이 보이긴 하나 이 정도면 괜찮은 편입니다. 그럼 왜 속이 쓰리고 아프죠? 글쎄요…. 잠간 침묵의 행간에 지난번에 했던 위내시경을 떠올린다. 사람을 옆으로 뉘어놓고 주둥이로 호스를 밀어 넣는다. 웩웩 고통을 받는 동안, 자기들끼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옆에서 일상의 대화를 소곤소곤 나눈다. 간간 킥킥 웃으면서. 나는 잡히기 위하여 뉘인 짐승 같은 꼴로 구경거리가 된 듯한 묘한 모욕감을 느꼈었다. 한국 사람들 매운 걸 먹기 때문에 이 정도는 다 그래요. 나도 검사해보면 그럴 겁니다. 아마…아직 위가 약에 적응이 덜 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한 번 더 그대로 살살 먹어보세요. 위장약 하나 더 넣겠습니다.
의사로서는 그 정도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서 버거운 많은 환자들을 도매금으로 넘긴다. 허지만 그건 양호한 편이다. 왜냐면 그 의사에게 부드러움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 다음은 환자 자신의 몫이다. 환자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서 어떻게 해야 한다. 당황이 되고 아득하고 절망스럽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성경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는데, 치료의 길은 어디인가? 병역을 3년이나 넘겼으니 3년 동안 기도해온 셈이다. 애간장이 녹듯 눈물의 기도를 해왔다. 아프면 그런 기도가 나온다. 그럼에도 하늘에서는 감감무소식이다. 참말이지 섭섭하고 서운하고 원망스럽다.
의사는 종전대로 소염 진통 해열제인 세레브렉스, 항 말라리야제, 엽산, 1주일에 한번 먹는 MTX, 그리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위장 보호제 등, 한 달 치를 처방했다. 이것으로 흉악한 불치병을 잘 관리하면서 신음하며 뒹굴며 한 달을 버텨야 한다.
출납창구는 진료실과는 달리 붐비고 북적댄다. 워낙 환자가 많아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서 있기도 힘든 환자들도 거기 끼어 차례를 기다린다. 제복의 수납원들은 돈을 내는 환자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돈 계산에만 찬바람이 돌 정도로 정신이 없다. 세레브렉스가 아직 보험적용이 안 돼 이것저것 10만원 넘게 지불한다. 가난한 전도사의 속이 쓰리고 아프다. 하나님의 종이 이런데 돈을 쓰고 이게 무슨 꼴이냐.
병원을 나서자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을 보자 알 수 없는 눈물이 왈칵 목젖을 치민다. 춥고 서러워 뼈가 떨린다. 아내에게 금비에게 사람들에게 괜스레 미안하기도 하다. 버스 차창 밖으로 시야를 까마득히 가로막는 분분한 눈발을 보면서 갑자기 선교니 꿈이니 하는 것들이 사치라는 생각이 스친다. 아픈 몸으로 어떤 일이든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억지이며 위선이 아니겠는가. 제 몸이나 돌볼 일이지 꿈은 무슨 꿈, 그런 생각이 들자 더 큰 절망감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꿈을 지우면 생명도 지워지는 것을.
나는 버스에서 내려 교회로 향한다. 오늘 신년 목회계획표와 구역편성표를 만들어놓아야 한다. 아파도 해놓을 것은 제 때에 해놓아야 편히 아플 수 있다. 눈은 좀처럼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교회 부근에 왔을 때 뽀얗게 눈을 맞은 채 한쪽 팔을 부러진 것처럼 제멋대로 흔들면서 허공을 딛듯 위태한 갈지자걸음으로 뇌성마비 기수가 오고 있다. 어깨에 팔다 만 휴지뭉치가 비닐에 쌓인 채 메어져 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질질 침을 흘리면서 혀가 돌아가지 않는 반벙어리 소리로 소리친다.
“저도사니임 아녀하-세여어?‘
하며 그 자리에 선 채 웃는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나는 쫓아가서, 춥지? 많이 팔았어? 어서 집에 들어가 몸 좀 녹여라! 반겨주었다.
그의 집은 우리교회와 지근거리에 있다. 조그마한 식당을 하는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 H동에 있는 장애인교회에 출석하면서 밤 예배는 우리교회로 나온다. 그는 휴지를 팔아서 통장에 거금 삼천만원을 저축했다고 했다. 장가 밑천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왠지 아픔과 절망을 함께 느꼈었다.
눈을 탁탁 털며 교회 사무실에 들어서자 학생회장인 인권이와 몇몇 청년 학생들이 이미 원안대로 컴퓨터 워드작업을 끝내놓고, 중앙에 놓인 석유난로 주위에 둘러앉아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오늘 나와서 도와달라고 미리 구조요청을 보냈던 것이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물이 달달달 끓고 있었다.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교정을 보고 프린트해서 복사하고 제본만 하면 될 것이다. 인권이는 복사기에 매달려 복사를 하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꺼낸다.
“전도사님, 상수가요…”
“응, 상수가 왜?”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번 심방을 가야 할 것 같아요!”
“왜? 무슨 일이 있나?”
“ 잘은 모르지만… 들리기로는 가출을 했다나 봐요!”
정신이 번쩍 난다. 가출이라니…. 내가 맡고 있는 학생 중에…. 가슴이 철렁한다. 아픈 것도 어디론가 달아나버린다. 갑자기 무릎이 탁 꺾여 꼬꾸라지는 심정이 된다. 한동안 눈앞이 어둑해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더니 차츰 시야가 돌아오면서 몸이 더 아파온다. 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머릿속에 투명하고 얇은 어름쪼가리들이 채워진 듯 얼얼하고, 특히 어깨관절이 더 무겁게 내리누르듯 통증을 가해온다. 병은 모든 문제보다 가장 심각한 것이다. 왜냐면 당장 아프니까. 어깨가 아픈 것은 이 젊은 나이에 벌써 인생의 짐을 너무 많이 졌기 때문일까? 완벽주의자라서 남보다 더 짐을 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강대강 살아야 할 텐데…. 그래야 숨 막히는 스트레스를 덜 받을 텐데….
상수 아버지는 모 대기업의 고위직급에 있는 분이다. 부족함이 없는 집안에서 가출이라니…. 전에 학생회원 정기 심방 기간에 그 집에 간 적이 있는데, 예수쟁이라는 이유로 심하게 문전박대를 당한 경험이 있다. 그런 집에 또 어떻게 심방을 간단 말인가. 더구나 유쾌한 일도 아닌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을 인해서. 전도사의 심방보다는 학교 친구이기도 하고 교회 친구이기도한 인권이가 알아보는 게 훨씬 효율적이겠다 싶어 인권이에게 알아보도록 부탁했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집에 가서 좀 쉬어야 하겠기에 뒤처리를 그들에게 맡기고 봉고차에 올랐다. 눈은 온종일은 넉근히 올 모양이다. 집에 가까워지자 또 걱정이 된다. 차라리 혼자 살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장기 환자는 가족 민폐자인 것이다. 오늘은 집에 가서 어떤 표정을 해야 하나?
담 밑에 봉고차를 주차시키다가 퍼뜩 생각나는 게 있었다. 큰일 날 뻔 했다. 오늘이 아내 생일이었다. 경황 중에 잊고 있었다. 봉창을 뒤져보니 돈이 달랑달랑하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눈을 맞으며 상가로 향한다. 작은 케이크가 얼마나 갈까 가슴 조이며. 케이크 집 ’파리 바게트’ 자동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케이크 진열장을 보니, 수중 돈으로는 턱도 없었다. 생각보다 케이크란 게 고가였다. 나는 주저했다. 어쩌야 할까. 아내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저며 온다. 가난한 전도사를 만나 고생이 많구나.
흰 고깔모자에 하얀 제복을 입은 앳띈 종업원이 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내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부인 생일인가 봐요? 하며 웃는다. 그러면서 이것두 괜찮은데, 하고 조그만 피자 빵을 권한다. 금비처럼 예쁘고 조그맣고 오밀조밀한 빵이다. 나는 그 피자 빵 하나와 촛대 하나를 샀다. 저녁식탁에서 피자 빵에 촛대 꽂아놓고 불을 밝히려고. 그리고 금비와 함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 불러주려고. 노래 부르다가 눈물이 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피자 빵 포장 백을 들고 오는 내 마음은 좀 전과는 달리 이상하게 눈처럼 포근하고 가벼워졌다.
2.
약의 부작용으로 배가 자주 아프다. 병을 앓으면 그 병고 뿐 아니라 엉뚱한 고통이 이것저것 겹친다. 배가 아플 때 이불을 두 겹 세 겹 덮어 배를 따뜻하게 해주면 배가 편안해진다. 밤에 류마티스로 어깨가 아플 때도 이불을 꼭꼭 여며 따뜻하게 해주라고 의사는 말했었다. 따뜻한 것이 상처와 아픔을 치료하고 소생시킨다. 따뜻한 사람이 사람을 살린다. 때문에 따뜻한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일 것이다.
지금이 한창 바로 그 봄이다. 봄꽃들이 다투어 흐드러지고, 새소리가 유난히 맑게 솜같이 푸근한 하늘 여기저기에 떠돈다. 그러나 병이 들면 그 꽃도 보이지 않고 그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기쁨도 잊고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통증으로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누런 개나리 빛깔로 속이 부글부글 부어오르고 곪아간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병원 약을 먹어도 아프고 기도해도 아프다.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 자구책을 찾던 중 모 기독교신문 광고란에서 코딱지만 한 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누가원’이라는 상호 아래 ‘류마티스, 염증이 열쇠다‘라는 책자 소개와, 자사에서 개발했다는 ’류마리스30‘ 이라는 건강식품에 대한 광고였다. 그리고 그 밑에 ’동원 원장 하 달수 장로의 30년 류마티스에서 벗어난 비법 대 공개‘라는 문구가 작은 글씨로 박혀 있었다.
이걸 놓고 2-3일 고민하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단 찾아가보기로 했다. 전철을 2번 갈아타고 더듬어 찾아간 곳은 O로터리 도로변에 있는 작은 빌딩 3층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여직원 하나가 창 쪽을 바라보고 컴퓨터 앞아 앉아 있고, 사무실을 칸막이 한 저쪽이 원장실인 듯 했다. 직원이라야 원장 포함 단 두 사람뿐인 것 같았다.
여직원은 나를 소파에 앉히고 녹차를 내오고 방문 연유를 묻는다. 류마티스 얘기와 광고 얘기를 했다. 여직원은 눈을 빛내며 우선 원장 하 달수 장로의 류마티스 완전 퇴치 경위와 자사 제품인 ‘류마리스30’을 비롯하여 ‘나이스 폴렌’ ‘어성초’ ‘프로폴리스’ 등의 효능에 대하여 나긋나긋 설명한다. 그 설명을 듣고 있노라니 어느새 경계심은 사라지고 류마티스는 간단히 완치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봄꽃처럼 뽀얗게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저되는 것을 흔들어 떨쳐버리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하며 한번 낯설고 두려운 이 길을 가보기로 했다. 허나 그곳의 약들은 병원 약에 비하여 등골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로 고가였다.
그날 저녁 내 설명을 들은 아내는 약값에 뜨끔 놀라는 기색이더니 얼굴에서 후딱 놀람을 거두고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나는, 안된다고 할 것이지, 동의해주는 아내가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는 몸이 풀어지며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이렇게 어렵게 구입한 약을 규정대로 꼬박꼬박 먹는데도 먹은 지 며칠 안 되어 뼈마디가 더 아프기 시작한다. 특히 어깨와 손목관절이 더하다. 온몸이 무겁고 오그라들 듯이 굳어진다. 류마티스는 밤에 활동한다. 밤만 되면 더 극성을 부리는 것이다. 새벽 2시 무렵부터는 아무리 입을 채워도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옆에서 자고 있는 아내가 들을까봐 억지로 참자니 굳어진 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는다. 이제는 더 망설일 수도, 미안해할 수도 없다.
아침 식탁에서 조심스럽게 분방을 말했을 때, 그게 당신한테 조금 더 편하다면, 하면서
“그럼 금비와 내가 거실에서 잘게, 당신이 방에서 자!”
한다. ‘당신한테 조금 더 편하다면’이 무슨 말일까? 내게는 그 말이 묘한 어감으로 들려왔다. 자기 잠자는데 방해가 될까봐 자기한테 미안해서 그러자고 한 것인데, 자기 입장에서는 미안해하는 내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러자는 건가? 그러나 순순히 동의해주는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하여튼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당신이 거실에서 자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거실에서 자야지…”
“류마티스는 차면 더 한 병이라며? 그런데 내가 어떻게 방에서 자?”
하고 아내는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른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내가 이렇게 소리 지르는 것을 나는 처음 본 것이다. 그러더니,
“걱정말구 방에서 자요! 이젠 봄인데 안 추워. 우린 건강한데. 추우면 보이라 조금 올리지뭐, 여보!”
말끝이 물기에 젖으면서 웃어 보인다. 나는 그러는 아내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내와 금비를 거실로 내쫓고 방에 혼자 누웠을 때 나는 울었다.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하며 서러워 소리죽여 울었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신음으로 바뀌었다. 혼자 있어 안심이 되자 류마티스란 놈이 마음 놓고 공격해오는 것이다. 공격이라기보다 발악이었다.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동작이 어렵다. 숨이 막히고, 어쩌야 좋을지 가늠이 가지 않고, 너무 고통스러워 치가 떨리고, 미칠 것 같다. 누워 있을 수도, 일어나 있을 수도 없다. 이런 때는 고쳐달라는 기도보다 죽여 달라는 기도가 앞선다. 죽음을 열망하나 지옥에서처럼 죽을 수도 없다. 병원 약을 먹을 때는 이렇지는 않았는데, 누리원 약을 먹고 그야말로 통증이란 게 어떤 것이란 걸 알게 된 것 같다. 도적놈들.
이런 때는 하나님보다 진통제가 더 갈망된다. 간신히 일어나 불을 켜고 진통제를 찾는다. 물을 가지러 소리죽여 주방으로 가는데 아내는 거실에서 무사태평으로 자고 있다. 내 신음소리가 없으니 편안한 모양이구나.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서운하다. 세상에, 남편은 아파서 썰썰 기는데 아내는 저렇게 잠을 자는구나 싶어 야속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아내가 깨지 않도록 가만히 들어와 약을 먹는다. 고통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거니까. 이 고통은 내 몫이니까. 나만 당하면 되는 고통이니까.
진통제를 먹고 얼마 되지 않아 숨이 트이고 살만해지고 통증을 느끼는 여유를 찾았다. 진통제란 이런 것이다. 진통제를 먹어야 병에 대하여 슬플 수도 있고, 지쳐서 축 늘어질 수도 있게 된다. 활동도 어느 정도 가능해지고, 잠도 조금은 잘 수 있고, 기도도 비로소 가능해진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도 있고, 하나님을 향하여 울 수도 있다.
하루가 천년 같은 고통의 밤이 지나고 드디어 아침이 왔다. 갈증 때문에 다시 물을 먹으려고 주방으로 가다가 거실을 보니 아내는 화장실에 간 듯 없다. 그런데 아내가 누워 자던 머리맡에 휴지뭉치가 여럿 뭉쳐 있는 게 아닌가. 가보았더니 눈물 콧물을 닦은 휴지뭉치였다. 밤에 내가 앓고 있을 때 아내는 잠만 잔 게 아니라 몰래 기도하며 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내가 물을 마시러 나올 때는 내가 미안해할까 봐 자는 척했던 거겠지.
사무실에 나와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그리워지고 불쌍해졌다. 병약하고 가난한 남편을 만나 고생만 하는구나. 지금 쯤 아내는 어린이 집에서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아내는 거기서 금비보다 다른 애들에게 더 신경을 쓰는데도, 그쪽 교회 엄마들은 아내더러 제 애만 돌본다고 불평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보수도 얼마 안 되는 거 그만두면 어떻겠느냐고 하자, 흔히 있는 일이라고, 내 영역은 나한테 맡기라고 하며 아내는 웃는다. 애들끼리 싸울 수도 있는데, 금비가 싸웠다 하면 그 눈총이 아내에게 날아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하고 슬프겠는가. 나는 속이 짠하여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보, 아파서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문자를 전송하려는데 먼저 문자가 왔다. 아내한테서 온 문자다. ‘여보 사랑해! 아파두 괜찮으니 마음 놓고 앓아! 끙끙끙 이렇게!’ 나는 문자를 마저 보내고 맞은편 벽에 걸려 있는 예수님 사진을 멍하니 바라본다. 몸은 아픈데도 뭐가 감사한지 자꾸 감사가 된다.
나는 갑자기 힘이 솟듯이 꼭 나아서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기보다 다시 다짐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부톤섬에 있는 ‘소라올리오’에 가서 거기에 ‘비둘기 집’같은 아담한 교회를 세우고, 원주민인 찌아찌아 족들에게 한글과 성경을 가르쳐, 저들로 하여금 인도네시아를 일깨우는 빛이 되게 하는 내 꿈을 꼭 이루어야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오늘이 목요일, 지금쯤은 다음 주 학생예배 설교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기도 중 잡아놓은 본문은 마태복음 5장 14-15절이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설교의 핵심 메시지는 ‘꿈이 없는 이 시대에 꿈을, 모호한 이 시대에 확실함을, 찰나적인 이 시대에 영원을, 방종의 이 시대에 순결함을, 고통의 이 시대에 불굴의 의지를, 하나님을 조롱하는 이 시대에 하나님 의지함을’ 이었다. 이런 정신과 믿음을 학생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독교가 세상에 밟히는 이유는 세상의 빛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때문에 청소년 때부터 빛과 소금에 대한 꿈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설교의 뼈대를 세워놓고 타이핑에 들어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학생회장 인권이었다. 가출한 상수가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다. 이건 날벼락이었다. 어떤 여자라니? 밤업소 여자라나 봐요. 뭐? 몇 살이나 된 여잔데? 잘은 모르지만 28센가, 20대 후반이래요. 나는 현기를 느꼈다. 18세 소년에 28세 밤업소 여자라니. 나는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저쪽에서 전도사님, 여보세요, 하다가 여기서 아무 대답이 없자 전화를 끊는다. 나는 대책이 서질 않았다. 방종의 이 시대에 순결함을? 꿈이 없는 이 시대에 꿈을? 웃음이 나온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역부족인 것이 느껴진다. 한참 후에 내 쪽에서 인권이에게 전화를 넣었다. 인권이도 살림 차린 거처를 모른다는 거였다. 단짝인 자기한테도 숨긴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도사님이 나서면 상수가 더 숨을 테니 자기가 수소문해보겠다는 것이다. 나는 인권이에게 일체 발설을 금하고 조용히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하면 할수록 목회란 건 참으로 암담하고 힘든 것이었다. 이런 때는 상수의 집에 심방을 간다 해도 소용없을 것이고, 학교로 찾아가 봐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본당으로 올라가 맨 앞에 앉아 기도했다. 강단 위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오랫동안 기도하며 해답을 찾았다. 상수 문제 뿐 아니라 나에게는 얽히고설킨 문제가 산적해 있다. 어깨를 짓누르는 이런 문제들은 그러나 언제나 미제로 남아 있을 뿐 완결되는 게 없었다. 언제까지 나는 이런 미결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왜 냉큼냉큼 웃음을 주시지 않을까?
저녁때가 다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던 탓에 관절이 저리고 뻣뻣이 굳어 있다. 나는 목양실로 향했다. 상수 문제에 대하여 보고도 할 겸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다. 노크를 했다. 담임 김 목사는 아직 자리에 있었다.
그는 어린애처럼 꾸밈없는 소탈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나 뿐 아니라 누구를 만나도 그는 변함없이 그런 모습이다. 내가 처음에 그날이 토요일이었던가, 이력서를 들고 이 교회를 찾아왔을 때, 교회 마당에 들어서자 늙은 남자가 초등학교 학생들과 숨기장난을 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고 웃은 적이 있다. 나는 그 늙은 남자가 교회 관리집사인 줄 알고 당회장실을 물었으나, 따라 들어오라는 손짓으로 가보니 그가 곧 당회장 김 목사였다.
낭패스러워 더듬더듬 상수 얘기를 드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그도 역시 잠시 낭패스런 얼굴을 하다가 이내 미소를 띠고 그, 그럴 수도 있지, 하며 표정을 누그러뜨린다.
“다 제 불차레입니다. 제가 학생들 하나 간수하지 못하고…”
“아, 아니야. 자네는 열심히 했어. 참새 한 마리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 것
인데… 무슨 뜻이 계시겠지. 그냥… 기도하면서 기다려보자구.”
하며, 이어 얼른 말머리를 돌린다.
“그건 그렇고… 자네 병은 좀 어떤가? 많이 불편하지?”
“아, 아닙니다. 이제 곧 좋아질 겁니다.”
“그래, 우리 같이 기도하면 좋아질 거야. 그리구… 선교사 가는 거 말이야…”
“네”
“급할 거 없을 것 같애. 건강해지면 그때 가두 늦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럼요. 다 때가 있겠지요. 말씀대로… 그렇습니다!”
“박 전도사! 그래, 다 좋아질 거야! 합력하여 선을 이룰 거야! 좋아지구말구!…”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내 손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해주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뼈를 물어뜯는 것 같은 통증이 계속되고 있다. 누가원에서는 그건 명현현상 때문이라고 했다. 하마같이 생긴 하 달수 원장은 불룩한 배를 안락의자에 깊이 묻은 채 혈색 돋은 얼굴에 표정도 없이 명현현상을 설명했다. 몸에 막힌 독소 같은 게 뚫리며 치료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그러니 염려할 것 없다고. 여직원은 말한다. 우리 제품에는 진통제 같은 걸 넣지 않았기 땜에 아픈 거라고. 이 고비를 넘기면 좋아진다고. 그들은 환자들이 문의 올 때마다 철 방패 같은 것으로 탁탁 막아서 환자들이 스스로 나가떨어지게 하는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명현현상(호전반응) 때는 2-3일 정도 약의 복용량을 줄이거나 복용을 잠시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극통의 기간이 지나면 다시 전의 양대로 복용하라는 것이다. 그들의 책 ‘류마티스, 염증이 열쇠다’에서도, 그들의 구두설명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2-3일이 지나도 통증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5일째 6일째 계속된다. 몸뚱이가 납덩이를 단 듯 무겁고, 어깨 손목 손가락 발바닥을 비롯하여 온몸의 뼈마디와 근육이 쑤시고 아프다. 류마티스는 통상 새벽 2시 경부터 아프기 시작하여 아침에 일어날 때 통증과 경직이 심하고, 그것이 서서히 풀려 오후가 되면 좀 자유로워지는 것인데, 지금은 밤과는 차도가 약간 있으나 오전 오후와는 별 차도 없이 계속 아픈 것이다. 몸이 무겁고 통증이 심하여 몽둥이로 얻어맞은 개처럼 헐떡이며 침대에 눌어붙어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약을 먹되 어떤 방향으로 먹어야 할지 매번 당황스럽고 아득하기만 하다. 이 통증이 명현현상인지 증상의 계속인지 알기 어려워, 약을 일시 중단해야 할지 계속 먹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밤에도 새벽 2시 경이 아니라 자리에 누워서 1시간만 지나면 벌써 그때부터 경직과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하얗게 불면의 밤을 울면서, 몸부림하면서, 죽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통과한다. 밤마다 캄캄한 터널을, 관절이 고장 난 병신이 육갑을 떨며 기어가는 꼴이다. 기어가고 있는 것만큼 통증과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투병이라 하였다. 투병은 하루하루다. 건강할 때는 하루 이틀 지나는 것 잘 모르지만, 통증의 질병 때는 하루 이틀 세게 된다. 하루하루가 힘겹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투병생활이다. 목회자가 요일을 세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된다.
인생은 고난과 싸우면서 꿈을 이룬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병이라는 고통만은 그 꿈을 앗아간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병의 고통은 통증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포괄적이라서 여유가 있지만 통증은 구체적이라서 숨통이 막힌다. 고통은 문화적이지만 통증은 야만적이다.
추적추적 장맛비가 오는 날, 누가원의 책 말미 부록에 붙어 있는 치료사례 자들을 찾아가보았다. B대학 근처에서 미장원을 하는 중년여자였다. 그는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대소변을 받아내다가 누가원을 만나 2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고 환하게 웃는다. 나는 벌써 3개월이 되었는데도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고 하자, 내가 뭐래도 얻어먹고 그러는 줄 아느냐고 되레 화를 낸다. 답답한 마음으로 사무실에 와서 전북 전주 주소의 사례 자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도 누가원 덕분에 류마티스에서 완치되었다고 하면서, 빨래를 삶고 있는 중이라 전화 더 못 받는다고 하며 얼른 전화를 끊는다. 세상에서 병든 자만큼 불쌍한 자들이 없는데, 세상은 그 불쌍한 자들을 등쳐먹는다는 생각이 든다. 병원, 약국, 건강식품업자, 무슨무슨 건강협회 등등.
한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든 어느 주일(일요일), 학생회장 인권이가 교회를 빼먹었다. 여태 주일을 범한 적이 없는 그다. 만일 외지에 갈 일이 있으면 전화라도 하고 가지 그냥 갈 아이는 아니다. 그런데 아무 말 없이 안 나오다니. 아무래도 예감이 안 좋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상한 점이 있었던 게 생각난다. 언제부턴가, 아마 상수 문제가 불거진 때부터일 것이다. 전처럼 생동하지 못하고 시들한 기색이었다. 기도도 별로 안 하고 학생회 일에 열심을 내지도 않았다. 그럴 아이가 아닌데… 고3이라 좀 피곤해서 그런 가부다 생각하고 넘겼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게 아닌 상 싶다.
예배 끝나고 인권이를 잘 따른다는 여고 1년짜리 다솜이를 사무실로 불렀다. 인권이 오늘 왜 안 나왔는지 혹시 아니? 잘 몰라요. 인권이 오빠 요새 제 전화두 안 받아요. 나쁜…,하다가 입을 다문다. 나쁜 놈? 그렇지 뭐예요, 사람 성의두 무시하구. 그래 그놈 나쁜 놈이다, 그런데 상수 소식은 혹시 듣니? 그 여자랑 살구 있는 건 아시죠? 인권이 오빤 그 집에 놀러간다는데 나한텐 가르쳐주지 않아요. 놀러간다구? 그렇다니깐요, 이건 여자 육감인데요, 인권이 오빠두 그 여잘 좋아하는 거 같다니까요. 여자 육감? 니가 여자라구? 전도사님, 그렇게 마음 놓구 망발하셔두 되는 거예요? 내가 여자 아니라구요? 인권이 오빠랑 상수 오빠랑 그 여자 땜에 종종 안 좋은 거 모르세요? 뭐? …
나는 다음날 하교시간에 맞추어 혼자 인권이네 집에 찾아갔다. 채소 노점상을 하는 그의 어머니는 몸살기가 있다고 하며 일찍 집에 들어와 있었다. 자글자글한 주름살에 세월의 그늘이 짙게 각인된 중년 아줌마였다. 어디 편찮으시냐고 물었더니, 글쎄 그렇게 착하던 인권이가 요새 속을 썩인다는 것이었다. 공부도 안 하고 맨 날 친구 집에 간다고 나다니더니, 그저께는 어느 놈과 싸워서 볼 따귀가 터지고 부어올라 병원치료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녀석은 학교에서 야자까지 하고 밤 10시쯤에 온다기에 학교로 찾아갔다. 그러나 내 전갈을 가지고 간 학생은 혼자 왔다. 아무리 찾아봐도 인권이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겸연쩍어 하는 품세가 인권이 녀석이 우정 나를 피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맥이 빠지고 몸도 아프고 속이 허해져서 발걸음 옮기기가 힘이 들었다. 교회 근처까지 와서 기수 어머니네 식당 앞을 지나는데, 갑자가 기수가 불쌍해졌다. 불편한 몸으로 평생을 살자니 얼마나 힘이 들까 싶어 잠시 그를 보고 갈 겸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기수 어머니가 나를 보더니 반기며 기수를 부르려는 것을, 내가 가볼게요, 하고 식당 뒷켠으로 돌아갔다. 기수 방에 불이 켜진 걸 보니 방에 있는 모양이었다. 뭘 하고 있나 싶어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라 뒤로 주춤했다. 그리고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눈꺼풀을 떼 내듯 잠시 눈을 껌벅여 다시 보았다. 녀석이 컴퓨터를 켜놓은 채 자위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병신 육갑하듯 제멋대로 돌아가는 손을 연체동물처럼 흔들어대며, 돌아간 입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짐승 같은 신음소리를 거칠게 죽여 가며, 허연 눈알을 까집고, 정신없이 헉헉대고 있었다. 녀석에게 가려져 조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컴퓨터에서는 야한 영상이 눈부시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 터질 것 같은 심계항진을 진정시키고는 식당홀로 나왔다. 그러자 기수 어머니가, 없어요? 금방 있었는데, 하며 찾으러 들어가려는 것을, 있어요! 만났는데 곧 나온답니다, 하며 나도 모르게 황망히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내 자신도 당황하여 엉겁결에, 나 밥 좀 주세요 배고프네요, 했다.
기수 어머니가 밥상을 차리고, 팔자 없이 여기서 밥 수저를 뜨는 동안 기수가 술에 취한 듯 불콰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며 나왔다. 비록 몸은 짜그라 붙었지만 얼굴의 거친 피부에는 구레나룻이 까칠하게 돋은 27세의 혈기 방창한 청년이었다. 나를 보더니 주춤 놀라며, 저도사니임 오셔서요오? 옆으로 꾸벅 인사한다. 나는 입이 깔깔하고 몸이 늘어져 더 먹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반쯤 밥그릇을 비우고 거기서 나왔다.
담 밑에 봉고를 주차시키고 누렇게 잎 바랜 작은 화단을 돌아 뒤 켠 현관으로 들어서자 웬 탕약냄새가 물씬 풍긴다. 주인 네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집에 무슨 와병 자가 있어 탕약인가 싶어 내 발소리에 현관에 나온 아내에게 시선을 보내자, 맞아요, 당신 약이예요, 당신 약을 달이는 중이예요, 아내가 말한다. 내 약이라니, 내 무슨 약을?
“당신 많이 아프잖아! 병원 약두 안 되구 누가원 약두 안 되구, 당신 힘든 거 알면서 어떻게 가만히 있어? 한
의원 약은 아니지만 내가 동의보감 처방대로 약재를 사다가 끓이는 거니깐 효과 있을 거예요. 나 꼭 당신 병
고치구 싶어. 눈 딱 감구 한번 먹어봐, 응?”
아내는 왠지 두려운 눈으로 야단을 피해가려는 듯 어리광 섞인 말로 얼버무린다. 그럼에도 나는 나도 모르게 버럭 화가 났다. 내가 이렇게까지 됐는가 싶은 충동이 욱하고 치밀었다. 그래도 만만한 게 아내라고, 나는 여태껏 여기저기서 얻어맞은 슬픔을 아내에게 퍼붓고 말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왈칵 눈물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다.
“나 당신한테까지 이런 짐 씌우고 싶지 않아! 당신이 이러면 나 부담이 돼서 못 견뎌! 내 영역은 내가 알아서
해! 제발 이러지 마!”
그러자 아내 역시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왈칵 쏟아져 나온 듯하다. 어리광 섞인 두려움이 갑자기 반격의 손톱으로 날을 세운 것이다.
“부부간에 니 영역 내 영역이 어딧어? 같이 아프면 안돼?”
“안돼! 당신두 어린이 집 일 당신 영역이라구 했잖아! 내 아픔 나만 가지면 됐지, 왜 당신까지 끼어드냐구?”
“같이 아프자구요! 같이 아프구 싶어! 이 망나니 깍쟁이야!”
“니가 망나니다, 아무데나 끼어들구! 비껴!”
나는 아내를 밀치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고 안에서 잠금 버튼을 눌러버렸다. 밖에서 엄마 아빠 싸움에 삐쭉이던 금비가 쾅 닫는 문소리에 놀라 앙 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어 어 괜찮아 엄마 아빠 화난 거 아니야, 금비를 달래는 아내의 소리가 나고, 이어 주방에서 떨그럭 떨그럭 밥상 차리는 소리가 났다.
“여보, 금비 아빠, 내가 잘못했어, 나와서 밥이나 먹어, 응? 명우 씨!…”
나는… 이래서는 안 되는 건데, 갑자기 주체 못하게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했다. 조금 진정을 하고는 안에서 말했다.
“나 기수네 식당에서 먹었어! 미안해! 조금만 더 그냥 이대로 있을게!”
“응 알았어, 마음 편히 가져요 여보!”
하고는 아내는 금비에게 밥을 먹이는 듯했다. 그리고는 금비와 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상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언젠가 밤에 너무 아파서 불을 켜놓고 잤더니 아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끄고 자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아플 때 불을 끄면 더 아픈 것 같은 걸 알 리 없는 아내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이 섭섭하여, 알았어! 당신 말대로 불 끄고 영원히 잘께! 대답했던 것이다. 아마 그때 아내는 그 말에 충격을 먹은 듯했다. 그 얼마 후에 나는 아내가 표 안 나게 인터넷 건강 사이트를 뒤지고 건강 서적을 읽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탕약을 달이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자신의 그런 호의라면 호의랄까 하는 것들이 나를 더 비참하게 한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아내 앞에서 면목 없는 가장인 것 같아 그것이 불편하고 슬펐다. 맨 날 끙끙 앓고 있는 내가 얼마나 초라하고 못나 보이는지….
문득 기수 생각이 난다. 그가 자꾸 불쌍해지는 것은 내가 그와 비슷한 처지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도 나도 얽힌 그물에 어쩌지 못하여 발버둥치는. 기수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들어가 보았다. 거기 게시판의 그의 글들은 그가 얼마나 신앙으로 살려고 몸부림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파도를 타고 교회 다른 애들 홈피에 들어가 보았다. 특히 여학생 홈피마다 기수는 들어와 방명록에 핑크색 안부를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답방으로 기수 홈피에 들어와 한마디 안부라도 물어주는 여학생은 별로 없었다. 이것만 봐도 썰물이 나간 싸한 바닷가 텅 빈 고독 같은 것이 얼마나 절절이 어둠처럼 여기에 묻어나는지!
나는 누가원 이후 병이 심해지면서 하나님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병세를 악화시키려면 그냥도 할 수 있을 텐데 없는 돈도 엄청 쓰게 하시고, 왜 그 소도둑 같은 자들에게 인도하셨을까? 성경에 보면 남들은 다 말씀 한 마디로, 또는 손 한번 얹어 거짓말처럼 깨끗이 고쳐주시면서 나는 아무리 애타게 기도하고 믿습니다! 하고 믿어도 오히려 절도요 강도 같은 자들에게 걸려들어 앵한 돈 쓰고 시달림만 당하니, 내가 아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신데, 사랑의 그분께서 도대체 왜 나를 이처럼 자근자근 밟으시는 것일까? 이것은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해일처럼 덮쳐오는 통증 아닌가. 하나님이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하늘 보고 물마시고 한다지만, 나는 어딜 보고 물을 마시란 말인가.
고통이 심하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원망이 튀어나오는 법, 욥도 그랬다.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욥기서6장4절).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욥9:17-18). 그러므로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욥23;2).
특히 오른쪽 어깨를 도끼로 콱 찍어버리고 싶다. 몸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냐. 몸만 없으면 이런 고통도 당하지 않으리라. 몸뚱이가 화장터 불구덩이 속에 던져지는 것은 행복이다. 언젠가 철야기도 때 사람들은 ‘죽음 앞에 겁을 내는 자여’ 하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죽음 앞에 기뻐하는 자여’하고 혼자 고쳐 불렀었다. 아내가 듣지 못하게. 많이 아프면 말을 잃어버리고 표정을 잃어버린다. 예수 안 믿었으면 자살했을 사람들. 죽으면, 죽어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편안하고 자유한 인생이 될 것이다. 한줌 지나가는 바람이 되어 세월의 눈물자국을 비로소 말릴 것이다. 화장터에 가보면 거기 온 사람들이 즐거워한다. 모두들 상복을 입고 있지만 속에서는 비실비실 웃음이 나온다. 산자도, 지금 몇 천도의 불속에 들어간 자도 그렇다. 화장터 굴뚝의 시커먼 연기는 깃발이다.
통증에 휘갈겨 정신이 찢기면 믿음도 찢기고 꿈도 찢긴다. 하나님에게 항의하고 대들게 된다. 하나님이 나를 버렸으니 나도 하나님을 버리겠다고 공갈을 치게 된다. 소중했던 목회, 선교, 그런 것이 비웃음으로 찢겨 걸레처럼 너풀거린다. 그렇게 되면 캄캄한 터널 속을 기어가던 무릎걸음도 멈추게 된다. 그러면서도 끝장도 나지 않는다. 어쩌란 말이냐.
컴퓨터를 켜놓은 채 책상에 엎디어 깜빡 잠이 든 듯하다. 책상과 내 얼굴엔 눈물이 흔근히 묻어 있었다. 컴의 엔터키를 누르자 기수의 홈피가 그대로 떴다. 시계는 12시를 넘기고 있다. 방문의 잠금장치를 풀지 않아 아내는 들어오지 못했으리라. 이부자리를 펴고 화장실에 가기 위하여 거실에 나가보니 아내와 금비가 달팽이처럼 껴안은 채 자고 있다. 다시 가슴이 찡하니 슬픔의 신호가 온다. 나는 후딱 못본척 볼일을 보고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누워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깊은 잠결에도 누군가 내 이마를 짚어보는 손길을 느꼈다. 약간 차면서도 따뜻한 손길이었다. 나는 순간 잠이 깨었으나 자는 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아내의 손길이었다. 아내는 이마에서 손이 내려와 내 뺨을 만져보고 하다가 이불을 꼭꼭 여며주고 가만히 방을 나가는데, 나는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그러는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꽃잎처럼 떨어진 걸 알 수 있었다.
다음날 새벽기도 다녀오니까 아내가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이 당신 생일인거 알아? 우리 식구 ‘오 해피 데이’에 가서 칼질하자! 내가 쏠께! 왜 바닷가에 있는, 꽃으
로 장식한 집말이야”
나는 생일인 걸 몰랐었다. 나한테 생일이라야 별 의미 없지만, 그래도 생일이라니! 그렇다면 나는 칼질하는 음식보다 아내의 칼국수를 선택하면 좋겠다. 아내의 칼국수 솜씨는 그야말로 환상이다. 어느 누구도 맛보고 감탄하지 않은 자 없다. 만일 감탄하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거나 미각상실자일 것이다. 마침 오늘 일기예보에 늦가을 비 오시시 온다고 하니, 거실 창가에 앉아 칼국수 앞에 놓고 비오는 작은 화원 바라보며 아내와 딸내미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들으면 모처럼 행복이란 걸 가슴에 안아볼 수 있지 않겠는가. 아내는 쾌히 동의하여 오늘 점심은 어떤 말도 필요 없는 행복한 식탁을, 키 작은 코스모스처럼 작고 낡은 우리 집 거실에 피워 올렸다.
밤에 몸이 또 무거워 와서 일찍 쉬려고 자리에 누웠는데 밖에서 노크소리가 난다. 아내였다. 나는 문득 상체를 일으키며, 금비는? 잠들었어요! 하며 아내는 들어와 내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앉는다. 어쩐 일이냐고 묻는 내 시선에,
“칼국수 하나 가지구 되겠어요? 그래서 생일선물 하나 주려구요!”
그러나 아내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내가 의아해하자 그녀는 웃으며,
“아, 생일선물 어딧냐구요? 바로 여깃어요!… 나!”
하고 자기를 가리키며 눈을 빛내는 것이다. 나는 머리에서 불이 번쩍하듯, 아하, 느낌이 왔다.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너무 오랫동안 젊은 아내와 분방을 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건데. 아무리 몸이 아파도 가끔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데… 내가 너무 무심했다는 미안함이 퍼뜩 들었다.
“그, 그렇군! 미, 미안해! 그래, 오늘은 같이 자자! 진짜 최고의 생일선물이야,… 여, 여보, 고마워!”
그러자 아내는 옷을 벗는다. 발을 넣은 이불 속에서 팬티를 마저 벗었다. 그리고는 당신두 벗어, 나처럼! 하고는 먼저 이불 속으로 몸을 넣는다. 나는 당황했다. 이러지 않던 아내였다. 전에는 결코 이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내의 단호함에 눌려 나도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허지만 맨살은 역시 머릿속이 짜릿할 정도로 감각적이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잠간! 하며 내 가슴을 밀어낸다.
“여보, 명우 씨! 우리 이젠 이렇게 살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처럼, 이렇게!”
“그, 그럼, 맨 날 발가벗고 살잔 말야?”
“내 말은… 아프면 아파하구, 슬프면 울구, 화나면 화내구, 응?… 아픈데두 안 아픈척하면 당신 더 힘들지 않
아!… 그러니, 아무것두 걸치지 말구 있는 그대로 살자는 거야! 우리는 부부니까. 일심동체 아니냐구. 그러니
같이 아프구 같이 슬프자, 응? 나 따루 당신 따루, 그게 무슨 부부야?”
나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내가 눈을 감고 가만히 있자 아내는 나를 끌어안는다. 우리는 맨몸으로 깊이 포옹한 채 그대로 있었다. 내 어깨에서 무거운 짐 같은 것이 풀려 내리는 듯 하더니 비로소 푹 안심이 되고 나른해진다. 여느 때 같으면 이런 때 발기가 되어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발기도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깊고 오묘하고 신비한 전류 같은 행복감은 처음이었다. 이대로도 충분히 좋았다. 아내도 지금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마음의 꺼풀은 잠옷처럼 가벼운 것이라도 그것이 어깨로 올라가면 어깨를 짓누르는 돌덩이가 된다는 것을.
3.
연말이 되면 다른 직업 종사자들도 그렇겠지만, 교회 교역자들은 그야말로 정신없이 바빠진다. 1년간의 부서별 결산과 신년의 계획안을 세우는 일, 연말의 다양한 행사와 성탄 준비 등,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바쁘다. 그럼에도 몸은 무거웠지만, 아내의 선물 이후 마음이 가벼워진 탓인지 그 많은 일들을 능히 감당하고 있다.
학생회장 인권이는 다시 교회생활로 돌아왔고, 그의 말에 의하면 상수도 그 여자와 결별하고 집에 돌아와 있다는 것이다. 창피함이 좀 희석되면 다시 교회에 나오겠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내 고통에 동참하는 뜻에서 오가피+해동피+금은화+백출, 등의 약재를 다리고 있고, 나는 그 동참을 받아주는 뜻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 정성을 먹어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저주하듯이 누가원과 결별하고 병원 약으로 돌아왔다. ‘스테로이드’ 같은 약은 독약 같은 것이지만, 그걸 먹으면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진다. 나중에야 어떻게 될망정, 그래서 이 연말은 그래도 낙낙하고 할랑할랑하게 일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 병에 대하여 끈질기게 냉담한 하나님에게 반감을 품고 있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내의 말대로 하나님과 나 사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이이므로, 고통스런 만큼 원망이 터져 나오는 건 달이 지듯 자연스런 현상이다. 신앙이 좋은 것처럼 한 꺼풀 걸치고 감사하는 척 하기는 싫었다. 남들은 원망이 죄라고 하지만, 나는 원망은 열망의 이면이라고 생각한다.
성탄의 계절이 되었다. 거리거리마다 반짝이는 요란한 성탄장식으로 마음들이 들떠 있는데, 그런 분위기는 교회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때쯤 되면 1년 내내 출석하지 않던 학생들도 꾸역꾸역 발걸음을 하여 예사로 얼굴들을 나타내 밝힌다.
막 교회로 들어서다가 안에서 나오던 상수와 마주쳤다. 상수는 나를 보더니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우뚝 선채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천천히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늘 리허설에 너도 순서 하나 넣어라, 할 수 있지?”
“예, 해보겠습니다!”
나는 말없이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기수가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침을 흘리면서, 저도사니임, 하고 나를 불러 세운다. 그러더니 그 종이를 내밀며, 자기의 신년도 기도제목인데 나한테도 기도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무실에 들어와 그의 기도제목을 훑어보았다. ‘신년도 기도제목’이라는 타이틀 밑에 1. 새해에는 믿음을 더하소서 2. 새해에는 장애 주신 거 원망 않고 감사만 하게 3. 주님을 위하여 이 몸으로 봉사 꼭 하게 4. 우리 어머니 건강과 기쁘시게 하도록 5. 내가 돈 벌어 우리 장애인 식구들 돼지고기라도 실컷 먹이게 6. 새해에는 꼭 배우자 주세요,… 그리고는 맨 밑에 ‘기도드립니다’ 하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의 기도 종이를 든 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슴에 진한 아픔이 전류처럼 고여 든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내가 참으로 못나보였다. 그의 헉헉대던 자위가 너무 불쌍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의 기도제목을 따라 혼자 간절히 기도했다.
언제 이렇게 준비했나 싶게 리허설의 다양한 순서가 진행되었다. 합창, 모노드라마, 피아노 독주, 단막극, 율동 등, 재미있고 진지하고 감동적인 순서들이다. 마지막으로 순서 하나를 붙여 상수가 기타를 들고 인권이와 함께 나온다. 상수가 기타를 치고 둘이 합창을 한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 노래를 부르면서 상수가 울고 인권이도 운다.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감정이 여린 십대들인지라 그 눈물이 전염되어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난다. 나는 상수의 눈에서 눈물을 보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었다. 그처럼이나 사팔뜨기처럼 세상을 사시로 보고 교회를 조롱하던 그가, 이처럼 진지하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픈 속내를 드러내며 울다니! 한참 봄꽃을 피울 젊은 가지들이 물꽃을 피워 올리고 있구나. 캄캄한 터널을 용케도 헤쳐 나와 햇살 반짝이는 신춘의 가지 끝에 영롱한 물꽃들을 피워 올리고 있다! 물꽃이 지나면 봄꽃이 피어나리. 담임 김 목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박 전도사! 다 좋아질 거야! 합력하여 선을 이룰 거야! 좋아지구 말구!…’ 나는 문득 유치하게도, 몸은 죽어도 꿈과 믿음은 죽을 수 없는 것이란 걸 깨닫는다. 나는 이 마음을 이번 성탄절에 아내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
눈물을 빚으면 봄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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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글향 내려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안에서 충만하시고 평안하시며
향필 하소서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