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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
<요한 1서의 말씀 5,14-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14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을죄가 아니면, 그를 위하여 청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죽을죄가 아닌 죄를 짓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죽을죄가 있는데, 그러한 죄 때문에 간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7 모든 불의는 죄입니다.
그러나 죽을죄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18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19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20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21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 복음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시어,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세례를 주셨다.
23 요한도 살림에 가까운 애논에 물이 많아, 거기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서 세례를 받았다.
24 그때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
25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말다툼이 벌어졌다.
26 그래서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27 그러자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28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29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30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제를 알고 분수를 지켜야 한다>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 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아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권력이 영원한 줄 아나 봅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를 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분은 십자가의 주 예수님뿐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립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줍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에서 세례를 베푸셨다’(요한 3,22 참조)는 보고로 시작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일한 본문입니다.
그리고 뒤에 4장 2절에서는 그의 제자들이 베푼 것으로 소개됩니다.
아마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 중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도 있었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다인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질문을 받은 요한은 예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분”으로서, 계시를 통해 오신 분이심을 밝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요한 3,27)
이어서 자신과 예수님을 동시에 증언하면서, 그리스도의 현현을 드러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9-30)
‘신랑’과 ‘신부’는 성경적 표상으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신부를 표상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았습니다(에페 5,21-33).
그러니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차지임을 표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으로 드러내줍니다.
또한 아가서는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신부인 교회와의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라는 말은 그분만이 교회의 신랑이시며, 민족들의 구원자임을 말해줍니다.
한편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묘사합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29-30)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고 신랑의 기쁨을 나누나, 결코 신부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시며’(요한 15,15 참조),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이토록 우리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함께 깊이 믿기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 신부인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말입니다.
그토록 친구를 깊이 신뢰하고 존중한 까닭입니다.
당신께서는 친구에 대한 그 사랑, 그 신의를 십자가에서 온몸으로 몸소 드러내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입니다.”
(요한 3,29)
주님!
당신만이 저의 신랑입니다.
당신 마음을 듣게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시고 당신 음성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기뻐하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당신을 다 내어주셨듯이 제 전부를 드리오니 저를 차지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거절도 수락도 사랑으로>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요한복음 3,27)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믿는 바인데, 요는 그 믿음이 오늘 서간에서 얘기하는 그 확신인지 성찰케 됩니다.
믿지 못하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 단계와 정도가 있지요.
불신이 있고, 의심이 있고, 흔들리는 믿음이 있고, 흔들림이 전혀 없는 믿음 곧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제 생각에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거라는 것을 적어도 우리는 불신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의심이나 의문은 가질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한가?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은 차별이 없으시니 그에게도 주셨는데 그가 받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야겠습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시지 않는 경우와 하느님께서 모두에게 주셨지만 인간 측에 문제가 있는 경우입니다.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가 주저하거나 변호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서간에서 얘기하는 대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 1서 5,14)
그렇습니다.
당신 뜻에 맞으면 다 들어주시지만, 당신 뜻에 어긋나는 것은 청하더라도 주시지 않습니다.
마약을 달라는 자식의 청을 들어주는 부모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런 사랑의 거절을 경험한 우리는 온당한 청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신할 수 있고, 그래서 이젠 하느님께 청하기보다 자기 힘으로 벌려고 하는데 이런 불신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청을 드릴 때는 거절도 수락도 하느님께서는 사랑에서 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으로 하고, 그래서 들어주시지 않는 것도 하느님의 사랑이요, 더 큰 사랑 또는 다른 사랑을 위한 거절이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다 내게 선이 아니고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있어야 합니다.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세례자 요한은 왜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을까?>
오늘 복음엔 ‘예수님의 세례’와 ‘요한의 세례’가 대비되어 나옵니다.
요한도 세례를 주고 예수님도 세례를 주시니 마치 경쟁자가 된 것처럼 나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
(요한 3,26)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 가장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한 번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제자들을 보내어 그분이 메시아가 맞는지 확인하는 일을 합니다.
결정적으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오셨는데, 그 메시아를 만나러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들은 이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재평가가 내려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왠지 세례자 요한을 높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우리는 모두 아무리 거룩해져도 세례자 요한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오해를 받는 분이 있다면 바로 ‘마더 데레사’입니다.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마더 데레사가 평생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을 느끼지 못하는 메마름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들어, 믿음이 약해 구원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물론 그리스도와의 거리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 ‘소명’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분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평생 로마에서 살아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로마의 국경을 더 넓히기 위해 변방에서만 살았습니다.
로마에서 떨어져 산 카이사르는 그러면 로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로마를 혼자 지배하려 했기에 살해당하기는 하였지만, 로마 국민에게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직무’상 멀리 떨어져야만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달걀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달걀의 노른자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과 더 가까운 것은 껍데기보다 흰자입니다.
껍데기는 노른자보다 본질에서 다르고 더럽고 딱딱합니다.
그러면 노른자는 자신과 더 가까운 흰자를 더 사랑하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더 변방에서 더 고통스러운 일을 하는 껍데기를 더 사랑하는 게 맞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몸통과 더 가깝다고 팔뚝을 더 사랑하고 손은 사랑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끝에서 고생하는 것들을 더 사랑하고 보살펴야 합니다.
물론 거리상으로는 멀지만 어쩌면 안의 것을 보살피기 위해 더 고생하는 것들은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구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둑보다 맨 끝에서 배를 부르는 등대를 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로 말하면 주님과 더 가까운 기도는 ‘관상기도-묵상기도-소리기도’ 순입니다.
저는 주로 묵상기도를 합니다.
관상수도원에 있는 수도자들은 주로 관상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마더 데레사는 거의 소리 기도를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분 사진에는 항상 묵주를 들고 있고 수도자들과 공동으로 하려면 성무일도와 같은 소리기도가 주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분은 저보다 묵상기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더 가까운 기도를 하는 사람은 ‘관상가-저-마더 데레사’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마더 데레사는 성녀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계란의 노른자는 스스로 오염된 흰자를 더 고마워할까요, 아니면 자신을 지키려는 단단한 껍데기를 더 사랑할까요?
당연합니다.
자신과 멀어도 자신의 ‘뜻’을 더 충실히 따라준 껍데기를 더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서는 내가 어느 수준의 기도를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소명에 어느 정도 충실했느냐?’로 결정됩니다.
모든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더 그렇습니다.
소위 ‘로고스 찬가’(요한 1,1-18)에서 하느님과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며, 그분을 증언한 유일한 분으로 세례자 요한을 말합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길을 닦으라고 보내신 유일한 분이요, 구약으로 말하면 엘리야 예언자와 같은 분입니다.
만약 기도의 단계로 본다면, 세례자 요한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의 ‘회개’ 단계에 있습니다.
그러니 타볼산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보고 기적을 행했던 그분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명을 충실히 수행한 면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사도들 못지 않습니다.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요한 3,28)라고 명확히 말합니다.
자신의 소명상 자신은 ‘회개의 세례’ 자리에 있어야지 그리스도께 가서 그분께 세례를 받으면 최초의 회개의 세례의 중요성을 선포하는 자의 역할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은 보내도 끝까지 그리스도께 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 거리의 중요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소명 때문입니다.
삶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당연히 그 기도를 통해 받는 기쁨도 높아집니다.
그래서 기쁘지 않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보다는 큰 기쁨이 없습니다.
다만 그분의 목소리를 다른 이들을 통해서 듣는 기쁨뿐입니다.
그러나 요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분이 커지시는 소식만 들어도 그 기쁨은 매우 충만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요한 3,29)
기쁨의 충만함은 소명의 충실에서 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달걀부침 하나 뒤집는 것, 하다못해 지푸라기 하나를 줍는 것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했다는 『하느님의 현존 연습』의 ‘로렌스 수사’(1605-1691)나 빗자루 수사로 불리는 ‘마르티노 수사’(1579-1639)는 그리스도의 변두리에서 마냥 기뻤습니다.
그만큼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피부가 검은 노예 취급되는 혼혈이었던 마르티노 수사는 수도원에 들어가서도 “나는 불쌍한 노예일 뿐입니다”라고 말하고, 수도회 재정이 나빠지자 “나는 수도원의 재산이니 나를 노예로 팔아 빚을 갚으십시오”라고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분들이 주방에서 평생 일만 하였고 마당을 쓰는 일만 하였다고 해서 누가 관상 수도회의 수도자들보다 영성이 낮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분들은 사랑의 현존 안에서 그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구체적인 사랑 실천을 했기에 온전히 모든 시간의 삶이 기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행복했습니다.
기도는 그분의 뜻에 내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춤을 그분의 음악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럴 때 기도의 맛을 느낍니다.
기도의 맛(기쁨)과 기도의 필요성(소명)만 잊지 않는다면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테네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부활시킬 힘이 있다면 자신들을 위해 젊은 나이에 싸우다 요절한 알렉산더 대왕을 살려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기도를, 그것이 어떤 기도이건 간에, 당신 뜻에 일치하려는 강한 열망으로 했다면, 그 사람을 부활시켜 가장 당신과 가까운 자리에 앉히실 것입니다.
그 사람의 ‘뜻 안에’ 머무는 것이 그 ‘사람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저는 주님을 위한 작은 일에 제 온몸과 마음, 정성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찬란한 태양처럼 동쪽 하늘 위로 붉게 떠오르자, 선구자 세례자 요한이 보여준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놀랍도록 겸손하고 솔직합니다.
그의 태도는 마치 서녘 하늘을 물들이며 저물어가는 석양처럼 담담하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복음 3장 28절, 30절)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작아지는 것에 대해 조금도 슬퍼하거나 못마땅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마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충만한 얼굴입니다.
그는 주님의 커지심과 동시에 자신의 작아짐에 대해서 큰 기쁨이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커지고 높아지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세례자 요한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도원 안에 살아가는 우리 역시 작아짐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작아진다는 것은 겸손해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겸손해진다는 것은 활짝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넓은 시야, 너그럽고 부드러운 시선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저희 공동체는 지금 잡목과의 전쟁을 선포한 후, 다들 톱 하나씩 손에 들고 열심히 톱질을 하고 있습니다.
한 형제가 실수로 손톱 끝을 조금 잘랐습니다.
제가 농담삼아 그랬습니다.
“손목이나 목이 날아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까?”
저 역시 어떻게 하다가 검지손가락을 삐끗했습니다.
부어오르고 많이 불편했지만, 마음속으로 이렇게 위로를 했습니다.
“시골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작아진다는 것, 겸손해진다는 것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건 사고들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갑작스레 다가온 불행이나 불운 앞에서도 크게 호들갑을 떨거나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고, 크게 한번 껄껄 웃으면서 유머 감각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17세기 프랑스 가르멜 수도회 회원이었던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가 수도원 안에서 맡은 소임은 다른 영성가들이 볼 때 가장 작고 하찮은 일, 허드렛일이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나 힘든 일을 할 때에도 그의 얼굴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큰일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기에, 주님을 위한 작은 일에 제 온몸과 마음, 정성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갈망(渴望;desire)의 사람 -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갈망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갈망의 사람, 수도자는 물론 인간의 정의입니다.
시편 63장 2절,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갈망의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예전 '내 수도생활관'이란 글에서도 갈망에 대해 강조한 부분이 있어 나눕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어 수도자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찾는 갈망은 영성생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사라지면 영성생활은 끝이다.
그리하여 수도자를 갈망의 사람이라 부른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을 때 저절로 깨어 있게 되고 기도하게 된다.
여기서 마음의 눈이 열려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다.
그러니 갈망-깨어 있음-기도-개안-마음의 순수-주님과의 만남이 일련의 연쇠고리를 이루고 있음을 본다.”
엊그제 1월 6일 교황님의 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에 전적으로 공감했고 감동했습니다.
갈망의 동방박사들을 통해 갈망이 우리의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설파한 불후의 명강론이었습니다.
길다 싶지만 일부 많은 부분을 인용하여 나누고 싶습니다.
“갈망의 능력이다.
갈망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타오르고 있는 불을 연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갈망은 우리를 직접적인 것, 보이는 것들 넘어 영적 현실을 보도록 우리를 내모는 것을 뜻한다.
갈망한다는 것은 우리를 초월하는 신비로서의 삶을 포옹하는 것을 뜻한다.
삶은 우리의 여기 지금의 삶보다 더 큰 무엇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색깔로 채워지기를 부르짖는 빈 화판과 같다.
위대한 화가, 빈첸트 반 고흐는 언젠가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나를 한밤중 뛰쳐나가 별들을 그리게 했다.’고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동방박사들처럼 별들을 향하도록 방향 지워진 반짝이는 갈망이다.
과장할 것 없이 ‘우리는 갈망하는 정도만큼의 존재(we are what we desire)’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것, 관습의 장벽을 넘어 우리의 삶을 앞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갈망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전 삶이 갈망의 훈련이다.’라고 말했다.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그러하다.
믿음의 위기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의 소멸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지상의 현실에만 골몰하다 보니 하늘을,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것을 잊었다.
위대한 것들에 대한 갈망은 증발되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욕구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은 닫혀진 공동체에서 텅 빈 공허를 느낄 뿐이다.
실로 갈망의 결핍은 다만 슬픔과 무관심의 개인이나 공동체로 인도할 뿐이다.
믿음은 갈망에 불을 붙일 것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 늘 새로운 믿음일 수 있다.
내 마음은 하느님 향한 갈망으로 타오르고 있느가?
혹은 실망으로 꺼져 가고 있는가?
바로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다.
오늘이 ‘갈망의 학교’(school of desire)이자 우리의 갈망을 키워야 할 날이요, 날마다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나 앞으로 나가야 한다.
갈망은 우리를 경배에로 흠숭에로 인도하고 흠숭은 우리의 갈망을 새롭게 한다.
하느님 향한 갈망은 우리가 그분의 현존 안에 있을 때만 자랄 수 있다.
예수님만이 욕구의 독재로부터 우리의 갈망을 치유한다.
실로 우리의 갈망이 욕구와 일치될 때 우리 마음은 병들게 된다.
한편 하느님은 우리의 갈망을 승화시키시며 이기심으로부터 그들을 정화하시고 치유하신다.
그래서 흠숭을, 침묵의 흠숭 기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흠숭을 잊지 않도록 하자.
캄캄한 밤일지라도 계속 빛나는 주님의 별이다.
그분을 향한 여정에 오르자.
동방박사들처럼 눈을 들어 우리 마음 속의 갈망의 소리를 듣도록 하자.
하느님께서 우리 위에 빛나게 만든 별을 따라가자.
하느님의 놀라움에 활짝 열도록 하고 쉼없는 탐구자들이 되자.
그리고 우리 ‘꿈꾸고, 찾고, 흠숭하는’(dream, seek, adore) 사람이 되도록 하자.”
내용이 너무 좋아 많이 생략하면서 거친대로 옮겨 봤습니다.
바로 이런 갈망의 모범이 제1독서의 사도 요한이요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갈망할 때 아드님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의 체험입니다.
다음 ‘갈망의 사도’ 요한의 체험적 고백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말 그대로 갈망의 은총입니다.
갈망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아드님의 신비를 체험한 사랑의 신비가, 갈망의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 1서가 오늘로서 끝납니다.
마지막 말마디,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큰 울림을 줍니다.
당시의 영지주의의 이단을 지칭하지만 현대판 우상들은 득실득실합니다.
우상들과 악마들로 가득한 세상이기에 죄도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갈망할 때 저절로 이런 우상들이나 악마들로부터 이탈하여 초연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갈망의 은총이 참으로 큽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은 세례자 요한은 질투심에 불타는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정체를 꿰뚫어 보며 겸손히 자신의 신원을 파악하며 제자들을 진정시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사람, 또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친구로 자신의 신원을 인지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갈망의 은총, 갈망의 체험, 갈망의 기쁨, 갈망의 충만, 갈망의 겸손입니다.
마침내 갈망을 통해 주님을 체험함으로 아드님과 자기의 관계를 깨달은 세례자 요한이요,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오늘 복음의 핵심적 진리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그분은 커지시고 나는 작아질 때 비로소 텅 빈 충만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적 여정은 그분은 커지시고 나는 작아져 가는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나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되신 그분 안에서 참나를 발견해가는 영적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점차 커져 가고 나는 점차 작아져 갈 때 충만한 기쁨에 참 나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향한 갈망의 표현인 ‘2022년 새해 소원’이란 자작 헌시 기도문중 다시 일부를 인용함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 남고
나는 온전히 사라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이, 당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이
마리아 성모님이
성요한 세례자가
성요한 시도가
바로 그러하였나이다.
내가
하느님이 될 때
전인적 치유가
온전한 참나(眞我)의 구원이 이뤄지겠나이다.
내 소원
단 하나 이것뿐이옵니다
오, 주 하느님!
일편단심(一片丹心) 당신만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가 수업 시간에 낯선 사람과 함께 들어오셨습니다.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학자로, 실험을 위해 오늘 우리 학교에 오셨습니다. 박수로 맞이하겠습니다.”
힘찬 박수에 인사하며, 화학자라는 사람은 가방에서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꺼낸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제가 연구 중인 물질로 휘발성이 강해 병마개를 뽑으면 바로 휘발됩니다. 인체에 해가 없지만, 냄새가 조금 날 것입니다. 병을 열었을 때 나는 냄새를 맡은 사람은 얼른 손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이윽고 병마개를 열자, 많은 학생이 차례로 손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학생은 이 냄새가 정말로 싫다는 듯이 인상까지 쓰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심리학과 교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화학자가 아닌 일반인이고, 액체는 그냥 증류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변 사람의 암시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믿고 있습니다. 저 사람이 병 안에 냄새가 나는 화학 물질이 있다고 했을 때, 여러분은 믿었고 그래서 냄새를 맡은 것입니다.”
이런 심리적 암시는 우리 일상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주변에 누군가 하품을 하면 따라 하지 않습니까?
또 계속 기침을 하고 있으면, 자기 목도 간지러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자신도 똑같이 무시하고 건너갑니다.
좋은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좋은 영향을 이 세상에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이 되는 영향, 긍정적 영향을 주고받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투덜거립니다.
세례를 자기들의 고유 상표로 생각했는데 예수님도 세례를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천명합니다.
신랑과 그를 축하하고 기뻐하는 신랑 친구에 비교하여 설명하지요.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며, 신랑의 친구가 그 신랑이 잘되는 것을 시기한다면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랑의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듣고 마음으로부터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며 기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랑이신 주님은 커지셔야 하고, 신랑의 친구인 자신은 작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세례자 요한의 영향으로 많은 이가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자기만 드러나는 삶을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요?
세례자 요한처럼 세상에 좋은 영향을 전달하고 있나요?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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