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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0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제1독서 : 말라 3,13-20ㄴ
복 음 : 루카 11,5-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5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회사의 소비자 만족도가 79% 나왔습니다.
이 경우, 여러분이 회사의 대표라면 어떤 조처를 하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부정적 평가를 받은 21%의 불만족 이유에 집중할 것입니다.
개선점을 찾아서 고치면 소비자의 만족도가 더 높아질 것으로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이 방법을 사용하는 회사치고 만족도가 올라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소비자 만족도도 떨어진다고 하더군요.
영국의 자동차 수리업체 ‘버피 프로케어’는 불만족 이유보다 만족 이유에 더 집중해서 보았습니다.
성공의 근본 원인에 온 힘을 집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 소비자들은 이런 점에 만족하고 있다. 조직 내부에서 이런 요인들을 연구하고
더 확대할 수 있도록 하자.”라면서 격려했습니다.
이 격려를 통해 8개월이 안 돼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80% 미만의 만족도였는데, 소비자들로부터 95%의 만족도를 얻게 된 것입니다.
긍정요소를 확대하면 임원이나 부서 사이에 정치적인 날을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도 비난할 필요가 없다 보니, 우선 직원들의 사기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기는 그대로 소비자들에게 전달되어서 그들 역시 만족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부정적 모습을 보면 서로 날을 세우기만 할 뿐이지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긍정적 모습을 보게 되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밤중에 친구에게 빵을 꾸러 간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친구는 계속해서 꿔 줄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줄곧 졸라댔기에 필요한 만큼의 빵을 얻게 된다고 하십니다.
만약 빵을 꾸러 간 사람이 ‘이 친구는 절대로 꿔 주지 않을 거야.’라는
부정적 마음이 가득했다면 이렇게 줄곧 졸라댈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꿔 줄 거야.’라는 긍정의 마음이 가득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어떨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분명히 들어주신다는 긍정의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긍정의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도 방법입니다.
조금 하다가 포기하고 마는 나약한 모습이 아니라, 강한 긍정의 마음으로 들어주실 때까지
청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원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 이상까지도 얻게 될 것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3).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을 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물결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 속에 죄악이 들어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1,27-30)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1,15-16).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좋은 것을 이루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말고 그분의 때와 방법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국에서 반가운 선물이 왔습니다.
‘좋은 생각’을 보내 주셨습니다. 인사이동으로 자리를 옮기면 어김없이 보내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미국으로 옮겼는데도 보내주셨습니다.
세상에는 고마운 사람, 감사할 사람, 나누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책을 읽으니 이번 호의 주제는 ‘고진감래(苦盡甘來)’였습니다.
바람에 예쁘게 피어나는 꽃은 긴 겨울 땅속에서 양분을 찾았던 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의 글도 비가 온 뒤에 밝은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지고, 훈훈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중에 하나만 나누고 싶습니다.
“시골 학교로 부임한 선생님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주사(酒邪)가 심했고, 어머니는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습니다.
가정 방문을 하였고, 배고픈 아이를 위해서 밥을 사 주었습니다.
비가 내린 어느 날, 아이의 발자국에는 물이 홍건 했습니다.
신발장을 보니 아이의 신에는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를 데리고 예쁜 신발을 사 주었습니다.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에게 선생님은
나중에 크면 선생님에게 신발 하나 사주면 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세월은 흘렀고, 선생님은 은퇴하였습니다.
신발을 사러 가게에 들어갔는데 가게 주인이 선생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전에 신발을 사 주었던 그 어린이가 지금은 신발가게 주인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과 제자는 울다 웃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야 비로소 우리에게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화답송은 우리가 어떻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가난한 우리 하느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과연 하느님다운 예수님의 말씀이고 신나는 약속이다.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인 하느님께 청함은 당연하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악한 것을 청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려운 문제 해결,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의 건강, 위험 중의 보호, 곤경에서 해방 등 사
는 데 다 필요하고 절실한 것들이다.
자녀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거기에 가장 좋은 것을 사주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 왜 우리 하느님은 그렇게 오랜 시간 청하고 매달렸는데도 주시지 않는 걸까?
어떤 신학자가 말했다, 우리 하느님은 가난뱅이가 되셨다고.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어주셨으니 더 이상 줄 게 없다고.
말라키 예언자가 고발한 내용이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 같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
오히려 이제 우리는 거만한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해야 한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말라 13,14-15)
우리 하느님은 정말 가난뱅이라서 악한 이들을 벌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실 수 없는 걸까?
연로하신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더 이상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보살펴드려야 한다.
그런데도 자녀들은 그분이 그렇게라도 살아계심에 고마워하고 마음 든든해한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주기 때문일 거다.
어쩌면 우리 하느님도 세상을 뒤집어엎을 힘이 없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실 지도 모른다.
불룩했던 하느님의 주머니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 있던 것들을 남김없이 다 나와 믿는 이들의 마음에 옮겨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모든 것을 넘겨받으셨고 그분은 다시 우리에게 그런 당신을 통째로 넘겨주신다.
그리고 약속하셨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예수님, 주님은 당신 가진 모든 것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무엇인가 청하며 기도하는 것은 무엇을 더 달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벌어져도 주님 곁을 떠나지 말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오늘도 어머니께 이러저러한 것들을 청합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 끝까지 그렇게 기도하면서 제가 주님 곁에 꼭 붙어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
주님의 기도는 자아를 때리는 망치다
전삼용 요셉 신부
곰을 발견한 한 소년은 17.3초 만에 정확하게 곰이 자신들을 따라잡을 것을 계산하였습니다.
그 공포감에 빠져있을 때 다른 소년은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소년이 말했습니다.
“너 정말 멍청하구나! 우리는 절대 저 곰보다 빨리 달릴 수 없어!”
두 번째 소년이 말합니다.
“그건 사실일지도 몰라. 하지만 난 너보다 빨리 달리기만 하면 돼.”
왜 달리지 않는 것일까요? 달려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는 자기 자신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뛰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장애물은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안 되는 것보다 되는 것을 먼저 보아야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소비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매번 곰에게 잡아먹힙니다.
기도하면 곰에게 잡아먹히게 만드는 자아를 죽일 수 있습니다.
이것 하나로 기도해야 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신 바로 다음에 바로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방법과 효과에 대한 설명입니다.
우선, 주님의 기도의 방법은 하느님을 괴롭히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벗이 한 밤중에 찾아와 계속 빵 세 개를 요구하면 귀찮아서라도 빵을 내어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귀찮게 하느냐가 얼마나 절실한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하느님은 더 원하는 이에게 더 많이 주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기도의 열매인 빵 세 덩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주님의 기도는 성령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성령과 빵 세 덩이와는 무슨 상관일까요?
보통 성경에서 숫자 ‘3’은 ‘하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빵은 ‘에너지’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에너지가 성령이니 빵 세 덩이는 성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얻어지는 ‘복음삼덕’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탄과 싸워 ‘청빈-정결-순명’의 덕을 얻으셨습니다.
이 복음삼덕은 자아를 눌러 이기면 얻는 덕입니다.
청빈은 자아의 소유욕을 이기고 정결은 자아의 육욕을 이기며 순명은 자아의 교만을 눌러 이깁니다.
삼구를 이기면 가질 수 있는 덕이 복음삼덕인데
이 복음삼덕은 하늘에서 오는 에너지인 성령의 힘으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아가 얼마나 안 좋은지 알기 전까지는 주님의 기도를 하느님을 괴롭히듯이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아가 얼마나 안 좋은지 알면 주님의 기도로 하느님을 괴롭힐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는 한 명만 잡아먹는 곰에게 수많은 사람 중에 내가 잡아먹히게 만드는 내 안의 가장 큰 적입니다.
애니메이션 영화 ‘치킨 런’은 악독한 양계장 아줌마로부터 닭들이 탈출하는 내용입니다.
탈출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닭이 안 된다고 믿는 닭들에게 이런 대사를 합니다.
“당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뭔지 아세요?
양계장의 울타리가 아니라 당신들 머릿속에 쳐져있는 울타리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머릿속의 울타리를 벗겨냅니다.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데 불가능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산다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인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주님의 기도를 드리면 자아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자아는 걱정과 두려움을 자아내지만 주님의 기도는 그런 것들이 솟아나지 못하게 막습니다.
이 가치를 안다면 짬을 일부러 내서라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석공들은 돌이 깨지지 않아도 계속 망치질을 합니다.
101번째 망치질에 돌이 깨졌다면 그것은 100번의 끈질긴 믿음의 망치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이기려면 이렇게 주님의 기도로 튀오나오려는 자아의 머리에 망치질을 해야 합니다.
청하시오, 주실 것입니다.
찾으시오, 얻을 것입니다.
두드리시오, 열러주실 것입니다.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김 루미나 수녀
오늘 복음에서 벗이 길을 가다 들렀다며
한밤중에 찾아와 빵을 꾸어달라고 줄곧 졸라대는 이에게
마지못해 빵을 꾸어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아
은혜를 청하는 자녀들에게 기꺼이 주십니다.
그런데 바로 주시기도 하지만 주로 드러나지 않게 시간이 흘러
우리가 알아차리도록 주십니다.
또한 복음에서처럼 인내로이 청하면 좋지만
때로는 순간적이 청원을 나는 잊어버리지만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주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며
이렇게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셨음을 즉 받았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나쁜 일이든지 좋은 일이든지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기민한 영적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복음말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은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출처 : ‘한모금’ /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