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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550만명 남짓 작은 나라 덴마크는
계속하여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히고 있는데,
그 이유는
‘후가(hygge)’라는 개념에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하여 40년 이상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중의 하나로 뽑혀왔습니다.
2015년 10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논쟁에서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가
덴마크의 공공정책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이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미국을 보다 행복한 곳으로 만들려면
‘덴마크와 같은 나라처럼 되어야 합니다.’”
북 유럽의 이 작은 나라가 정서적으로 안정을 누리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미국의 언론인이자 저자인 제시카 알렉산더(Jessica Alexander)는
덴마크의 심리치료사인 이벤 산달(Iben Sandahl)과 함께 쓴
신간서적 『The Danish Way of Parenting: A Guide To Raising The happiest Kids in the World』에서 이 의문에 대하여 답하고 있습니다.
해답은 ‘후가(hooga)’라고 발음하는
덴마크의 삶의 방식 ‘hygge’에서 찾고 있습니다.
‘후가’의 어원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게르만어(語) ‘hyggja’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으며
‘만족하게, 친밀하게(cozy), 제집같이(homey) 느낀다’는 뜻으로,
정확한 번역은 어렵습니다.
기본적으로 ‘남들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더불어 산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남들과 가깝게 지내기도 하지만’
가깝게 지내는 시간을 신성하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덴마크 사람들은 ‘후가의 삶’을 ‘잘 사는 것(good living)’으로 생각하는 것은
함께 일하여 다 함께 잘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즉 ‘후가의 삶’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을 말하며
덴마크 사람들이 행복의 기본요소로 여기므로
영국이나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후가’에 대한 강좌를 개설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후가’를 촛불을 밝히고 좋은 음식을 마련하고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후가’를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 지나지 않으며
이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후가’는 정확하게 무엇을 뜻할까요?
다른 사람들과 문제를 전혀 일으키지 않고
가족이 화기애애하게 모여 있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거기에는 정치 이야기도 없으며 가족문제도 이야기 하지 않으며
제니 이모의 장애아 이야기 같은 것도 없습니다.
즉 부정적인 이야기도 없으며 불평을 늘어놓지도 않으며
무거운 이야기도 없습니다.
어느 한 사람만 모든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모두 힘을 보탭니다.
아무도 뽐내지 않고 아무도 공격하지 않고 누구와도 경쟁을 하지 않습니다.
이 순간, 음식, 함께 있음에 만족하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며 서로 돕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외부 세계로부터의 피신처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지만 가족처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후가’의 다섯 불문율은 이렇게 훌륭합니다.
덴마크의 ‘후가’를 연구한 미국의 인류학자들은 ‘후가’의 삶
즉 아무도 남을 깔아 뭉개고 각광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 것을 보고
어렵지 않게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 위하여
모두 가면을 벗어 던지고 골치 아픈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도 않습니다.
물론 ‘웰빙’을 위하여 더불어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살아가려면 혼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이와 같은 연대 의식은 장수(長壽)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하고 면역체계를 강하게 만들어줍니다.
연구자들은 ‘평등주의(egalitarianism)’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예를 들어 로버트 비스와스-디너(Robert Biswas-Diener)와
동료들의 2009년 연구에 의하면 부자인 미국 사람들과 덴마크 사람들은
다 같이 행복했지만 소득이 적은 덴마크 사람들이 훨씬 더 행복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평등하게 여기게 되면
행복한 사회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평등주의가 ‘후가’의 핵심 가치였던 것입니다.
버니 샌더스는 덴마크 사람들의 이와 같은 삶의 원칙을
일종의 공공이익을 위한 것으로 인용했던 것입니다.
‘후가’의 삶을 사는 다섯 가지 비결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나 자신을 그대로 내보인다(Come as you are)
뭔가를 과시하려고 애쓰지 않고 경계 태세를 허문다.
가면을 벗어 던지고 껄끄러운 문제들은 제쳐놓는다.
경쟁, 과시, 가식이 세상을 피곤하게 한다고 본다.
논란은 피한다.
너무 심각하거나 분열을 초래하는 사안을 두고 다투지 않는다.
헐뜯는 발언, 불평은
금기로 한다.
2. 논란을 피한다(Forget the controversy)
너무 심각하거나 분열을 초래하는 사안을 두고 다투지 않는다.
헐뜯는 발언, 불평은
금기로 한다.
초점을 이 순간에
함께 있음에 둔다.
우리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논쟁을 하며 보내며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며 지내지만,
‘후가’의 삶은 음식을 나누어 먹고 함께 어울려 동반자 의식을 느끼며
음식을 싸가지고 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후가’에서는
불평을 하거나 무거운 이야기를 하거나 판단하거나 논쟁하지 않는다.
3. 자신을 팀의 일원으로 생각한다(Think of yourself as a team member)
좋든 싫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할 일을 한다.
어느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하는 데 얽매이지 않게 힘을 보탠다.
백지장을 받들듯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일할 몫을 잘 알고
시키지 않아도 자기 일을 한다.
4. ‘후가’를 외부로부터의 피난처로 생각한다
(See hygge as a shelter from the outside)
가족·친구들과의 시간을
출세 노력, 인맥 형성, 경쟁, 물질주의로부터의 피난처로 삼는다.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판단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편하게 살려고 한다.
좋든 싫든 ‘후가’를 신성시하며 문제를 가져 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가족이나 친구들이 판단의 두려움에서 해방되게 된다.
5. 시간은 한정적이라는 것을 명심한다(Remember it is time limited)
잘나 보이려, 과시하려, 불평하다가, 부정적 생각만 하며 허송세월 하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지금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다 보면 모든 순간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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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성경에 ‘선하신 분은 하느님 아버지밖에 없다’고 되어 있는데
‘선한 사람’이라는 표현도하고 있어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정의(正義)란 말과 중용(中庸)이라는 말과 중도(中道)란 말을
구분 없이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선하다(good)’는 말은 ‘God’에서 나왔다고 말하듯이
‘선한 사람’이라는 표현보다는 ‘중용을 지키는 사람’
즉 ‘착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듯합니다.
그리고 영어 ‘justice’를 ‘정의’로 번역하고 있는데 ‘중용’으로 번역해야 옳습니다.
‘정의’는 ‘의로움’을 말하며 ‘거룩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은 결코 거룩하게 되지 못하며 하느님만 거룩합니다.
‘중용’은 대인 관계에서 손해 보는 것도 없고 더 많은 이익을 보는 것도 없는
이른바 ‘win-win’을 뜻하며 ‘중도’보다는 좁은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중도’를 강조하고 있는데
『신심명(信心銘)』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국 선종(禪宗)의 3조(三祖) 승찬대사(僧璨大師, ?-606)가 쓴 『신심명(信心銘)』에서는
마음을 비우는 법 즉 마음 치유법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승찬 스님은 2조(二祖) 혜가(慧可, 487-593) 스님을 만나기 전에 세속에서 살았는데
나병(癩病)에 걸려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어느 산중(山中)에 도인(道人)이 계신다는 말을 듣고
혹 그 도인께서 병을 낫게 하는 방도를 일러주실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혜가 스님을 찾아가서 말하였습니다.
“저는 나병을 앓고 있는데, 과거에 죄가 많아서
이 병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죄를 참회시켜주시면 병도 낫고 죄도 참회하는 길이 있을듯한데 참회시켜주십시오.”
그러자 혜가 스님이 예전에 당신이 불안한 마음을 갖고 달마스님을 찾아갔다가
달마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불안한 마음이 씻은 듯이 낫게 된 것을 생각하고는
“그대는 죄가 많아서 이런 병을 앓고 있다고 하니
그 죄를 가져오면 내가 참회시켜 주겠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죄를 가져오면 참회시켜 주겠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죄를 찾을 수 없었고,
정말 죄가 많아서 이런 큰 병을 앓고 있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혜가 스님이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모두 참회 되었다.” 하고 말하고
이어서 말하였습니다.
“육체의 병은 마음의 병에서 오는 법이고,
마음의 병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에서 오는 법이며,
이 삼업의 과보(果報)가 마음의 병을 일으키고, 마음의 병은 몸의 병을 일으키니,
삼업의 죄업(罪業)을 우선 소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참회를 하면서 복(福)을 심고 도(道)를 닦아야 한다.”
혜가 스님의 이 말씀을 들은 승찬 스님은
그 자리에서 혜가 스님을 믿고 법을 청하게 되었고,
혜가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참회하고, 불법승 삼보를 믿고 의지하여,
복을 짓고 도를 닦아 마침내 병에서 완쾌하게 되었고,
그리고 스님의 법맥까지 이어 3조가 되었습니다.
평생 동안 고치지 못할 병을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믿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여
후학들을 위해 『신심명(信心銘)』을 편찬하게 되었습니다.
『신심명』은 믿을 신(信), 마음 심(心), 새길 명(銘)인데
‘믿음을 마음속에 새기는 글’이란 뜻입니다.
큰 깨달음은 바로 마음을 믿는 데 있다는 말인데,
사언(四言) 이구(二句), 73송, 584자(字)로 되어 있습니다.
『신심명(信心銘)』에서는 일체 분쟁(分爭)에서 오는 고통(苦痛)은
상대적(相對的)인 개념, 즉 이분법(二分法)적 사유(思惟)와 흑백(黑白) 논리에 의해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이러한 사유(思惟)는 중생의 본성(本性)이 아니라고 하여
철저히 그 대립적인 관계를 부정하고,
그 대신 불이(不二, nonduality)와 중도(中道)사상으로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이치를 깨달아
대립(對立)을 화합(和合)으로 바꿈으로써
대립에서 오는 고뇌(苦惱)를 소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유는 서로 수용(受用)하고, 포용(包容)함으로써
지도(至道)에
이르러 극락(極樂)을 얻게 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지도(至道)는 대도(大道), 중도(中道), 지복(至福), 극락(極樂) 등으로도 표현되며
가톨릭의 ‘구원’과 비슷한 뜻을 갖고 있는데
일체의 대립적인 사유를 지양(止揚)함으로써
중생을 포용(包容)하여 구경(究竟)에 원융무애(圓融無碍)하게 하나가 되어
극락을 즐기게 하고자 하는 가르침입니다.
대립(對立)적인 마음은 하나의 공(空)에서 나온 것이니
대립이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또 이 공(空)은 대도(大道)의 기본으로
모든 중생의 불생불멸하는 본성(本性)으로써
능히 일체 중생을 포용하여 원융무애하게 할 수 있는 지도(至道)이므로
이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지도(至道)에 이르러
극락을 이루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일종평회(一種平懷) 민연자진(泯然自盡)’이라는 게송(偈頌)이 그것입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가난한 마음’ 즉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갖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어떤 종교를 믿든 마음을 비우고 정화(淨化)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가 없게 되는데
물론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지만
『신심명(信心銘)』의 도움을 받아
먼저 마음을 비우는 법을 배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프란치스코 성인이 말한 대로
“자신의
죄밖에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고,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고 은근히 자랑하지도 않으며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경청(傾聽)하고,
마귀인 자신의 나쁜 버릇과 잘못된 지식을 과감히 버리고,
무연자비(無緣慈悲) 즉 혈연이 아닌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고 욕심을 내지 않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생각을 습관화하는 것이
바로 올바른 삶이고 수행(修行)인 것입니다.
없을 때 없음으로 인해서 생길 수 있는 좋은 점을 볼 줄 알고,
있을 때 있음으로써 생길 수 있는 나쁜 점을 찾아 볼 수 있으면
있고 없음이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니
이 둘을 하나로 여길 수 있는 마음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공부 못하는 학생이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알라는 뜻도 숨어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면
‘참된 종교’를 믿지 못하게 되어 결코 깨달을 수가 없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많은 사람이 읽고 감명받았음 합니다~~~
무연자비 배우고 갑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