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日本ⓣⓥ* 원문보기 글쓴이: 사다크비아
우리나라만큼 '운동'이 '저항'이 치열하게 끈질기게 계속되었던 나라도 없지 싶어요.
일제시대때부터 시작해서 60년대 70년대 80년대까지 ..
여하튼 이 때 운동권 학생들과 오늘날의 운동권 학생들은 참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이 때 운동권 학생들은 적어도 공부도 열심히 했고,
정말 '정의'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거든요.
하지만 오늘날의 운동권 학생들은 형식적인 등록금 투쟁만 할 뿐
실질적으로 이것이 어디서부터 파생되는 모순인지_ 파악하려는 의지도 없고 노력도 없고 생각도 없고..
옛날의 운동권학생들보다 공부도 너무 안하고요.
글 하나 멋드러지게 쓰지 못하고 맨날 '등록금 동결' '올림픽을 해도 개강을 해도 변하지 않는 2MB'
이딴 플랭카드나 써걸어놓고
대자보 써서 붙인 거 봐도 글같은 글은 하나도 없고..
이 때 운동권 학생들이 쓴 글 보면 정말 그 치열한 고민이,
젊은 친구가 그 극한의 상황에서 가슴을 움켜잡고 썼을 법한 그런 명문들이 있고
또 그런 글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요즘 운동권학생들은 적어도 그런 치열한 고민은 없는 것 같아요..
시대가 변하기도 했지만.. 좀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하고.
여하튼 이거 재밌으니까 읽어보세요. 흐흐
전두환 X 국풍 X
5월 27일에는 광주학살을 규탄하며 한 젊은이가 자신의 생명을 내던졌다.
그의 이름은 김태훈(서울대 경제학과 78학번).
광주태생으로서 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그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때문에 한해 동안 고민해 왔다.
김태훈씨는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고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는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서울대는 이 사건으로 연 3일간 시위를 벌인다.
이후 84년 복학생협의회는 김태훈씨를 비롯한 민주열사들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는데
짭새들은 이것마저 훔쳐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김태훈 열사가 도서관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진 날
외대 도서관에서는 재미있는(?) 유인물들이 떨어져내렸다.
전두환 X 국풍 '81 X 라고 갱지에 볼펜으로 쓴 유인물들을 쓴 장본인은 이재현씨(영문과 78학번).
5월 26일 저녁 유인물을 밀기 위해 등사용품 일체를 가지고 여관에 투숙한 이재현씨는
시간이 갈수록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한번도 등사기를 사용해 본일이 없는 그는
선배들에게 들은 대로 열심히 원지를 긁어 롤러로 밀었으나
끝내 유인물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새벽녘 등사를 포기한 이재현씨는 가지고 간 백지들에다 볼펜으로 성명서를 쓰기 시작했다.
40~50장 정도 쓰다 팔이 아파진 그는 1백장 가량은 구호만 쓰고
나머지 1백장엔 전두환 X 국풍 X 란 초미니 구호를 적어 넣었다.
현장에서 연행된 이재현씨는 경찰서에 가서도,
자신은 중학교 때부터 등사기를 자유자재로 다뤘다는 한 경찰관에게 설움을 당했다.
너는 애가 왜 그렇게 무식하냐? 등사기도 밀 줄 모르고.
81년 들어 학생운동의 투쟁력이 급격하게 회복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곳에 따라서는 지진아들도 있었다.
전남대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들은 광주항쟁때 전남대 학생운동권이 맥없이 도망치고 말았던 원인을
과학적인 이론의 부족에서 찾으면서 81년의 1차적인 목표를 체계적인 사회과학 학습에 두었다.
이러다 보니 광주항쟁 1주기에도 정작 현지인 전남대에서는 시위 한건 없이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5월이 저물어 갈 무렵 전남대 교정에는 다량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아카시아 향기가 흩날리는 5월이란 매우 문학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유인물은
사회과학한다는 년놈들아 정신차려라 라는 욕설로 끝을 맺고 있었다.
재학생들의 미온적인 태도에 울화통이 터진 시인 박몽구씨와
몇몇 전남대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경고장을 보낸 것이다.
-----------------------------------------------------------------------------------
이대 학생들의 시위
81년 학생시위에 나타난 새로운 양상 중의 하나는 여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정권측은 이러한 현상에 내심 당황해 하면서도 이것을 비방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향신문에 81년 12월부터 1월까지 연재됐던 학생운동 관계 연재물 대학가의 음영
(특별취재반 명의로 되어 있으나 실제 필자는 박순식기자)은
이화여대에서 6월 4일 시위를 주동한 조기숙씨(무용과 78학번)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C양(조기숙씨)의 보이프렌드 K군이 데모를 주동하기 직전 C양에게 남긴 말은 C양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나 같은 남자는 사랑만이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일치하고 고난의 길을 같이 걷겠다는 여자라야 일생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몇일을 고민한 끝에 C양은 K군처럼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형기를 마치면 K군과 결합할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80년 5월 당시 4·19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대 선배들의 전철을 되밟지 말자는 각오로
서울역 시위에 참여했던 이대 학생운동권은 81년 당시 상당한 수준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조기숙씨는 이러한 조직과 후배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사과정에서 시위동기를 남자친구의 영향으로 진술했던 것이다.
이대 운동권의 제1의 목표는 이대는 데모 안하는 애들,
시집 잘 가려고 간판 따러온 애들 이란 인식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경찰 역시 그러한 이대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에서 시위가 일어나도 배후조직을 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이대 운동권은 더욱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
이대생들에게 얻어맞은 짭새
82년 10월 12일 광주의 별 박관현씨가 옥중투쟁중 사망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시기는 81년 박몽구씨가 욕설을 퍼부었던
전남대의 사회과학 한다는 년놈들사이에
자신들의 준비론적 자세에 대한 반성들이 퍼져나가고 있을 때였다.
전남대생들은 날마다 전대병원 분향소에 줄을 섰다.
1·2학년보다 오히려 3·4학년들이 더 많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박관현씨가 학생회장을 지낼 무렵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14일에는 주동자 없이도 전남대 강당 앞에 6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누군가가 메가폰까지 갖다 놓았다.
제발 누가 나와 지도를 해달라는 전남대생들의 열기였던 것이다.
이날부터 전남대 학생운동권이 이끌기 시작한 시위는
매일 1만명 이상씩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1주일을 끌었다.
전남대 81학번들의 전투성의 기틀은 이때부터 잡혀나갔다고 말해진다.
그들은 사회과학하는 년놈이었음과 동시에
대규모 대중시위라는 경험을 함께 쌓을 수 있었던 세대였기 때문이다.
11월 3일에는 서울시내 각 대학에서 교내 시위가 있었고
오후부터 종로에서는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중앙대의 김연명씨(사회복지학과 80학번)는 시위를 주동하면서
고추가루를 가지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미처 봉지를 풀기 전에 짭새들에게 붙잡혔다.
경찰서에서 김연명씨는 고추가루때문에 곤욕을 치뤘다.
그들은 이 고추가루를 시위용품이라 하여 압수해갔다.
학생운동에 대한 대중의 애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11.3 이대시위일 것이다.
이날 학생회관에서 울면서 학우들에게 살인정권 타도를 호소하던 임규완씨(사학과 79학번)는
9월 22일 시위의 생존자였다.
9월 22일 짭새들에게 임규완씨가 잡혀 수위실로 끌려 들어갈 무렵
마침 근처에서 졸업사진을 찍고 있던 사학과 4학년 학생들이
일제히 규완아 하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그들은 수위실 창문을 부수고 짭새들을 걷어차고 때리고 꼬집고 하여 임규완씨를 빼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학교를 빠져나온 임규완씨는 11월 3일 다시 한번 학내로 들어가
시위를 주동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날 학생회관 앞에서 임규완씨를 끌고가던 짭새들에게 또 다시 이대생들이 달려들었다.
학생들은 임씨를 빼내기 위해 짭새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급소를 얻어 맞은 짭새가 주저 앉은 사이에
누군가가 임규완씨에게 바바리코트를 벗어 던져주었다.
임규완씨는 바바리코트 주머니에서 코트주인이 애인에게서 받은 것으로 보이는 염주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 염주를 주인에게 돌려주지도 못하고 임규완씨는 1년간의 도발이 생활을 해야했다.
-------------------------------------------------
고공전 최고 기록을 수립하다
5월 18일 고대 시위에서는 가슴 아픈 광경이 벌어졌다.
이날 시위의 주동자들은 붉은 스프레이로 티셔츠의 가슴과 등에
광주학살 책임지라는 구호를 적어 넣었는데
짭새들이 달려들어 옷을 찢어 버리는 바람에
주동자중의 한사람인 임현주씨(정외과 80학번)가 브래지어 바람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여학생들의 이러한 수난에 대한 학생들의 대응은 성대 5월 23일 시위에서 나타났다.
이 날 시위에서는 사상 최초로 주동자 6명 전원이 여학생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고미경(생활미술학과 80학번), 오경희(가정대 80학번), 조갑덕(철학과 80학번),
김희순(사학과 80학번), 원유미(의상학과 80학번) 등 6명의 여학생들이
도서관 옥상에서 가정대 건물에서 그리고 지상에서 차례차례 나타나 시위를 이끌자
학생들은 물론 진압경찰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날 시위는 우연의 소산이 아니었다.
그간 학생운동권 내에서는 남학생에 비해 소수인데다
민감한 감수성을 가진 여학생들이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러한 운동경험을 평가하면서
성대에서는 여학생들만의 독자조직을 통해 학생활동가들을 길러내는 작업을 3년간 해온 결과
여학생들만으로 시위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무렵 학생운동권에는 각 대학의 특징을 장난스럽게 풍자한 별명들이 나돌았다.
서울대는 기회주의적 소셜리스트(사회주의자)이고
연대는 리버럴리스트(자유주의자),
고대는 내셔널리스트(민족주의자)라는 것인데
성대는 테러리스트라고 불렸다.
성대가 이러한 애칭을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각 시위에 대한 성대의 엄청난 물량투입(?) 때문이었다.
성대는 시위시간을 늘리기 위한 궁리 끝에 83년부터 인해전술을 사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당시 한 시위의 주동자수는 보통 3~4명 수준이었는데
3.22 시위에 9명을 투입한 성대는 5.25 시위에는 10명의 주동자가 시위를 이끈다.
진압경찰로서도 도무지 정신이 사나워 주동자들을 잡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날 시위에서 잡히지 않고 도망친 주동자들이
다음날도 계속 나타나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5월 23일 시작된 성대 시위는 무려 닷새간 계속된다
5.25 시위에서는 80년대 학생운동 사상 고공전 최고 기록이 수립됐다.
그 장본인은 손정진씨(산업심리학과 80학번, 현 이상수의원 비서관).
그는 성대 교수회관 뒷편에 있는 6~7층 높이의 굴뚝에 올라가 무려 1시간 30분을 버틴것이다.
손씨가 굴뚝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자 교수회관 뒷담에 붙은 주택가에서는 아줌마,
아이들 심지어 개까지 나와서 구경을 했다.
그런데 메가폰을 갖고 먼저 올라 가기로 했던 후배가 짭새들에게 잡혀가는 바람에
손씨는 육성으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굴뚝이 워낙 높아 이 소리가 잘 안들렸던지
멀리서 그를 본 학생들은 나쁜 놈, 굴뚝 위에까지 올라가 진압 지휘를 한다며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손씨가 뛰어내릴 것을 우려해 굴뚝위로 따라 올라갈 엄두를 못낸 경찰들은 어느 교수를 동원했다. 이 교수는 굴뚝밑에 오자마자 가장 아끼는 제자인 듯이 현수야 하며 애절하게 불렀다.
아닙니다. 정진인데요.
아무튼 내려와라.
결국 손씨는 민방위훈련할 때 쓰는 자루를 타고 내려왔다.
하도 목이 말라서 가지고 올라온 우유를 마셨는데 그것이 상한 것이었다.
-----------------------------------------------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의 진면목
이날 시위의 주동자중의 하나인 최아무개(국문학과 80학번)는
테러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날 오후 최군은 가두시위 예정장소로 가기 위해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길 건너편에 옛애인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한번 더 보려고 후다닥 길을 건너는 순간
최군의 등에 멘 쌕에 꽂혀있던 식칼이 근처에 있던 방범대원의 눈에 띄었다.
강도(?)를 잡으러 방범대원의 쫓아 오자 당황한 최군은
순간적으로 칼을 꺼내 방범대원을 위협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강도야 하는 외침에 주변의 시민 수십명이 그를 쫓기 시작해
끝내 강도(?)는 시민들에게 체포되었다.
성대 3.22팀과 5.25팀은 재판과정에서도 법정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했다.
검사에게 개새끼라고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신발을 벗어 판사에게 던지는 등
법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5공의 존재를 단 한치도 인정할 수 없다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흔히 운동권 학생들은 데모하느라 공부를 안한다고 지탄을 받는데
이것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얘기다.
그들은 학기 중에는 시위하느라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지만
일단 방학을 하면 합숙을 해가며 열심히 공부를 하곤 했다.
하여간 이들의 시험답안지는 장황하기는 해도 정답은 없는 것들이었는데
이에 짜증이 난 홍성찬 교수(연세대 경제학)는 시험감독으로 들어올 때마다
학생들에게 답안지에다 성명서 쓰지 말아요 하며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83년 7월경 춘천교도소에서는 재소자 구타와 부식 개선 문제로
구속 학생들이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이를 말리는 과정에서 한 교도관이
강원대 성조기 사건으로 구속된 송민석씨에게 빨갱이 새끼라고 욕을 했다.
이에 송씨는 검사도 법정에서 나더러 저항적 민족주의자라고 했는데
왜 빨갱이 새끼라 하느냐며 욕한 교도관을 모욕죄로 고소하겠다고 변호사를 불렀다.
당황한 교도소측은 부식 문제 등 제반의 처우개선 문제에 대한 해결을 약속하고
욕한 교도관도 송씨에게 사과를 했다.
그런데 이날 밤 학생들이 들어있는 감방의 식구통(감방에서 밥이 들어도는 구멍)문이
슬며시 열리더니 영계백숙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학생들의 단체행동을 무마하려는 교도소측의 미소 작전이었다.
학생들은 이것을 먹느냐 마느냐로 입씨름을 했고 이통에 영계백숙은 다 식어 버렸다.
결국 다음날 아침 따뜻하게 데워서 영양보충도 하고
다른 방 재소자들에게도 나눠주기로 하고 모두들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우원석씨(연대 토목공학과 76학번)는
영계백숙이 사라져 버린 것을 발견했다.
성미급한 몇 명의 겸연쩍은 미소와 함께.
------------------------------------------------
배정한, 송용일이란 악몽
86년의 학생운동을 얘기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구학련 위원으로서 치안본부의 프락치 노릇을 했던 배정한씨(서울법대 83학번)가 그 사람이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배씨를 똑똑하긴 한데 의지가 약했다고 평한다.
배씨는 86년 여름 치안본부에 잡혀가 김영환은 간첩이다. 그와 연결되면
너는 죽는다며 김영환만 잡아주면 살려주겠다는 협박과 회유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영환씨는 안기부에서 잡게 되고 실적을 못올려서인지
배씨는 11월에 청년동맹사건을 만들어 경찰에 넘기는가 하면
다수의 서울대 동료, 후배들을 치안본부에 잡아주었다.
그 방법도 교묘해서 사람들이 자꾸 잡혀가고 배씨가 의심을 받게 되자
배씨는 동료인 장유식씨가 프락치라는 소문을 퍼뜨려 조직 내에 의심과 반목을 조장했다.
이 무렵 배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소문을 확인할 겸해서 건대앞 그날 이후 라는 카페에서
배씨를 만난 장유식씨는 그날 이후 징역을 살게 됐다.
장씨가 배씨와 마주앉자마자 치안본부 사람들이 장유식 하며 그의 옆에 와 앉았던 것이다.
배씨는 마지막까지 시치미를 떼더니
그후에도 84학번 후배와 녹두출판사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잡아들이고 프락치 활동을 마감했다.
그는 서독으로 떠나기 전 길에서 우연히 학교 시절 같이 활동했던 동료를 만나자
어떻게 된거냐? 라는 힐난에 운동 자체가 반사회적인 것이고 나는 반운동권이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87년 남노련 등 노동운동권에서 프락치활동을 했던 송용일씨(연세대 경제학과 82학번)는
배정환씨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충격을 던졌다.
85~86년에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서
지금도 그를 아는 사람 중에는 그의 프락치 활동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는 능력있고 성실한 학생운동가였다.
그가 프락치 활동을 하게 된 계기 역시 보안사에서 일주일 정도 연행된 사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문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신념을 꺾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8개월이란 오랜 기간 동안 노동현장에 뛰어들면서까지
프락치 활동을 하는 악질적인 변절을 하게 됐던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이다.
이에 대해 84년까지 그를 지도했던 과선배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는 않지만 그가 운동이론에 대해서는 철저하려 하면서도
운동 자체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불안정함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끝내 고쳐주지 못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송씨는 행정적인 능력이 뛰어나고 만사를 명료하게 분석해내며
정연한 논리를 구사하는 언변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가정환경이나 성장배경 등 사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를 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고
공식적인 회의에서 문제제기를 해서 풀어야 할 문제를 비공식적으로 제기한다든지,
검거되면 자신이 마땅히 책임져야 할 부분을
동료에게 미루어놓는다든지하는 문제점을 나타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87년까지 그와 같이 일했던 원창연씨(정외과 82학번)는
당시 이 친구가 기질적으로 좀 비겁하구나 하고 생각하는 정도에서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결국 그로 인해 검거된 뒤 원씨는 자신과 송씨가 나눈 대화의 내용을
수사관들이 훤히 알고 있는 현실 앞에서
송용일의 변질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마침내 원씨는 송씨의 운동과정은
일을 열심히 하는 능숙한 운동관료로서의 성장과정이었다는 결론을 얻는다.
말잘하고 능력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선배들에 의해 선택돼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러나 거기서 그가 맺는 관계도 일을 중심으로 결합된 인간관계에 불과하며,
관료주의, 종파주의, 소영웅주의 등과 같은 독소들을 올바르게 해결하며
신념에 찬 운동가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이같은 조직 어디에서도 채워질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장래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은
대중운동 속에서 고통스럽지만 묵묵히 단련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지도자로 성장하는 것이라는 지당한 사실을
86년까지의 학생운동가들은 책에서만 배웠던 셈이다.
87년, 학생운동은 아니 80년대의 학생운동은 처음으로 대중과 부딪치게 된다.
그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발견하는가.
-----------------------------------------------
서울대에 출현한 눈사람과 타잔
81년 3월 19일은 한국의 공안당국자들에게는 악몽같은 날이었다.
80년 말 서울대 무림 조직을 일망타진했다고 믿은 그들은
적어도 향후 3~8년간 대학가에는 시위가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했었다.
그런데 개강 후 2주일이 채 되지도 않은 이날 바로 서울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이날 시위의 주동자는 유기홍씨(국사학과 77학번)와 문용식씨(국사학과 79학번) 등 5명.
이들은 5공치하의 삼엄한 대학에서 시위를 성공시키기 위해 고공전의 기법을 도입했다.
학생회관 3층의 한 방을 점거하여 플래카드를 내걸고
한 손엔 횃불을 들고 창틀에 올라서서 ‘반파쇼 민주화 투쟁선언’을 낭독한 것이다.
기습을 당한 학내 상주 경찰(이하 짭새)들이 도끼를 들고 달려왔다.
이날의 시위는 양동작전이기도 했다.
학생회관 맞은 편의 도서관 난간에는 박태견씨(국문학과 78학번)가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뒷날 학교측은 아크로폴리스에는 장미꽃을 잔뜩 심고 도서관 창에는 철망을 둘러쳤다.
그러나 이것은 시위를 막는데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학생들은 장미꽃은 훌쩍 뛰어넘고 철망은 칼로 찢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날 저녁 인문대 여학생 휴게실에서는 1학년 여학생모임이 열렸다.
모임의 목적은 민중과 지식인이라는 책을 가지고 독서토론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모여든 여학생들은 기왕의 프로그램은 제쳐두고
그 날 시위를 본 소감들을 얘기하기에 바빴다.
모두들 호의적인 반응들이었는데 유독 한 여학생이
시위학생들의 배후에는 불순세력이 있다며 끈질기게 시위를 비난했다.
모임이 끝나갈 무렵 주소록을 작성하기 위해
백지를 돌리던 모임의 주관자 석미주씨(종교학과 79학번)는
이 학생이 쓴 주소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바로 전두환씨의 딸 전효순씨였던 것이다.
몇일 후 총장을 통해 종교학과 과장에게 석미주씨를 조심시키라는 얘기가 내려왔다고 한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펴낸 백서에 따르면
민주화 운동 인정자 중 87년에만 보상자가 88명으로 1980년대에서 가장 많았고
민주화 운동 관련 사망자만해도 21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많은 학생 노동자 일반시민들이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다 쓰러졌으며 이는 고스란히 6월 항쟁의 자양분이 됐다는 얘기다.
제작진은 선영씨의 죽음 이후 송두리째 변한 가족들의 삶을 추적했다.
성실한 교직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사대 졸업반이었던 큰오빠,
평범한 학생이었던 두 남동생, 그저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 하는 것이 마냥 행복했던 어머니 등
가족 모두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특히 새벽녘에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귀신같은 몰골로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는
더 이상 예전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딸은 살았고, 내가 죽었다’고 절규하며 전경들에게 달려들어 연행되는 학생들을 빼앗아오고,
사지가 들려 시위장에서 끌려 나가는 거리의 투사가 됐다.
20년 전 전교조 활동을 시작한 아버지 역시 현재 지리산 골프장반대운동을 펴고 있다.
첫댓글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