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은 많이 더웠다. 이 놈의 날씨는 이제 4계절이 아니라 2계절로 나뉘는 것 같았다.
6월의 날씨가 이리 덥다니, 유이는 강의실 앞 복도 게시판에 서서 무엇인가를 읽고 있었다.
해준은 학생들에 섞여 지나가려다가 돌아보고 유이에게 다가갔다.
[뭐 해?]
[어. 알바 자리 알아보려구]
[또? 무슨 알바를 그렇게 많이 해? 너 그러다 쓰러지겠다]
유이는 보고 웃으며 팔을 들어 힘을 준다.
[왜 이래? 서유이 깡 하나로 버티는거 알면서?]
해준의 얼굴에 약간의 걱정이 묻어난다.
[그래도 좀 쉬어가면서 하지]
[...]
유이는 별달리 할 말이 없다.
유이가 벤치에 앉아 있고 곧 해준이 다가와 캔음료를 내민다.
유이는 받아서 얼굴에 먼저 댄다.
[아, 시원하다]
캔음료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유이의 볼을 타고 목을 타고 흘러내리며 유이의 쇄골뼈에 고이
는걸 바라보며 해준도 캔음료를 따서 한모금 마시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유이는 묻지도 않은 말을 먼저 꺼낸다.
[어학 연수 가려고...]
뜻밖이다.
[어학연수? 그래서?]
유이가 해준에게 빙긋 웃는다.
[어...한 일년. 예상하면 천만원 정도는 모아야 할텐데...]
잠시 허탈하게 웃는다.
[두달안에 그 돈 모을 수 있을까?]
입밖으로 꺼내 놓으면서도 유이는 그 말이 실현불가능하다는걸 안다.
단지 입밖에 꺼내 놓으므로써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같은 것이다.
해준도 대화에 무게를 두지 않고 이어나간다.
[그럼, 학교랑은 벌써 다 알아본거야?]
유이는 그런 해준이 고맙다.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그런 해준이...
[어, 영국 런던쪽에 있는 학교로...]
[그러다 돈 안생기면 어쩌려구?]
슬슬 핵심을 짚는 물음을 던진다. 의미없는 대화를 이제 끝날때가 온 것이다.
[그러게. 사고 쳤지 뭐...]
물음을 던져놓고 되려 안타까운 해준이 말한다.
[뭐가 그렇게 급해... 어학연수야 천천히 갔다와도 돼는건데...]
말속에 묻어나는 해준의 안타까움을 느끼고 유이는 정말 좋은 남자다라고 생각한다.
[그냥...답답해서....한국땅을 좀 벗어나고 싶네....]
해준은 뭔가 더 말할 듯 하다 그냥 입을 다문다. 다만 무릎위에 올려놓은 유이의 캔음료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그녀의 흰바지를 적시는걸 그냥 바라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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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험이 모두 끝나고 조교가 시험지를 걷어갔다. 모두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이제 시작되는 여름방학에의 계획들땜에 모두들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런 그들과 상관없듯 유이는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그럴때 해준이 다가왔다.
[알바 자리 구했어?]
[아니]
학생들로 엄청나게 붐비는 패스트푸드점 구석자리에 앉아서 유이는 해준을 기다리고 있다.
곧 해준이 햄버거와 음료를 사가지고 자리와 와 앉는다.
유이는 받으며 묻는다.
[넌 이제 방학인데 뭐 할꺼야]
[글쎄... 전국 일주나 해볼까?]
유이는 햄버거를 까서 한입 베어물고 말한다.
[좋겠다. 암튼 팔자 좋다니까]
해준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낸다.
[너 기가 막힌 알바자리 있는데 나 소개비 얼마줄래?]
유이는 곧 표정이 바뀐다.
[알바? 어떤 자린데? 돈은 많이 줘?]
반가운 소식이다. 요새는 알바자리조차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씩만 물어봐. 숨 넘어가겠다]
[얘기 꺼내지만 말고 확 풀어놔봐]
[딱 60일 일하고 천만원. 어때?]
유이는 갑자기 맥이 탁 풀린다. 이런 싱거운 말 할 녀석이 아닌데
[장난하냐! 민해준]
그런 유이에 아랑곳 없이 해준은 빙글빙글 웃는다.
[정말이라니까. 소개비 얼마줄꺼야? 그것부터 말해봐. 흥정은 제대로]
손을 유이에게 내민다. 유이는 그런 해준의 손바닥을 탁 쳐내며
[뭔진 모르겠지만 누가 두달치 알바비를 천만원이나 주겠니? 미치지 않고서야...]
해준은 꽤 진지해진다.
[너 할 생각 있어, 없어? 그것만 말해]
유이는 왠지 몸이 긴장됀다.
[나야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지. 그럼 딱 방학 끝나고 바로 영국으로 날라갈텐데...
정말 그런 알바자리가 있단 말야? 이상한 거 시키는거 아니지?]
[그게 좀...]
해준이 말끝을 삼킨다.
그럼 그렇지... 그러나 유이는 끈질기게 해준의 다음말을 기다린다.
버스 뒷자리에 용케 자리를 잡고 앉은 유이는 골똘하게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있다.
해준이 한 말을 곰곰 생각한다.
[일단 니가 제주도까지 내려가야 돼. 거기서 60일동안 꼼짝 못하고 일 해야돼고
마지막 날 니 통장으로 돈은 자동입금 될거야. 물론 그곳에 있는 동안 쓰게 되는
기타 비용들은 그쪽에서 다 지불해 줄거고...]
유이는 핸드폰을 만지작 거린다. 마음속에 갈등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종사촌인데 나이는 우리랑 동갑이야. 작년에 사고로 눈을 실명했어. 진행중인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사고 이후로 제주도에 틀허박혀서 꼼짝을 안해.
사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집 아들이라 실명 사실도 쉬쉬하고 있어. 그룹 차세대
후계자로 일찍부터 후계자수업중이었거든. 이번에 컴작업을 대신해줄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내가 너를 추천했어. 어때? 할 수 있겠어?
원래도 차가운 성격이긴 하지만 사고 이후로 더 나빠졌다더라고...일만 잘해주면
별로 부딪힐 일은 없을텐데...]
유이는 결심한 듯 단축번호 버튼을 길게 눌렀다.
[여보세요? 어...유이..나 그거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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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을 한 이상 일을 미룰일은 없었다. 유이는 비행기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들을
바라봤다. 제주도는 처음이다. 물론 비행기도 처음이다. 요즘은 고교 수학여행으로도
제주도를 간다지만 어찌 하다보니 처음 가보게 되는 제주도다.
해준은 공항에 도착하면 사람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배웅나온 김포공항에서
친절하게 말해줬다. 곧 전국일주를 할거라고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유이가 짐가방을 들고 나오자마자 한 남자가 다가왔다. 20대 후반에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였다.
[서유이씨죠?]
유이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예. 강도훈씨...]
그 남자는 유이의 가방을 받아들고 앞서 갔다.
북제주군 한림읍의 해안도로를 고급 검정 세단이 미끄러지듯 달려간다.
해안도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게 뻗어있었다. 유이는 열린 차창으로 바닷바람과
내음을 한껏 들이마셨다. 긴머리가 바람에 마구 헝클어졌지만 아랑곳없이 그렇게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한시간 반여...그런데 이곳은 마치 다른 세계같았다.
시간의 흐름이 서울과 달랐다. 지나가는 풍경조차, 향기로운 바람조차 폴라로이드 즉석
사진처럼 한장한장 박제되어 멈추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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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스레 가꾸고 꾸민듯한 정원을 지나 별장안까지 자신을 김비서라 소개한 남자가
가방을 들어다주고 나갔다. 곧 나이가 좀 있어보이는 가정부가 나와서 유이를 맞았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유이는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지금 도련님께서 주무시고 계시거든요. 요즘 통 잠을 못 주무시다가 이제 좀 잠이
드셔서요]
[예...] 긴장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어느세 긴장하고 있었던지 맥이 좀 풀린다.
[일단 이층 아가씨 방에서 쉬고 계세요. 깨시면 말씀 드릴게요]
[예] 방으로 안내하려 올라가는 가정부를 따라서 유이는 올라간다.
방은 정갈했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꼭 필요한 물건외엔 없었지만 그래도 허전하다
거나 그런 느낌은 없었다. 가구의 종류나 배치, 커텐과 침구의 색깔조차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었다.
유이는 커텐을 열어젖혔다. 싱그러운 제주의 푸른하늘과 시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기분이 솜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서울의 임대아파트 창으로 바라보던 그 우중충하고
숨이 막히는 그런 풍경이 아니라 끝을 모르는 푸른 하늘과 주위에서 유이를 가볍게 감싸는
공기의 흐름까지도...
[음. 좋았어. 덕분에 경치 좋은 곳에서 돈도 벌고. 이게 바로 일석일조 아니겠어]
유이는 마냥 행복해져서 침대에 앉아서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를 꼭꼭 눌렀다.
[민해준. 고맙다. 넌 역시 나의 베스트 프랜드야]
짐정리도 대충 끝난 유이는 침대에서 뒹글뒹글 거리고 있지만 무료함을 참을 수가 없다.
[벌써 몇시간째야. 오늘중에 볼 수나 있나?]
하는데 마침 노크소리가 들렸다. 유이는 얼른 일어나 몸매무새를 정리하는데
가정부가 들어서며 말했다.
[시장하시죠? 저녁 내려와서 드세요]
[예? 저..강도훈씨는?]
[도련님은 아직 주무세요. 오늘은 그냥 쉬시고 낼 뵙도록 하세요]
식당에서 유이는 혼자 밥을 먹고 있다.
유이는 수저를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이렇게 하루가 가는구나. 돈 벌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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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잠자리에 뒤척이다 새벽이 되서야 잠이 든 유이는 시끄럽게 들리는 노크소리를
어렴풋하게 들었지만 선뜻 깨지 못하고 비몽사몽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급기야
누군가 자신을 흔들며 깨우자 겨우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떴다.
가정부였다.
[왜 그러세요?]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묻어난다.
[도련님께서 지금 내려오시랍니다]
유이는 이불을 끌어당겨 다시 누으며 중얼댄다.
[저 어제 늦게 잤어요. 지금이 몇신데.... 나중에 보면 안될까요?]
가정부의 목소리가 당장 엄해진다.
[지금 당장 일어나세요! 아가씨는 우리 도련님의 고용인이에요!]
유이는 가정부의 차가운 목소리에 잠이 확 달아나면서 벌떡 일어났다.
[빨리 일층 서재로 오세요]
가정부가 나가버리자 유이는 시계를 본다. 새벽 여섯 시다.
[내가 미쳐....] 역시 돈 벌기는 쉽지가 않다. 게다가 큰 돈은....
서재앞에서 유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머리를 매만진다.
워낙 가정부가 재촉하기도 했거니와 상대방이 눈이 안보인다는 사실때문에
잠 옷 삼아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 차림에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묶고 바로
내려온것이다. 노크를 하니 안에서 예 소리가 들린다.
유이는 다시 한번 쉼호흡을 하면서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다.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2.
[ 중편 ]
그 해 여름 (1)
민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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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12 16:3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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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읽기는 낮에 읽었는데,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서 이제야 감상 답니다. ^^ 표현력 아주 좋으신 거 같아요. 저도 영국에 한 1년 나갔다 왔었지요, 대학 때. 그래선지 더욱 더욱.. 유이가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멋진 글 부탁드릴게요. 건필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