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어머니의 양산
석야 신웅순
오일장은 주로 아버지가 다니셨다. 어머니가 가시는 이 날만은 어머니에겐 모처럼의 설레는 나들이였다. 어머니는 한복을 입고 양산을 쓰고 장에 가셨다. 내 6,7세쯤이었고 어머니는 30대 초반이었으니 참 젊고 예뻤을 때였다. 집안일만 했던 어머니에겐 외출은 패션을 뽐낼 수 있는 모처럼의 설레는 시간이었다. 이 때만도 우리집은 괜찮았을 때였다. 양산을 쓰고 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복사꽃, 살구꽃 같이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어머니는 옷감 천을 이 것 저 것 꼼꼼하게 살폈다. 사지 않을 때도 있었다. 돈이 없어서 그랬는지 마음이 맞지 않아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 때 쓰고 갔던 어머니의 그 예쁜 양산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이후 어머니의 양산은 한 번도 쓴 일도 본 적도 없다. 어머니에겐 흙이 묻은 허름한 까만 몸빼가 전부였다. 밭일은 순전 어머니의 몫이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풀은 우후죽순이었다. 큰 밭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머니와 함께 매일 풀을 맸다.
산그늘이 저만치 내려오면 더위도 지쳤는지 어머니는 풀 매러 가자고 나를 불렀다.
싫었다. 더위는 참을 수 있어도 허리 아픈 것은 참기가 힘들었다. 일하기 싫어서 공부했다. 생전 어머니들은 일만하면서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해보면 위대하기에 앞서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화사하고 우아한 어머니의 양산은 어디로 갔을까. 어디다 숨겨놓고 하늘나라로 가셨을까.
“여보, 당신 외출할 때 꼭 양산 쓰고 다니세요.”
“잘못하면 큰 일 날 수 있어요.”
아내의 그 말이 늘 입에 붙어있다. 나는 여태껏 양산을 써 본 적이 없었다. 쓰고 안 쓰고의 온도차이가 10도라니 놀랍다. 나는 여름 한철 어지럼증을 경험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장시간 차를 운전한다거나 장기간 밖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있다.
날씨가 35도를 넘나든다. 가까운 거리도 양산을 쓰고 다니는데 아직은 남들의 시선이 조금은 쑥스럽다. 무슨 대수랴. 요샌 양산을 무료 대여해주는 곳도 있다고 한다. 온열 환자를 막기 위함이다.
그동안 양산은 여인의 전유물이었고 첨단을 걷는 중요한 패션 소재였다. 이젠 패션 이전에 양산은 자외선 차단까지 우리들의 생존 문제가 되었다. 남자들이 양산을 쓰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한여름 외출에 남자들도 양산을 써야 온열을 예방할 수 있다니 세상이 바뀌어도 백팔십도나 바뀌었다.
몇 년 전부터 마스크를 써야하고 얼마 전부터 모자를 써야하고 이제는 양산까지 써야하니 세상이 여기까지 왔다. 기후 변화를 예측할 수 없다. 지진, 폭우, 폭염의 재난문자들이 시시때때로 날아온다.
아들 딸들은 그렇다 치고 손주들은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조상들의 잘못된 삶 때문에 살아가기 힘들 후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도 마음이 무겁다. 마스크 대신 방독면을 쓰고 다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의 양산은 어머니의 양산처럼 화사하고 아름답다. 내 양산은 여름 숲처럼 칙칙하고 어둡다. 매미 소리가 양산 위로 소나기처럼 쏟아져 양산이 휘어질 것만 같다. 얼마나 더우면 한 여름 구름도 양산을 쓰고 다니는가. 가을도 양산을 쓰고 산녘 어디쯤 저만치서 어머니처럼 오고 있으리라.
- 2023.8.7.석야 신웅순의 서재,여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