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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집(雲集)
구름처럼 모인다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일컫는 말이다.
雲 : 구름 운(雨/4)
集 : 모을 집(隹/4)
(유의어)
무집(霧集)
운둔(雲屯)
운합무집(雲合霧集)
출전 :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하늘에 떠 있는 작은 물방울, 구름이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는 어려워 수시로 변한다. 새털구름이란 구름이 있듯이 새털같이 가볍고 종류도 많은 것이 구름이다.
'구름 운(雲)'의 아래에 있는 '이를 운(云)'은 처음 뭉게구름이 피어오른 모습을 그린 것인데 날씨와 관련된 글자임을 나타내기 위해 '비 우(雨)'를 더했다고 한다.
중국은 간체자로 운(云)을 다시 쓴다. '모을 집(集)'의 '나무 목(木)' 위에 있는 글자는 '새 추(隹)'로 새를 대표하는 조(鳥)에 비해 참새와 같은 작은 새를 가리켰다. 나무 위에 사는 새는 떼를 지어 모이니 많이 모인다는 뜻이 됐다.
처음엔 나무 위에 새가 세 마리나 있는 집(雧)이나 집(雦)을 모은다는 뜻으로 썼다는데 너무 복잡하여 줄였다. 참고로 새 세 마리라도 雥은 '새떼모일 잡'이란 다른 글자다.
구름처럼 모이고 새떼처럼 한 곳에서 재잘대면 그 수가 많음이 절로 드러난다. 이 말을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는 뜻으로 된 것은 '사기(史記)'가 처음이다. 중국의 첫 통일제국을 이룩한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뒤 학정에 시달린 농민들이 곳곳에서 들고 일어났다.
품팔이꾼 출신의 진승(陳勝)은 재능과 지혜도 없었으나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느냐며 난을 일으켰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수비하는 일에 동원됐다가 폭우를 만나 늦어지자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인 900여 명의 인부들이 적극 호응했다. 초(楚)나라를 넓힌다며 장초(張楚)라 이름 짓고 가는 곳마다 기세를 올렸다.
진승이 기치를 올릴 때 처음부터 위협적이 될 수 없었으니 그때의 묘사를 보자. 진시황 본기(本紀)에 있는 부분이다.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높이 세워 깃발로 삼으니(斬木爲兵 揭竿爲旗/ 참목위병 게간위기), 천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메아리가 울려 퍼지듯 호응했다(天下雲集響應/ 천하운집향응)."
최초의 대규모 농민반란으로 각지의 호족 무사들이 호응했다가 점차 분열돼 장초도 부하에 피살됐다. 하지만 이 기세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봉기를 촉발했고, 6개월 남짓 이어진 장초의 진승은 후일 은왕(隱王)으로 추존되며 제후나 왕의 반열인 세가(世家)에 이름을 올렸다.
굶과 같이, 새떼를 모으듯 많은 사람의 뜻을 결집한 진승은 전제 왕조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데는 성공했다. 구름이 높은 곳에 떠 있어 높은 지위를 꿈꾸는 청운(靑雲)이나 용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 듯 두각을 나타내는 풍운아(風雲兒)의 좋은 뜻이 많다.
반면 높은 곳에서 내려 보다가도 금방 흩어지니 운집무산(雲集霧散)이라는 말대로 '뜬구름을 잡다'란 말도 명심하는 것이 좋다. 어느 구름에 눈이 들며 어느 구름에 비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더 좋은 말이 있다. 구름보다 더 무상한 것이 인심이란 격언이다. "구름은 인간들보다 기분파가 아니다. 인간들의 마음이나 사상은 구름 못지않게 날아다닌다."
雲集(운집)
京鄕各地集都城(경향각지집도성)
경향각지에서 도성에 모였으니,
高喊鳴天邦土驚(고함명천방토경)
고함이 하늘을 울리고 나라 땅이 놀랐네.
政治兩分難尋協(정치양분난심협)
정치가 둘로 갈라져 협력을 찾기가 어려우니,
與忘經濟溺朝更(여망경제익조경)
여당은 경제 잊고 다시 북한에 빠지네.
提言公正露累次(제언공정노누차)
공정 문제는 여러 차례 드러났으니,
省察回心可索貞(성찰회심가색정)
성찰과 회심만이 곧음을 찾을 수 있네.
勢力極限皆退去(세력극한개퇴거)
극한 세력은 모두 물러나라고,
豊饒社會萬氓徵(풍요사회만맹징)
풍요사회를 만백성들이 요구하네.
■ 史記 本紀 권06. 秦始皇本紀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
이 장은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의 후반부로 사마천이 진나라의 역사기록을 마친 이후 자신의 평론과 가의의 산문인 과진론(過秦論)의 전문을 기록하였다.
과진론(過秦論)은 가의(賈誼)의 정론(政論) 산문의 대표작으로 상중하 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과진’은 진나라가 저지른 잘못이라는 뜻으로 진나라 멸망의 원인을 분석하여 한나라 왕조가 정권을 공고히 하도록 조언하는 내용이다.
고문관지(古文觀止)에 실려 있는 가의의 과진론은 상편에서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형세와 그 후에 멸망한 주요 원인을 총괄적으로 논하였으며, 중편에서는 시황제(始皇帝)의 정확한 정책 결핍과 뒤를 이었던 호해(胡亥)가 그 전철을 밟으면서 아무런 개선도 하지 않았음을 분석하였다. 하편에서는 진나라 정권이 위급한 때에 군주인 자영(子嬰)은 이를 일으켜 세울 만한 능력이 없었음을 설명하였다.
본 장에서는 고문관지(古文觀止)에 실려 있는 3편 중 하편을 상편으로 기록하였으므로 순서가 바뀌어 있다.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에 실려 있는 과진론의 내용은 과진론의 상편 만 수록한 것이다.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 1
(1)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秦之先伯翳, 嘗有勳於唐虞之際, 受土賜姓.
진나라의 선조 백예(伯翳)는 일찍이 요임금과 순임금 시대에 공을 세워 봉지와 성을 하사 받았다.
及殷夏之閒微散.
이후 하나라와 은나라에 이르러 쇠퇴하여 흩어졌다.
至周之衰, 秦興, 邑于西垂.
주나라가 쇠퇴할 무렵 진나라가 일어나 서쪽 변경에 도읍을 정했다.
自繆公以來, 稍蠶食諸侯, 竟成始皇.
진 목공(秦 繆公) 이래 차츰 제후들을 잠식했고, 결국 시황이 성취했다.
始皇自以為功過五帝, 地廣三王, 而羞與之侔.
시황은 스스로 공적은 오제(五帝)를 뛰어넘고 땅은 삼왕(三王)보다 넓다며 이들과 함께 비교되는 것조차 수치스러워 했다.
善哉乎賈生推言之也. 曰:
훌륭하도다! 가생의 평론. 가생은 '과진론(過秦論)'에서 이렇게 말했다.
(2)
秦并兼諸侯山東三十餘郡, 繕津關, 據險塞, 修甲兵而守之.
진나라는 제후들을 병탄하고 산동에 30여 군을 설치하여 나루터와 관문(關門)을 수리하고 험준한 요새를 거점으로 무기를 정비하고 그곳을 굳게 지켰다.
然陳涉以戍卒散亂之眾數百, 奮臂大呼, 不用弓戟之兵, 鉏櫌白梃, 望屋而食, 橫行天下.
그러나 진섭이 흩어져 있는 수졸(戍卒)의 무리 수백 명을 모아 팔을 걷어붙이고 고함을 지르며, 활과 창 같은 무기 대신 호미와 몽둥이 따위의 농기구를 들고 아무데서나 식사를 하며 천하를 누볐다.
秦人阻險不守, 關梁不闔. 長戟不刺, 彊弩不射.
진나라 군대는 험준한 요새를 갖고도 지키지 않았고 관문과 교량을 봉쇄하지 않았다. 긴 창으로 적을 찌르지도 않았고, 강력한 활을 쏘지도 않았다.
楚師深入, 戰於鴻門, 曾無藩籬之艱.
초나라인 진승의 군대가 깊숙이 쳐들어와 홍문에서 싸웠지만 결국 울타리조차 되지 못했다.
於是山東大擾, 諸侯并起, 豪俊相立.
이에 산동이 크게 시끄러워져 제후들이 일제히 일어났고 호걸들이 잇달아 자립했다.
秦使章邯將而東征, 章邯因以三軍之眾要市於外, 以謀其上.
진나라는 장한(章邯)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동방을 정벌하게 했으나 장한은 이를 틈타 삼군의 병력으로 외부의 제후들과 거래하여 황제에게 모반을 했다.
群臣之不信, 可見於此矣.
신하들이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子嬰立, 遂不寤.
자영이 즉위했으나 끝내 깨닫지 못했다.
藉使子嬰有庸主之材, 僅得中佐, 山東雖亂, 秦之地可全而有, 宗廟之祀未當絕也.
만약 자영에게 평범한 군주의 재능이 있고 중간 정도 보좌할 신하를 알았다면 비록 산동이 혼란에 빠졌더라도 진나라는 영토를 보전할 수 있었고 종묘 제사 또한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3)
秦地被山帶河以為固, 四塞之國也.
진나라의 영토는 산으로 가로막히고 큰 강으로 에워싸여 견고하게 방어가 되어 사방이 요새와 같은 나라이다.
自繆公以來, 至於秦王, 二十餘君, 常為諸侯雄.
진 목공으로 부터 진 시황에 이르기까지 20여 명의 군주들은 늘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豈世世賢哉.
이것이 어찌 대대로 현명했기 때문이겠는가?
其勢居然也.
그 지리적 위치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且天下嘗同心并力而攻秦矣.
더구나 천하가 일찍이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진나라를 공격했다.
當此之世, 賢智并列, 良將行其師, 賢相通其謀, 然困於阻險而不能進, 秦乃延入戰而為之開關, 百萬之徒逃北而遂壞.
그 당시 유능하고 지혜로운 자들이 즐비하여 뛰어난 장수들은 각국의 군사를 지휘했고, 유능한 재상들은 그 계책을 서로 나누었지만 험준한 지세에 막혀 진격할 수 없었으며, 진나라가 이들을 맞아들여 싸우려고 관문을 열자 백 만의 연합군 병사가 패주하다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豈勇力智慧不足哉.
어찌 용기와 힘 그리고 지혜가 부족해서였겠는가?
形不利, 勢不便也.
지형이 불리하고 지세가 유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秦小邑并大城, 守險塞而軍, 高壘毋戰, 閉關據阨, 荷戟而守之.
진나라는 작은 읍의 군대를 큰 성과 합치고 험준한 요새에 주둔하여 지키며 보루를 높이 쌓고 싸우지 않으면서 함곡관의 관문을 닫고 요충지를 거점으로 삼아 무기를 걸머진 채 방비했다.
諸侯起於匹夫, 以利合, 非有素王之行也.
제후들은 평민에서 일어나 이익으로 합쳐진 자들이지 왕으로서의 덕행을 갖춘 자도 없었다.
其交未親, 其下未附, 名為亡秦, 其實利之也.
제후들은 서로 친하지도 않았고, 부하들도 역시 따르지 않았으며, 진나라의 멸망을 명분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 때문이었다.
彼見秦阻之難犯也, 必退師.
이들이 진나라가 험난한 요새로 둘러싸여 침범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틀림없이 군대를 퇴각시켰을 것이다.
安土息民, 以待其敝, 收弱扶罷, 以令大國之君, 不患不得意於海內.
이후 자신의 나라를 안정시키며 백성을 평안하게 하고, 다른 나라들이 쇠퇴하기를 기다려 약소한 나라를 거두고 지쳐 있는 나라를 도와 대국의 군주로 호령할 줄 알았다면 천하에 뜻을 얻지 못할까 근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貴為天子, 富有天下, 而身為禽者, 其救敗非也.
천자가 되어 고귀해지고 천하를 소유해 부유해졌는데도 사로잡히는 몸이 된 것은 패망을 구하는 책략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4)
秦王足己不問, 遂過而不變.
진시황은 자신에게 만족하여 남에게 묻지도 않았고 계속 잘못을 범해도 고치지 않았다.
二世受之, 因而不改, 暴虐以重禍.
2세 황제는 그것을 답습하며 고치지 않고 포악하게 굴어 재난을 가중시켰다.
子嬰孤立無親, 危弱無輔.
자영(子嬰)은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위태롭고 약했으며 보필할 신하가 없었다.
三主惑而終身不悟, 亡, 不亦宜乎.
세 군주가 미혹되었으나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으니 멸망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當此時也, 世非無深慮知化之士也, 然所以不敢盡忠拂過者, 秦俗多忌諱之禁, 忠言未卒於口而身為戮沒矣.
그 당시 세상을 깊게 생각하여 시세의 변화를 아는 선비가 없지는 않았으나 감히 나서 충성을 다해 잘못을 바로 잡으려 하지 못했던 것은 진나라의 습속에 꺼리고 피하여야 할 금기가 많아 충성스러운 간언을 하는 자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故使天下之士, 傾耳而聽, 重足而立, 拑口而不言.
그래서 천하의 선비들에게 귀를 기울여 듣게만 하고, 발은 모은 채 입을 꾹 닫고 아무 말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是以三主失道, 忠臣不敢諫, 智士不敢謀, 天下已亂, 姦不上聞, 豈不哀哉.
이로 인해 세 군주가 길을 잃어도 충신은 감히 직언하지 않고 지혜로운 선비는 감히 계책을 내지 않으니 천하가 어지러워도 간악한 일이 황제에게 알려지지 못했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先王知雍蔽之傷國也, 故置公卿大夫士, 以飾法設刑, 而天下治.
선왕(先王)은 언로를 막는 것이 나라를 망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공경과 대부와 사(士)를 두어 법령을 정비하고 형벌을 정해 천하를 다스렸던 것이다.
其彊也, 禁暴誅亂而天下服.
나라가 힘이 강했을 때는 포악함을 막고 난을 토벌하여 천하를 복종시켰다.
其弱也, 五伯征而諸侯從.
나라가 힘이 약했을 때는 오백(五伯)이 정벌하여 제후들이 순종했다.
其削也, 內守外附而社稷存.
나라가 약해졌을 때는 안으로는 지키고 밖으로는 가까이 지내 사직을 보존했다.
故秦之盛也, 繁法嚴刑而天下振; 及其衰也, 百姓怨望而海內畔矣.
그래서 진나라가 강성했을 때는 법령이 번잡하고 형벌이 엄격하여 천하를 떨게 했다. 그러나 쇠약해지자 백성이 원망하고 천하가 배반했다.
故周五序得其道, 而千餘歲不絕.
그래서 주나라는 다섯 작위의 제도가 바른 길을 걸었기에 천여 년 동안 나라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秦本末并失, 故不長久.
그러나 진나라는 본말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由此觀之, 安危之統相去遠矣.
이렇게 볼 때 안정과 위기의 원리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野諺曰; 前事之不忘, 後事之師也.
시골 속담에 이르기를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이 뒷날의 스승이 된다'라고 하였다.
是以君子為國, 觀之上古, 驗之當世, 參以人事, 察盛衰之理, 審權勢之宜, 去就有序, 變化有時, 故曠日長久而社稷安矣.
이로써 군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는 상고 시대를 자세히 살펴 당대를 시험해 보고, 또 인간사를 고찰하여 성쇠의 이치를 관찰하며, 권세가 적당한지를 세심히 살펴 거취에 순서를 두고 변화하는 때를 좇은 덕분에 오래도록 계승되고 사직이 안정되었던 것이다.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 2
(1)
秦孝公據殽函之固, 擁雍州之地, 君臣固守而窺周室, 有席卷天下, 包舉宇內, 囊括四海之意, 并吞八荒之心.
진 효공(秦 孝公)은 효산(殽山)과 함곡관(函谷關)의 험준한 지세를 점거하여 옹주(雍州) 땅을 지키고 군주와 신하가 굳게 지키면서 주(周)나라 왕실을 엿보았으니, 천하를 석권하고 보자기로 싸듯 온 세상을 모두 차지하고, 사해(四海)를 주머니 속에 쓸어 넣어 천하를 병탄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當是時, 商君佐之, 內立法度, 務耕織, 修守戰之備, 外連衡而鬬諸侯, 於是秦人拱手而取西河之外.
이 당시 상앙(商鞅)이 진효공을 보좌하여 안으로는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고 농사와 길쌈에 힘쓰게 하였으며, 수비와 공격할 장비를 수리하였으며, 밖으로는 연횡책을 써서 제후(諸侯)들 끼리 싸우게 하였으므로 이에 진(秦)나라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서하(西河) 밖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다.
(2)
孝公既沒, 惠王武王蒙故業, 因遺冊, 南兼漢中, 西舉巴蜀, 東割膏腴之地, 收要害之郡.
효공(孝公)이 죽은 뒤에 혜문왕(惠文王), 무왕(武王) 등은 진 효공이 남긴 사업을 계승하고 물려준 계책을 좇아 남쪽으로는 한중(漢中)을 병탄하고 서쪽으로는 파(巴)와 촉(蜀)을 빼앗고, 동쪽으로는 기름진 땅을 빼앗아 가지며 요충지가 될 만한 여러 군을 손에 넣었다.
諸侯恐懼, 會盟而謀弱秦.
제후들은 두려워하며 회맹을 하여 진나라의 세력을 약화시킬 방법을 논의했다.
不愛珍器重寶肥美之地, 以致天下之士, 合從締交, 相與為一.
진기한 기물과 귀중한 보물, 기름진 땅을 아끼지 않으면서 천하의 훌륭한 인재들을 불러들여 합종하여 교분을 맺고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當是時, 齊有孟嘗, 趙有平原, 楚有春申, 魏有信陵.
당시 제(齊)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었고 조(趙)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이 있었으며, 초(楚)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이 있었고 위(魏)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었다.
此四君者, 皆明知而忠信, 寬厚而愛人, 尊賢重士, 約從離衡, 并韓魏燕楚齊趙宋衛中山之眾.
이 네 공자는 모두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웠으며, 관대하고 후덕하여 백성을 사랑할 줄 알았고, 어진 이를 존경하며 선비들을 중히 여겨 이들은 합종책(合從策)을 맺고 연횡책(連衡策)을 깨뜨려 한(韓), 위(魏), 연(燕), 초(楚), 제(齊), 조(趙), 송(宋), 위(衛), 중산(中山)의 군사를 연합하였다.
於是六國之士有寧越徐尚蘇秦杜赫之屬為之謀, 齊明周最陳軫昭滑樓緩翟景蘇厲樂毅之徒通其意, 吳起孫臏帶佗兒良王廖田忌廉頗趙奢之朋制其兵.
이에 6국의 인재 중에 영월(寗越), 서상(徐尙), 소진(蘇秦), 두혁(杜赫) 등이 그 계책을 만들고, 제명(齊明), 주최(周最), 진진(陳軫), 소활(召滑), 누완(樓緩), 적경(翟景), 소려(蘇厲), 악의(樂毅)의 무리가 각국의 의견을 소통시켰으며, 오기(吳起), 손빈(孫臏), 대타(帶陀), 아량(兒良), 왕료(王廖), 전기(田忌), 염파(廉頗), 조사(趙奢)의 무리가 군대를 통솔했다.
常以十倍之地, 百萬之眾, 叩關而攻秦.
그들은 일찍이 진나라보다 열 배가 되는 땅과 백만 대군으로 함곡관을 쳐서 진나라를 공격하였다.
秦人開關延敵, 九國之師逡巡遁逃而不敢進.
진나라는 관문을 열고 적을 끌어들이니 9개국의 군대는 주저하다가 도망치며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秦無亡矢遺鏃之費, 而天下諸侯已困矣.
진나라는 화살 하나, 화살촉 하나 허비하지 않고 천하 제후들을 곤경에 몰아놓았다.
於是從散約解, 爭割地而奉秦.
이리하여 합종의 약속은 와해되고 앞을 다투어 땅을 떼어 진나라에 바쳤다.
秦有餘力而制其敝, 追亡逐北, 伏尸百萬, 流血漂鹵.
진나라는 남은 힘으로 피폐해진 세력을 제압하고 패배하여 도망가는 적들을 추격하여 죽이니 엎어진 시신이 백만을 헤아리고 흐르는 피에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因利乘便, 宰割天下, 分裂河山, 彊國請服, 弱國入朝.
진나라는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편리한 대로 천하를 마음대로 자르고 산하를 쪼개니 강국은 복종을 청하고 약한 나라는 조회했다.
延及孝文王莊襄王, 享國日淺, 國家無事.
뒤를 이은 효문왕(孝文王)과 장양왕(莊襄王)에 이르러서는 재위기간이 짧았던 탓에 나라에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3)
及至秦王, 續六世之餘烈, 振長策而御宇內, 吞二周而亡諸侯, 履至尊而制六合, 執棰拊以鞭笞天下, 威振四海.
진 시황에 이르러서는 6대의 유업을 계승하여 긴 채찍을 휘둘러 말을 몰듯 천하를 제압하여 동주(東周)와 서주(西周)를 병탄하고 제후들을 멸망시켜 지존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통제했는데, 곤봉과 칼자루를 쥐고 천하를 매질하니 그 위세가 사해를 떨게 했다.
南取百越之地, 以為桂林象郡, 百越之君俛首系頸, 委命下吏.
남쪽으로 백월(百越)의 땅을 취해 계림군(桂林郡)과 상군(象郡)으로 삼으니 백월의 군주는 머리를 숙이고 목에 인끈을 걸고 나와 관리에게 목숨을 맡겼다.
乃使蒙恬北筑長城而守藩籬, 卻匈奴七百餘里, 胡人不敢南下而牧馬, 士不敢彎弓而報怨.
이어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북쪽에 장성을 쌓아 변방을 지키게 하여 흉노를 7백여 리 밖으로 몰아내니 흉노족은 감히 남쪽으로 내려와서 말을 방목하지 못했고, 6국의 병사들은 감히 활을 당겨 원한을 갚으려 들지 못했다.
於是廢先王之道, 焚百家之言, 以愚黔首.
이에 선왕들의 치도를 버리고 백가의 서적을 불태워 백성들에게 우민정책을 실행했다.
墮名城, 殺豪俊, 收天下之兵聚之咸陽, 銷鋒鑄鐻, 以為金人十二, 以弱黔首之民.
이름난 성을 부수고 호걸들을 죽였으며, 천하의 병기를 함양으로 거두어들인 뒤 이를 녹여서 종을 만들고 금인(金人) 12개를 주조함으로써 백성들을 약화시켰다.
然後斬華為城, 因河為津, 據億丈之城, 臨不測之谿以為固.
이어 화산(華山)을 깎아 성을 만들었으므로 황하를 해자로 삼게 되었으며, 억 장이나 되는 높은 성에 의지하여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골짜기를 굽어보며 굳건히 지켰다.
良將勁弩守要害之處, 信臣精卒陳利兵而誰何, 天下以定.
뛰어난 장수와 강력한 쇠뇌로 요충지를 지키고, 믿을 만한 신하를 두고, 정예병이 날카로운 병기를 들고 누구냐고 물어보며 검문하자 천하가 평정되었다.
秦王之心, 自以為關中之固, 金城千里, 子孫帝王萬世之業也.
진 시황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관중(關中)의 견고함이 천리에 이르는 철옹성 같아 제왕의 업이 자손만대로 전해질 것이라 여겼다.
(4)
秦王既沒, 餘威振於殊俗.
진 시황(秦 始皇)이 죽은 뒤에 그 남은 위세가 풍속이 다른 곳까지 떨쳤다.
陳涉, 罋牖繩樞之子, 甿隸之人, 而遷徙之徒, 才能不及中人, 非有仲尼墨翟之賢, 陶朱猗頓之富, 躡足行伍之閒, 而倔起什伯之中, 率罷散之卒, 將數百之眾, 而轉攻秦.
진섭은 가난한 집 자식이었으며, 고용살이 하는 농민으로 수자리에 징발된 무리였고, 재능은 보통 사람에도 못 미쳤으며, 공자나 묵자의 현명함도 없고, 도주(陶朱)나 의돈(猗頓)처럼 부유한 것도 아니었으나 병졸의 대오(隊伍)에 참여했다가 갑자기 농민의 대열에서 일어나 피곤에 지쳐 흩어져 있던 병사들을 이끌고 수백의 무리를 통솔하여 방향을 바꾸어 진나라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斬木為兵, 揭竿為旗, 天下雲集響應, 贏糧而景從, 山東豪俊遂并起而亡秦族矣.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높이 들고 일어나니 천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며 호응하여 양식을 짊어지고 그림자처럼 따랐으며, 산동의 호걸들이 함께 들고 일어나 진나라 왕족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5)
且夫天下非小弱也, 雍州之地, 殽函之固自若也.
또 진나라의 천하는 작아지지도 약해지지도 않았으며, 옹주의 땅과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함도 이전과 같았다.
陳涉之位, 非尊於齊楚燕趙韓魏宋衛中山之君; 鉏櫌棘矜, 非錟於句戟長鎩也.
진섭의 지위는 제(齊), 초(楚), 연(燕), 조(趙), 한(韓), 위(魏), 송(宋), 위(衛), 중산(中山)의 군주들보다 존귀하지 않았고, 호미와 작대기, 괭이자루와 창자루는 갈고리 창이나 긴 창보다 날카롭지도 않았다.
適戍之眾, 非抗於九國之師.
수자리에 유배 갔던 무리들은 9국의 군대에 맞설 수 없었다.
深謀遠慮, 行軍用兵之道, 非及鄉時之士也.
주도면밀하고 생각이 원대하거나 군사를 움직이는 용병술도 과거 모사들에게 미칠 수 없었다.
然而成敗異變, 功業相反也.
그러나 성패는 이변이었고, 공적은 서로 반대로 나타났다.
試使山東之國與陳涉度長絜大, 比權量力, 則不可同年而語矣.
시험 삼아 산동의 나라들과 진섭의 장단과 대소를 가늠하고 권세와 실력을 비교해 보게 한다면 함께 취급하여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然秦以區區之地, 千乘之權, 招八州而朝同列, 百有餘年矣.
그러나 진나라는 작은 땅과 제후의 권력을 가지고도 8개 주(州)를 빼앗아 동등한 6개국의 제후들을 조회하게 한 지 100년이 넘었다.
然後以六合為家, 殽函為宮, 一夫作難而七廟墮, 身死人手, 為天下笑者, 何也.
그런 다음 천하를 한 집으로 만들고 효산과 함곡관을 궁으로 삼았는데 한낱 사내 하나가 난을 일으키자 천자의 사당이 무너지고 군주가 남의 손에 죽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어째서인가?
仁義不施而攻守之勢異也.
인의를 베풀지 않았고,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 3
(1)
秦并海內, 兼諸侯, 南面稱帝, 以養四海, 天下之士斐然鄉風, 若是者何也.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제후들을 병탄하고 남면하여 황제를 칭하며 사해를 통치하자 천하의 인재들이 순종하여 진나라에 귀순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曰: 近古之無王者久矣.
대답은 이러하다. '근래에 왕 다운 왕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周室卑微, 五霸既歿, 令不行於天下, 是以諸侯力政, 彊侵弱, 眾暴寡, 兵革不休, 士民罷敝.
주나라 왕실의 역량은 미약했고, 오패(五霸)는 이미 죽어 천자의 명령이 천하에 행해지지 않았으며 이에 제후들은 무력으로 서로를 정벌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략하고 대국은 소국을 모질게 구니 전쟁이 쉴 날이 없어 군사와 백성들은 완전히 지쳐버리게 되었다.
今秦南面而王天下, 是上有天子也.
지금 진 시황이 남면하여 천하의 왕 노릇을 하니 이는 위에 천자가 있는 것과 같았다.
既元元之民冀得安其性命, 莫不虛心而仰上, 當此之時, 守威定功, 安危之本在於此矣.
즉 목숨의 안전을 바라던 선량한 백성들은 누구나 마음을 비우고 황제를 바라보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이 때 위엄을 지키고 공적을 정해야 할 것이니 안위의 근본이 여기에 달렸던 것이다.
(2)
秦王懷貪鄙之心, 行自奮之智, 不信功臣, 不親士民, 廢王道, 立私權, 禁文書而酷刑法, 先詐力而後仁義, 以暴虐為天下始.
진 시황은 탐욕스럽고 비루한 마음을 품고 단지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려고 하여 공신들을 믿지 않고 선비와 백성을 가까이 하지 않고 왕도를 폐지하고 사사로운 권위를 세우고 서적 등을 금지시키고 형법을 가혹하게 적용하고, 거짓과 권력을 앞세우고 인의는 뒤로 밀쳐둔 채 포악함으로 다스리는 것을 천하의 전제로 삼았다.
夫并兼者高詐力, 安定者貴順權, 此言取與守不同術也.
무릇 천하를 통일할 때는 거짓과 권력을 중시하고, 나라가 안정되었을 때는 권력의 변화에 순종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이는 천하를 얻을 때와 지키는 때의 통치술이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秦離戰國而王天下, 其道不易, 其政不改, 是其所以取之守之者(無)異也.
진나라는 전국시대를 거쳐 천하의 왕이 되었음에도 방침을 바꾸지 않았고 정치를 개혁하지도 않았으니, 이는 천하를 얻고 지키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孤獨而有之, 故其亡可立而待.
홀로 고립된 채 천하를 소유하려 했기 때문에 그 멸망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던 것이다.
借使秦王計上世之事, 并殷周之跡, 以制御其政, 後雖有淫驕之主而未有傾危之患也.
만약에 진 시황이 지난 세대의 일을 헤아리고 은나라와 주나라의 자취를 따라서 자신의 정책을 실행하였다면 이후 비록 방탕무도하고 교만한 군주가 나올지라도 나라가 기울고 위태로워지는 환난을 없었을 것이다.
故三王之建天下, 名號顯美, 功業長久.
그런 까닭에 삼왕(三王)은 나라를 세워 그 명성을 아름답게 드러내고 공적을 길이 전한 것이다.
(3)
今秦二世立, 天下莫不引領而觀其政.
지금 2세 황제가 즉위하자 천하가 목을 길게 빼고 그 정책을 지켜보지 않는 자가 없었다.
夫寒者利裋褐而饑者甘糟糠, 天下之嗷嗷, 新主之資也.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누더기 옷도 보탬이 되고, 굶주린 자에게는 술지게미와 쌀겨도 달콤하기 마련이며, 천하 백성들의 아이고 하고 슬피 우는 소리는 새로운 군주에게는 밑천이 되는 것이다.
此言勞民之易為仁也.
이 말은 고달픈 백성들에게는 어진 정치를 베풀기 쉽다는 뜻이다.
鄉使二世有庸主之行, 而任忠賢, 臣主一心而憂海內之患, 縞素而正先帝之過, 裂地分民以封功臣之後, 建國立君以禮天下, 虛囹圉而免刑戮, 除去收帑汙穢之罪, 使各反其鄉里, 發倉廩, 散財幣, 以振孤獨窮困之士, 輕賦少事, 以佐百姓之急, 約法省刑以持其後, 使天下之人皆得自新, 更節修行, 各慎其身, 塞萬民之望, 而以威德與天下, 天下集矣.
만약 2세 황제가 평범한 군주의 덕행으로 충직하고 현명한 사람을 임용하고 신하와 군주가 한 마음으로 천하의 고난을 염려하고, 상중에 소복을 입고 선제의 잘못을 바로 잡고, 땅을 백성에게 고루 나누어주며 공신의 후손들에게 봉토를 하고, 제후국을 세워 군주를 옹립해 천하를 예로 다스리고, 사면령을 내려 감옥을 비우고 형벌을 면제하여 죄를 연좌시키는 더러운 형벌을 폐지하여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창고와 곳간을 열어 재물과 돈을 나누어주어 의지할 곳 없는 고아와 홀아비 및 곤궁한 선비들을 구제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고 노역을 줄여 백성의 긴급한 곤란을 도와주고, 법령을 간소화시키고 형벌을 덜어 죄인이 훗날의 기회를 갖게 하고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스스로 새롭게 함으로써 절조를 바꾸고 품행을 수양하여 각자 몸가짐을 삼가게 하고 모든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켜 위엄과 덕으로 천하 사람들을 대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을 것이다.
即四海之內, 皆讙各自安樂其處, 唯恐有變, 雖有狡猾之民, 無離上之心, 則不軌之臣無以飾其智, 而暴亂之姦止矣.
만약 천하 도처가 모두 기뻐하며 각자의 처한 자리에서 평안히 생업을 즐기며 오직 변란이 일어날까 걱정하는 정도라면, 설령 교활한 백성이 있더라도 군주를 배신할 마음을 먹지 못하니, 모반을 꾀하는 신하도 간사함을 감출 길이 없을 것이며, 사납고 어지러운 음모도 그쳤을 것이다.
二世不行此術, 而重之以無道, 壞宗廟與民, 更始作阿房宮, 繁刑嚴誅, 吏治刻深, 賞罰不當, 賦斂無度, 天下多事, 吏弗能紀, 百姓困窮而主弗收恤.
2세 황제는 이와 같이 통치 방법을 실행하지 않고 오히려 포악무도한 짓을 거듭하면서 종묘와 백성에게 해를 끼치면서 아방궁을 다시 짓고, 형벌을 번잡하게 만들어 사형을 가혹하게 하여, 관리가 일을 하면서 가혹함이 심하고 상벌은 부당하고 세금은 한도가 없었으니 천하에 일은 많으나 관리들이 감당할 수 없었고 백성은 곤궁한데 군주는 구휼에 나서지 않았다.
然後姦偽并起, 而上下相遁, 蒙罪者眾, 刑戮相望於道, 而天下苦之.
간사함과 거짓이 한꺼번에 일어난 연후에는 위아래가 서로 기만하고 죄를 덮어쓰는 자들이 많아져 형벌을 받은 자들이 길거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대할 정도로 넘쳐나니 천하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했다.
自君卿以下至于眾庶, 人懷自危之心, 親處窮苦之實, 咸不安其位, 故易動也.
군후와 공경은 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스스로 위태롭게 여기는 마음을 품게 되니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지경 속에서 모두 자리에 불안을 느꼈으므로 쉽게 동요될 수밖에 없었다.
是以陳涉不用湯武之賢, 不藉公侯之尊, 奮臂於大澤而天下響應者, 其民危也.
그래서 진섭이 상나라 탕왕이나 주나라 무왕과 같은 현능함을 갖추지도 않았고, 공후(公侯)와 같은 존귀한 신분을 빌리지도 않았으면서도 대택(大澤)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서니 천하가 이에 호응했던 것은 그 백성들이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故先王見始終之變, 知存亡之機, 是以牧民之道, 務在安之而已.
그래서 선왕은 일의 처음과 끝의 변화를 보고 존망의 기미를 살펴서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백성을 편안히 하는데 힘써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天下雖有逆行之臣, 必無響應之助矣.
비록 천하에 역행하는 신하가 있을지라도 틀림없이 이에 호응하는 자가 없었을 것이다.
故曰; 安民可與行義, 而危民易與為非. 此之謂也.
그래서 이르기를, '안정된 백성은 더불어 의를 행할 만하고, 위기에 처한 백성은 더불어 나쁜 짓을 하기 쉽다'고 하여 이러한 정황을 말한 것이다.
貴為天子, 富有天下, 身不免於戮殺者, 正傾非也.
천자가 되어 귀해지고 천하를 가지는 부를 지녔는데도 그 몸이 죽음을 면치 못한 것은 기울어지는 것을 바로잡으려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是二世之過也.
이것이 2세 황제의 잘못이다.
▶️ 雲(구름 운)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비 우(雨; 비, 비가 오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云(운)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雨(우)는 천체(天體)에 관계가 있다. 云(운)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수증기가 하늘에 올라 자욱이 퍼지는 모양에서 구름을, 雲(운)이 생긴 후로는 云(운)을 말하다란 뜻으로 썼다. ❷회의문자로 雲자는 '구름'이나 '습기', '덩어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雲자는 雨(비 우)자와 云(이를 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云자는 뭉게구름이 피어오른 모습을 그린 것으로 소전까지만 하더라도 '구름'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해서에서는 날씨와 관련된 글자임을 뜻하기 위해 雨자가 더해지게 되었다. 구름은 하늘 높은 곳에 떠 있으므로 雲자는 높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금세 사라지기도 하기에 속되고 덧없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간체자가 보급된 이후 다시 옛 글자인 云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雲(운)은 성(姓)의 하나로 ①구름 ②습기(濕氣) ③높음의 비유 ④많음의 비유 ⑤멂의 비유 ⑥덩이짐의 비유 ⑦성(盛)함의 비유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구름이 오고가는 길이라는 운로(雲路), 구름처럼 많이 모임을 운집(雲集),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임을 운둔(雲屯), 구름과 안개를 운무(雲霧), 구름과 진흙이란 뜻으로 차이가 썩 심함을 운니(雲泥), 구름이 덮인 바다를 운해(雲海), 기상이 달라짐에 따라 구름이 움직이는 모양을 운기(雲氣), 구름 낀 먼 산을 운산(雲山), 구림이 걸친 숲을 운림(雲林), 구름 밖이나 구름 위를 운표(雲表), 외로이 홀로 떠 있는 구름을 고운(孤雲), 이상한 모양의 구름을 기운(奇雲), 하늘에 떠 다니는 구름을 부운(浮雲), 저물녘의 구름을 모운(暮雲), 엷은 구름을 경운(輕雲), 머리털이나 새털 모양으로 보이는 구름을 권운(卷雲), 여름철의 구름을 하운(夏雲), 빛이 몹시 검은 구름을 흑운(黑雲), 구름과 진흙 차이란 뜻으로 사정이 크게 다르다는 경우에 쓰는 말을 운니지차(雲泥之差), 구름 같은 마음과 달 같은 성품이라는 뜻으로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운심월성(雲心月性), 남녀가 육체적으로 어울리는 즐거움을 일컫는 말을 운우지락(雲雨之樂), 구름처럼 합하고 안개처럼 모인다는 뜻으로 어느 때든지 많이 모임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운합무집(雲合霧集), 구름이나 안개가 걷힐 때처럼 산산이 흩어져 흔적도 없이 됨을 이르는 말로 의심이나 근심 걱정 등이 깨끗이 사라짐을 비유하는 말을 운소무산(雲消霧散), 구름처럼 어느덧 흩어지고 새처럼 자취 없이 사라짐을 일컫는 말을 운산조몰(雲散鳥沒), 구름이 열려 해를 본다는 뜻으로 지금까지 구름처럼 꽉 막혔던 것이 비로소 열림을 이르는 말을 운개견일(雲開見日), 속됨을 벗어난 인간의 고상한 기질과 성품을 일컫는 말을 운상기품(雲上氣稟),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 맑게 갠다는 뜻으로 병이나 근심이 씻은 듯이 없어짐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운권천청(雲捲天晴), 구름은 용을 좇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는 뜻으로 의기와 기질이 서로 맞음을 이르는 말을 운룡풍호(雲龍風虎), 탐스러운 귀 밑머리와 꽃 같은 얼굴이라는 뜻으로 미인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운빈화용(雲鬢花容), 구름이나 연기가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가고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때의 쾌락을 오래 마음에 두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운연과안(雲煙過眼), 구름이 아무 생각 없이 일고 흐르듯이 인생을 유유히 삶을 이르는 말을 운출무심(雲出無心), 큰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바란다는 뜻으로 희망이 간절함을 이르는 말을 운예지망(雲霓之望), 구름 속을 나는 두루미라는 뜻으로 고상한 기품을 가진 사람을 이르는 말을 운중백학(雲中白鶴), 구름이냐 산이냐는 뜻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산인지 구름인지 분별하지 못하여 의심함을 이르는 말을 운야산야(雲耶山耶) 등에 쓰인다.
▶️ 集(모을 집)은 ❶회의문자로 雧(집)은 본자(本字), 雦(집)은 고자(古字)이다. 나무(木) 위에 새(隹; 새 추)가 모여서 앉아 있는 것을 나타낸 글자로 '모이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集자는 '모으다'나 '모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集자는 木(나무 목)자에 隹(새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集자는 나무 위에 새가 앉아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갑골문에서는 총 두 가지 형태의 集자가 등장하고 있다. 하나는 새가 나무 위를 날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마리의 새가 나무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여러 마리가 앉아있는 모습은 후에 雧(모을 집)자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단순히 새 한 마리만을 그려 '모이다'라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集(집)은 논문(論文)이나 시가(詩歌)나 문장(文章) 따위 작품을 모은 서책(書冊)으로 ①모으다 ②모이다 ③편안(便安)히 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가지런하다 ⑥이루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흩을 산(散), 나눌 배(配)이다. 용례로는 개인이 모여서 이룬 단체를 집단(集團), 어떤 일이나 현상 대상 등이 한 곳이나 한 대상에 또는 한정된 짧은 시간에 몰리거나 쏠리게 함을 집중(集中), 특정한 공동 목적을 위해 여러 사람이 모이는 회합을 집회(集會), 한 곳으로 모음 또는 한 곳으로 모임을 집합(集合), 이미 된 계산들을 한데 모아서 계산함 또는 그 계산을 모아 셈함을 집계(集計), 모여 쌓이는 것 또는 모아 쌓는 것을 집적(集積), 정치 등의 권력을 어떤 한 군데로 모음을 집권(集權), 모음과 흩어지게 함 또는 모여듦과 흩어짐을 집산(集散), 취미나 또는 연구하기 위하여 어떤 물건이나 재료 같은 것을 여러 가지로 찾아 모음을 수집(蒐集), 사람이나 물품을 일정한 조건 아래 널리 구하여 모음을 모집(募集), 단체나 조직체의 성원들을 불러서 모음을 소집(召集), 거두어 모음을 수집(收集), 한데 모이어 뭉침을 결집(結集), 빈틈없이 빽빽하게 모임을 밀집(密集), 찾아서 얻어 모음을 채집(採集), 여러 사람이나 물건이 모임을 군집(群集), 한군데에 엉겨서 모이는 것을 응집(凝集), 사람들이 안개처럼 많이 모여듦을 무집(霧集), 물건을 사 모으는 것을 매집(買集), 물건을 거두어 모으는 것 또는 국가가 병역 의무자에 대하여 현역에 복무할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징집(徵集), 시를 여러 편 모아서 엮은 책을 시집(詩集), 한 사람의 시문詩文을 모아서 엮은 책을 문집(文集), 구름처럼 많이 모임을 운집(雲集), 고슴도치의 털과 같이 많은 것이 한 곳에 모여든다는 뜻으로 사물이 한꺼번에 많이 모임의 비유의 말을 위집(蝟集), 많은 훌륭한 것을 모아서 하나의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일을 집대성(集大成),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비를 이르는 말을 집중호우(集中豪雨), 여우의 겨드랑이 밑에 난 흰털을 모아 갖옷을 만든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 한 가지 일을 성취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집액성구(集腋成裘),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룬다는 말을 집소성대(集小成大), 헤어졌다가 모였다가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이합집산(離合集散), 구름처럼 합하고 안개처럼 모인다는 뜻으로 어느 때든지 많이 모임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운합무집(雲合霧集), 구름처럼 모이고 안개처럼 흩어진다는 뜻으로 별안간 많은 것이 모이고 흩어진다는 말을 운집무산(雲集霧散), 거짓이 많아 처음에는 좋았다가 뒤에는 틀어지는 교제를 일컫는 말을 오집지교(烏集之交), 만감이 착잡하게 일어난다는 말을 백단교집(百端交集)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