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하늘의 도라는 것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당소위천도ㆍ儻所謂天道, 시야비야ㆍ是邪非邪)!”
树欲静而 风不止 子欲养而 亲不待
(수욕정이 풍부지 자욕양이 친부대)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질 않고
자녀가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네~~~.
내리사랑과 치사랑에
흔히들 내리사랑은 있지만 치사랑은 없다, 한다.
치사랑이라는 단어 역시,
내리사랑의 반대 개념으로 만들어진 단어라는 거다.
얼핏 보면 맞는 말인 듯 하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게
낙수(落水)처럼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사랑은 방향이다. 방향은 위 아래를 따지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사랑의 방법이 다를 뿐이다.
🐬 연어와 가물치의 교훈🐬
첫 번째 물고기는 깊은 바다에서 사는 연어 (salmon) 입니다.
어미 연어는 알을 낳은 후 한 쪽을 지키고 앉아 있게 되는데
이는 갓 부화되어 나온 새끼들이 아직 먹이를 찾을 줄 몰라
어미의 살코기에 의존해 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미 연어는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며
새끼들이 맘껏 자신의 살을 뜯어먹게 내버려 둡니다.
새끼들은 그렇게 성장하고 어미는 결국 뼈만 남게 되어가며
소리없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모성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어를 [모성애의 물고기]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가물치 입니다.
이물고기는 알을 낳은 후 바로 실명을 하여 먹이를 찾을수 없어
그저 배고픔을 참는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부화되어 나온
수천마리의 새끼들이 천부적으로 이를 깨닫고는 어미가
굶어 죽는 것을 볼 수 없어
한 마리씩 자진하여 어미 입으로 들어가
어미의 굶주린 배를 채워 준다고합니다.
그렇게 새끼들의 희생에 의존하다
시간이지나 어미가 눈을 뜰 때 쯤이면 남은 새끼의 양은
십분의 일 조차도 안된다고 하며 대부분은
자신의 어린 생명을 어미를 위해 희생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물치를 [효자 물고기]라고 합니다.
이 물고기들을 보면서 나를 돌아봅니다.
살아가면서 우린 모두 이 두 가지 역할을 다 하게 되죠.
잘 하고 계시는 분도 많겠지만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이 물고기들보다 잘하고 있는지 때늦은 반성을 해봅니다.
특히 연어같은 모성애는 있으면서
가물치 같은 효심은 가지고 있지 못한 자식이 아닌가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어린시절, 뻐꾸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어미새가 아이에게 먹이를 먹여주는 장면을 두고
내리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아기새가 어미를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치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몰랐지만,
그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인 것이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에 대한 몇 가지의 텍스트를 찾아 달아 놓는다.
내리사랑, 안도현 <스며드는 것>
다음은 안도현 시인의 시 <스며드는 것>의 전문이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부모의 역할은 자식에게 희망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때는 절망적인 상황을,
잠시 희망으로 가려주는 지식도 필요하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포로수용소에 같인 두 부자(父子)를 보라.
아비는 끊임없이 자식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열악한 상황에서 그 어린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희망 보여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적 상황에서
어미게는 체념을 가르치기 보다는,
마지막까지 알들에게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지속되는 일상이 곧 희망이니, 푹 잠들게 하는 것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그리고 대피할 수도 없는 3등석 승객들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배가 침몰하는 과정에서
어미는 아이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며
깊은 잠을 재운다. 때로는 불가피한 절망 속에서는,
그러한 희망으로 절망 가리기가 필요한 것이다.
치사랑 하나, 이루리 <북극곰 코다 호>
<북극곰 코다 호>라는 동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사냥꾼 보바는 북극곰을 사냥하기 위해 이리저리 헤맨다.
그러다 발견한다. 어미 북극곰과 아기 곰을.
보바는 총으로 곰을 조준한다. 그러다 갑자기 눈이 내린다.
그래서 보바는 북극곰의 검은색 코를 찾는다.
곰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 검은색 코만 찾으면
얼마든지 북극곰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준경에 검은코가 들어온다.
그때, 갑자기 검은코가 사라진다.
아기곰이 엄마곰의 코를 손으로 가려준 것이다.
아이는 능력껏 어미를 보호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백색 설원에 붉은 피를 보지 않고,
새하얌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가 해준 것이라고는 그저 몸에서 정 반대의 색깔을 가진
검은 코를 가려준 것 뿐이다.
이 얼마나 사소하고도 위대한 치사랑일까.
치사랑 둘, 기형도 <엄마 걱정>
아이로써 어미에 대한 사랑은 그 얼마나 허약하고 다채롭나.
아이는 오래도록 엄마를 기다리며
오로지 엄마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외로움과 기다림은,
아이가 어미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다.
다음은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부자자효의 인륜을 회복하자.
부자자효 [父慈子孝]
어버이는 자식에게 도타운 사랑을 베풀고
자식은 부모를 잘 섬기는 일
부자자효는 인륜의 근본인데
이시대는 돈 때문에 부자(부부, 가족) 간에 서로 죽이는
인간패악의 극치를 보며 살아가야 하는 극도로 타락한 말세입니다.
아버지 사마귀는
교미후 자식을 위해 스스로 암컷에게 잡아 먹히고
어미 연어는 새끼 연어의 먹이가 되어 목숨을 희생하는
내리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며
자식 까마귀는
부모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먹이를 물어다 부양하고
새끼 가물치는 새끼 때문에 눈이 먼 어미 가물치에게 스스로
먹이가 되어 어미를 살리는 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ᆞ
우리는 미물이라는 사마귀와 연어의 내리사랑과
까마귀와 가물치의 극치사랑의 교훈을 다시한번 되새겨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효로서
보은 부양하는 인륜지 대도를 되어야겠습니다.
이 물고기들보다 잘하고 있는지 반성이 되는군요.
특히, 연어같은 모성애는 있으면서,
가물치 같은 효심은 가지고 있지 못한 자식이 아닌가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부모에게 하는 만큼, 자식에게 돌려 받는다고 하던가요.
부모에게 좀 더 나은 자식, 자식들에게 좀 더 자랑스런
부모가 되어 보려는 다짐을 우리 모두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늘어나는 건 요양원 요양병원입니다.
가정의 달 5월!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이 있는 5월을 맞이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연어와 같은 모성애의 내리사랑은
받고 살았으면서
가물치 같은 효심은 주지 못한 자식들이 아닌가
깊이 반성하게 합니다.
不備礼
淺學菲才한 餘滴의 想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