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님 이야기
얼굴은 살아온 역정
고등학교 은사님인 김창규(金昌圭) 선생님과 사모님이시다. 두 분 얼굴에 높은 기품이 서려있다. 외람된 표현이지만 품위 있고 곱게 나이를 먹고 계신다. 얼굴에 살아오신 역정이 담겨 있다. 많은 제자들을 감동시키고 지금도 선생님과 사모님을 찾게 하는 교육자로서의 훌륭한 삶이 묻어 있다.
선생님은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셨다. 그 때가 1976년이니 벌써 31년 전이다. 선생님께서 1935년생이시니 그 때의 선생님 연세가 지금의 우리 나이보다 많지 않으셨다.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선생님을 처음 뵌 지 3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선생님을 찾아뵙고 있다. 자주 찾아뵈어야 도리인 줄 알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생활이다.
나이가 40이 넘은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고 한다. 나도 벌써 40하고도 중반을 넘어 조만간 50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내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살고 있나? 자신할 수 없다. 물론 얼굴에 기본 바탕이 있겠지만 생김새와 관계없이 호감을 주는 형으로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다. 스스로 불만스럽고 찡그리면서 살면 그것이 굳어 얼굴에 그렇게 나타나고, 긍정적이고 밝게 살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얼굴에 묻어난다.
선생님께서 마련하신 자리
2007년 7월 29일(일요일) 선생님께서 몇몇 제자들을 모이게 하셨다. 나는 우신고등학교 3회인데,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2회 선배 중의 한 사람이 승진을 했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이를 축하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하신 것이다. 직접 부르신 것은 아니고 2회 동기에게 넌지시 알려주어 자리를 주선하도록 하신 것이다. 2회 선배 3명과 3회 4명이 나왔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2회 선배들이 선생님으로부터 술을 처음 배웠다고 실토했다. 재수할 때 선생님 댁을 찾아뵈었더니 술과 담배를 권했다고 한다. 나도 고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술을 처음 배웠다. 여름방학 때 충남 덕산에 있는 가루실 농민학교에서다. 선생님은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오셨는데 길영희(吉瑛羲) 선생님의 애제자이시다. 선생님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길영희 선생님을 찾아뵈었는데, 여름방학을 맞아 나와 1학년 때 반장 등 2명을 가루실 농민학교에 데리고 가셨던 것이다. 길영희 선생님을 뵐 기회도 가졌다. 그 때 선생님께서 술은 어른으로부터 배워야한다고 하시면서 고량주로 우리에게 주도(酒道)를 가르치셨다. 그 날 나는 토하고 온갖 추태를 다 부렸다.
우신고등학교와의 인연
내가 고등학교 들어갈 당시 우신고등학교는 특수지 학교(경기도 역곡과 경계지역인 궁동에 위치)로서 추첨으로 학교를 배정받지 않고 지원자 중에서 성적순으로 학생을 선발했다. 우리가 입학한 다음 해인 4회까지만 지원받아 선발하고 그 다음부터는 추첨방식(소위 ‘뺑뺑이 방식’)이 적용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준다는 설명을 듣고 우신고등학교를 선택했다. 오로지 내 교육을 위해 상경해서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어깨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장학금을 주는 학생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입학할 때 60여 명에게 장학금을 주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어 3학년이 되었을 때는 문과와 이과에서 몇 명씩만 주었다.
데자뷰라고 하나. 고등학교에 처음 갔을 때 좌우에 조그만 동산이 있고(교가에서는 이를 좌청룡 우백호라고 그럴 듯하게 표현한다) 그 가운데 터에 교정이 있다. 전에 꿈에서 생생하게 보았던 곳이었다.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가서 그 일대를 돌아다녔는데 선명하게 인상에 남았다. 꿈에서 본 그곳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지금은 좌우 동산을 팔아 아파트를 건축해서 경관을 버렸다.
선생님의 엄한 가르침
선생님께서는 윤리과목을 가르치셨고 상담실장도 겸임하셨다. 수업 첫 시간에 “Boys, Be Ambitious!"를 칠판에 쓰시고 강의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우 엄격하셔서 모든 학생들이 대하기를 어려워했다. 중간고사 끝나고 우리 반 전체 학생들이 상담실로 불려가 일 대 일 상담을 했다. 나는 입학 때의 성적보다 많이 떨어졌다고 회초리로 종아리를 몇 대 맞았다. 그리 굵지 않은 나무회초리로 맞았는데, 며칠 동안 잠을 자다가 종아리 근육이 뭉치는지 통증에 놀라 깨기도 했었다. 그 후로는 선생님께 맞은 기억이 없다.
나는 공부 방법을 전적으로 선생님 말씀에 따랐다. 선생님께서는 학교도서관에서 공부할 것과 큰 도시락을 준비해서 점심과 저녁을 먹을 것 등 두 가지를 학생들에게 권유하셨다. 나는 이를 그대로 실천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1시간 정도 걸렸다. 그 때 나는 신월동에 살고 있었는데, 신월동에서 버스로 영등포로 나와서 영등포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학교로 간다. 아침 5시 정도에 일어나 6시쯤 집을 나오면 7시쯤 학교에 도착한다. 첫 수업 시작할 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데 보통 졸기 십상이다. 조는 것은 조는 것이고 그래도 도서관에 있다가 교실에 가야만 마음이 놓였다. 수업 끝난 후에는 저녁 10시 정도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집에 도착하면 11시쯤 된다. 평일과 토요일 구분을 두지 않았고, 일요일에도 별 일 없는 한 학교에 갔다. 생활의 중심을 도서관에 두었다고나 할까.
큰 양은도시락을 준비해서 점심 때 절반 먹고, 나머지 절반은 저녁때 먹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대화하던 중에 도시락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2회 선배 중에도 점심과 저녁용 큰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 사람이 있었고, 우리 3회 중에도 몇 명 있었다. 모두 선생님의 영향이었다.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을 계속하니 그 효과가 여름방학 끝나고 2학기 중간고사 때부터 나타났다. 사실 고등학교 처음 들어가서 우수한 학생들과의 경쟁(우리 때 커트라인이 연합고사 200점 만점에 160점이었고, 4회는 200점 만점에 180점이었다) 속에서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실천한 결과 불안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나의 그런 모습을 믿음직스럽게 보신 모양이다. 나는 겨울에도 마찬가지의 생활패턴을 유지했는데, 도서관이 워낙 크고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도서관 안이 추운 편이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추운 날이 많아서 영하 19도까지 내려간 날도 있었다. 나는 그런 사정도 모르고 평상시와 똑같이 도서관에 갔다. 선생님께서는 추운 겨울날 도서관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방석을 뒤집어쓰고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그것이 나였다고 가끔 말씀하신다. 그런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나는 선생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제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유한흥국(流汗興國, 땀을 흘려야 나라가 흥한다)”과 “위선최락(爲善最樂, 선을 행하는 것이 최대의 즐거움이다)”이란 길영희 선생님의 친필 휘호를 댁에 보관하면서 우리에게도 그 뜻을 따를 것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같은 글을 직접 쓰셔서 우리에게 주시면서 그 뜻을 항상 간직하라고 하시기도 했다.
제자들에 대한 사모님의 배려
선생님께서 제자들에게 워낙 엄격하셨으나 항상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옳은 길로 인도하시고자 하셨다. 학생들의 이름을 직접 불러주시고, 가정환경에 대해서도 깊은 내용까지 이해하셨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님께서는 학생들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 선생님께 거부감을 갖는 학생도 일부 있었으나, 그래도 많은 학생들이 선생님을 따랐다. 졸업 후까지도 기회 있을 때마다 선생님을 찾아뵙고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사모님께서도 초등학교 선생님을 역임하셨다. 우리가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을 때는 사모님께서는 교직을 그만두신 다음이다. 우리가 선생님 댁을 찾아뵈면 사모님께서는 우리를 반갑게 맞으시고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우리를 대접해주셨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는 방학 때 등에 제자들을 직접 집으로 불러 하룻밤 재우시기도 하셨다. 선생님께서 분재를 하셨기 때문에 집에는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선생님과 사모님께서는 성격이 많이 다르신데, 사모님께서 워낙 포용력이 있으셔서 제자들이 보기에 부부생활을 훌륭하게 하시고 계신다.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의 며느리를 딸로 여기시고 제자들의 아이들을 손자 손녀로 여기신다.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시고 축하할 일이 있으면 챙겨주시기도 한다. 사모님께서도 제자들의 며느리를 딸과 같이 대우해주신다.
제자들과의 끈끈한 교감
선생님께서는 우신고등학교에 오시기 전에 오산고등학교에 근무하셨다. 오산고등학교에서는 도서반을 지도하셨는데, 도서반원들이 졸업 후에도 계속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그래서 우신고등학교 제자들과 오산고등학교 제자들이 같이 어울리기도 했고, 좋은 선후배의 인연을 지속하고 있다. 선생님께서 회갑을 맞았을 때 오산고등학교 제자들과 우신고등학교 제자들이 뜻을 모아 회갑연을 치러 드리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우신고등학교에 계시다가 선린상업고등학교로 옮겨서 근무하셨고, 정년을 몇 년 앞두시고 명예퇴직을 하셨다. 부평에 사시다가 퇴직 후에는 양평에 집을 짓고 사모님과 함께 살고 계시다. 텃밭을 가꾸시고 노동을 하면서 건강하게 지내고 계신다. 제자들에게도 서너 평씩 떼어 줄 테니 채소 등을 키워 먹으라고 하신다. 부지런한 몇 사람이 선생님 기대에 부응하고 있으나, 나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
선생님의 극진하신 사랑
내 어머니는 내가 선생님을 만난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하셨다. 막내 동생이 중3이 되어 고등학교 진로를 결정할 즈음(1983년경, 그 때 나는 군대에 끌려가 있었다), 어머니는 선생님을 찾아뵙고 막내가 선생님 밑에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상담을 하셨다. 그래서 신월동에서 개봉동으로 이사를 했고, 막내 동생은 결국 우신고등학교에 배정을 받아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다.
우리 남자 3형제는 모두 주례를 선생님께 부탁드렸다.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승낙하시고 우리 3형제의 주례를 서 주셨다. 우리 3형제는 아내들끼리도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데 모두 선생님과 사모님의 은덕으로 생각하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호(號)라고 할까 뭐 이런 것을 지어서 내려주시기도 했다. 나에게는 두 가지를 주셨다. ‘여민(黎民)’과 ‘파하(破荷)’가 그것이다. ‘여민’은 ‘검은 백성’이란 뜻으로 노동에 종사해서 살갗이 검게 탄 백성이므로 ‘뭇 백성’, ‘평범한 백성’이라는 의미로 서경(書經)에 자주 나온다. ‘파하’는 ‘짐을 깨뜨리다’는 의미인데 나에게는 너무 벅차지 않은가 생각한다. 선생님께서는 돌 전각에도 조예가 깊으신데, ‘破荷’란 글씨를 돌에 조각하여 주셨다. 내 블로그의 별명 ‘파하’는 바로 선생님께서 주신 명칭이다.
제자에게 주는 교훈
선생님께서는 승진한 공무원 제자를 위해 특별히 노자(老子)에서 몇 구절을 적어 오셔서 교훈으로 삼으라고 건네주셨다. 그 중에 두 구절을 소개한다.
“승인자유력 자승자강(勝人者有力 自勝者强)” 다른 사람을 이기는 사람은 힘 있는 자이겠으나 스스로를 이기는 자가 강하다.(제33장 辯德)
“자현자불명 자시자불창(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스스로 나타내는 자는 밝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못한다.(제24장 苦恩)
공무원이 경계로 삼아야 할 구절이다.
조금이라도 더 자주 선생님을 찾아뵙고 또한 항상 선생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부끄러움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
|
|
이 포스트를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포스트는 비디오에도 등록되었습니다.
비디오에 등록된 포스트는 비디오에서 삭제해주세요.
이 포스트를 삭제하시
이 포스트를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포스트는 비디오에도 등록되었습니다.
비디오에 등록된 포스트는 비디오에서 삭제해주세요.
이 포스트는 키친에도 등록되었습니다.
키친에 등록된 포스트는 키친에서 삭제해주세요.
겠습니까?
이 포스트는 비디오에도 등록되었습니다.
비디오에 등록된 포스트는 비디오에서 삭제해주세요.
이 포스트는를 삭제하시겠습니까?
네이버 여행에 등록된 포스트도 삭제 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