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진안의 구봉산(九峯山)은 연석산과 금남정맥의 최고봉인 운장산 서봉과 운장대(雲長臺)로 이어지는 호남알프스 구간의 시작점에 있다.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서 구봉산이다. 골이 깊고 산이 높은,힘차고도 스릴감 넘치는 아찔한 바위산과 장쾌한 육산의 산맛을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2015년 7월 4봉과 5봉사이에 100m 길이의 구름다리 명물이 놓여져 있어서 건너갈 때의 긴장감과 전율이 배가 된다.시작고도 353m에 최고고도 1051m의 표고차가 크고(트랭글) 경사 역시 무척 가파른데다 산의 외형이육중하면서도 거친 암릉 형태를 띠고 있어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이란 소리를 듣는다.산 정상인 천왕봉에 오르면 멀리 남덕유와 지리, 기까이는 마이산과 운장산까지의 확트인 조망이 일품이다. 마이산과 운장산의 유명세에 조금 가려진 듯 해보이지만 산의 높이와 골의 깊이, 신비감, 스토리 면에서 조금도 뒤짐이 없다.북쪽의 개마고원에 비견되는 우리나라 진안고원의 진면목을 완성해주는 곳, 바로 구봉산이다.
오전10시, 인천부평에서 약 4시간 걸려 전북진안 구봉산주차장입구에 도착했다. 어제 진안지역 일기예보로는 -4도 였는데, 막상 현장에 오니 이곳은 영상의 봄날씨였다. 겉옷을 벗어서 배낭에 묶고 복장을 가볍게 했다.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 조금 걸어가면 이정표와 함께 1봉을 향하는 오르막이 시작된다. 지난 1월 7회에걸쳐173km 종주를 마친 금남정맥의 최고봉인 운장산이 오른쪽으로 우뚝하니 서 있다. 둥근 막대계단과 야자매트, 흙길을 밟으면서 고도를 높여나갔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오전햇빛에 다소 풀렸음인지 살짝 부풀어 오른 숲속길 봄흙을 밟는 듯한 발아래 촉감이 부드럽게 전달된다. 능선쪽으로 점점더 몸을 붙여가자저~ 멀리에 한장의 그림같은 구봉산의 명물 구름다리가 얼굴을 내밀어 준다. 능선에 올라 오른쪽으로 꺽고쉼터를 지나 1봉과의 거리를 거의 좁혀가자 다닥다닥 줄지어선 8개 암봉들이 강력한 위엄의 제9봉(천왕봉)을 향하고 있다. 그 모습이마치 천상의 하늘사막을 걸으며 마지막 물한방울과 피한방울을 태우며 정상이라는 오아시스를 향해가는 탁힌 갈색의 단봉낙타들을 연상케한다. 가을에 비축해뒀던 등짝 위 볼록 솟은 혹에 담아놓은 수십 키로그람의 지방을 물과 에너지로 분해하여 어떠한 것도 섭취할 수 없었던 혹한의 겨울을 이기고 마침내봄의 향연에 초대받을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처연한 그런 순간같은.....
1봉(668m)은 2봉 갈림길에서 우측 100m지점에 있다. 명품송 아래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8봉까지 조경목으로 된 계단과 로프같은 안전시설이 아주 잘되어 있다. 등산과 관광인구 유입을 목적으로 2~3년 사이 진안군청에서 많은 돈을 들여 등산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흔적이 역력했다. 2봉(720m)에서 3봉(728m)까지 짧게짧게 오르내리며 전진한다. 4봉(752m)을 바라보면서 그림같이 세워진 팔각정을 배경으로 한 모든 곳이 포토죤이다. 그만큼 풍경이 아름답다. 사진을 통해 구봉산의 위용을 허락하는 장소가 계속 이어진다.구봉산의 명물 구름다리. 강철 케이블로 상판을 지탱하도록 매달아 드는 현수교방식으로 만들어졌다.2015년7월에 설치했다고 한다. 지상고 47m, 해발고 740m 총길이가 100m, 보행폭 1.2m 최대 150명이 이용 가능하다.5봉(742m)에서 땀을 식히면서 막걸리를 한잔했다. 작은 다리를 넘어 6봉(732m)에서 7봉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인상깊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각을 줘 휘어지게 설치된 모습이 마치 수천개의 다리를 지닌 지네가 산을 넘고 푸른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 오르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장관이었다. 계단 위를 오르는 등산객들의 지쳐보이는 듯한 흐릿한 모습이 지네에서 나오는 진액때문에 허우적대는 것은 아닐까.한차례의 내리막과 오르막계단을 지나 7봉(739.8m)을, 오르막과 내리막을 다시한번 거치자 마침내작은 목교(木橋)를 지나 8봉(780m)에 도착했다. 12시, 점심간식으로 물을 끓여서 컵라면 크기의 누룽지삼계탕을 먹었다. 맛이 좋았다.
다시 배낭을 메고 오늘 코스중 제일 어려운 9봉 정상을 향했다. 몇발짝을 걸어 내러가니까 돈내미재가 나온다. 이곳에서 양명마을 주차장으로 탈출할 수 있다. 계속 전진했다. 9봉까지는 아주 가파랐다. 진입초기가 그늘진 북사면이어서 냉기가 오~싹할 정도였다. 계곡에는 거대산 고드름이 매달려있다. 몹시 거친 오르막길을 로프를 잡고 올랐다. 조금씩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발아래로 펼쳐진 세상과 눈으로 호흡하며 한발두발 정상에 다가갔다.30분쯤 지나 능선에 오르자 '운장산 8km'라고 적힌 이정표가 나타났다. 왼촉으로 구봉산 정상 0.1km, 몇걸음을 더하니 드디어 정상이다.
구봉산 천왕봉(1002m) 정상에 올라섰다. 8개의 암봉능선과 구름다리가 내가 걸어온 곳에 내려다 보인다. 멀리 남동쪽으로 대덕산과 뒷편에 남덕유산을 비롯해지리산 천왕봉과 반야봉, 북쪽으로는 복두봉과 운장산(1126m)이, 가장 오른쪽으로 마이산이 찍힌 사진팻말을 감상하고 산의 위치를 관찰하고자 빙둘러가며 쳐다봤다. 미세먼지가 좀 있어서 그런지 산그리메도 흐릿하고 주요 산들도 알아보기 힘들었다.그럼에도 진안고원에 우뚝 선 호남의 조망대라는 구봉산의 명성에 걸맞게 사방이 탁트인 정상에 올라 좋은 날씨 속에서 온 사방을 둘러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저멀리의 용담호는 가뭄때문인지 수량이 작은듯한 모습이다. 잠시 물산모금을 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경사가 심하기 때문에 안전에 신경쓰면서 시간관리도 염두에 두고 이동했다. 바랑재에서 천황사 쪽으로 직진하지않고 '좌틀하여' 양명마을 주차장으로 향했다. 1시간 20분 정도 걸려 무사히 신행을 미쳤다. 2:42, 끝.
피에쓰
1)나는 지난 1월 금남정맥을 완주하면서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이자 자가 운장, 호가 구봉인 송익필이 운장산 오성대에서 임진왜란 즈음에 은거하여 지금의 운장산과 구봉산의 지명이 유래됐다고 후기를 쓴적이 있었다. 그런데 니의 조상이자 이괄의난을 평정하고 후금이 쳐들어온 병자호란때 안주성에서 순국한 충장공 남이흥장군(1576-1627)의 충렬을 기리는 충장사가 있는 충남 당진에 구봉 송익필의 위패를 모신 입한대 역시 딩진에있다는 것을 알고 '한앙사람이었던 송익필이 왜 충청도에서 죽고 제각이 이곳 당진에 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면서 연고가 없는 구봉의 호와 진안 구봉산 이름의 연관성이 무엇인지 알고싶었다.결론적으로 보면 진안군 구봉산의 이름과 구봉 송익필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보여진다. 우선 구봉산의 한자와 송익필의 호인 구봉의 한자가 달랐다. 구봉산의 한자표기는 九峯山이다. 아홉개의 봉우리라는 뜻이다. 송익필의 호인 구봉은 龜峯이다. 송익필이 태어난 곳은 한양이고 서얼출신이어서 초시를 봤지만 벼슬길이 막혀 고양시 송포동 구봉산(龜峯山) 밑, 현재의 일산서구 구산동( 龜山洞)에서 일찍부터 율곡이이, 성혼과 함께 사림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송익필의 호도 이곳 龜峯山 이름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때문에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구봉산이 송익필의 호인 구봉과는 연관이 없다 하겠다.
2)송익필과 구봉산이 그리 관계가 없는 두번째 증표. 이날 나는 구봉산주차장부터 1~9봉까지, 정상에서 다시 원점회귀하여 돌아올때까지 송익필( 1534-1599)에대한 전설이나 표지석, 글씨 한점을 보지 못했다. 이건 좀 이상한 일 아닌가?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자 노론세력이면서 동인과 호남인재 1000여명을 죽이고 수백, 수천을 고문한 기축옥사(1589, 정여립역모사건)의 막후 조종인물로 지목받는 인물이 이 산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처럼 흔적하나 없을 수 있겠는가? (송익필은'송시열 이상의 사상가, 정철을 능가하는 시인, 이이 이상의 정치가, 조정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산림(山林)의 전통을 창시한 불세출의 책략가, 조선중기의 통치원리 대부분을 만들어낸 사상계의 군주'(조선의 숨은 왕, 이한우지음, 2010) 소리를 듣는다. 율곡 이이, 송강 정철, 성혼과 절친한 사이였다)
3)최근 몇년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구봉산 정상석에는 1002m와 천왕봉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예전에는 구봉산정상을 장군봉으로 불리었으나 진안군청에서 이곳을 관광지로 크게 정비하면서 봉우리 명칭을 천왕봉으로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진안군지(誌)에도 산 정상이 장군봉으로 기록되어 있어 천왕봉 표석은 장군봉으로 바로 잡아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주변 볼거리
-신라 헌강왕때 창건한 천황사(전북진안군정천면 수암길54)가 있다. 전북유형문화제 제17호 대웅전과 천황사부도(전북문화재재료 제123호)가 있다. 천황사 인근에 천연기념물 제495호로 지정된, 수령 400년의 전나무(높이 30m, 가슴둘레높이 5.51m)가 있다. -마이산탐방코스, 운일암 반일암팀빙코스, 금강상류 용담호팀방코스, 진안고원길, 운장산, 진안홍삼스파 -문의 진안관광안내소 063-430-2114
첫댓글14년 전인 2005년에 다녀온 기억이 납니다. 구봉산장-1~8봉-정상-바람골-구봉산장 8봉 오르는 길에 20여미터 높이에서 물이 떨어져(소 오줌 정도) 시원하게 옷을 적신 기억이 납니다. 천왕봉의 정상석도 크게 바뀌었고 구름다리는 기억이 안납니다. 산행 후기도 실감있게 읽었지만 송익필과 구봉산을 잘 정리하여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브라베리님. 100m길이의 현수교설치와 등산로의 대대적인 정비, 대형정상석 모두 2015년 전후에 바뀐것들입니다. 역사관련한것을 후기에 담다가 송익필이 이지역에 들어온 배경을 추적해봤습니다.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은 1521년신사무옥을 일으킨 공로로 정3품 당상관에 오릅니다. 자연히 구봉을비롯해 자식들은 좋은환경에서 자랐죠. 그런데 60여년 뒤인 1586년 신사무옥으로 멸문지화의 화를 입은 후손들이 '역모는 조작된것'임을 밝혀내면서 송익필형제들과 식솔 70여명 모두 사노비로 귀속되고 송익필은 그 틈바구니에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숨어살았고 추노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죠
@바다(남상오)서인의 노회한 책략가였던 송익필에게 기회가 온것은 정여립역모사건이었습니다. 전주가 고향인 정여립은원래 서인이었다가 율곡이이가 죽자 동인으로 돌아섰죠. 스승을 비판하고 선조에게도 미움을 받자 낙향하여 진안 죽도에서 대동계를 조직하고 활을쏘고 창과칼을 쓰는법을 배우고 멀리 황해도까지 세력을 모았죠. 왜구를 물리치기도했습니다. 정여립세력이 커지자 '대동계가 한양을 공격하여 반란을 일으킨다'고 선조에게 고발하고 조정은 진압하는데 1589년에 벌어진 정여립역모사건, 1000여명을 살육한 기축옥사입니다. 정여립을 역모로 몰고 동인정권을 무너뜨리고 서인들의 재기를 총지휘한이가 송익필이고 집행을 송강정철이 합니다.
정여립은 진안죽도에서 결사항전을 하고 이곳에서 끝내 자결합니다.송익필이 왜 연고도없는 진안으로 숨어들었을까하는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운장산, 구봉산일대에서 머물면서 정여립세력을 체포하고 처리하는 현장상황을 지휘하고 조정에 알리기위해서였지요. 이때 신분은 추노꾼에 쫓겼기때문에 '숨어들었다'는 말이 정확합니다. 운장산(雲長山)도 원래는 주줄산으로 불렸으나 '산이높아 구름이길다'는 뜻에서 운장산이 됐죠. 송익필의 자가 운장(雲長)이어서 바뀐 것인지는 단정할수 없죠. 할아버지의 자가 직장(直長)인것도그렇고. 그당시 숨어살던 송익필의 자를 따서 산의 이름을 바꿨을것같지도 않고요
기축옥사로 1000여명이 죽고 수백수천이 고문을 당했죠. 이사건으로 반역향(叛逆鄕)이라하여 호남의 등용문이 막히게됩니다. 당쟁의 산물인 정여립사건과 천민의신분으로 전락하여 재기를 꿈꿨던 송익필, 그런 흔적이 남아있는 운장산 구봉산 이름에 깃든 역사를 조금 배운시간이 된것 같습니다.
그래요 바다님. 산행지가 정하여지면 그 산에 대하여 산행 코스나 주위의 풍경을 미리 알아두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요. 바다님은 그 과정을 넘어 그 산에 대한 과거를 찾아보고 익혀 산행을 하면 더욱 값진 산행이 되겠지요. 자세히 몰랐던 지난 역사도 함께 배웠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
첫댓글 14년 전인 2005년에 다녀온 기억이 납니다. 구봉산장-1~8봉-정상-바람골-구봉산장
8봉 오르는 길에 20여미터 높이에서 물이 떨어져(소 오줌 정도) 시원하게 옷을 적신 기억이 납니다.
천왕봉의 정상석도 크게 바뀌었고 구름다리는 기억이 안납니다.
산행 후기도 실감있게 읽었지만 송익필과 구봉산을 잘 정리하여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브라베리님. 100m길이의 현수교설치와 등산로의 대대적인 정비, 대형정상석 모두 2015년 전후에 바뀐것들입니다.
역사관련한것을 후기에 담다가 송익필이 이지역에 들어온 배경을 추적해봤습니다.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은 1521년신사무옥을 일으킨 공로로 정3품 당상관에 오릅니다. 자연히 구봉을비롯해 자식들은 좋은환경에서 자랐죠. 그런데 60여년 뒤인 1586년 신사무옥으로 멸문지화의 화를 입은 후손들이 '역모는 조작된것'임을 밝혀내면서 송익필형제들과 식솔 70여명 모두 사노비로 귀속되고 송익필은 그 틈바구니에서 성과 이름을 바꾸고 숨어살았고 추노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죠
@바다(남상오) 서인의 노회한 책략가였던 송익필에게 기회가 온것은 정여립역모사건이었습니다. 전주가 고향인 정여립은원래 서인이었다가 율곡이이가 죽자 동인으로 돌아섰죠. 스승을 비판하고 선조에게도 미움을 받자 낙향하여 진안 죽도에서 대동계를 조직하고 활을쏘고 창과칼을 쓰는법을 배우고 멀리 황해도까지 세력을 모았죠. 왜구를 물리치기도했습니다. 정여립세력이 커지자 '대동계가 한양을 공격하여 반란을 일으킨다'고 선조에게 고발하고 조정은 진압하는데 1589년에 벌어진 정여립역모사건, 1000여명을 살육한 기축옥사입니다. 정여립을 역모로 몰고 동인정권을 무너뜨리고 서인들의 재기를 총지휘한이가 송익필이고 집행을 송강정철이 합니다.
정여립은 진안죽도에서 결사항전을 하고 이곳에서 끝내 자결합니다.송익필이 왜 연고도없는 진안으로 숨어들었을까하는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운장산, 구봉산일대에서 머물면서 정여립세력을 체포하고 처리하는 현장상황을 지휘하고 조정에 알리기위해서였지요. 이때 신분은 추노꾼에 쫓겼기때문에 '숨어들었다'는 말이 정확합니다.
운장산(雲長山)도 원래는 주줄산으로 불렸으나 '산이높아 구름이길다'는 뜻에서 운장산이 됐죠. 송익필의 자가 운장(雲長)이어서 바뀐 것인지는 단정할수 없죠. 할아버지의 자가 직장(直長)인것도그렇고. 그당시 숨어살던 송익필의 자를 따서 산의 이름을 바꿨을것같지도 않고요
기축옥사로 1000여명이 죽고 수백수천이 고문을 당했죠. 이사건으로 반역향(叛逆鄕)이라하여 호남의 등용문이 막히게됩니다. 당쟁의 산물인 정여립사건과 천민의신분으로 전락하여 재기를 꿈꿨던 송익필, 그런 흔적이 남아있는 운장산 구봉산 이름에 깃든 역사를 조금 배운시간이 된것 같습니다.
그래요 바다님. 산행지가 정하여지면 그 산에 대하여 산행 코스나 주위의 풍경을 미리 알아두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요. 바다님은 그 과정을 넘어 그 산에 대한 과거를 찾아보고 익혀 산행을 하면 더욱 값진 산행이 되겠지요. 자세히 몰랐던 지난 역사도 함께 배웠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
브라베리님 시산제때 뵙겠습니다
대단한 바다님
쵁오십니다 ~^^
크크 울 월척님 낼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