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쿠데타의 나라' 조선의 몰락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왕인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에 묻혔다. 1926년에 작고한 순종도 이곳에 묻혔다. 홍유릉이란 홍릉과 유릉이 같이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홍릉은 원래 청량리에 있던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의 무덤이름이고, 유릉은 순종의 부인 순명효황후의 무덤이다. 그런데 황제가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부인들의 무덤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흡수한 후 ‘능’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하게 한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조선이 이에 반발하자, 먼저 사망한 황후들의 무덤 이름을 빌어서 '능'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꼼수를 부린 셈이다. 어찌했거나 고종과 순종은 제 이름의 능을 갖지 못하고 묻혀있는 셈이다.
1392년 이성계가 군사쿠데타로 세운 조선은 505년 동안 존속하다가 1897년 대한제국으로 바뀌었으며, 그 후 13년 만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만행에도 518년의 긴 역사를 가진 조선왕조는 조선민중들은 가슴속에 살아 있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시작되고 이틀 뒤인 3월 3일은 고종의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그해 1월 21일 고종은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독이 든 식혜를 먹고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전국 방방곡곡에 퍼졌다. 독립선언서를 3월 1일에 발표한 것도 고종의 장례식에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고종의 독살설에 대해서는 한말 계몽운동가 윤치호가 고종황제의 염을 한 민영달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1920년 10월 13일 일기장에 써놓았다.
1.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2.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30센티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5.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고 했다.
67세의 나이로 사망한 고종은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왕좌에서 쫓겨난 뒤에도 나라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이리 저리 고심을 하고 있었다. 또한 덕수궁에 머무르고 있던 고종은 비밀리에 독립운동단체에 재정후원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 밀사로 다녀온 이상설이 주도하여 만들 신한혁명당이다.
신한혁명당은 이상설이 상해에서 동제사를 이끌던 신규식과 함께 1915년에 결성하였다. 신한혁명당은 본부와 지부를 두고 본부장에는 이상설이 동제사가 있던 상해지부는 신규식이 맡아 운영하였다. 중국에는 상해·장춘·연길 등에 지부가 결성되었고, 국내에는 평양, 경성, 회령, 나남에 지부를 조직하였다.
신한혁명당은 해산후 상해의 신한청년당의 모태가 되었으며, 신한청년단은 상해 임정의 결성을 주도하게 된다.
이 신한혁명당이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켜려 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신한혁명당이 결성되기 한해 전은 독일이 일으킨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해였다. 이 때 이상설은 독일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 판단하고 독일의 힘을 빌려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다. 또 중국의 원세개와 ‘중한의방조약’을 체결하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이 조약은 한국에 혁명전쟁 또는 독립전쟁이 발발하면 중국이 군자 및 병기를 공급한다는 밀약이었다. 그리고 국제적 효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독일의 보증 하에 중국과 한국의 국가원수가 서명하고 혁명 정부 수립 후에 세계에 공표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상설은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자력으로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외교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신한혁명당은 고종과의 비밀 면담을 위해 외교부장 성낙형을 국내로 잠입시켰다. 그러나 이상설의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였으며, 중국의 원세개는 약속과 달리 일본과 적대적인 관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일로 이상설은 마음의 병을 얻어 1917년 러시아 니콜리스크의 한 병원에서 48세의 일기로 돌연 사망하고 만다. 그의 유해는 러시아의 차가운 강 아무르에서 화장된 다음 재가 되어 흩뿌려졌다. 그의 유언은 유달리 침울하고 뼈아픈 것이었다.
“광복을 못 이루고 죽은 자가 무슨 낯으로 고혼인들 조국에 가겠소? 나는 실패한 인간이니 내 몸과 유품을 전부 불태우시오. 그 재도 모두 바다에 날려 버리시오. 아무도 내 제사를 지내지 말아 주시오.”
그 이후 1918년에도 서간도 삼원보에 경학사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회영 이시형 형제가 고종의 망명을 추진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의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면서, 일본으로 부터 독립할 기회를 얻었다고 판단한 이회영은 고종을 망명시켜 민족정부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고종이 죽으면서 그 계획도 무위로 돌아갔다. 그 이후에도 의친왕 이강의 망명도 추진하였지만 그도 여의치 못했다.
3.1만세운동이 일어나고 1만여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하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더이상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국외에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국통을 이어갈 임시정부를 세우기로 하였다.
하지만 1919년에는 여덟개의 임시정부가 결성되어 있었다. 그중 조신민국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 고려공화국(高麗共和國), 간도임시정부(間島臨時政府), 신한민국정부(新韓民國政府)는 누가 추진한 것인지, 어떻게 수립된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단지 전단지로만 발표된 것이어서 그 주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실체가 있는 임시정부로는 서울에 있던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 혹은 대조선공화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노령정부(露領政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다. 또 후일 알려진 천도교측에서 주도한 대한민간정부(大韓民間政府)가 있었다.
한성정부는 1919년 3월 중순부터 서울에서 비밀리에 추진하여, 4월 2일에는 인천에서 13도대표자대회를 열어 구체화한 뒤,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공포한 것이다. 한성정부는 서울에서 발족하여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하여 수립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부조직과 각료구성이 어느 것보다 짜임새가 뛰어나고 해외지도자를 총망라한 대표자로 조각되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연합통신》을 통하여 세계에 보도됨으로써 국제적 선포효과도 가지고 있어 국내외에 가장 강력한 임시정부의 통합에 있어 정통성을 가지게 되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1월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던 신한청년당 인사들이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고 있던 중, 1919년 4월초에 서울에서 망명한 인사들로부터 한성정부수립추진의 소식을 듣고, 13도대표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정부수립을 선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령정부는 1917년에 결성된 20만 러시아의 한인들의 대표조직이었던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의 후신으로 1919년 1월에 결성되었으며, 공식명칭이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였다. 행정부에는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기도 했다. 또한 전로한족중앙회의 전통을 계승하여 각계각층의 지도자 70~80명을 의원으로 선출하였다. 노령정부에서도 파리강화회의에 윤해(尹海)·고창일(高昌一)을 파견했으나, 신한청년단의 김규식과 달리 폐막후 도착하는 바람에 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하였다.
통합교섭은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현실적으로 통합논의가 어려웠던 한성정부는 상해임시정부와 먼저 통합을 하였으며, 이후 대한국민의회의 대표로 선정된 원세훈이 상하이로 와서 교섭을 벌였다. 이러한 통합논의 끝에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 1948년)가 결성되었다. 임정은 일본 제국의 침략을 피해 수립한 한반도 강제점령을 부인하고 국내외를 통할·통치하고 항일투쟁을 지휘하기 위한 목적으로 각지에 설립된 한국의 임시정부들이 통합하여 발족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이었다.
임시정부 결성과정에서 조선왕조를 유지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며칠 동안 이어졌지만 왕정복고의 주장은 받아 드려지지 않았다. 다만 임시헌정서에 조선왕조를 왕족으로 예우한다는 문구만 들어갔을 뿐이었다. 조선왕조는 그렇게 조선민중들에게서 멀어져갔다.
내가 태어나기 한해 전 조선왕조 오백년은 이렇게 완전히 저물갔다.
첫댓글 히유,.. 회사의 바쁜 일에다가 조선왕조를 공부하느라 업그레이가 늦어 부렀습니다. 독자 제위에게 양해를..... 다음편도 조선왕조의 실정에 대한 공부가 진행될 터인데요. 재미없어도 걍 즐겁게 봐주셔요.. 저도 이 글 쓰며 많은 공부 하고 있답니다.
허참~~ 보통일이 아닐턴데...항상 기다리고 있습댜... !! 수고~~~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