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도차제 / 김성철 교수 교리 해설(10)
수년전 텔레비전에서 ‘차마고도’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차마고도(茶馬古道)란 ‘차’와 ‘말’의 교역로로 중국의 서남부에서 티벳을 거쳐 인도로 이어지는 옛길이다. 그 다큐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티벳인들의 강력한 신앙심을 보여주는 삼보일배 장면이었다.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면서 험준한 티벳고원을 오르내린다. 무릎은 헐고 관절은 붓지만 개의치 않는다. 노숙을 하면서 불교성지를 향해서 걷고 또 걷는다. 지난한 고행의 길이다. 세계 그 어디에서도 티벳인들처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심을 가진 종교인들을 만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신앙심에는 ‘강력한’, ‘적극적’, ‘능동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티벳인들이 이렇게 깊은 신앙심을 갖게 된 비결은 티벳에서 개발된 특유의 불교교육체계에 있다. 이를 ‘보리도차제’라고 부른다. 티벳어로는 장춥람림(Byang Chub Lam Rim)이라고 하는데 줄여서 ‘람림’이라고 쓰기도 한다. ‘장춥’은 ‘깨달음’ 즉 보리(菩提)를 의미하고, ‘람’은 길(道)이며, ‘림’은 단계(次第)라는 뜻이다. 보리도차제란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매겨진 순서’를 의미한다. 보리도차제에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과 비유로 인간과 생명과 세계에 대한 통찰을 차근차근 제시한다. 한 구절, 한 구절 읽어가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읽는 것이 그대로 수행이다. 공포심과 감동이 교차하면서 우리의 감성과 지성은 서서히 변화한다. 불교적으로 개조되는 것이다. 누가 보든 안 보든, 깨어 있든 꿈에서든, 말과 생각과 일거수일투족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과 점차 합치해 들어간다. 강력하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독실한 불자로 환골탈태하는 것이다.
불전의 양은 너무나 방대하다. 불교에 입문했는데 먼저 어떤 경전을 봐야 할지, 어떤 수행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워 난감했던 불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리도차제를 지침으로 삼으면 이런 고민이 해결된다. 보리도차제에서는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을 모두 취합하여 불교수행의 순서에 맞추어 하사도(下士道), 중(中)사도, 상(上)사도의 삼사도(三士道)로 정리하고 있다. 불전의 모든 가르침을 불자들의 ‘교육과정’으로 재편해 놓은 것이다.
첫 단계인 하사도에서는 윤회의 세계 속에서 향상하는 것, 즉 내생에 인간계나 하늘나라와 같이 좋은 세간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방법은 남에게 많이 베풀고 계율을 잘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세속의 길이다.
둘째 단계인 중사도에서는 윤회의 고통을 절감하고서 해탈, 열반을 추구한다. 계, 정, 혜 삼학의 수행을 통해서 번뇌의 뿌리를 뽑는다. 소승불교의 성자인 아라한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전문수행자의 길이다.
셋째 단계인 상사도에서는 불교수행이 무르익어서 해탈과 열반이 멀지 않은 수행자가, 보리심을 발하여 소승적 열반을 유예하고서. 윤회 속에 머물면서 성불의 그날까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삶을 살아간다. 자비심 가득한 대승보살의 길이다.
하사도(下士道), 중(中)사도, 상(上)사도를 차례대로 세간도, 나한도, 보살도라고 부를 수 있다. 하사도인 세간도에서는 윤회 속에서의 향상을 추구하고 중사도인 나한도에서는 윤회에서 벗어남을 추구하며 상사도인 보살도에서는 다시 윤회 속으로 들어와 이타의 삶을 살아간다. 그 누구라고 하더라도 첫 수행은 세간도인 하사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사도 수행이 완성되어야 그 다음 단계인 나한도의 중사도 수행에 들어갈 수 있고, 중사도 수행이 무르익어야 그 다음 단계인 상사도의 보살도를 닦을 수 있다. 중사도의 수행자는 하사도의 심성을 갖추고 있고 상사도의 수행자는 하사도와 중사도에서 익혔던 심성과 통찰 모두 그대로 갖추고 있다. 이렇게 보리도차제의 수행은 누적적(累積的)이다.
하사도 수행에서 가장 먼저 닦아야 할 수행은 ‘죽음에 대한 명상’이다. ‘명상’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심오하고 독특한 어떤 수행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분별하고 생각하는 수행’이다. 이때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다. 공포심이 들 때까지 “나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죽음의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다.”는 등의 생각을 계속 떠올린다. ‘죽음에 대한 명상’이 완성되면 재물욕이나 명예욕과 같은 세속적 욕망이 사라지고 ‘종교심’이 솟는다. 그 다음에는 ‘아귀, 축생, 지옥’이라는 삼악도의 처참한 삶에 대해 공부한다. 우리는 내생에 대개 삼악도에 태어난다. 두려움이 생긴다. 이 때 비로소 불, 법, 승 삼보에 의지할 마음이 진심으로 솟는다. 참된 불자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실천함으로써 내생의 불행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선악의 기준인 십선계와, 인과응보의 가르침과, 파계한 악업의 과보에 대해 배운다. 그 결과 누가 보든 안 보든, 언제 어디서든 눈곱만큼의 악도 행하지 않는 선하고 도덕적인 불자가 된다. 요컨대 하사도 수행에서는 ‘자신의 죽음’과 ‘삼악도의 내생’과 ‘악행의 과보’에 대해 깊이 이해함으로써 “속물처럼 살지 않겠다.”는 ‘종교심’과 “꿈속에서도 악을 짓지 않겠다.”는 ‘도덕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하사도 수행이 완성되면 비로소 중사도 수행에 들어간다. 하사도 수행의 완성 여부는 내 양심에 비추어 내가 판단한다. 나의 도덕성과 나의 종교심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중사도 수행의 목표는 ‘출리심(出離心)’의 완성이다. 출리심은 염리심이라고도 부르는데 인간계든 하늘나라든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겠다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내생에 인간계나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은 극히 드믄 일일 뿐 아니라 그렇게 태어나도 언젠가는 다시 아래 세계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 집, 멸, 도의 사성제를 공부하고 계, 정, 혜 삼학을 닦아서 번뇌를 제거하는 수행에 전념한다. 이런 번뇌는 ‘세속에 맺힌 한’이기에 이를 제거할 경우 우리는 세속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윤회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탈하는 것이다. 열반하는 것이다.
중사도 수행을 통해 번뇌가 어지간히 소진되었을 때 수행자는 주변을 둘러본다. 내 부모가 보이고, 형제가 보이고, 친척이 보이고, 친구가 보이고, 뭇 생명들이 보인다. 나는 중사도 수행을 하여 번뇌를 제거하기에 다시는 윤회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내 주변의 이 모든 생명들은 육도윤회의 세계에서 삼악도의 고통을 겪으면서 탄생과 죽음을 무한히 되풀이 할 것이다.
이 때 수행자에게 연민의 마음이 솟는다. 그리고 “나만 혼자 갈 수 없겠다.”는 생각에서 그냥 윤회의 세계에 머물면서 이들을 돕고 제도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상사도인 보살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뭇 생명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언젠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부처가 되어야 그 복덕의 힘으로 보다 많은 생명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 다시 말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부른다. 상사도에서는 먼저 보리심을 강화시키는 수행에 들어간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전생이 있었고 개개의 전생마다 우리를 낳고 길러준 어머니가 계셨을 것이다. 아직 해탈하지 못한 이상 그 어머니들 모두 지금 어딘가에서 윤회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①모든 중생은 전생에 한 번 이상 나의 어머니였고(知母),
②어떤 어머니든 그 은혜는 막중하며(念恩),
③반드시 그 은혜를 갚는 것이 도리이고(報恩),
④이를 위해서는 모든 중생에게 행복을 주고(慈心),
⑤모든 중생의 고통을 제거해 주며(悲心),
⑥이런 자비의 마음을 더욱 강화하여(意樂),
⑦반드시 성불하여 모든 중생의 고통을 내가 짊어지겠다는 서원을 한다(菩提心).
일곱 단계로 이어지는 마음이기에 이를 칠종인과법이라고 부른다. 그 후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의 육바라밀을 닦고 보시, 애어, 이행, 동사의 사섭법(四攝法)으로 모든 생명체를 포용하며 가부좌 틀고 앉아 지관쌍운(止觀雙運)의 수행에 전념한다. 지관쌍운 수행의 궁극에서 공성에 대한 통찰이 완성된다. 이를 청정견(淸淨見)이라고 부른다.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인 ‘보리심’을 체화하고 공성에 대한 통찰인 ‘청정견’을 획득하는 것. 상사도의 수행 목표다.
보리도차제의 하사도는 세속에 사는 일반인의 길이고, 중사도는 출가한 소승수행자의 길이며, 상사도는 출, 재가를 막론하고 성불을 지향하는 대승보살의 길이다. 수학 공부에서 덧셈과 뺄셈을 알아야 곱셈과 나눗셈을 할 수 있고, 곱셈과 나눗셈을 알아야 인수분해를 풀 수 있고, 인수분해를 알아야 미적분을 알 수 있듯이, 하사도 수행이 완성되어야 중사도 수행에 들어갈 수 있고 중사도 수행이 무르익어야 진정한 상사도 수행자, 보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미적분을 푸는 사람이 인수분해는 물론이고, 곱셈과 나눗셈, 덧셈과 뺄셈에 모두 능통하듯이, 보리심을 실천하고 청정견을 추구하는 상사도 수행자의 마음에는 중사도의 출리심은 물론이고 하사도의 종교심과 도덕성 역시 늘 함께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하사도, 중사도, 상사도로 단계화하여, 이를 따르면서 차근차근 나의 감성과 지성을 개조해 갈 때 ‘차마고도’의 티벳불자들에게서 보았듯이, 불교에 대한 신심이 몸에 밴 강력하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불자로 개조된다. 보리도차제의 힘이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김성철 교수
월간 <불광> 2012년 10월호 / 불교, 쉽고 명쾌하고 행복하게
[출처] 보리도차제 / 김성철 교수 교리 해설(10)|작성자 수처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