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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것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가운데서 우리를 택하셨어요.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어요. 또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늘의 비밀을 알게 하셨어요. 하늘의 기쁨과 평강을 깨닫게 하셨고 누리게 하셨고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셨어요. 또한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우게 하셨어요. 예수 그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가정을 통하여 자녀를 통하여 또 여러가지 삶의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구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하셨어요. 이 모든것에 얼마나 감사한지를 모릅니다.
자 그런데 그런 반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것도 있어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만큼 우리에게 소망을 가지고 게신거에요.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열매를 맺는것입니다. 내가 그냥 나로 끝나는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그냥 나혼자 구원받고 축복받고 행복하고 그것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내가 변하고 나로 인하여 이웃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는거에요. 나라는 밀알한알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그런 변화의 기대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하나 빼놓지 않으세요.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기대와 소망을 품고 계시는 거에요.
어떻게 우리가 그 기대에 부응 할 수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그 비밀을 말씀하고 있어요. 이 본문은 우리가 너무 잘아는 말씀이에요. 너무 평범한 자연의 이치에요. 그래서 어쩌면 머리에만 담고 있는 말씀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오늘 본문 읽으면서 “아 목사님이 오늘 무슨 말씀 하시겠구나” 이미 자기 나름대로 설교 밑 그림 다 그린 분도 있을거에요.
그러기에 오늘 여러분, 우리는 먼저 성령께 간구하기를 소원합니다. “성령님 이 말씀이 머리에만 머물지 말고 가슴에 품도록 해 주세요. 또 가슴에만 품지 말고 내 손에 내 발에 내 삶에 내려 오도록 해 주세요.” 우리가 간구할때에 말씀이 능력이 되고 생명의 힘이 될 줄 믿습니다.
먼저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한 일의 밀일”이란 단어입니다.
제가 밀알이 없어서 쌀안 한 알 가지고 왔어요. 밀알로 생각하세요. 보이지도 않죠? 또 보인다 한들 무슨 대수겠어요. 이게 정말 별거 아니가든요. 이것 한 알로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어요. 이걸로 한끼 배를 채우겠습니까? 아니면 예쁘다고 고리 끼워서 귀에다가 달고 다니겠어요. 제가 여기서 이것 휙 집어 던진다고 해서 예배 끝나고 “아이구 아까워라” 이거 찾을 사람 하나도 없어요. 그냥 밀알 한알일 뿐이에요. 그 자체로는 볼품없고 초라하고 아무런 가치도 발견 할 수 없는 그런 존재일 뿐입니다.
그란데 여러분 이 밀알이 땅에 묻하면 어떻게 됩니까? 눈이 트고 싹이 납니다. 파랗게 순이 돋고 자라기 시작을 해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열매가 맺히는거에요. 분명히 손 안에 있을때에는 아무 가치 없어 보이는 밀 한 알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수 백 수천 알이 맺히는거에요. 한 알이 변하여서 엄청난 열매가 맺히는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다른것 아니에요.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에요. 생명의 힘입니다. 이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 한 작은 밀알은 언제나 놀라운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거에요.
몇년전에 이런 뉴스가 났었어요.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이란 곳에서 발굴작업을 하다가700년된 고려시대 연꽃 씨앗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씨앗담그기를 했대요. 5일만에 싹이 나더라는겁니다. 그러더니 순이 돋고 잎이 맺히고 쑥쑥 자라더니 아름다운 연꽃이 맺힌거에요. 정말 신기한것은 식물학자들에 의하면 그 연꽃나무의 특성이 옛날 고려시대의 연꽃과 똑같다는 거에요. 그 속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더 크고 더 비밀스러운 생명이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어떤 생명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절대 마르거나 죽지않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속에 살아있는 사람들인것입니다. 절대로 끊어 질 수 없는 생명이에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온 생명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죄 짐을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끝없는 사랑의 통로를 통하여 나온 생명이에요.
그러기에 우리는 분명 한 알의 밀알같이 나약한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때문에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 실망하고 좌절하고 염려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때문에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아요.
우리는 분명 작은 일에도 분노하고 상처입고 흔들리는 존재 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때문에 결코 후퇴함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이란 문이 열려 있는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허락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있는거에요. 예수님의 생명이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변화도 가능합니다. 무리 모두는 아름다운 열매, 많은 열매, 좋은 열매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게 있는거에요.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할렐루야
이제 매일 아침 눈을 뜨시면 여러분 자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의 생명이 내안에 넘치는 존재다” “비록 내가 밀알 한 알 같은 존재일지라도 그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나는 변화하여 큰 열매를 맺으리라”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녀에게 서로들 그렇게 말해 주세요. 성도들끼릴 서로 그렇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인하여 늘 풍성한 매일매일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주목할 단어입니다. 그것은 “땅에 떨어져.......” 하는 말입니다.
밀알이 열매를 맺을려면 먼저 땅에 떨어 져야만 해요. 아무리 생명이 있고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싹이 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물에서 재배하는 수경재배도 일부식물은 가능해요. 그러나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맺기 위하여는 거기에 합당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 윈리는 땅이나 물이나 마찬가지에요.
생명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그냥 싹이 트는게 아니란 사실입니다.반드시 있을 자리에 있어야만 되는거에요. 받을 것들을 받아야만 합니다. 햋볕도 받고, 수분도 맞아야 하고, 각종 영양분이 필요해요. 그래야만 그 생명이 살아나고 싹이 나게 되는거에요. 자라게 되는것입니다. 아무리 값비싼 황금으로 만든 잔 속에 넣어보세요. 싹이 나는게 아니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포근하고 푹신한 침대속에 둔다고 해서 싹이 납니까? 가지가 자랍니까? 아니잖아요. 밀알이 있어야 할곳은 땅입니다. 땅에 떨어져야 해요. 싹이 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것이고 반드시 함께 해야 할 것들과 함께 해야만 하는거에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그 생명이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맺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곳에 있어야 합니다. 받을것 받아야 해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속에 늘 살아 있기를 소원합니다. 제일 중요한거에요.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거에요. 그것을 내가 느끼고 깨닫고 잊지않고 가슴에 품고 사는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대속의 은혜에요.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은혜입니다. 또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 하시는 은혜에요.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여호와 이례 준비하여 주시는 은헤입니다. 나의 나 된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진실한 고백인거에요.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내 가슴을 늘 붙들고 있어야 하는거에요. 그런 자리에 머물도록 나 자신을 몰아갸야 합니다. 사모하고 찾아야 해요. 있을 자리에 있어야 하는것이고 받을것을 받아야 하는거에요. 그래야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것입니다.
이 은혜를 늘 가슴에 품기위하여 제일 중요한 자리가 예배의 자리에요. 여러분, 예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온 맘다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일 주일에 한 두번 드리는 예배잖아요. 정말 사모하고 오세요. 그리고 온 맘 다해 드리세요. 여러분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혼탁해진 영과 육이잖아요. 참 회개로써 다시한번 정결케 해야만 해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거든요. 순결한 제물이 되어야 하는것입니다. 준비하고 드려야 하는것입니다. 그럴때에 은혜가 임하게 되는거에요.
우리의 모든 예배가 하나님께서 열납하시고 은혜를 폭포수같이 퍼부어 주시는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 생활에 바쁘지만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불을 끄지 마세요. 하나님 생각, 예수님 생각, 성령님 생각하는 시간을 자꾸 많이 가지세요. 갈보리 산상 십자가 앞으로 자주 자주 나가세요. 그 십자가의 아픔을 같이 경험하세요. 그리고 나의 삶의 주인이시요 왕되신 하나님을 늘 고백해보세요. 그 주인에게 믿고 의지하고 맡기고 귀를 기울이고 따를려고 결단해 보세요. 그러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경험을 그 은혜속에서 진정으로 깨달을 수가 있어요.
이렇게 은혜가 풍성하면 얼굴이 달라집니다. 믿음이 생겨요. 소망이 생기고 꿈과 비젼이 생겨납니다. 당연히 건강한 싹이 틉니다. 푸르른 잎이 자라고 아름답고 좋은 열매가 맺게 되어 있어요. 다른말로 하면 만사가 형통해지는거에요. 요셉이 보디발집에 종으로 팔려가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케 되었더라. 억울하게 누명쓰고 감옥에 갔는데 거기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형통케 되었더라. 이렇게 성경이 말씀하잖아요. 어떤 환경에서도 형통함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풍성한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늘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있을 자리에 있고 받아야 할것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싹이 트고 자라고 열매맺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형통의 증거가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 주목할 단어입니다. 그것은 “죽으면” 하는 말입니다. 반대는 “죽지 아니하면”하는 말이에요. 죽으면 싹이 트고 가지가 자라고 많은 열매가 맺어지는 거에요. 그러나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입니다. 싹도 트지를 않습니다. 가지도 잎도 없어요. 당연히 열매가 맺히지를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것은 원래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서 말씀하신거에요.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십자가에서 비참한 처형을 당할 이유는 더욱 없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아셨어요. 자신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꿈꾸고 계시는 그 열매를 가슴에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나 하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하니님께서 구원하실려는 그 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셨던 거에요. 제 이름도 거기 있었고 여러분 이름도 거기 있었어요. 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심으로 이루어진 열매인 것입니다.
오늘 이 “한 일의 밀알이 죽으면” 하는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그거에요. 예수님께서 죽으신것 같이 우리도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매 맺으라는 거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꿈과 소망의 열매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희생, 봉사 이런 차원을 넘어선 말이에요.
내가 죽음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열매를 보라는 거에요. 나의 희생, 나의 섬김, 나의 헌신, 나의 인내, 나의 사랑, 이 모든 것들로써 하나님께서 맺으실 열매를 기억 하라는거에요. 궁극적으로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참된 제자된 나의 모습을 통하여 어떤 하늘나라의 열매가 맺어질까? 기대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죽는다는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헤가 넘칠때에 사도바울과 같이 이런 고백을 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 내가 죽었다는 고백이에요. 내가 죽은 내 안에 대신 그리스도께서 사심을 느낍니다. 깨닫습니다. 고백해요. 그런데 문제는 이게 계속 되지를 못하잖아요. 너무나 자주 덜 죽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거에요. 아직도 내속에 꿈틀 꿈틀하는 육신의 소욕을 보는것입니다. 덜 성숙한 나를 발견하는거에요. 여러분 그게 우리 고민중 하나가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마 우리같은 고민을 했던것 같아요. 그런데 그는 그냥 고민만으로 끝나지를 않았어요. 해답을 발견하고 귾임없이 노력하였어요. 답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이렇게 답해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자신을 십자가에 매일 못 박는거에요. 자신을 죽은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같은것들이 “너 아직 죽지 않았어 넌 살아있어 죽으면 안돼” 자신을 칠때마다. 아니야 “나는 죽은자이다” 그러고 십자가에 다시 한번 자신을 못 박는 거에요. 그러면 어떤 고백이 나옵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해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것이라”
아직 연약합니다. 아직 모자랍니다. 아직 허물과 죄에서 완전하지를 못해요. 그러나 이제는 확실한 믿음으로 사는거에요. 영원히 거할 쇠하지 않을 하나님의 집을 믿음으로 바라는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맺으실 하나님의 열매를 믿음으로 바라보는거에요. 그리고 나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속하신 그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고 매일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는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의 원리가 바로 그거에요. 우리는 스스로 죽을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나를 죽여야지. 내가 죽어야지.....” 아니에요. 여러분, 그렇게 하지 마세요. 대신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바랍니다. 그냥 자기를 죽일려고 아무리 노력해 보십시요. 아마 노력하는 만큼 더 살아날 것입니다. 잠시 죽는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요. 그러나 사실은 속에서 눌려서 쌓이는 것입니다. 이게 자칫 터지면 더 무서워요.
여러분 우리가 죽는 방법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에요?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하는것입니다. 그 분의 고난을 기억하는거에요. 왜 고난 받으셨나? 왜 수치와 모욕을 참으셨나? 그 위에서 어떤 생각을 햐셧고 무엇이 그 분을 기꺼이 그 죽음까지 인내 하게 하셨나 하는거에요.
그것이 깨달아 진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을 매일 십자가 위에 못 박을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내가 매일 죽노라” 당당하게 외칠 수가 있을거에요. 그리고 나를 죽지 못하게 하는 것들 앞에서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거에요. “예수님이라면 이때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이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우리가 드리는희생 섬김 봉사 모두가 마찬가지 입니다. 이 죽음의 진정한 원리와 의미가 살아 있을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참 열매로 나타나는거에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열매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의 의가 하나님의 열매처럼 둔갑하여 나타내는거에요. 그것이야말로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것입니다. 이런 열매는 교만을 낳게 됩니다. 바리새인같은 위선을 낳게 되요. 남을 정죄하는 오류를 범하게 하는것입니다.
십자가위에 매일 못박는, 그래서 죽음으로서 열매맺는 우리 모두 되기를 소원합니다.
말씀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힘 없고 연약하고 밀알 한알 같은 존재같이 여겨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는 변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하여 있을곳에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은혜속에서 공급받아야 할것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위에서 매일 죽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여러분의 삶속에서 주렁주렁 맺히는 복된 열매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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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빛과 소금과 밀알 그중에 밀알은
스스로 몸을 버려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가지와 열매를 맺어 또다시 수많은 밀알을 만들어내니 인간이 이처럼
희생 헌신 하는 것이 성직자들의 길이니....
요즘의 교역자들은 정녕 이렇게 밀알과 같은 삶을 사는지 아니면 건축교로 개종을 한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