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락리 송왕 양조장/박철영
월락리는 남원 시내와 가까워서인가 있을 것이 제법 있었다. 이발소 바로 맞은편에 막걸리를 만드는 송왕 양조장이 있었다. 월락리는 그때도 약간은 시내 분위기를 풍겼다. 그곳에 파출소도 있었고 거기서 왼쪽으로 나가면 이백면과 나누어지는 분기점이었다. 아래로는 시내로 내려가는 길과 이어졌다. 그곳에는 설날에 쓸 가래떡을 뽑던 떡방앗간도 있었다. 월락리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 마을과는 달리 농사만 짓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직업도 다양해 활기가 있었다. 파출소 앞에는 자전거를 수리해주는 자전차뽀가 있었다. 본래 자전거를 수리해주는 점포였을 것이다. 자전거 수리점이 맞을 텐데 우리가 중학교 다닐 때는 자전차뽀라고 말했다. 그곳에 들러 펑크 난 타이어 빵꾸를 때운다거나 타이어에 부족한 바람을 넣곤 했다. 거기다 자전거에 이상이 있으면 주인아저씨한테 공구를 빌려 사용했다. 빌린다기 보단 단골이기에 자잔차뽀 안에 걸어놓은 공구를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특히 자전거 핸들이 삐딱해지면 자전거 앞 바퀴를 두 가랑이 사이로 넣어 움직이지 않도록 잡고는 핸들을 바로 잡고 몽키로 조였다. 사실 키가 작다보니 자전거를 타도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 짐칸에 고무줄로 묶어놓은 책 가방에 흙이 묻고 교복도 엉망이 되었다. 작은 키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페달을 밟는다고 엉덩이를 자전거 안장 좌우로 비틀어야 겨우 닿는 정도였다. 그런 내 속도 모르고 키는 참으로 더디게 컸다.
그만해서 끝나면 좋은 거다. 자전거 페달이 뭉개지거나 뚝 부러져버린 경우도 있었다. 거기다 자전거 핸들도 넘어진 충격으로 한쪽으로 홱 돌아가 버려 틀어져 버린 것이다. 언젠가는 자전거 브레이크가 들지 않아 그대로 들이받아 핸들이 부러진 경우도 있었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그때 브레이크가 들지 않은 건지 아니면 내가 서툴러 그랬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워낙 기계치라서 자전거도 기계적인 동작을 하는 거고 내가 잘 다뤄야 하는 거니까. 자전거에서 핸들이 부러진 거라면 대형 사고다. 견적이 많이 나온다는 뜻이다. 그럴 때 찾아갔던 곳이 월락리 자전차뽀였다. 학교에서 오후 수업이 없는 날에는 지나가다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 자전거 바퀴살에 광을 냈다. 자전차뽀에는 기름을 담은 깡통과 헝겊을 놓아두었다. 일종에 손님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 정도는 눈치껏 사용해도 괜찮았다. 그런 헝겊에 기름을 발라 자전거 바퀴살과 바퀴를 닦으면 광이 났다. 다 닦고 난 뒤 깨끗해진 자전거 바퀴를 돌리면 둥근 바퀴와 바퀴살에서 속도와 비례해서 은빛의 둥근 원이 윙윙 소리를 내며 울듯 돌았다. 쪼그리고 앉아 바퀴에서 나는 맑은소리와 빛을 가슴에 죄다 담았다. 그런 뒤 비가 오지 않으면 며칠간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그런 월락리에는 일종에 공장이라고 해야 할 막걸리 양조장이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면 술 냄새가 훅 풍겨왔다. 심부름 때문에 그곳을 들어가 보면 막걸리를 만드느라 분주한 사람들이 보였다. 입구에는 짐 자전거가 늘어서 있었다. 그중 몇 대의 짐자전거가 우리 마을까지 대 여섯 말을 싣고 배달하러 다니던 아저씨 것이었다. 모내기 철이나 가을 추수 때가 되면 이분들은 그야말로 죽을 고생 하는 계절이다. 집집마다 막걸리 한 말 아니면 반말 정도를 예약받기 때문이다. 그 양이 상당했다. 주문은 동네 구판장에 미리 말해놓거나 학교에 가면서 양조장에 들러 전했다. 당시는 동네에 전화란 게 아예 없던 시절이다. 그렇게 동네마다 주문을 받다 보면 적은 양이 아니었다. 그때는 배달용 차를 이용할 여유까지는 없었다. 그런 용도로 살 수 있는 만큼 차가 보급이 안 되었고 우선은 돈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한참 후에 삼륜차가 나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짐바라는 짐 자전거가 웬만한 용달차 정도 값어치를 하던 때이다. 배달하는 분들이 많았고 우리 동네에는 단골로 와주는 분이 있어 인사를 해줄 정도로 낯이 익었다. 양조장 직원이니 어떤 처우를 받고 일을 했는지는 몰라도 동네에서 모내기나 추수하는 집이 한 두 집이 아니기에 밤샘하며 날랐을 것이다. 도로 사정도 안 좋아 자갈이 깔린 신작로도 힘들었을 것이고 고갯마루나 커브 길이 나오면 엄청 고생했을 것이다. 술통을 당시는 술 통개라고 했다. 술 통개는 짐 자전거에다 네 개를 뒤쪽에 매달고 그 위에 한두 통개를 더 실었다. 그냥은 못 실으니 자전거 뒤쪽 짐 실을 곳에다 쇠고리를 걸어 술 통개를 고리에 걸었다. 그렇게 많은 술 통개를 싣고 우리 마을 앞 당산 고개를 오를 때는 만만치 않은 각오가 필요했다. 자갈길을 혼자 밀고 오른다는 것은 어렵다. 그런 당산고개를 매일 넘어야하니 술 통개를 배달하는 아저씨도 힘들고 지쳤을 것이다. 그런 날은 자기가 싣고 온 술을 마셔가며 술기운에 일을 했다. 어떤 때는 술이 과해 당산 고개 돌아가는 넙죽 바위에 짐 자전거고 술통개고 다 집어치우고 거나히 술에 취해 잠을 자는 일도 있었다. 고된 일에는 휴식이 최고이고 술까지 곁들였으니 잠깐이나마 내 눈에도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짓궂은 아이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 때에 빨대를 이용해 술통개의 뚜껑을 열고 술을 빨아 먹었다. 아이들끼리는 그런 것도 자랑이 되는 때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쳐다보기만 해도 웃음이 도는 그 친구 얼굴들이 떠올라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나도 언젠가는 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오지 않았다.
우리는 학교 갈 때나 갔다 오면서 술 나르는 그 아저씨를 자주 보았다. 당산고개 오르는 초입에서 아저씨를 만나면 술 통개를 잔뜩 실은 짐 자전거를 밀어줬다. 아저씨 혼자일 때는 술 통개를 나누어 옮기며 당산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나도 인천 부평에서 짐바라고 하는 짐 자전거에 농심 라면과 미원을 싣고 배달을 해 보았다. 미원은 한 포대에 25kg로 포장되어있었다. 이것을 대 여섯 포대씩을 실어 날랐다. 가깝게는 부평 시장에서 멀리는 작전동 해태음료 공장이 있는 곳까지 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다. 그래도 부평은 큰 도시여서 아스팔트가 포장된 도로가 많았다. 그렇기에 월락리에서 술 통개를 배달하는 아저씨들보다는 좀 나았을 것이다. 비 포장된 자갈길로 술 배달하는 아저씨들의 고통은 일상이었고 짐작 이상의 고통스런 삶이었을 것이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은 만큼만 앞으로 나간다. 인생이란 것이 자전거와 너무도 닮았다. 먹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볼 겨를도 없는 숙명이었다고 치자. 고등학교 때인가 월락리를 지나다니며 술 배달하는 아저씨의 작은 희망을 이루어가는 걸 보았다. 월락리 양조장에 붙은 건물에다 그분 예쁜 아내가 구멍가게를 낸 걸 알았다. 세상 탓하지 않고 묵묵히 꿈을 이루어가는 풀꽃같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거기에도 있었다.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면서 오로지 사회 탓만 하는 사람들, 남의 잘못에 목소리를 높이는 데 주저하지 않은 사람들도 보았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꿈을 키우되 허황스런 꿈은 꿈이 아니다. 그저 헛될 뿐이다.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 힘쓸 때 이룰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꿈이다. 그런 꿈을 나는 지금도 꾸고 있다. 월락리 양조장에서 일하던 그 아저씨가 생각난다. 고단함이 배여 구릿빛이 된 얼굴이지만 눈빛에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결기가 있어 보였다. 자신이 밟았던 짐자전거의 페달만큼을 행복으로 변화시켜가는 모습을 보았다. 자전거에 올라타고만 있으면 알아서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삶은 어떠했는가를 고민해봐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첫댓글 술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술이야기니까
술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