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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康秊(1858∼1908)은 철종 9년(1858) 경북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에서 이기태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樂仁 호는 雲崗이며 전주가 본관이다. 어머니 남씨가 태양을 삼키는 꿈을 꾸었다 하여 아명을 出陽이라 불렀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8척 2촌의 장신에다 勇力이 출중하였고 兵書에 조예가 깊어 일찍부터 장군감으로 지목되었다.
그는 1880년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折衝將軍行龍驤衛副司果의 선전관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1896년 1월 11일 가산을 정리하여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관찰사 金錫中과 수검 李浩允·金仁覃을 체포하여 農巖 장터에서 효수하였다. 이어 제천으로 유인석을 찾아가 그의 師門이 되었으며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 해 4월에 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한 다음, 유인석이 요동으로 망명하자 그는 의병을 해산하고 은식하였다. 그러나 1897년 5월 유인석을 찾아 요동으로 갔다. 그러나 그 해 7월 다시 귀국하여 단양 금채동에 우거하였다.
단양 금채동으로 돌아온 후 10년간 의암 유인석의 문인으로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화서 이항로의 문집을 간행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화서 이항로의 문장목판은 지금도 제천에 고히 소장되어 있다. 이 목판은 불교의 팔만대장경에 필적하는 유학경전으로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강년은 또다시 거의할 것을 결심하여 1907년 4월에 을미 때의 옛 동지 安成海와 함께 제천에서 궐기하였다. 그 뒤 1908년 7월 충북 청풍의 까치성 전투에서 체포될 때까지 1년 3개월간 단양·제천·원주·연풍·영월·횡성·강릉·청풍·충주·문경·예천·영주·봉화·안동 등 경북·강원·충북 일대를 돌며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일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의병항쟁사에서 지울 수 없는 전적을 남겼다. 그의 엄청난 전투 경력은 申議官의<창의가>에 자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자상한 기록으로는 이강년의≪雲崗倡義日錄≫이 있다. 이 일록에 적혀 있는 주요 전투상황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가장 큰 전투는 1907년 8월 3일의 갈평전투였는데 지금 그곳에 기념비가 서 있다.
따라서 이강년은 1907년 8월 1일의 군대 해산 이전에 의병을 일으켰다. 군대 해산이 단행되자 민긍호의 원주 진위대가 봉기하였고 이강년이 그들과 연합했다. 그리하여 이강년과 민긍호는 강원도·충청도·경상북도 일대에 걸쳐 용맹을 떨치던 양대 의병장으로 일제 군경들이 크게 두려워하던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강년은 무과 출신으로 구식군대의 맹장이었고, 민긍호는 신신군대의 대표적인 의병장이었으니 신구 한국군의 조화로운 연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강년이 재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광무황제는 전판서 沈相薰을 은밀히 이강년에게 보내어 都體察使를 제수하면서 다음과 같은 密詔를 내려 독려하였다.
아, 나의 죄가 크고 악이 충만하여 황천이 돌보지 않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이 틈을 엿보고 역신이 권세를 농락하여 4천년 종묘사직과 3천리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의 수중으로 넘어갔도다. 생각하면 실날같은 나의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사직과 만백성을 생각하니, 이것이 애통하도다. 여기에 선전관 이강년으로 都體察使를 삼아 七路에 勸送하니, 良家의 才子로 각기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召募將에 임명하여 印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쫓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어 罷出하고 처분하여 강토를 보전하고 사직을 수호함에 목숨을 다하여라. 조서를 비밀히 내리는 것이니 그리 알고 모든 일을 거행하라(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編,≪獨立運動史資料集≫1, 223쪽).
이강년 부대는 민긍호 부대와 연합하여 충청북도 관찰부 소재지인 충주 공략에 나섰다. 이강년은 제천-청풍-충주로, 민긍호는 제천-주포-충주로 길을 나누어 충주를 향해 진군하였다. 이강년은 8월 23일 충주에 먼저 도착, 功城 준비에 들어갔는데, 민긍호는 도중에 박달재에서 일군과 조우, 격전을 벌이는 바람에 충주 도착이 늦었다. 이에 이강년은 단독으로 충주공략전을 벌였으나, 일군 2개 소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강년은 단양을 거쳐 죽령을 넘어 경북 풍기·문경 지역으로 이동해 갔다. 이곳에서 그는 여주의 金賢圭 의병부대와 합류한 뒤, 조령과 문경 서쪽의 梨花嶺에 병력을 배치,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처럼 경상·충청 양도의 관문인 문경이 의병의 수중에 들어가자, 일군은 이 일대에 대한 의병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일군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문경 동북쪽의 葛平으로 이동하였는데 일군이 그곳까지 추격해오자, 이강년은 우선봉 白南圭, 좌선봉 河漢瑞, 우군선봉 權用佾, 도총독장 李萬源 등을 출동시켜 적을 격파한 다음 단양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일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이강년 부대는 다시 영춘으로 이동, 그곳의 李明相 부대와 청풍의 趙東敎 부대를 합병하였고, 소모장 元建常이 삼척지방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합류해와 의진이 크게 강화되었다.
9월 25일 이강년 부대는 赤城을 거쳐 영춘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인 뒤 다시 영월로 북상하였다. 그 곳에서 10월 6일 일군과 또 격전을 벌이고 다시 영춘으로 남하하여 남한강을 건너 제천 宋寒으로 진출하였다.
10월 21일 일제가 보낸 강원도 선유사 洪祐哲 일행이 원주에서 酒川 방향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백남규·권용일이 이끄는 의병을 上杻峙에 매복시켜, 일군의 호위를 받으며 가는 선유사 일행을 기습하여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홍우철은 간신히 원주로 되돌아 갔다. 이강년 부대는 그 뒤 단양을 지나 죽령으로 남하하였다.
의병이 교통요로인 죽령에 출현하게 되자, 일군은 병력을 죽령 방면으로 집중시켜 의병을 제압하려 하였다. 이에 11월 10일 죽령에서 일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강년 부대는 소백산을 거쳐 재차 영춘-의풍-고치령을 지나 순흥 공략에 나섰다. 여기에는 울진 일대에서 용맹을 떨치던 申乭石 의병진도 동참하였다. 두 부대는 순흥의 일군분견소, 경찰서 등을 파괴한 다음에 이강년은 義豊으로, 신돌석은 西壁으로 각기 이동하였다.
의풍으로 이동한 이강년은 군인 출신 邊鶴基를 우군장으로 임명하는 등 전열을 가다듬는 뒤 영춘으로 남하해 갔다. 그러나 11월 26일 영춘 동쪽에서 일군과 조우하여 격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從事 朱範淳·鄭傔童이 전사하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이에 이강년은 일군과의 조우를 피하면서 죽령으로 남하, 그 일대를 전전하면서 도총독장 이만원, 소모장 이중봉, 선봉장 권용일 등과 함께 흩어진 병력을 모아 전열을 수습해 나갔다.
그 뒤 이강년은 12월에 경기 지역을 향해 북상길에 올랐다. 단양을 지나 제천으로 향하던 중 이강년이 병을 얻어 12월 16일 전군이 임현 부근에서 잠시 유진하게 되었는데, 이 때 기습공격을 가해와 참모 元荷汀·申橚·申明熙, 소모장 李重鳳 등 10여 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부근의 旁杜寺에서 잠시 요양하던 이강년은 그 비보를 듣고, “내가 거의한 지 12년에 이와 같은 참패를 당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탄식하였다.
이강년은 이 때 이인영으로부터 13도창의군의 서울 탈환작전에 참가해 달라는 서신을 받고 서울을 향해 북상하기로 했다. 이강년은 태백산맥을 따라 강원도 홍천·화천을 거쳐 1908년 1월 8일 마침내 경기도 지역에 당도하였으나 목적지인 서울은 멀기만 하였다. 요소요소에 일본군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이를 뚫고 나가기에는 힘이 벅찼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강년은 4월 초순에 하는 수 없이 강원도로 퇴각하고 말았다. 즉 화천 간척리, 인제를 거쳐 4월 10일에 설악산 백담사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일본군 500명은 4월 13일 백담사를 공격해 왔고 이강년은 보기좋게 적을 무찔렀다. 백담사전투는 이강년 부대가 거둔 대첩중 하나로 꼽힌다. 이어 이강년 부대는 설악산 신흥사를 거쳐 영월로 남하하였다. 이 때 마침 백남규·권용일 양인이 그 동안 모집한 4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본진에 합류해와 의병들의 사기가 한층 고무되었다.
이강년은 새로운 활동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재차 안동 서벽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영주수비대 소속 일군이 서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선봉장 백남규·권용일과 우군장 변학기 등으로 하여금 길목을 지키게 하고 成益賢의 삼척의병이 이들을 지원토록 하여 일본군을 포위 섬멸시켰다. 그는 승세를 몰아 서벽 남쪽의 乃城으로 진격,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자 禮安수비대 소속 일군이 의병을 추격하여 다가왔다. 일군은 위장전술을 펴 ‘義兵大陣’이라 쓴 깃발을 앞세우고 다가왔다. 이강년 의병은 이들을 맞아 집중사격을 가한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이후 황지·상동·제천·평창 등지를 전전하며 일군과 혈전을 거듭하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동안에 전력이 크게 소모되어 있었고, 더욱이 6월 28일에는 평창 부근의 獅子山에서 원주수비대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어 더 이상 항전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강년은 잔여 의병을 이끌고 영월을 거쳐 청풍으로 남하하던 중 鵲城에 잠시 유진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것을 탐지한 제천수비대 일군이 이곳으로 진격해 왔다. 이강년 부대는 이들을 맞아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기울어 도선봉 河漢瑞 등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은 전사하고, 이강년은 왼쪽 발목에 총탄이 적중, 행보를 옮기지 못하여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태백산맥을 중심 무대로 경상·충청·강원 일대에서 용명을 날리던 이강년 의진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는데 1908년 7월 2일의 일이었다. 이강년은 이때 다음과 같이 분한 마음을 시로 읊었다.
무정하다 탄환이여
발목을 상하여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나 맞았으면
욕보지 않고 요경(瑤京)에 갈 것을(≪海東義士雲崗李康秊先生略史≫, 33쪽).
이강년은 적에게 잡힌 뒤에도 비굴한 행동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상처의 치료는 물론 음식도 거절하였다.
그는 충주·수원을 거쳐 7월 8일 서울 용산의 일군사령부로 압송되었고, 19일에는 다시 평리원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았다. 일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 그는, “보고 싶은 자는 이토 히로부미 뿐이다. 너희 무리와는 말하지 않겠다”고 크게 호령하고, 또 평리원에서는 원장 朴濟璿의 물음에 ‘더러운 자’와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글로서 답하였다.
내가 거의한 것은 먼저 5적과 7적을 단죄하고 왜적을 박멸해 위로 나라의 철천지 원수를 갚고 아래로 도탄에 빠진 생민을 구하고자 함에서였다.
그 뒤 이강년은 9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3일 오전 10시에 51세를 일기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는 죽기에 앞서 장자 承宰와 종제 康壽에게 주는 유서 그리고 전국의 의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告訣文을 남겼다.
너의 아비는 평생에 血衷을 품어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하였다. 이제 뜻대로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랴. 너는 놀라지 말고 정신을 차려 동생과 함께 내가 죽은 뒤 3일 안으로 薄葬토록 하라(≪大韓每日新報≫, 1908년 10월 15일,<訣長子承宰書大略>).
나는 양심이 격동함을 참을 수 없어 병신년(1896) 이래로 13년간에 두 번 義旗를 들고 일어나 30여 회전에서 賊酋 백여 명을 참수하였다. … 이 몸은 尊華攘夷의 大義에 죽는 것이니, 이제는 그 날이 되었다. 동지들에게 바라는 것은 賊勢가 성하다 하여 본래의 뜻을 어기지 마시고 더욱 큰 의리로 매진하시어 광명한 날을 기다리시라(≪雲崗倡義錄≫, 告訣八域同志, 295쪽).
한편 이강년이 피체된 뒤 중군장 金尙台가 유지를 받들어 백남규 등과 더불어 영호남 각지를 전전하며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강년(李康秊1858~1908)은 동학운동에도 참여했던 구한말 의병장이다. 그는 고종황제로부터 도체찰사 임명을 받아 의병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군하던 중에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본은 전주이며 철종 9년 1858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에서 아버지 이기태와 어머니 의령 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는 운강(雲崗)이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의 집에서 자랐으며, 장성하면서 기골이 점차 장대하고 키가 여덟 자가 넘었고 눈빛은 불이 넘치는 것 같아 위엄이 넘쳐 흘렀다고 한다.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 후 물러나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했다. 이때 휘하에서 농민군으로 활약하며 심산유곡을 누볐던 많은 농민들이 후에 의병항쟁에 가담하게 되었고 보급조달, 지형탐색, 현지 정보망 구축과 같은 의병항쟁에 있어 긴요한 전략자원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94년에 청일전쟁, 갑오개혁에 이어 1895년 8월 명성황후시해, 단발령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을미의병으로 알려진 의병전쟁이 시작되었다. 특히, 단발령은 전국의 재야 유생들을 분개시켜 전쟁의 직접적 불씨가 되었다.
경북 문경의 이강년 생가 /문화재청
이때 선생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일본인들을 소탕하고자 결심했다. 제천에 유인석 의병대가 형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1896년 2월 23일 자신의 가산을 흩어 군사들을 모집하고, 문경에서 왜적의 앞잡로 양민을 토색질하던 안동관찰사 김석중 등 3명을 생포해 농암시장에서 효수(梟首)했다.
선생은 의병을 거느리고 안동의 창의대장 권세연을 만나 군사상의 문제를 의논하고, 제천으로 가서 유인석을 찾아 합류했다.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이 된 선생은 1896년 3월 17일 전군장 홍대석과 함께 군사 6초(哨)를 거느리고 수안보의 병참을 공격했고, 이후 9초(哨)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과 함께 문경 평천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그해 4월 제천 의진이 장기렴이 거느린 관군에게 패하자 유인석은 중국 요동으로 건너갔다.
이때 선생은 유인석의 뒤를 좇아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고자 했지만,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백산으로 들어간 선생은 보급이 어렵고 이탈자가 늘어나 의병대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 금채동에 은신했다.
선생은 1897년 4월 요동으로 들어가 유인석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을 만나 장백, 무송, 즙안, 임강 등에서 이주민 자치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생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백성들에게 항일의식을 불어넣고 이를 기반으로 직접 적과 부딪혀 싸우면서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서 그 해 7월 다시 단양으로 돌아왔다.
1907년 군대의 해산은 당시 의병항쟁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해산한 군인들이 대부분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으로 전환했다.
선생은 1907년 3월 유인석과 상의한 후, 강원도 원주, 횡성 등지에서 군사를 모집했다. 이어 6월에 원주읍의 무기고를 열어 병장기를 거두고 군세를 확충했다. 7월 제천읍으로 진군,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원주 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 의진, 조동교, 오경묵, 정대무 의진 등과 연합하여 제천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종황제는 선생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제수하며 밀조를 내렸다. “선전관 이강년으로 도체찰사를 삼아 지방 4도에 보내니 양가(良家)의 재주 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병을 일으키게 하며 소모장(召募將)을 임명하되 인장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좇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이고 파직하여 내쫓을 것이며, 오직 경기(京畿) 진영의 군사는 나와 함께 사직에 순절할 것이다.”
의병부대 /운강 이강년 기념관 블로그
제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구름같이 모여든 40여진이 제천에서 선생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했다. 선생은 제천 백묘에서 진을 치고 원주 민긍호, 청풍진 조동교와 연합해 충주의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충주는 군사상 요충지로 이곳의 공략은 의병활동의 거점 마련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7월 15일 행군을 시작해 충주를 치고자 작전을 벌였으나, 각 의진이 시기를 놓쳐 충주 진격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이강년은 일제 앞잡이 김기찬과 일진회 회원 김상호를 총살해 친일매족행위를 징계했다. 원주에서 탄환을 보충하여 전력을 보강한후 8월 3일 주흘산 혜국사 승려들의 지원을 받아 갈평으로 적을 쳐부수고 총과 탄환, 투구 등을 노획해 다음날 다시 갈평에 나아가 순검 1명을 총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괴성에서 일본군 장교와 병사를 잡아 효수하고 무기를 노획했다.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단양 유치, 영월, 병두, 연풍 등지에서 적과 대치했으나, 전세는 불리했다. 9월에 들어 김상한, 윤기영, 주광식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자 전세를 회복했다. 9월 16일 제천 추치에서 대전하여 적 200명을 사로잡았고, 9월 27일 죽령에서 다시 적 200명을 사로잡았으며, 10월 5일 단양 고리평에서 적 80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10월 23일 풍기 백자동 전투에서 적 100명을 사로잡아 승전했지만, 11월 12일 풍기 복상동에서는 대패하고 말았다. 선생은 거병한지 12년에 이때처럼 패배한 때는 없었다고 탄식하며 부하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 무렵 각지에서 분산해 전개되어온 의병들이 이인영과 허위등의 의병장을 중심으로 대일연합전선의 형성을 도모했다. 전국의 의병부대들이 하나의 통합된 지휘부 밑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경기지방으로 모여 서울을 포위하고 일제 통감부와 담판하고 일제를 한국에서 몰아내는 연합의병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해 11월 각 의병진에 통문을 띄워 전국의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에 모일 것을 호소하고 13도 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는데, 선생은 호서창의대장에 선임되었다.
선생은 대규모 항쟁계획에 호응해 즉각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약속한 기일 내에 양주로 집결하기 위해 북상을 서둘렀다. 박장호 의진과 연계해 경기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11월 21일 전동, 12월 3일 낭천, 12월 5일에는 경기도 건천에서 일제의 저지선을 뚫어야 했다. 그러나 혹독한 폭설과 추위로 교통이 마비되고 식량과 탄약의 조달이 어려워 더 이상의 진군이 어려웠다. 결국 선생은 서울진공을 미루고 후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08년 6월 4일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장마비로 인해 화승총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선생은 복사뼈에 탄환을 맞아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강년은 옥중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었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서야 삶을 어찌 구하려 하나만 오랑캐 쳐부술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고 해서 넋마저 사라지랴.”
선생은 충주로 압송되었다. 선생은 결국 교수형을 선고 받고 1908년 10월 13일 51세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운강문집」이 있고 그 제자와 의병시절의 부하들에 의하여 엮어진 「운강선생 창의일록」이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이강년 선생 영정 /운강 이강년 기념관 블로그